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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열두제자연구
의리의 사나이 ; 시몬 베드로
요한복음 1:44,눅5:4-5
들어가는 말
보논 그라운즈(Vernon Gronuds)박사는 신학교 졸업생들에게 격려사를 하면서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조그만한 선물을 하기로 하였다. 졸업식장은 조용한 긴장이 있었다. 그런데 듯밖에도 그 선불은 ‘흰손수건’이었다. 그 조그만한 손수건은 제자들에게 추일히 섬기는 삶을 살지 못하였기에 예수께서 그들의 발을 씻겨 주셨던 밤을 상기시키는 설교였다.
주님이 발을 씻겨 주시려던 것을 처음에 성급하게 거절하였던 베드로는 꾸중르 들었다. 이 사건은 떠다니는 모래가 굳은 반석으로 변하는, 베드로에게 영향을 준 여러가지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몸 말
1. 게바, 베드로 (요 1:42)
1). 삶의 배경
*고향과 직업//고향인 벳세다에서 동생 안드레와 가버나움으로 옮겨와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였다(마8:14/ 눅10).
*학력//회당에서 공부한 정도의 교육수준을 갖고 있었다.(행4:13)
*가정//아버지 요나는 사망하고 안드레와 공동으로 소유한 집에서 아내와 장모와
함께 살았다.
*육체적으로는 건강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나약하였다.
2). 인격
*충동적이고 성급하고 경솔하고 무모하여, 지나치게 열정적이고 명랑하며 반응이
대단히 빠른 사람이다. 항상 질문을 잘하여 12제자의 대변인이기도 했다.
(심사숙고하는 요한이 무던밖에서 서성일 떄 베드로는 곧장 들어갔다.)
*의리있는 사나이//
*용기와 비겁, 강함과 나약함이 함께 있었다.(말고의 귀를 짜름//주님을 세번 부인)
*조용히 생각해야 할 때 말을 꺼내고 깨어 있어야 할 때에 잠들어 있었다.
*바다위를 걷겠다고 용감하게 시도하다가 가라 앉고, 신앙고백을 한 후에 주님
일을 반대하기도 한다.
3). 소명(Calling)
난장이를 골리앗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변덕스러운 형을이렇게 부르는 주님을 의아히 여겼
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는 바라본 후(1:42)에 말했다. 이 새로운 이름은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것을 이해하시고 큰 은총을 베푸신 것이다. 잠재능력을 보셨다.
4). 갈고 다듬으신 주님
세월이 흐르면서 베드로는 점점 반석으로 변하고 있었다.
떠다니는 성급한 모래가 요동치 않는 반석으로 변하는데는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
2. 주님의 부르심
1). 고기잡던 날//*밤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던 밤이 지나고 새벽에 주님이 오시어 좀 더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눅5:4-5) 그러나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다.
2). 물위를 걷던 날//(마14:22-33)
오병이어의 사건 후, 주님은 폭풍우를 만날 것을 아시면거도 제자들에게 건너 편으로 가라고 하셨다. 여섯시간동안 노를 저었으나 5KM 밖에 가지 못한, 새벽 4시 칠흑같이 캄캄한 밤에 물거품 일어나는 산 같은 파도 위를 당당히 걷는 자태를 보고 놀란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한다. (27절)“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주님은 시몬의 충동적인 변덕을 잘 아시기 때문에 믿음을 깊게하는데 이용하시낟. 세차게 부는 바람을 보고 당황한 그는 물 속에 가라앉게 되었고 살려달라는 외침에 주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면서 “왜 의심하였느냐?”(30-31)하시며 건져 주셨다.
주님은 믿음 없음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적은 믿음을 꾸짖으셨다. 다른 제자들은 큰 믿음을 보이지 않았고 물 위로 걸을 생각도 않했고 오직 베드로만 걸으려고 했다. 물 위로 걷지는 못 했어도 주님의 손을 잡고 흔들리는 파도위를 걸었다는데 그 얼마나 큰 경헙이었는가? 이 사건은 분명 베드로의 믿음 성장에 전환기 였다.
3). 위대한 신앙고백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제자들은 엄청난 기적을 행하시는 주님을 자기들이 알고 있는 수준에서 대단한 인물인 세레요한, 예레미야, 선지자라고 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이이다.”라고 고백했다.
네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리라고 한다. 이 고백에 복음의 열쇠를 받았다.이 사건이 제자들의 이름 중에맨 처음에 나오게 되는 이유이다. 그는 오술절 유대인에게(행 2:14-41), 사마리아인에게(핸 8:15-17), 고넬료 이방인의 집에서(행 1:25-48) 제일 먼저 복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축복의 사건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만류하다가 사탄이라고 질책을 받았다. 하나님으로 부터 계시를 받고 축복을 받았으나 주님의 목적을 좌절시키려 했기에 사탄의 도구가 되어 이용당했다.
4). 그리스도를 부인
*모든 제자가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베드로!!
주님은 연약한 인간의 몸을 지닌 베드로 장담도 교만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아시면서, 오늘 밤 닭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하리라 하셨다. 시몬은 힘차게 주와 함께 죽을 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말한다.
주님은 그가 그런 일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엄청난 노력과 기도를 하여 하늘의 도움을 구하여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나태함을 빠짐을 질책하셨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자고 있는 그에게 “(막14:37/ 한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구짖었다.
인간적인 용기로 말고의 귀를 자르긴 했어도 전신적인 비겁함이 멀리 도망쳐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가 군중들의 틈에 끼어불을 죄고 있게 했다. 그느 요한 처럼 주님의 옆에 있어야 했다. 숨지 말고 군중들에게서 나와야 함에도 3번 부인한다.
①단순하게 부인 ②맹세하며 부인 ③저주하며 완강히 부인(마26:69-75)
닭이 두번 울고 주님이 가실 때 슬피 울었다. 거의 진흙과 같은 보잘 것 없는 반석인 자기
를 보면서..............
5). 새로워진 베드로
한 잠도 못잤다. 거짓말에, 책임회피에, 은혜 모르고 비겁하고 경건하지 못한 그! 주님과 함께 3년을 살았는데 자랑스럽기만 하던 그가 절방 속에서 허덕인다. 부활절 아침, 주님은 타락한 그의 심령을 위로해 주셨다. 무덤을 향해 달려가게 하셨다.
고향으로 돌아가 고깆바이 다시하는 베드로에게 내양을 먹이라고 기회를 주셨다. 오순절의 성령충만함을 부어 주시고 한번 설교로 3000명이 회개하는 역사를 이루셨다. 변덕스럽던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용기있는 지도자로 변화되었다. 주님이 베드로를 변화 시
키시는데는 오랜 시간이 흘렸다.
3. 베드로의 최후
전설//박해가 너무 심해서 도망하려고 로마에서 나오다가 시자가를 지고 들어가시는 주님을 만났다.
“퀘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너가 버린 십자가를 다시 지러간다.” “그럴수 없습니다. 제가 지러갑니다.”
그 길로 로마에 다시 들어가 전도하다가 잡히어 십자가에 순교한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내가 그대로 못 한다고 하여 꺼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한다.
춘원 이광구의 책 「麻依太子」에 나오는 글에
“의리없는 놈의 친구가 되기 보다는, 의리없는 놈이 원수가 되는 것이 안전하다.
의리없는 친구는 언제 나를 배신하여 해칠지 몰라도,
의리있는 원수는 내가 의리를 지키는 동안 내 의리를 알아 준다.”
초대교회의 교부이며 순교한 폴리갑 감독은 처형 직전에 그를 존경하던 집행관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나 주님을 부인하고 생명을 구하라고 했으나
“주님은 나의 80평샌 사는 동안 한번도 배신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배신하리요”
시몬은 주님을 만남으로 성품이 변할 수 있었다.우리도 주님께서 두드리시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주님 쓰실만한 인물이 될수 있다.
위대한 전달자;안드레
요한복음 1:38-44
들어가는 말
*출생//예수님의 고향으로 유명한 Nazaret에서 동쪽으로 40Km(약 100리)정도 떨어져 있는 Beth -Saida는 아주 아름다운 동네이다. 어부인 아버지 요나와 어머니 요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남자다운’ ‘용감한’이란 뜻을 가졌다.
*베드로와의 비교//
베 드 로 안 드 레
*큰 어부 *작은 어부
*대중적 복음전파 *개인적인 복음전파
*폭죽같이 큰 소리를 지르다가 *지조있는 재구꾼이며 조용한 마음을 소유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 앉는다.
금새 김 빠지는 소리를 내며
가라 앉는다
*성격이 매우 급하나 *신중하고 차분함. 심중하고 견실하며
온건한 믿음을 지녔다.
그러나 자기 형의 그늘에 늘 가리워 있었으나 자신의 허물을 시인하고 뒷전에서 힘써 일하였다.
본 론
1.주님의 부르심(요1:38-39)
안드레는 처음엔 세례요한을 존경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세레요한을 존경하며 그의 제자가 되었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세례받으러 오신 에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 Messiah」라고 하자, 가장 먼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날 주님과 대화를 한 후, 그리스도로 확신하고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된, 주님의 선택을 받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 뒤를 이어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이 믿게 된다.
고기잡이로 돌아가긴 하였으나 몇달 후, 주님께서 ‘고기잡이를 그만 두고 나를 쫒으라.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하시며 제자직분만 행하라는 부르심을 응답한다.
2. 전달자 안드레 (요 1(40-42)
안드레는 베드로 같이 훌륭한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하나씩 차근차근 잘 낚는 어부가 되었다. 그는 사람을 주님께로 소개하는 일을 잘해서 ‘전달자’ ‘소개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1). 자신이 깨닭은 진리= 예수님이 Messiah라는 것=를 형 Simon과 빌립에게 전달
시몬은 침착하고 믿을 만한하고 견고한 행동을 하는 동생 안드레를 은근히 존경하고 있었다. 그가 밝고도 홧니에 찬 어조로 ‘메시야를 만났다. 와서 보라”고 소리쳤다. 이 확신에 찬 소리는 요한까지 주님꼐로 데리고 오는 역사를 이룬다. 물론 가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를 가지기 까지는 많은 기도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분은 가족을 전도하기가 헌금 100만원을 내는 것보다 어렵다고 한다.
