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유 보우 완?" "당신은 보우가 하나입니까'라고 물어 보는 듯한 인사말을 스리랑카 사람들은 좋아한다. 이 나라에서는 싱할리어, 타밀어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데 '안녕하세요'는 거의가 공통으로 쓰고 있었다.
스리랑카의 배꼽이라 불리는 지역에는 '담블라(Dambulla)'라는 조그만 도시가 있다. 이 도시 남쪽에는 해발 100m쯤을 550계단을 이용하여 오르는 '마하 비하라 동굴'이 있는데, 이 동굴이 바로 누워 있는 부처상으로 유명한 '담불라 사원'이다.
담불라 사원은 시기리아와 불과 50리 정도 떨어져 있어 이곳에서 시기리아 쪽을 바라보는 경치 또한 장관을 이룬다. 반 바지 차림은 입장할 수 없는 동굴사원- 어렵사리 오르는 이 계단길 곳곳에는 어려운 중생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구걸 행각을 벌이고 있다.
여기서는 위만 쳐다보고 올라가야지 조금만 한눈 팔면서 관심을 보였다가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나는 모처럼 배운 스리랑카말로 멋모르고 인사 한 마디 했다가 사원 입구까지 따라와 강매를 하려고 덤벼드는 장사치 덕분에
힘든 줄도 모르고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반 바지 차림으로 오는 바람에 출입을 거부당해, 결국 입구에서 신발을 보관하는 사람에게 푸대자루 비슷한 이 나라의 고유의상인 '랭리'를 빌려 입고 들어갔다. 남녀 불문하고 무릎이 보이는 하의 차림은 성스러운 자리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스리랑카에서도 스리랑카법을 따를 수밖에......자연스럽게 바위산을 깎아 만든 동굴안은 커다란 바위 및이라 시원하기 그지없었으나, 통풍과 채광이 되지 않아 거주하기에는 불편해 보였다. 이 동굴의 역사는 기원전이라는데, 길 게 누워 있는 부처상 위로 후레스코식으로 그려 놓은 수만 종의 부처상은 마치 천장지로 도배하여 놓은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마침 한국 불교에 관심이 많은 주지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어 함께 앉아서 잠깐
담화를 나눴다. 비록 종교와 언어는 달랐지만 "여러분의 건강을 기원한다"는 스님의 말씀은 통역하는 분의 얘기를 듣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근엄했다. 경내에 있는 넓은 잎의 선인장에는 자기도 못 알아볼 글씨가 잔뜩 새겨져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우리나라 명산의 정상에 올라가보면 바위마다 자기 이름 석자를 써 놓고 자손만대 뽐내려는 이들이 많은데, 이 나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곳 경내에는 일본원숭이들이 돌아 다닌다. 이 원숭이들은 관광객들로부터 먹이를 얻어먹다가 신이 나면 가끔 카메라를 빼앗아 도말치기 때문에 입구에는 '원숭이 조심'이라는 팻말까지 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에 감춰 들여온 부처님 치아 사리- 남쪽으로 캔디(Kandy)를 향하여 내려가다 '아루비하라 사원'에 잠깐 들렀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유일한 야자잎으로 만든 불경이 있다.
어려운 제작과정을 설명한 후, 안내인은 "한국에서 오신 스님 한 분이 이곳에 머물면서 5년째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고 알려 주엇다. 그런데 이 불경을 완역하려면 앞으로 5년은 더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꼭 성공하시길 비는 기도를 마음속으로 드리며 아루비하라 사원을 떠났다. 이 지방에서부터는 스리랑카 사원의 외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삼각형태로 구성된 장식벽의 고유 문양들이 만이 나타난다.
일행은 다시 호반 고시인 '캔디'로 향했다. 캔디로 오르는 길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시골길이다. 아름다운 이름의 이 도시는 해발 500m의 고지대에 위치하며 주변에 '캔디'라는 이름의 넓은 호구를 끼고
있다. 아곳은 1786년 영국이 들어오기 전까지 400년간 이 나라의 수도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다. 인구는 20만명 정도이지만 상권 규모도 콜롬보보다 더 크다고 한다. 캔디 사람들은 "부처님 치아를 보관한 사찰이 있고, 매년 8월에 열리는 싱할리 민족의 대축제는 대형 코끼리가 등장하는 축제중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자랑한다.
시내에 들어서자 스리랑카의 중부지대에서 보기 드물었던 유럽풍의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상업도시답게 활기찬 모습의 사람들이 눈에 띈다. 4세기경 '올리싼 공주'의 머리카락에 감춰져 스리랑카에 들어온 부처님 치아
진신사리가 이곳 '다라마 마리가와 사원'에 안치된 것은 1590년 수리야 1세 왕이 이 사찰을 설립한
직후였다. 시내 중심부의 캔디 호숫가에 있는 이 사원에는 불교 수녜단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데, 이 칭는 하루에 세 번 정도밖에 공개를 안하기 때문에 운이 좋아야 친견한다고 한다.
더욱이 워낙 희귀한 보물이라서 부근의 경비도 엄격하고, 입장객에 대한 통제도 상당히 심하다. 그래도 사찰은 설립 당시의 모습으로 비교적 잘 보존 되어 있었다.
입구 전면은 팔각정같은 형태의 건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나뭇잎에 삼각형 무늬를 파낸 듯한 치장벽을 층층이 쌓아올려 특이한 입면을 구성하고 있다. 특히 남쪽의 성 언덕 공원에 올라 호수를 끼고 서서히 내려오면서다라마 사원을 바라보면, 뒷 배경이 되는 울창한 숲과 호구에 되비치는 왕의 여름 별장, 주변에 늘어선 고색창연한 건물 등이 스리랑카 최고의 운치 있는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은 고지대이기 때문에 날씨도 비교적 시원한 편이어서 스리랑카의 부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문화 경제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고 식당에서 만난 한 캔디인은 끝도 없이 자랑한다. 이런
사실은 외형적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침 호텔에서 결혼식이 있어 자세히 지켜보니 서양의식이 많이 가미된 예절과 복장으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었고, 국민소득 400불 내외의 국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어 보였다. 이처럼 마냥 행복한 국민성을 지닌 착한 민족들이지만, 스리랑카에서는 12살 가량의 소녀들로 구성된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 결사대(LTTE)'에 의해 감행되는 자살테러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타밀 해방호랑이 결사대는 12살 소녀들- 이 내분은 영국이 식민통치를 할 때 인도와 동화시키려는 의도로 타밀족(族)을 인위적으로 스리랑카로 이주시키고 이들을 우대한 식민정책의 부산물이다.
식민지 지배에 의한 민족분쟁이 골 깊은 종교전쟁으로 발전한 셈이다. 타민족에게 일방적인 종교와 문화를 가요한다는 것은 결국 어리석은 일일뿐이라느 것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목적지인 콜롬보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산자락으로 보이는 성경책을 쌓아 놓은 듯한 '바이블 마운틴'의 흐릿한 자태가 무척 인상적이다. 가끔 보이는 과일가게와 저녁을 지으려고 불 피우는 연기가 솟는 전원 풍경을 지우면서 열대의 밤은 깊어 간다.
산등성이 너머 보이던 먼 도시의 불빛마저 사라지니, 높은 밤
하늘엔 남십자성만 유난히 빛나고 있다. 빨리 이 땅에도 민족분쟁의 씨앗이 깨끗이 사라지고 화합과 만남의 장(場)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
출처: 페가수스 Pagasus 원문보기 글쓴이: 도시 김재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