미국의 제2차 대각성 운동
코네티컷의 예일 대학도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불신앙이 점점 퍼져 나가게 된다.
유니테리언파는 지적으로 매우탁월하며 그중 조셉 프리스트리 박사의 가르침때문이었다.
대각성 운동의 시작은 동부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1787년 버지니아의 두 장로교대학에서였다.
햄프턴 시드니 대학과 워싱턴 앤드리대학이였다.
그것은 동부 해안의 제2차 대각성 운동 최초의 표징이었다.
당시 두각을 나타낸 지도자로는 디모티 드와이트(1752-1817)와
나다니엘 테일러(1786-1857), 베넨트 타일러(1783-1858), 기언 비처(1775-1863)등이 었다.
그중 조나단 에즈워드의 손자 디모티 드와이트는 1795년 예일대 학장이 되었을 때 학생들의 신앙 회복에 힘썼다.
그 결과 예일 대학엔 각성 운동의 불길이 강하게 타올랐고 1802년 전체 학생이 1/3이 회심했다.
드와이트는 이 지역 대학들과 각 교회 목회자들로부터 큰 힘을 끌어내면서 부흥운동을 계속 주도해 나갔다.
이후 50년간 주기적으로 일어난 각성운동은 유능한 영적 지도자를 많이 배출했고
그들은 서부 지역에 헌신했다.
교육 수준이 낮고 거친 서부 지역민들의 교화에 힘썼다.
거대한 남서부 변경 지역의 신앙 부흥은 새롭게 정착된 알레게니 산맥과
미시시피 강 사이에서 발생했다.
그 중심 지역은 컨테기와 테네시였다.
동부가 조용한 예배당 분위기였다면 서부는 거칠면서 요란했고 또 무질서하게 보였다.
인디언들과 전투, 질병과 싸워야 하는 개척 문화에서 서부인들은 자연스럽게 야성적으로 변했다.
그래서 동부의 부흥 운동과는 다른 접근의 사역을 해야 했다.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부흥 설교가의 사역이 부각되었고
그 중 제임스 맥그리디(1758-1817)목사가 유명했다.
그는 검은 눈도앚에 우람한 체격을 가진분으로 용기 있고 타협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는 펜실베니아 주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출신으로 처음 설교를 시작한 곳은 노스캐롤라이나였다.
1798년 켄터키로 옮긴 후 레드 리버, 개스퍼 리버, 머디 리버 세 군데 회중에게 설교하면서 부흥의 불을 붙였다.
그 지역은 말도둑들과 무법자들과 살인자들이 우글거렸고
강도들의 항구라고 불릴 만큼 위험했다.
놀랍게도 그곳의 거친 회중들은 그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에 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흥 집회의 마지막 날엔 온 회중이 눈물을 흘리며 크게 울부짖는 영적 각성이 일어났다. 그것은 미국판 오순절의 역사와도 같았다.
말씀을 통해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주께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이후 개스퍼 리버의 부흥회 소문이 순식간에 번져 나가자 수많은 서부 새척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집회 전부터 천막과 휴대용 식량을 들고와 기다리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개스퍼 리버 집회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천막 집회였다.
진정한 제2차 대각성의 전성기였으며 그는 감리교 순회 목사인 피터 카트라이트와 부흥을 더욱 확장시켰다.
1801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켄터키에서 바튼 스토운 목사와 맥그리디 목사의 주도 아래 캐인 리지 집회를 했다.
1만에서 2만 5천명 정도가 참여한 대단한 집회였다.
목회자들은 집회장 여기저기 흩어져 동시 다발적으로 설교했다.
회중은 강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
거친 개혁자들의 흐느끼며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나이아가라 폭포수와 같은 굉음처럼 그 일대를 덮었다.
그 당시 침례교회는 감리교회에 가담해 산맥을 넘어 미국 남서부에 대각성 운동을 전해 주었다.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이들은 복음주의 연합 전선을 형성해
사회개력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해 400-500회 정도의 집회가 열렸으므로
미국 남서부 지역은 날로 새롭게 성장했다.
먼저 도덕성이 회복되었다.
수많은 술집들과 매춘부들이 운에 띄게 줄었다.
제2차 대각성의 마지막 주자로 현대부흥 운동의 아버지라 불리는
찰스 피니는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