(예화)
어느 사업가가 레스토랑을 지나가다가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갖다데고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거지 소년을 보았다.
“애, 배가 고프니?” 소년은 수줍은 듯이 대답했다.
그는 소년을 식당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음식을 넉넉하게 주문하여주었다. 그러자 그 소년
은 계속해서 창 밖만 바라볼 뿐 맛있는 움식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의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왜 않먹니? 배고프다고 해잖아?” 뜻 박에도 소년은
“창 밖에 들여다 보는 아이가 내 동생이예요”라고 했다. 신사는 창 밖의 소년도 데리고 갔다. 두 소년은 풍성한 음식를 먺었다. 아직도 믿음의 밖에있는 가족들을 이와같이 복음의 축제에 초대될 필요가 있다.
3. 오병이어의 기적때 보여준 사랑과 믿음 (요 8-9)
a. 갈릴리 해변 그의 고향옆 벳세다 광야에는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다가 3일동안 굶주린 민중들이 있었다. 안드레는 이들의 먹을 것을 염려하여 예수께서 건의하는 사랑의 소유자이다.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줄 아는 고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b.뿐만 아니라, 보잘것 없는 것이지만 예수께 갖고 가기만 하면 분명히 문제가 해결 되라고 믿은, 좋은 믿음의 소유자 이다. 그래서 겨우 떡5개와 물고기 2마리 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예수께로 인도하는 믿음을 보았다.
4. Halla 인을 주님꼐로 인도 (요 12:20-22)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헬라인이 예수를 만나고 싶어서 찾아 왔다. 그는 예수께 소개해 주는 폭넓은 사람이었다. 유대인만이 위대하다는 당시인들 처럼 편협한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다. Andrew는 에수가 세상을 구할 구주이시요, 예수의 복음이 온 인류를 위한 것이요,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임을 알았다. 이 위대한 진리를 깨달았을때 그 진리를 열렬히 받아 들였고, 다른 사람들도 이 진리를 알게 되길 원했다. 그래서 죽기까지 열심히 전도하고, 복음 전파 하는데서 기쁨을 찾고 살았다.
5. 둘째자리에 만족하는 안드레
마가,행전// 4번째 자리
마태,누가// 2번째 자리 그는 중요한 사건에서 제외되었다.
(주님의 산상변화. 주님의 고뇌의 기도현장,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Pater가 큰 인물이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임을 알자. 그는 자기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그를 주님께 인도해서 지도자가 되게 했다. 자신은 3대제자 축에 못들고, 뒤로 물러섰다. 자기가 인도한 형 Peter 와 동료 John과 James 형제가 주요제자가 되고 자기는 소외 되었어도 섭섭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불평없이 뒤로 물러나 둘째자리에 앉는 겸손을 보였고, 단지 주님을 섬김으로 만족하고 충성되고 성실히 사는 사람 이었다. 높은 지위의 열망은 있으나 뒷전에서 조용하게 주님께서 생각해 주시는 것만 감사하면서 만족하고 뒷전에 처진 것을 괴로워 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한 사람씩 주님을 믿는 승리자가 되도록 인도하였다. 교회에서는 베드로 같은 몇 명의 용감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더 필요한 사람은 눈에 뜨이지 않는 뒷전에서 일을 하는, 깊은 신앙을 가진 많은 안드레가 요구된다. 참으로 능력 없으면서도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것을 던져주는 「사나이다운」 제자 였다.
6. 그 후 안드레의 삶
*유대의 역사가인 Eusebius의 책 「HistoryⅢ」
1) Ephesus 지방에서 열심히 전도하였다.
2) 그런데 가롯유다 대신 제자로 뽑힌 맛디아가 식인종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를 구하려고 기적적인 항해를 하여 흑해연안 코가스 산맥이 있는 스구디아(南Russia)에 도착한다. 기적으로 맏디아를 구출하고, 식인종도 거의다 교회 시킨다. 그래서 스구디아와 비잔티움(터기의 수도 이스탄불)에 교회까지 세운다.
3)그후에 그의 전도 공헌은 위경인 ‘안드레 행전’에 의해 알게 된다. Greece에 와서(드레이스, 마케도니야,고린도,파트라스)에서 열심히 전도한다. 그런데 그지역 총독인 ‘애기아테스의 부인’까지 전도하여 에수를 믿게 한다. 그러자 총독은 그 분풀이 Andrew에게 에수를 피투성이가 된 Ancrew를 고분하고, 끝내 X형의 십자가에 밧줄로 묶여서 일동안 둔다. 고통속에서 Andrew는 A.D69년 11월말에 이렇게 기도하며, 하늘 나라로 갔다.
“그리스도이신 에수님!
내가 뵈었고, 내가 사랑하고, 그안에 있는 나를 받으소서.
당신의 영원한 나라에 내 영혼을 받으소서 아멘”
그래서 Catholic에서는 오늘날에도 X를 「St. Adrew †」라고 부르며, 11월 중에 하루를 안드레의 날로 지키며, 열심히 전도한다.
전도 방법에 있어서도 안드레 처럼 가장 친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을 안드레식전도라고 불리어 진다. 이렇게 순교한 안드레는 336년 - 콘스탄틴대제가 비잔티움에 세운 「거룩한 사도들의 성전」에, 그의 아들 콘스탄티어스가 365년 「디모데, 누가,안드레」의 유해를 모셨다.(성물 권위자 마시다켄의 증언)
결 론
안드레의 일생은 자기를 바로 볼 줄 알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사람을 천거하는 미력을 보이며 살았다. 예수의 능력을 조금도 의심없이 믿는 큰 믿음과 사랑의 소유자로 살았다. 그리고 남을 인도하기에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는 폭넓으면서도 정열적이었고, 사랑과 믿음이 철철 넘쳐 흐르게 살다간 위대한 제자이다.
*예수의 제자된 여러분!
①자기를 바로 봅시다. 주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더 좋은 사람을 천거 합시다.나보다 늦게 믿은 친구일 지라도 좋은 신앙가지면 칭찬하고 인정해 주자. 이렇게 사는자가 주님을 기쁘게 하느자요,에수의 제자입니다.
②변치 않는 굳센 믿음과 어려운 사람과 함께 괴로워 할줄아는 사람이 됩시다.이러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과 동행하며, 에수님과 함께사는 사람입니다.
③예수를 전하된 정열적으로 전하며, 그 기쁨속에 사는 자가 되자, 우리가 체험하고, 깨닫는 진리를 꼭 전하는 사람이 되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바로 예수의 제자요, 작은 안드레인 것이다.
첫 순교자 야고보
사도행전 12:1-2
들어가는 말
1. 생활환경
갈릴리 지방에 zevedee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배도 소유하고 가정에 종을 두고 살만한 부자였다.(막1:19-20) 그에게는 아버지의 일을 돕는 두아들, John과 James가 있었다. 그는 두 아들이 다른 가정처럼 자신의 가업을 이어 가기를 원하였을 것이다. 이들이 아버지의 일을 돕고 있던 어느날, Peter와 Andrew와 함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의 제자가 되어 따르게 된다. 야고보에 대해서는 안타까울 정도로 적게 기록 되어 있으나(막 5:37, 14:3) 그는 훌륭했기에 그는 훌륭했으므로 「3대 제자」중 하나가 되었다.
2. 성격
*형//요한 *동생//야고보 이 두 형제는 너무조 폭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주님께서 “우뢰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보아너게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지어 주셨다. 폭풍우 같은 기질을 가졌으며 태풍과 같은 정열이 있었고 불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잠잠하다가도 노여움을 화산처럼 폭발시키곤 하였다.
그러나 주님과 관계를 가지면서부터 요한은 사랑의 사도로 변화되었고 야고보는 의를 위하여 기꺼이 순교한 첫 사도가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일생이 보여주는 교훈을 얻고,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것인지 알아보자.
본 론
1. 성격은 급하지만 용기 있는 사람
그에게는 불타는 복수심(눅9:51-56)이 있었다. 갈릴리 지방과 산상변화가 있는지 어마 안되어 주님은 제자들과 여행을 하셨다. 먼지 투성이와 좋지 않은 도로 사정 피로가 겹쳐 쉬고 싶은 때, 사마리아인들에게 쉴곳을 간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 당하였다. 시장하고 피로에 겹친 제자들은 불친절한 접대에 화가 머리까지 나서 분노한다.
“주여!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나이까?”여쭈었다.(눅9:45)
소돔의 불과 유황으로 화풀이 하기를 원했다.
*사마리아인들은 앗시리아인들로서 유대인과 혼혈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번역한 성경에따라서 생활을 하며 그리심에 있는 성전에 나가서 경배하기 때문에 주님과 제자들이 나타난 것을 당황해하고 있었다. 이들이 자기를 냉대한다고 적들로 규정하고 모두 불 속으로 쓸어넣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으로는 도무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만한 자질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꾸짖으시면서 그의 잘못을 지적해 주셨다. (눅9:56)“인자는 사람의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 그러나 야고보는 위대한 사도이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행1:8)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증인이 되라 하셨을 때, 사마리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행8:25) 실수한 일을 지적하여 주신 주님의 교훈을 곧 바로 실천하는 사도였다. 옛날 자기를 거절했던 사마리아 촌에 까지 순회 설교를 했다. 하늘로 부터 멸망의 불이 내리는 대신 성령의 불꽃이 강림하여 이들의 가슴에 안주하도록 하였다.
