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크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다
-나만의 책 만들기
올 들어 나는 농촌유학을 하고 있는 ‘시골살이 아이들’에서 2주에 한번 아이들과 ‘나만의 책 만들기’를 하고 있다. 애초는 운영하는 분의 의도대로 아이들이 시골에서 지내며 겪은 일들을 예쁘게 기록한 책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모두 다르다. 글과 그림, 만들기를 잘 하고 좋아 하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그런 거엔 별로 관심이 없이 뛰어놀고만 싶은 아이도 있지 않은가? 어른 기대에 부응하는 기록보다는 아이들은 자기만의 세계로 달려가고 싶은 욕구가 있다. 더구나 한 가지 주제를 한 학기 동안 일관되게 유지하기란 좀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시골살이 생활의 추억을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만화나 잡지 등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한쪽을 열어두고 시작했다. 그리고 2학기 들어서는 그런 방향설정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냥 그 시간이 되면 아이들은 자기만의 만화책, 화풀이책, 특허책, 요리책, 퀴즈책, 상상나라책 등을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든다.
성미산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남자 아이들은 역시 졸라맨식의 만화와 전쟁게임 형식의 만화에 몰두한다. 남자아이들의 만화는 금방 30쪽 40쪽, 2권 3권을 훌쩍 넘는다. 둘이 하기도 하고 혼자 하기도 한다. 남자아이들은 역시 싸우며 풀어야 할 것이 많나 보다. 자기만의 상상 공간 안에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등장시키고 죽이고 살리고 마구 변형시킨다. 눌리고 막힌 걸 풀고 해소하며 자기를 다져 나가는 것 같다. 아이들의 단순하고 거친 선들은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옆에서 그야말로 책 만드는 걸 도와준다. 쉼 없이 아이들이 만들어 달라는 크기대로 책을 만든다. 처음엔 아이들이 너무 내게 의존하게 될까 살짝 염려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내가 하는 걸 충분히 보고 자기도 할 만하다고 느끼면 점차 하나둘 하지 말래도 자기가 직접 하는 게 생긴다. 물론 내가 만든 책만을 원하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다른 것에 몰두해야 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바람은 있지만 그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한다.
처음 시작할 때는 다양한 재료로 멋진 책을 만들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머리가 유연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들은 외적 형식이 간단해도 곧 자기만의 내용 채우기에 몰입했다. 아이들에게 책은 기록이 아니라 놀이였다. 그리고 그 안에 자기 관심과 표현, 그리고 심리적 해소를 하고 있었다. 결국 2학기에 나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허용된 책이라는 공간 안에서 자기만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는 그 옆에서 아직 손놀림이 서툴거나 자신감이 부족한 아이들을 위해 칼질하고 구멍 뚫고 매고 찍는 일을 도와준다. 서툰 아이들은 색과 종이를 선택하고 크기를 결정하면 된다.
재료도 1학기와는 달라졌다. 처음엔 잡지, 과자상자, 박스 같은 폐지를 활용해 다양한 책을 만들려고 했다. 나는 잡동사니 같은 재료들을 좋아한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필요한 것들을 찾아내길 바랬다. 다양한 재료는 물론, 색종이 대신 칼라 잡지에서 필요한 색을 찾아내기를 바랬다. 그랬더니 내가 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더구나 유학 온 아이들이 다양한 재료와 폐지를 구하는 일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쉽지만 가을에는 문구점에서 산 색상지와 A4에 더 의존하고 있다.
용환이는 만들기를 너무 좋아한다. 상상력에 제한이 없고 자유로워 기발한 모양의 책을 마구 만들었다. 영감이 떠오르면 불꽃같이 만들었다. 사람이나 동물 등 입체적인 책을 마구 만들었다. 멋진 책이지만 종이도 많이 썼다. 평등을 중요시하는 아이들이 불만을 제기해 왔다. 계속 멋진 책을 만들고 싶으면 아무래도 자기가 쓸 색상지나 폐지 등 종이를 다음에 올 때 더 준비하고, 이왕 만든 책에는 내용도 차분하게 채우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만큼 맘껏 해보고, 필요를 느낀 뒤에야 판단하고 행동하기를 바란다. 용환이는 지금 디테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닐지 모른다.
오늘은 갔더니 지난번에 이어 민정이가 기다렸다는 듯 옆에 왔다. 아이들이 신청한 특허품목을 주욱 보여주고 내가 같이 심사위원이라고 그 중에 뺄 것을 정해달라고 했다. 그래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기준과 어린이 심사위원회에 대한 것이다. 특허기준이 없으면 친한 친구 안 친한 친구에게 편파적으로 적용해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민정이는 특허기준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1학년 민경이는 감기에 걸렸다. 지난번에 만든 책을 잠자는 농가에 놓고 왔는지 잃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만드는 걸 도와줄까 하고 물었더니 자기 혼자 한다고 한다. 그러더니 내 옆에 앉아 세모 두 개를 오리고, 백지 한 장을 자기 손바닥 두 개 만하게 자른다. 그리고 그것을 일일이 다른 백지에 대고 금을 그은 뒤 다시 가위로 오린다. 한 장씩 한 장씩 천천히 한다. 다시 내가 도와줄까 물어보니, 자기가 혼자 한다고 계속한다. 아직은 칼질에 자신감이 없어 가위로만 하면서 자기의 힘으로 만드는 모습이 참 대견했다.
민정이는 금새 또 새로운 양식의 책을 만들어 특허를 낸다고 하고, 다른 아이들은 A4 한 장을 여러 번 접고 칼로 잘라 만든 꼬마책을 만드니 너도 나도 한권씩 달라고 한다. 그래 표지를 각기 다른 색으로 만들어 하늘북, 주황북, 노랑북, 초록북 하고 주니 귀여운 책이라고 좋아한다. 크기가 다양하고 용도가 여러 가지인 책을 아이들은 정말 좋아한다. 거기에 자기만의 비밀을 기록하거나 그냥 가지고 싶어 한다. 자기만의 책은 역시 비밀책이어야 어울린다.
지후와 민서는 둘이 앉아 계속 주제를 정해 아이들의 의견을 물으면서 앙케이트를 채우고 있다. 윤정이는 은빛마을에 여러 가지 집을 그리면서 멩이의 집을 그리고, 내 방과 부엌 등을 꾸미란다.
남자아이들 중 찬우는 특히 차분하고 섬세하다. 호기심을 가지고 다양한 책을 만들고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아이들이 만화 붐을 타고 만화 속에서 적을 물리치고 주변의 사람들을 등장 시켜 죽였다 살리는 동안, 찬우는 새로운 모양의 책을 만들고 꾸미는 데 집중한다. 내용도 채우고 하는 게 어떠냐는 멩이의 은근한 채근은 한 귀로 흘려버린다.
나는 지켜본다. 사람은 자유롭게 집중하고, 해소하고, 만족할 시간이 있어야 자기를 발견하고 성장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교육은 대부분 어른의 기대와 예상에 맞도록 아이들이 행동하도록 유도한다. 대개의 경우 교육은 어른 만들기지 자아실현이 아니다. 알묘조장이다. 우리가 배우면 배울수록 자기를 모르는 것은 자기를 알 기회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울수록 자기에 대해 무식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소외시키고 남 눈치만 보며 산다.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부담스러워 하고, 무의미를 느끼고 심심한 삶을 산다.
조금이라도 자유의 공기에 노출해 자기식대로 클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자연의 자연스런 방법이다.
그렇게 크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