2. 질투와 원한을 모른 성자
안드레가 형 Peter의 그늘에서 일한것 같이, 야고보도 형 요한의 그늘에 가리워 있었다. 유명한 형 밑에서 일하기도 어렵지만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신 유명한 동생밑에서 일하기는 더 어렵다. ‘요한과 야고보’라고 호칭, 야고보는 꼭 요한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끝내에는 요한의 형제라고 기록되어 있기 까지한다(마10:2). 혼자 기록한 곳은 유일하게(Acts12-2)에만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야고보는 12사도의 명단 중에 모두 요한보다 앞에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주요한 세사도 가운데 하나로 야고보를 택하신 것을 보면 그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베드로// 선천적으로 지도자의 자질이 있었다면
요 한//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는 제자였다면
야고보// 유능하고 유망한 인물로 큰 잠재력을 가진 신앙 깊은 사람
이상의 3사람은 다른 제자들에게 허용되지 않는 특권이 있었다. 여러분 그러나 자기의 소명을 잘 감당해 낸 인물로 유명하다. 우리는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너무 훌륭한 사람이 많아 내갸 할일이 표시나지 않아도 맡겨진 일을 충실히 하는 사람이 되자. 그가 바로 「성자」인 것이다.
3. 훌륭한 신앙가
야고보는 巨富인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을 많은 유산을 팽개친채 예수를 따랐다. 내일 아침걱정 안하는 사람이 없이 굶주리는 사람 많던 그 당시에 이 거대한 상속을 포기하고 따른에는 그들이 초기 신앙이 얼마나 컸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제자들은 남출신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 가난했다. 그래서 내버릴 것이 별로 없어서 어려움없이 예수를 따를수 있었다.
그러나, James와 요한은, 특히 야고보는 모든 제산을 물려 받을수 있었던 형이던 그의 결단은 굉장한 신앙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요한과 함께 “우뢰의 아들” (The sons of Thunder, Boaneqe)라는 별명도 지어 주셨다. 이 열성을 초지일관 식지 않고 활약하여 최초의 순교한 제자가 된다.
훌륭한 신앙기가 되길 원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도 포기 하는것이 있어야 한다. 내 할것 다하고, 예수를 따를순 없다. 내가 하고 싶던것 다하고, 못된 이기심, 자존심, 그대로 가지곤 주일날 놀려 갈곳 다가고는 남는 시간에 예수 믿는다는 자세는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없지만 쪼개어서 예배하고, 귀찮더라도 이것을 이기고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주님은 우리가 쓰고 남은 시간 받기를 원치않으신다. 가장 귀한 시간을 쪼개어 바치길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할것 다하고 나서, 할일없고 심심하여 봉사하는것은 원치 않으신다. 해야 할일 많고, 바쁜 속에서 시간을 쪼개어 바친것을 귀한것을 가장 좋아 하신다. 예수님은 최상의 것을 원하시지, 적당히 하는것 마지 못해 하는것을 원치 않으신다. 야고보처럼 자신의 최고의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께 바치며, 예수님을 위해 삽시다.
처음에 가졌던 그 열심을 그대로 유지하십시요!!
하나님의 일은 요령에 있지 않고, 최선의 열성과 최상의 봉사에서 빛나면, 열매 맺게 된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의 3대 제자가 될수 있다.
4. 위대한 첫 순교자
우리는 Herod이왜 제일 먼저 야고보를 체포하였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열성과 야망이 있는 야고보는 격하기 쉽고 유은하며 뒤어난 지도자이기 때문에 힘찬 소리로 외치는 야고보의 입을 막고자 했을 것이다.
헤롯은 에수님이 탄생하실 때, 죽이려다 베들레헴 주변에서 태어난 어린 생명 수을 죽인 흡혈귀 같은 폭군 「대 Herod」의 손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것을 체험한후, 그는 Spain에 가서 전도하였다(12제자전) ‘땅끝까지 이르러 내증인 되라(행 1:8)’에 예수의 유언을 실천키 위해 당시에 지구의 끝이라고 생각했던 Spain까지 배를 타고 가서 오랬동안 머물면서 그곳에 많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는 Spain에 있는 유대인 거류민과 유대인 노예들에게 복음전도와 위문을 목적으로 갔을 것이다. 주로 바다의 순레를 하면서 전도를 하였기에 「조개」는 그의 상징이되었다고 한다. 유대인 노예들은 독립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갔거나, Herod에 속아서 팔려간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야고보가 예루살렘에 들어오자 폭로될까 두려워 하여
①유대인 노예들을 「선동했다는 터무니 없는 죄」를 씌웠다.
② Jr에서 놀라운 성장을 보이는 Xty운동을 독립운동으로 두려워 했고
③유대교를 믿는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저지른 인기 장난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야고보가 체포되었을 때, 그를 고소했던 자가 그의 요기와 자제력에 깊은 갑동을 받아 세레받기를 원하였고 교회의 일원이 되어 야고보와 함께 죽었다고 한다. 야고보 사도는 Herod Aqippa Ⅰ라고 기록된 사람에 의해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의 유골은 지금의 Spain 「콤로스 텔라」라는 성전에 묻혀 있다고 전해진다.
12제자 중 성경죽음이 기록된 사람은 예수님을 팔고 양심에 가책으로 자살한 가롯유다와 순교자 야고보 밖에 없다.
순교는 외형으로 보면 ‘남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타살이지만 그러나 배교하면 안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부득부득 우겨서 죽는 것이기에, 순교는 원해서 죽는 타살이다. 그러나 이 순교는 큰 용기 없이는 못하는 죽음이기에 확고한 신앙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가장 먼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스스로 찾아간 죽음의 길, 순교의 길을 간 James는 분명히 용기 있는 사람이요, 솔선수범의 사람이었다.
예수를 맏기로 결심한 여러분!
우리도 ‘죽느냐, 사느냐’하는 갈림길에서 설때 주님을 위한 것이라면, 비굴하게 배신하여 살기보다는 나를 버리지 않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순교의 정신으로 살아가자. 하늘 나라에서의 상은 「순교의 상」이 가장 크다고 한다. 우리 모두 순교의 정신으로 전도하며 열심히 살아가자(예/주기철, 이기풍, 이기선, 이원형)
맺는말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예수님을 전했기에 모진 고통속에 순교의 길을 갔다. 처음의 열정으로 일하시길 원하신다. 우리도 열심히 전도하자. 그러다가 챙피도 당하고 망신도 당하라, 자존심 포기하고 전도하라. 이것이 순교를 향해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제자 : 요한
마태복음 27:3-10
들어가는 말
1.요한의 이름
레오날도 다빈치(Leonardd da Vinci)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소녀처럼 미소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얼굴을 그렸다. 십대의 말기에 주 예수를 만났을 때에는 비록 사도들 가운데서 나이가 가장 어리며 나약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요한은 용감하고 영적으로 강건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다(막 3:17). 이 형제들의 활화산 같은 성품은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잘 나타났다. 또 이 형제는 앞으로 올 왕국에서 높은 자리 둘을 주십사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다. 주 예수는 이들의 불 같은 열망과 경건하지 못한 욕심을 꾸짖으셨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삼 년간 훈련시켜 폭풍 같은 성격을 잠재웠으며 우뢰를 조용하게 변화시겼다.
2.요한의 초기 생활
형제인 야고보와 함께 요한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안드레와 고기를 잡았다. 요한의 아버지는 세베대였다(마 10:2). 고기잡이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힘든 노동이었다. 거센 파도를 헤치면서 노를 젖기 때문에 손바닥에는 못이 박혔다. 또약볕 아래서 그물을 수선하는 일은 청년들을 구리빛으로 만들었다.
안드레와 함께 요한은 밥티스마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께 인도되었다. 예수님과 몇 말씀을 나눈 요한은 그가 구세주임을 확신하였다. 요한은 육십년이 지난 뒤에도 처음으로 예수님과 대화한 감격적인 시간인 시간을 회상하였다. 이 순간부터 에수님은 요한의 생애에 빛이 되셨다. 사랑이란 서로 주고 받는 보완관계이다. 요한은 “예수의 가장 사랑받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예수님과 처음 만난 후 요한은 고기잡이하러 돌아왔으나 나중에는 예수님과 동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고기잡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예수께서 요한을 부르셨기 때문이다. 야고보, 베드로, 안드레와 함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하여 큰 마음을 먹고 아버지와 배와 고기와 직업을 버렸다.
본 론
1.편협한 마음(막 9:38-40, 눅 9:49-50)
어느 마을로 복음을 전하러 가던 중에 요한은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가 보려고 요한은 앞으로 다가갔다. 귀신들린 한 소년이 땅 위를 뒹굴면서 소리를 지르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세로 귀신을 쫓아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이 미처 손도 쓰기 전에 낮선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다. 그 소년은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뒤틀다가 조용해지더니 고쳐졌다.
요한이 귀신을 쫓으려 했을 때 깜짝 놀란 낯선 사람에게 큰 소리로 “감히 어떻게 당신이 주님의 이름을 쓸 수 있단 말이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능이 있길래 그런 일을 하오? 당신은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권세도 받지 못한 사람이요. 나는 주님의 가까운 사람 중에 한 사람이요. 이전에 나는 당신을 본 일이 없오. 결코 주님의 이름을 쓰지 마시오”라고 했다.
예수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도 없으며 예수의 이름으로는 일도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요한은 몰아쳤다. 요한은 예수님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열ㅆ나이다”라고 여쭈었다(막 9:38).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한자니라”(눅 9:50)고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의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병고치는 이 사람은 스게와의 일곱 아들처럼 전문적으로 귀신을 쫓는 사람임을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행 19:13-14). 이 사람은 어디에서인가 예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곤고한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흉내내어 보려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사도들과 동등한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느지도 모른다.
요한의 성격이 외곬수적인 것은 가장 높은 자리에 대한 그의 야망이 연장된 결과였다. 그는 사도로서의 자부심을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9:39). 요한은 주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여 주 에수의 일을 행하는 데 제자 아닌 사람을 제외시키려는 계획을 성공하지 못하였다.
열 두 사도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부인하지 않은 것은 성도들에게 대단히 훌륭한 교훈이 된다. 마치 사도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며 무리를 만들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물론, 우리는 믿음의 근본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을 행하는 것에 찬성할 수 없다. 말년에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지지하는 행위에 대하여 강경한 경고를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과 똑같이 행하면서도 신학적인 문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마음을 용서하고 관대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속한 종파만이 오직 진실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우리들과 꼭같지 않다고 하여 침례교이든, 감리교이든, 루터란이든, 오순절 계통이든, 성공회이든 배척할 정당한 근거는 없다.
2.요한의 변화
어느 정원사가 정원의 흙을 보고 “너는 어떻게 그처럼 좋은 향기를 풍기느냐?”고 물었더니 진흙은 “사람들이 나를 장미꽃 옆에 두었기 때문이랍니다”라고 대답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성급한 청년 요한은 성인이 되어 온유한 성격으로 변하였다. 요한의 야망은 줄어들었다. 편협한 외곬수적 성격도 사라졌다. 요한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격렬한 성격의 청년에서 마음 착한 성인이 된 것이다.
신학자들은 요한이 복음서 뿐만 아니라 서신과 계시록도 썼다고 믿는다. 약 일 세기 전에 일부 학들이 “요한서신을 쓴 사람이 과연 사도 요한이냐”하는 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복음서의 요한과 서신의 요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네번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요한을 야망으로 가득 차 있고 화를 잘 내며 도량이 좁은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비하여 요한서신의 기록자인 요한은 사랑의 정수라고 설명되어 있다. 요한은 주 예수에 의하여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도로 변하였다.
요한이 이렇게 변하는 데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의 인격 속에는 타고난 성격이 항상 깃들어 있기 때문에 폭발적인 잠재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함께 해주시는 권능과 근엄한 용모는 여러 갈래로 찢어진 요한의 옳지 못한 정력을 온유한 길로 인도하였다. 유리들의 정력은 결코 옳기만 하지더 않고 나쁘기만 하지도 않은 그 중간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나쁜 방향으로 쓰일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일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요한의 강력한 정신이 거짓 교리나 사악한 행동에 대하여 단호히 규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한의 성품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격려를 해 준다. 고집이 세고 이기적이며 불평하기 좋아하는 청년이라 해서 반드시 고집세고 이기적이며 잘 투덜대는 어른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영적인 성장법칙에 따라서 떫고 시퍼런 과일이 달콤하고 맛좋은 과일로 익을 수 있는 것이다.
3.요한이 보여준 사랑
우뢰와 같은 요한의 성격이 온유하게 변한 것은 십자가와 초대교회에의 성심과 용감성도 설명해 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서움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가 어느 사도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로 다시 돌아온 사람이 요한이었다. 베드로가 멀리 떨어져서 뒤따르고 있을 때 요한은 용감하게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갔다(요 18:15-16). 아마 대제사장은 요한의 아버지인 세베대의 사업과 롼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과는 서로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대제사장을 알고 있던 덕택으로 요한은 베드로도 뜰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따. 그러나 대제사장의 종을 해쳤기 때문에 겁에 질려 베드로가 숯불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을 때 요한은 예수님을 심문하는 재판장에게로 곧장 들어갔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 요한은 진실 속에서 살고 있었다.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그리스도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고 적들의 한가운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다>(요 19:26-27)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의 집으로 마리아를 모셔온 후 요한은 다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으려고 서둘럴 되돌아갔다.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 또 “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 보았다.
군병이 에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 뿐이었다.(요 19:38-42). 요한은 용감하였으며 최후까지 예수님께 헌신하였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살인마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는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4.서로 사랑한 에수님과 요한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몇몇 사도들과 더욱 가깝게 지내셨던 것같다.
예수님과의 우정을 갖는 게 기뻐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끼리 점점 친밀해진 것은 큰 무리들로부터 더욱 독자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에수를 따르는 사람이 오백여 형제이며(고전 15:6), 모인 무리의 수는 일백 이십 명이고(행 1:15), 예수께서는 칠십 인을 제자로 세웠다.(눅 10:1). 이들 가운데 열 두 사도가 있으며 사도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세 사람이 있으며 이 중에서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자주 불리워졌다(요 13:23/20:2/21:7). 요한은 “여호와의 은총을 받는다”는 이름의 뜻 그대로 일생을 살았다.
분명히 요한은 제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세 제자의 한 사람일 뿐아니라 에수의 사랑받는 제자로 불리워진 유일한 사람이며 다락방에서는 그리스도의 품에 앉았다(요 13:23). 초대교회의 문헌을 보면 요한을 에수의 가슴에 기댄, 사랑을 의미하는 “에피스테티오스”(The Epistethios)라고 자주 부르고 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라는 부탁을 받은 요한은 예수님께서 운명하시기 전에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들은 사람이 되었다.
1)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다.
요한은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요3:16) 유명한 말씀을 우리에게 남겼다. 요한은 책임감으로서의 사랑 뿐만 아니라 사도직의 징표로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ㅏ”(요 13:34-35)하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상기시켜 주었다. 요한은 그의 저술에서 오십 번 이상이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사랑받는 요한은 예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믿었으며 밤을 새워 고리를 잡은 후 바닷가에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본 제자였다(요 20:8/21:7). 요한은 하나님 계시의 환상을 포함한 영적 진리를 알 수 있는 놀라운 지혜를 받았다.
2)요한의 사랑은 강했다.
사랑에 대햐어 요한이 요약한 말은 사랑의 근간을 이루었다. 진실한 사랑이란 그 사랑의 대상을 해롭겔 할 모든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하며 결코 꺽이지 않는 강한 것이어야 한다.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나운 개로부터 아장아장 걷는 자기의 아이를 보호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 진실한 사랑이다. 요한은 일반적으로 그릇된 가르침이 어린 아이들에게 크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요한은 거짓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서슴치 않고 경고했다(요일 1:6/2:4).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당부했다.(요이10). 또 디오레베는 교만하여 사악한 말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세상에 공개했다(요삼9:10). 요한의 우뢰 같은 성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그의 강경한 어조도 사랑과 겸손으로 많이 부드러웠졌다.
어떤 전설은 요한이 에베소에서 공중목욕탕에 갔을 때 영시주의자인 세린도를 만난 장면을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그를 보자마자 목욕도 하지 않은 채로 목욕탕을 뛰쳐나오면서 “모두 도망치자, 진리의 적이 들어있는 세린도 때문에 목욕탕이 무너질런지도 모르니 우리 모두 도망가자”고 외쳤다고 한다. 어떤 기회에 요한은 세린도를 “마귀의 맏아들”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근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우뢰와 같은 그의 성격의 단면을 잘 반영하고 있다. 요한은 온유하면서도 강했다. 박식하면 격한 마음이 가라앉지만 요한의 사랑은 예리한 통찰력과 지식에의하여 퇴색하지 않았다. 그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다섯 권의 책을 쓸 수 있었다. 요한복음의 서문은 로고스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요한에게는 “그리스도인 플라톤”(ChristianPlato)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삼 세기의 교부들은 계시록의 필자에게 “신학자”란 칭호를 붙였다.
5.말년의 요한
소아시아 태생으로 요한의 제자이면서 폴리갑(Polycarp)과 잘 아는 이레니우스(Irenaeus)는 요한은 주후 98년까지 에베소에서 살았다고 말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을 독살시키려는 음모에서 하나님께서 목숨을 구해주셨다고 한다. 이 전설은 뱀이 그려진 성찬배가 요한을 상징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또 다른 전설은 핍박받는 동안에 끓는 목욕탕에 던져졌으나 요한은 그 속에서 살아났다고 한다.
에베소에서 멀지 않은 에게 해 복판에 있는 아름다운 섬인 밧모에 요한이 유배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요한은 계시록의 인사말에서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에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라고 썼다. 밧모섬에서 도미시안 황제에 의하여 추방된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책에 대한 멧세지를 받고 환상을 보았다. 순교자와 성도와 하늘의 승리를 본 요한의 마음은 기뻤다. 계시록의 마지막인 22장에서 요한은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라고 썼다(계22:8)
트라얀(Trajan) 황제는 요한이 밧모를 떠나서 에베소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했다. 소아시아에서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선교사업은 그의 목숨이 다할 때 성취되었음을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서 알 수 있다. 요한은 자기의 영적인 자식들이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 요한은 충분한 보응을 받을 것을 잊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이들에게 충고했다. 요한은 가이오와 데메드리오의 선행과 디오드레베의 교만함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요한은 그의 영적인 자식들이 다른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증거하기를 원했다. 요한은 대단히 오래 살았다. 예수를 처음 따를 때 가장 어린 소년이었던 요한은 열 두 사도 가운데서 제일 장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형제인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제일 먼저 죽었다.
은혜 속에 살고 성장하는 것에 관하여 요한의 생애는 많은 교훈을 준다. 요한은 불 같은 성급한 성격을 서서히 가라핝히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권세에 순종했다. 여든 살이 되어서라도 사랑하며 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그리스도의 권세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 론
요한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성도들에게 그의 삶을 통해서 어떤 문제와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논한다면 “사랑의 훈련”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 수가 있는가? 세 가지만 강조하겠습니다.
1.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의 주님과 깊이 교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처럼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고동을, 그 사랑의 심장을 느껴 본적이 있으신지요? 글분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요? 그래서 요한일서 3장 1절에 사도 요한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라고 말한 것처럼 주님의 가슴에 깊이 기대고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 주님의 호흡을 느낄 때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2.주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의 확인과 확신없이 사랑의 지속이 어려운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3.사랑은 실천할수록 증가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줄수록 늘어납니다. 사랑의 생리는 사랑을 줄수록, 내 사랑의 창고를 계속 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격정적이고 사나웠던 성격의 소유자 요한은 그 격정이 주님께 포로가 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주님의 성령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을 때, 그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사도로 변모하게 되었느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구스타프 도오르라는 유명한 화가가 주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주님의 초상화를 그릴까라고 안탔까워 하고 있을 때에 그를 사랑했던 , 예수를 잘 믿는 믿음의 친구가 그에게 찾아와서 이런 유명한 충고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자네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나, 그러면 자네는 주님의 형상에 더욱 가까운 주님의 모습을 그릴 수가 있을 것이요“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님의 형상을 그리고 싶으십니까?
충고는 하나입니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십시오.
세리장 : 마태
사도행전 12:1-2
들어가는 말
진실한 교인인 한 청년과 그의 아내는 가까운 이웃과 친분관계를 가지면서 자기 아파트에 초대하여 기분전환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이들은 복음을 전할 기회가 있기를 원하고 있었다. 한달에 한 번씩 구원받지 못한 친구와 이웃들을 식사에 초대하고 무디협회에서 제작한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항상 대화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의 촛점이 맞추어졌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식사전도”라는 증거 방법의 하나이다. 그러나 식사전도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독특하게 생겨난 방법이 아니라 열 두 사도 중 하나인 마태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자 즉시 사용했던 증거 방법이다.
본 론
1.마태의 이름
마태도 다른 몇몇 사도들처럼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마태’로 불렸으나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처음에 ‘레위’로 부르다가
세관에서 일할 때는 마태라고 불렀다. (막2:14/3:18/눅 5:27/6:15).
그의 첫 이름은 레위였는데 그리스도를 믿은 후 예수께서 마태라는 새 이름을 지어 주셨다. 레위라는 이름은 고향 사람들이 불렀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그는 사도들 가운데서 일곱번째,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여덟번째에 자리잡고 있다(행1:13).
2. 경멸받는 마태의 직업
다른 복음서 기자들은 경멸받는 마태의 직업을 점잖게 표현하였으나 마태는 자신을 세리라고 했다.(마 10:3) 경멸받는 자신의 직업에 대하여 말하면서 마태는 “나는 더 이상 경멸받는 직업에 종사할 수 없다. 사도직분으로 일하고 싶다”고 고백하였다. 마태의 사회적 신분은 현대의 마피아단이나 또는 마약 판매자와 거의 비슷할 정도이다. 그는 스스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세리의 일
탈무드에 의하면
하나는 보통 세금을 징수하는데 술, 또는 과일이나 이와 비슷한
품목에 대한 세금을 거둔다.
하나의 세리는 마태가 속하여 있는 세관관리이다. 세관의 세리들은 사람들을
정지시켜 검색하거나, 짐을 시간을 끌며 조사하고, 날카로운 쇠꼬창이로
밀수품을 색출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많은 미움을 받았다.
2)마태의 근무처
가버나움의 교역하는데 참으로 좋은 위치였다. 다메섹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는 간선도로로 짐을 가득 싣고 내려오는 대상들은 마태가 근무하는 세관에게 멈추어 2-12%에 달하는 관세를 지불해야 한다. 또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어부로부터 세금을 받아 들였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가끔 마태에게 세금을 바쳤다.
사무실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눈으로부터 크게 시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기들의 짐을 검색하는 세리들을 아무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세리들이 미움을 받는 데는 더 많은 이유들이 있다.
3)세리의 죄악
대부분의 세리들은 정직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의 직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로마당국에 일정한 금액을 바친 후 그 이상으로 주머니를 채우고, 가능하면 더 많은 돈을 사람들로부터 긁어 모았다.
세리의 행동에는 탐욕과 부패와 착취와 협작이 뒤따랐다. 로마제국이라는 권력을 배경으로 하고 로마 군사의 힘을 빌어 강제징수하고 사람들을 협박하여 감언이설로 속여 빼앗았다. 높은 세금 수탈에 서민들이 고통을 당하는 동안 세리들은 점점 부자가 되었다. 로마제국에 봉사하는 직업 때문에도 미움을 받는 세리들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더러운 사람들로 보였고, 외국 정부와 야합하는 공모자로 간주되었다.
세금징수는 가장 추악한 직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세리들은 이방인이나 창기와 한 통속으로 취급되었다.(마 18:17/21:31). “세리와 죄인”은 최하층 사람의 통칭이었다(마9:9). 더구나 이들은 재판정에서 증언할 자격도 없었으며, 일반 죄인을 조롱할 자격도 없었고, 회당에 들어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리의 돈은 연보로 받아주지도 않았다. 이들은 사회적인 문둥병자의 지위로 버림을 받았다.
마태는 빛나는 황금에 유혹되어 그는 양심을 팔고 자신의 조국을 배신하였고 속이면 속인 만큼 재산이 불어났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특권도 박탈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그가 세리로 출발할 때는 정직하겠다고 결심을 했을 것이지만 점점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직업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마음은 과부나 고아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못할 만큼 강팍해졌다.
3.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부르심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활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마태도 예수의 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쳤는데 그 때문에 베드로의 문 앞에는 예수님에게서 병을 고치려는 가버나움 사람들로 몰려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마태는 형제와 사촌들과 함께 시몬이 예수를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직업을 포기한 이야기와 지붕을 통하여 수족이 마비된 사람이 예수께로부터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중풍환자에게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3-5)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도 내심으로는 자신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기를 바랬을 것이다.
마태가 “경멸받는 세리도 예수께서 받아 주실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사무실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았다. 자세한 질문을 받은 마태는 전에는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죄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태는 마음 속으로 자신이 대단히 더러운 인간임을 느꼈다. 다른 사람들처럼 예수께서도 그를 “세리, 배신자, 죄인, 또는 사기군”이라고 하셨을까?
예수께서는 자비로운 말씀으로 “나를 좇으라”(마 9:9)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름에 압도당하고 영접하심에 너무도 기뻤던 마태는 그 자리에서 성결을 느꼈다. 그의 마음은 평강으로 충만했다. 마비된 사람을 고친 것을 비난하는 사람에 대하여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자기의 죄를 용서하면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마 9:6)하신 말씀을 상기 했다.
그는 즉시 순종하여 나와서 사무실의 문을 닫았다.
누가는 예수께서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묻는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눅 5:27-28)
다른 제자들은 죽은 후 묻힐 곳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거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어떤 지위에 대하여 토론도 했지만 마태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순간적이었다.
예수께서 마태를 택하실 때에는 서로 깊은 관계가 없었던 것같다.
1)마태의 등장은 그 때까지의 사도들의 조직에 급격한 변화를 일으켰을 것이다.
마태가 두 가지의 명단에서 일곱번째로 기록된 것을 보면 안드레, 베드로, 야고보, 요한, 빌립과 나다나엘은 마태보다 먼저 사도로 불리었다. 이들 여섯은 모두 애국자이거나 어부들이었다. 혐오를 받는 가버나움의 배신자 세리가 사도들의 틈에 끼어들어 친숙한 동료들에게 긴장을 유발시켰을 것이다.
2)마태를 택하신 예수님의 정책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거리감을 주었을 것이다.
도덕적인 문둥병자를 부르신 것은 무분별한 정책처럼 보인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으며,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것을 비난하면서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15:2)고 불평했다. 제자들 가운데 중요한 제자로 마태가 등장하여 유대인의 편견을 막지 못하고 군중들의 불만을 해소시키지 못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마태를 택하신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일지라도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선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며 그 은혜는 모든 인간에게 고루 베풀어 진다. 모든 사람들이 마태를 질시하고 있을때 예수께서는 사랑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한 사나이, 마태를 보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사랑의 은혜는 죄짓고 회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문이 열려 있다.
베푸시는 예수님의 계획적인 정책이었다. 만일 교회에 여러층의 사람들이 있다면 어부들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복음전파에는 다양성이 있는 것이 좋다.
4. 마태의 풍성한 잔치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직후 마태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을 때 세리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앉아 있었다(눅 5:29). 잔치의 내용이나 넓은 집은 많은 손님들의 접대하는 데 충분했으며 모든 것은 마태의 재산정도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마태의 이 잔치는 훌륭하게 돈을 쓰는 것이었으며 또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축하하기 위함이다.
자신의 불행했던 과거는 모두 가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마태는 무척 기쁜 일이었다. 마태가 구세주와 영원히 혼인하는 것을 기념하여 마태의 영적인 결혼잔치라고 부리어 왔다. 마태는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잔치를 베푼 것이다.
2)작별하기 위함이었다.
마태는 자신의 과거를 불사르고 있었다. 마태는 자신의 직업을 떠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들어간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일종의 송별파티였으며 옛 생명의 죽고 새로운 생명으로 중생함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3)증거하기 위함이었다.
옛 친구에게 증거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잔치에 친구들을 청하였다. 만일 그가 신앙깊은 사람들을 초청했다면 그의 집에 세리와 죄지은 자들이 모일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마태를 기피했을 것이다. 갈릴리와 유대의 모든 죄인들이 참석했는데도 예수께서는 마태의 초청을 쾌히 수락하셨다. 이 잔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을 것이다. 마태는 주인의 자리에 앉고 예수님은 상석에 앉으셨다.
셈 슈메이커는 「그리스도인이 택하여야 할 가장 좋은 자리는 구원의 문 바로 안쪽」이라는 글을 썼다. 안쪽에서 너무 깊숙하게 떨어져 있으면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기 어려우며 문으로부터 너무 멀리 가서 있으면 입구를 더듬어 들어오는 소경을 맞이할 수가 없다.
칠레의 한 교회에서 시민들의 큰 환영을 받는 철야 집회가 있었다. 밤마다 도둑들이 기쁜 찬송가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놓고 집집마다 털었다. 그러나 어떤 도둑은 예배석에 몰래 숨어 들어와 죄를 깨닫고 회개했다. 일 년이 지난 후 이 도시의 경찰은 복음전도 역사상 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진기한 일을 하였다. 경찰은 24명의 범인들의 사진과 함께 목사 앞으로 연하장을 보냈다. 경찰은 목사님의 복음전도를 듣고서 범인들이 도둑질에서 손을 떼었기 때문에 이들의 사진을 교회의 기록에 함께 보관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5.마태의 저술
마태 시대의 사람들은 세리는 변화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께서는 마태의 잠재능력을 보셨다. 마태는 예리했고 훈련되어 있었으며 용모가 출중하고 헬라인과 라틴 사람과 아랍인에 대하여는 정통하였다. 미래가 인생의 목적에서 돈을 단념하려 한다는 걸 알아차리신 예수께서는 그가 신약의 첫째권을 쓸 수 있도록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셨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겨냥하여 쓴 것 같다. 마태는 구약 속의 선지자들에 의하여 약속된 참 메시야가 예수임을 증명하려는 결심을 하였다. 이를 위하여 마태는 복음서를 쓰면서 몇 군데에서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마 1:22)는 것과 마태복음서 2장 15,17,23절 등은 그 형식과 내용이 비슷하다.
마태는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혈통을 조사하여 그리스도 가계를 추적하였다. 조심스럽게 14대에 걸쳐 세 그룹을 만들어서 마태는 그리스도의 혈통을 밝혔다. 마태가 체계화하기를 좋아한 것은 언제나 모든 것을 정리하는 성품에 기인하였다. 마태복음의 거의 절반 정도가 마가복음처럼 활동의 기록으로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의 특징은 위대한 논술이란 점이다.
마태는 언어이든 상징적인 묘사이든 문서전도의 방법을 사용하는 시인이나 저술가, 신문기자 , 편집자, 서기, 장부 기록자와 회계원의 선구자였다.
마태는 복음을 쓰면서 일생을 살았다. 마태가 에디오피아와 바사에서 복을 전파했다는 전설도 있다. 그의 사도로소의 상징은 본래의 직업을 뜻하는 “세개의 지갑”이다. 그는 이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을 증거할 수 있었다. 아마 마태는 여리고의 세리장인 삭개오에게 예수께서 여리고를 방문하면 예수님을 만나라고 권하는 글을 보냈을 것이다.
맺는 말
구원 받은 우리도 마태처럼 식사전도를 하여 올해를 마무리하자.
신중한 사람 : 빌립
요한복음 1:43-46
들어가는 말
1.이름의 뜻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뜻인 이 이름은 아마 북쪽 갈릴리 바다에 그리이스의 영향력을 계속하여 행사한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의 이름을 따른 것 같기도 하다. 또 사도들의 고향인 벳세다를 도시의 지위로 승격시킨 공적이 있어서 지방의 통치자인 영주 빌립이란 이름으로 보상으로 받았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빌립은 그리이스라는 세력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뿐 아니라 그리이스에도 멧세지를 전하는데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벳세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동향인 빌립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요4:4) 메시야를 찾으려는 안드레나 베드로처럼 빌립도 마찬가지로 메시야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2 빌립의 기질
태어날 때부터 오랜 친구인 베드로와는 달랐다. 베드로가 오직 자신의 신념만으로 나아가려 하는 것과는 달리 빌립은 결단을 내리기 어려운 순간에는 또 하나의 오랜 친구인 안드레에게 많은 협조를 구했다.
흑백을 가려야 할 일이 생기면 분석적이면서 치밀한 빌립의 마음은 그 일을 심사숙고하고 흑백을 가리는 찬반의 결정에 신중을 기했다. 사실, 빌립은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 조심스럽게 계산하기 때문에 더러는 우유부단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도의 조력에 의존하기도 했다. 빌립은 결코 경솔한 판단을 하여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본 론
1.메시야를 증거하는데 신중(요 1:43-46)
1).빌립을 부르심
요한복음은 안드레가 베드로를 예수께 데리고 간 사실을 기록한 후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은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하셨다고 쓰고 있다(요 1:43). 안드레와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에 대하여 빌립에게 이야기했을런지도 모른다. 베다니와 갈릴리 사이의 길을 가다가 어느 곳에서인가 예수님은 빌립에게 제자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을 권하셨다. 예수께서는 빌립을 세례 요한을 따르는 한 사람일 거라고 아셨기에 빌립을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게서 빌립을 찾으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를 찾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찾는데 대한 반사적인 행동이다.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다만 나무에 올라가서 힐끗 예수를 구경하려고 했을 뿐이지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시고 나무 위를 보신 후 스스로 삭개오의 집을 찾아 들어가셨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진실로 누가 누구를 찾는가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빌립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전설은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마8:21)라고 말한 사람과 빌립이 동일한 인물이라고 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립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상통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름에 빌립이 우물쭈물했다면 그것은 잠시 뿐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눈을 보고 목소리를 들은 빌립은 자신의 생애가 변함없이 항상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립은 천천히 심사숙고하여 선택한 길이지만 이것은 충심에서 우러나온 최종적인 결단이었다.
2).빌립의 전도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의 생각이 나자, 즉시 예수님을 만난 사실을 친구에게 말해 주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것이 빌립의 첫번째 전도였다. 새로 만난 삶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진실한 전도정신으로 빌립은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고 말했다.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을 성취하리라고 빌립은 확신한 것이다. 빌립은 확신한 것이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확신을 말하였으나 나다나엘은 예루살렘이 더욱 실증적인 곳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날 수 있느나?”(요1:46)고 물었다. 친구가 자기의 증거하는 것을 부인하였으니 빌립은 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구약의 모든 예언들이 에수 안에서 성취된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빌립은 말다툼을 하지않고 간단하게 “와 보라”(요1:46)고 대꾸했다. 논리적인 대화가 신앙에 훌륭한 기초가 된다 하여도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논쟁을 하면 안된다. 논쟁이 더이상 불필요함을 깨달은 빌립은 친구에게 예수께로 가보자고 했을 뿐이다. 자신있게 설명할 수도 없고 신념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에 “와 보라”고 고만 한 것은 빌립의 성격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와 같이 주님께 의지하는 것을 증거해 주기를 원하거나 논쟁하려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한 사람이 나쁘기만 하지는 않다. 이런 사람에게는 “저는 당신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돌아노는 주일 아침에 당신을 교회로 모시겠습니다. 아침 열 시까지 당신 집으로 제가 가지요”라고 말하는 것이 현명하다.
드디어 빌립의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미 안드레, 요한, 베드로와 야고보가 예수를 메시야로 믿었으며 빌립이 다섯번째가 되며 모두 기록되어 있다. (마10:3/막3:18/눅6:14). 그 후 사도들이 두 사람씩 작을 지어 복음전도 여행을 할 때 빌립과 나다나엘은 아마 한 짝이었을 것이다.
2.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계산(요한복음 6장 5-14절)
1).빌립은 수효를 계산했다.
어느날 자기를 따르는 수천의 무리를 보신 예수께서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빌립에게 물으셨다.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빌립에게 그 해결 방법을 물으신 것이다. 그런데 빌립은 시험에 불합격하였다.
빌립은 마음 속의 컴퓨터 단추를 눌러 무리들에게 떡을 먹이는 데는 이백데나리온 이상이 필요하다는 상당히 정확하고 실제적인 계산을 해 냈다. 이 금액은 모든 사람들을 조금씩 먹이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액수였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기 때문에 빌립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먹을 것을 사주려면 거의 일년 품삯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가진 돈이 없는데 어떻게 당장 음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라는 식으로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빌립의 정확하고 논리적인 생각은 필요한 돈을 잘 계산해 냈다.
2).현대의 빌립들
빌립과 비슷한 현대인은 맵시있게 옷을 입고 슈퍼마켙에 가서 물건을 사는 사람일것이다. 이 사람은 자기가 사려고 하는 품목을 기록한 종이를 들고 짐차를 밀면서 선반에서 물건을 내릴 때마다 물건값을 적어 놓으며 카운터에 가서 자기의 계산과 맞추어 본 다음에 지불할 것이다.
교회에서 봉사할 때에는 항상 신속하게 일한다. 논리가 정연하고 계산에 밝으며, 거의 기계적인 만큼 정확한 이 사람은 항상 전통을 존중하며, 근본원리를 탐구하고 수치를 맞추어 본다. 이 사람은 “우리는 전에 그렇게 한 일이 없어”. 또는 “그것은 할 수 없었어”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런데 현대의 빌립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할 수도 있다는 반대되는 그 계획안에 결코 찬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식에 따라서 일을 처리합시다“라고 역설하였다.
3).빌립은 믿음이 없이 계산을 했다.
빌립은 비젼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오로지 확증과 계산과 최악의 경우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위기에 처할 때를 대비하여 주님께서 예비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빌립은 수천 명을 먹일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며 떡을 살 수 있는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의 기질은 기적을 배척했다. 그는 너무도 타산적이기 때문에 담대하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빌립에게 믿음을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되게 하시려고 무리들을 먹일 떡에 대하여 그에게 물으신 것이다. 빌립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대답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바구니에 음식을 가진 아이을 데리고 옆에서 있는 안드레를 쳐다 보셨다. 빌립이 비젼을 갖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드레는 속시원하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요6:9)고 여쭈었다. 안드레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예수께서는 아이가 가진 것으로 무리들을 모두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성취하셨다.
이 사건이 있은 후 다행스럽게도 빌립은 타산적인 성격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모시고 배웠다. 빌립은 자신의 믿음이 깊지 못함을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나는 알아야 한다. 바람을 재우고 병을 고치며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는 무리들을 먹일 수 있다. 나는 왜 「주여, 무리들을 먹이는 일은 당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아닙니다.」라는 말씀드리지 못했을까? 나는 왜 믿음이 없을까? 라고 빌립은 혼자 말했을 것이다. 그 날 빌립은 자신이 얼마나 속되고 융퉁성이 없는가에 대하여 얼마쯤 깨달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면 작은 것이 크다는 것도 배웠다. 교회는 주제넘고 경솔하게 예산의 집행을 좌절시키려는 기도로 부터 보호되기 위하여 신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다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이 강한 것을 필요로 한다.
계산적이며 보수적인 머리가 반드시 냉정한 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 기계적으로 철저히 따지는 것이 불신앙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인 생각을 가진 빌립은 무리를 충분히 먹이기를 원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알지 못했을 뿐이다. 빌립은 불가능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바꾸어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다.
(성경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에 이르고 애굽의 군대가 양쪽으로 포위하여 뒤쫓을 때 모든 일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다를 가르시고 이들이 무사히 빠져 나가도록 하셨다(출 14:8-31). 옥에 갇힌 베드로의 처형이 이튿날 아침으로 계획되어 있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끝장인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사슬을 풀고 옥문을 열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행 12:1-10).우리에게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 주신다.
3.헬라인을 맞을 때의 우유부단함(요12:19--22)
유월절에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헬라인들이 있었다.(요 12:19-20) 이들 중에 몇 사람은 유명한 선생인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직접 만나기를 원했다. 그들은 빌립을 소개자로 선택하였다. 그의 이름이 헬라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빌립은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 헬라인이기 떄문에 곧장 데려가지 않고 주님의 뜻을 생각해 보았다. 언젠가 (마10:6)“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신 적이 있음을 기억하였다. 이방인들은 사마리아인들 보다도 한 단계 아래로 낮은 사람들이었다. 주님이 원하실까? 생각하며 썩 내키지 않아서 착한 친구 안드레에게 상의했다. 빌립은 안드레의 조언에 힘을 얻어 주님꼐 고하였고 주님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다.(요12:25)
분석적인 태도를 가진 빌립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불을 붙이지는 못 하였으나 자신의 가슴에는 불을 당겼다. 주님와 함꼐 하면서 설령 안에 거하는 생활을 통하여 빌립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크게 성공하였다. 지나치리 만큼 신중한 성격은 보다 큰 단호한 결심을 하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하는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게 보통이다. 만일 빌립이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면 헬라인들은 준미을 만나지 못하고 제 갈길을 갖을 것이고 그들의 영혼은 구원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어떤 성도는 중요한 기회가 마주칠 때 마지못해 하듯이 꾸물거린다. 기회는 중요하다.안드레가 상드레와 상의 없이 구원에 관한 것은 신속히 행동에 옮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빌립은 믿음을 갖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비록 이해하는데에는 우둔하였으나 부지런히 영적인 문제를 추구하고 생각하는 사라밍었다. 합리적인 생각을 쓸어 버리고 주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의문도 없애기 시작하였다. 자신이 찾고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였다. 과학적인 방법과 실용주의 속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과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 능력과 존재에 대하여 우리들의 한정된 지식에 대하여 깨어서 주목하시기를 원하신다.
맺는 말
1. 그의 생애
초대교회의 문서들은 소아시아에서 성교하였다고 전한다. 라오디게아, 골로새 둥지에서사역했는데 자주 갈라디아 지역을 순회하였다고 한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불란서 고올(GAUL)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그 곳 가지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히애라폴리스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리들에게 잡혀서 몰매를 맞고 십자가를 지면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훗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져서 빌립을 기념하는 교회당에 안치 되었다.
2.교훈
1)말씀의 권위 앞에 내 생각을 맡기는 훈련이 필요하다.
2)내가 말씀을 받았을 때에는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
3)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이 우너하시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결다으로 옮겨지기
위하여서는 내 주변에 좋은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있어야 한다.
혼자의 생각은 오류에 빠질 우려가 있으므로 성도는 교제하라.
4)주님을 계속 바라보아야 한다.
신앙의 성장괴정에는 위심과 회의가 있어서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질문을 드리면서 계속 주님 앞에 있어야 한다.이것이 그가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 이다. (빌립보서 4:8-9) 함께 읽읍시다.
생각하라// 행하라//진리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되자.
정직한 사람 : 바돌로매
요한복음1:43-51
들어가는 말
1.무화과 나무 아래 있는제자
갈릴리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일종의 개인적인 휴식처였다. 무화과 나무는 약 4m의 높이로 자라고 가지는 사방으로 7m를 덮는다. 대부분의 집들은 방을 하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무화과 나무 그늘에서 개인적인 시간을 보냈다.
2.이름의 뜻(Batholomew // Nathanael)
1)바돌로매//그는 왕족의이름을 따서 지었으나 실제로는 귀한 신분은 아니었다.
돌로매의 아들이란 뜻이다.
2)나다나엘// “하나님의 선물”을 의미하는데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지어 주셨을 것이다.
3.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을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이유
마태, 누가, 마가과 사도행전은 모두 바돌로매를 열 두명의 사도 가운데 여섯번째, 또는 일곱번째로 들고 있으나 나다나엘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마10:3/막3:18/눅6:14/행1:13).
요한복음은 바돌로매라고 쓰지 않았지만 나다나엘을 사도 가운데 하나로 포함시키고 있으며(요1:45-51) 갈릴리의 가나 지방에서 온 어부의 한사람으로서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다.(요21:2).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모두 열 두 사도 가운데 들어 있다면 동일한 인물로 지칭되어야 한다. 나다나엘(바돌로매)괴 빌립의 관계가 매우 가까운데 문제의 초점이 있다. 앞에서 말한 사들의 명단을 보면 세 군데에서 항상 바돌로매는 빌립과 짝을 짓고 있다. 요한은 나다나엘(바돌로매)과 빌립은 친구였으며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께 데리고 갔다고 한다.
본 론
1.나다나엘은 성경을 상고했다.
1)나다나엘은 묵상했다.
무화과 나무 밑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신 예수께서는 “너 혼자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친구들은 그가 배에 없으면 정원의 무화과 나무 아래서 그를 찾았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신앙깊은 사람임을 알고 계셨다. 죄를 짓지 않는 정직한 마음은 무화과 나무 밑에서 늘 묵상하는 나다나엘의 습관에서 생긴 것이다. 이처럼 조용하게 묵상함으로써 나다나엘의 영은 새로와지고 그 성품은 강건해졌다.
(예)우리는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십대의 아이들은 귀가 아프게 라디오와 녹음기를 틀어 높으며 어른들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텔리비젼을 켠다. 우리는 또 매우 바쁜 세상에 살고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서 필요한 것은 시속 100km이상 달리는 스포츠카와 흔들의자“라고 비꼰 일이 있다. 나다나엘 시대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에게는 무화과 나무가 절실히 필요한것이다.
*누구든지 조용하게 생각하고 기도할 장소를 가져야 한다.
//이삭은 한밤중에 들로 나갔다.//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하나님과 친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고백록을 보면 「어거스틴은 오랜 시간 동안 하나님을 피하여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 된 후 은밀한 곳을 추구했다.」고 쓰여 있다. 그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밑에 던져졌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홍수와 같이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회개했다.”
2)나다나엘은 기도했다.
무화과 나무 그늘은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장소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인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도록 해주며 하나님의 능력은 절망적인 세상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는데 실패하고 있다. 철저하고 규모있는 기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기도의 제목과 방해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은밀한 곳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빈방을 기도장소로 마련하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기도실의 벽을 막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3)나다나엘은 성경을 연구했다.
나다나엘은 묵상하고 기도하는 열성 이상으로 성경을 연구했다. 그는 메시야의 약속을 찾으려고 구약을 공부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뒤에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말했다.(요 1:45). 빌립의 말은 메시야를 찾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들여서 율법과 선지자를 연구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빌립이 나다나엘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무화과 나무 밑에서 구약성경을 펴들고 메시야의 강림을 생각하고 있다.
성경이 세계의 베스트셀러이기 때문에 순전한 호기심에서 읽기도 한다. 성경의 문학적 가치 때문에 읽혀지기도 하며 우리가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기도 하므로 읽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중보자이며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말씀하셨다. 시므온이나 안나와 마찬가지로 나다나엘도 메시야의 약속을 믿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보면서 그리스도를 찾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즉석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었다.
2.나다나엘은 회의론자였다.
메시야를 만난 사실을 열심으로 설명하는 빌립에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나?고 물었다(요 1:46)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다나엘은 나사렛으로부터 구세주가 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왕의 옷을 입은 위대한 정복자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부터 올까? 혹은 미가가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했던 베들레헴으로 부터 정복자가 올까? 나다나엘이나 다른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나사렛의 배경을 이해한 것은 부활과 다락방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알고난 후의 일 일것이다(마 2:23/눅24:44-48)
나다나엘은 회의를 품으면서도 정직했다. 나다나엘은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사렛으로 부터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는 티끌만한 암시도 받지 못하였다. 이 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다. 성경을 바르게 읽지도 못할 분아니라 바르게 해석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정당화를 위해 성경을 끌어와서 해석한다.
정직한 회의론은 빛과 진리에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나다나엘의 결심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뒤에 예수님의 적들은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상고해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요7:52)고 했다. 이들의 편견은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인격과 위엄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부인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한편 나다나엘의 정직한 회의론은 더욱 상고하여 빛을 찾는 길을 열어 놓았다. 그의 개방성은 그의 성실한 정직한 마음은 가서 직접 보기를 원했다.
3.나다나엘의 큰 발견
두 사람은 빌립이 예수와 헤어진 장소로 갔다. 빌립은 속에서 안달이 났고 나다나엘은 좀 흥분했다가 깜짝 놀랐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기록하고 있다. 나다나엘의 모습은 이 말씀에서 적나라하게 들어나고 있다.
1)나다나엘은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의 씨가 있으니
하나는 육신의 자녀이며
다른 하나는 언약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자녀라고 바울은 가르쳤다(롬 9:6-8).
육신의 씨들은 아브라함을 믿고 행하며 그리스도에 앞서 메시야의 임하심을 간절히 고대 하던 조상들과 같은 영적 신앙을 갖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은 영적인 씨에 속하 도록 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육신을 가리킬 뿐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영적으로 함께 살기를 하나님 이 원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2)나다나엘 속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나다나엘은 교활하거나 속이는 피를 이어받지 않았다. 위선도 없고 간사함도 없기 때문에 성격은 맑은 물처럼 투명했다. 그는 어떤 말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숨겨진 동기를 찾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의 천진난만한 성격은 사람들이 자기를 이용하고 속이는 것까지도 용인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그의 행운은 이루 말할수 없는 귀한 보석(예수)으로 인도해 주었다. 바리새인들의 교활함과 위선에 진노하고 꾸짖은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의 성격을 속이지 않고 숨겨진 동기가 없다고 칭찬하셨다.
나다나엘은 감동을 받았다.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도중에 그의 의문은 완전히 사라졌다. 당황하면서도 나다나엘은 솔직하게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질문했다(요1:48)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노라”(1:48)하시는 메시야의 시원 대답이 의문을 풀어 주었다. 확신을 가진 나다나엘은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로소이다”(요1:49)라고 하였다. 베드로나 도마의 경우 만큼 의미심장하지 않을런지는 모르지만 이것은 훌륭한 신앙고백이었다(마 16:16/요20:28)
나다나엘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었으며, 회의론을 품고 있다가 확신을 가진 성실한 사람의 표본이라 하겠다.
4. 나다나엘은 완전히 깨달았다.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기적을 이루시며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시고 은혜가 넘치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직접 보고 들었다. 기적이 성취되면 뒤이어 또 기적이 성취되었다. 귀머거리는 소리를 듣고, 소경은 눈을 뜨며, 벙어리는 말을 하고, 문둥병자는 깨끗해지고 큰 무리가 먹으며, 폭풍은 잠자고, 죽은 자는 살아났다. 때로는 어리둥절했으나 자신이 걷고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먹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배신의 밤이 오자 예수님은 체포되어 고난을 받으시다가 마침내는 십자가 쳐형을 당하셨다. 이 때부터 부활이 있기까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믿음은 완전히 죽어있는 듯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의 기적은 이들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어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파할 결심을 하는 새로운 삶을 재촉한 계기가 되었다.
예수님은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며 이 사닥다리는 죄지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준다는 것을 나다나엘은 깨닫게 되었다.
5. 생애
나다나엘은 브리기아, 헤라홀리스, 알메니아와 인도 등지에서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전설에 의하면 그는 우상숭배가 심한 아르메니아 지방에서 16년간 전도하다가 곤봉으로 맞고 살갗을 벗기우고 십자가에서 머리를 떨구고 죽은 후시체는 자루에 넣고 묶이어서 바다에 던져졌다고 한다. 그후 그의 시신은 이탈리아 베네벤툼으로 옮겨졌고 후에 타이버 섬에서 그의 기념성전을 짔고 모셨다고 한다.
나다나엘의 사도로서의 상징은 더러는 무화과 나무이기도 하지만 칼로 살갗을 벗기웠기 때문에 그의 상징은 항상 “세 자루의 칼”이었다.
이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가 히브리어로 마태복음을 기록하였다고 한다.
또 바돌로매 복음을 기록하여 많은 감화를 주었다고 한다.
맺는 말
1.마음을 열자.
예수님이 그를 귀하게 여기신 것은 그가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전도할 때에도 아예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힘든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마음이 열렸다는 사실에서 귀한 대화의 시작이다. 자기의 약점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문제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그리고 지도를 부탁하는 것은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단계로 발 돋움하기 위한 준비이다. 자기의 약점을 끝 까지 숨기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은 가증된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자기의 굳게 잠긴 성문을 열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기도함으로 과거에 개닫지 못하던 자기의 죄를 생각나게 하고, 제단 앞에 자기의 문제를 가자다 놓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속에 더러운 것이 많다. 이제부터 우리의 마음을 열자.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치료를 구하자. 그때 부터 교정은 시작된다.
2.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나다나엘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교회에 오래 다닌 분 가운데 어떤 말씀의 주제가 나오면 ‘나는 배울 것이 없다.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무궁무진하다. 반복되는 것은 있지만 더 깊이 나를 일깨워 준다. 열린 마음은 가진 사람에게 진리는 영광스럽게 다가온다.
교회에는 안 다니지만 전에 기독교 학교에 다녔던 사람들에게 전도해 본적이 있는가? 보통 ‘네 이미 잘압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성경에 대해서는 이미 끝냈습니다.’ 진리를 탐구하고 수용하는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3.깨달은 후에는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은 고백에 대한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께 대하여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게 되었을 때 달라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무엇을 시인하는 힘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말한다.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한다고 하지만 말을 하면 마음이 따라 올수 있는 것이다.
(예)사랑을 고백하면 그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더 사랑하게 된다고 한다. 불평을 하면 더욱 한심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참으로 고백이라는 힘은 엄청나다.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시인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있다. 나다나엘은 고백의 중요성과 영감있는 아름다운 고백의 모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간사한 것이 없고 진실하고 조용히 주님을 따라가며 생애를 주님 위해 바친 충성스러운 제자가 될수 있었다.
주님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바돌로매와 같은 또 하나의 제자를 원하고 꼐신다.
주님은 성격이 다른 여러 제자를 쓰셨다. 우리는 다 똑 같을 수는 없다. 당신이 가진 약점과 인간적인 부족함이나 모순과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약점과 장점을 모두 사용하시어 일하시려 한다.
의심하는 사람: 도마
요한복음1:43-51
들어가는 말
1.별명
1)“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나쁜 성격의 소유자로 생각하기 쉽다.
2) “의심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불려 왔다.
의심할 바 없이 도마의 별명은 진리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잘못 이해하게 하는 요소도 있다. 눈에 뜨이는 그의 특징은 정직한 의심이다. 그는 진리를 알려고 질문을 잘하는 성격이었다. 진리를 듣고 한 번 확신하기만 한다면 그는 전심으로 그 진리를 따랐다.
도마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화나는 표정을 짓지 않으셨다. 요한복음에서는 도마가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부활의 신비를 믿고 감동한 것을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몇 가지 증거 가운데 절정 단계에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성실한 의심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로운 믿음에 이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3)“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 잘하는 사람“이란 별명이
도마에게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2.제자 서열
도마는 열 두 사도의 명단을 제외하고는 새 복음서에서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1)마태복음에서는 일곱번째로(마 10:3)
2)마가과 누가복음에서는 다 같이 여덟번째로 기록되었다.(막 3:18/ 눅 6:15).
3)부활 후 다락방에 있을 때에는 여섯번째로 기록되어 있다(행 1:13)
4)요한복음에는 3번 언급된다. 요한은 부활 후 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들 가운데 그를 포함시켜 디두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요 11:16)
3.성경
도마는 우울증을 가졌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충실하고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도마는 염세적이었지만 헌신적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각오도 되어 있었다. 아마 도마의 이중성격 때문에 또 다른 이름인 디두모로 불리우게 되었을 것이며 ”쌍동이“(디두모)란 별명이 어울리기도 한다,
본 론
1.도마의 용감한 염세주의 (요한복음 11장 1-16절)
주님의 명성이 대단히 널리 퍼졌기 때문에 종교지도자들은 폭도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다. 예루살렘의 위험한 지역을 벗어나면서 제자들을 유대에서 요단으로 건너가는 곳인 비교적 안전한 베레아로 인도하셨다.
그곳에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중병이 들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틀을 기다린 후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보러 베다니로 되돌아가자는 의견을 밝히셨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하나이까?”(요 11:8)고 여쭈었다.
제자들의 반대 의견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신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요11:11)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다(요11:12).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죽음이 아닌 육체적인 휴식을 예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이 때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죽었다고 분명히 말씀하시면서 가자고 하는 것은,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요 11:4), 너희들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요 11:14-15).
1).유대로 돌아가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의 거리를 좀 두고 바라보기만 하거나 마치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요 11:16)고 제의 했다. 도마는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주를 따라 베다니로 갈 각오를 다짐했다. 우물쭈물하는 제자들의 충성심을 집결시키는 용기에 불을 붙인 사람은 지도자 베드로가 아니라 도마였다. 그 용기는 그의 회의심을 무모한 자살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는 위험한 땅으로 제자들이 발길을 재촉하였다.
2). 불완전한 도마의 용기
이 말만 본다면 그는 의리있고 뜨거운 열정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침울하고 어두운 그늘이 깔려 있었다. 도마는 사물의 어두운 면만을 보는 염세주의자였다. 그는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릴 의사와 능력을 가지신 것을 알지 못하였다. 비록 용감하였으나 도마의 마음에는 이판사판 이래저래 죽을 것이라면 두렸기는 하지만 지금 죽으러 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도마를 너무 꾸짖지 말자. 깊은 실의에 빠졌던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 19:4)라고 기도했으며 다윗은 우리가 항상 쓰는 말씨로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고 울부짖었다(시42:5)
2.몹시 당황하여 질문하는 도마(요한복음 14장 1-7)
주님은 유월절 경배를 마치고 작별의 말씀을 하셨다.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했던 제자들의 소망과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진리가 오리라는 제자들의 확신의 위험한 공포가 따랐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라 진실로 새로운 시작임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배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축복이 내리는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된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하셨다.
이 때 당황하는 도마에게 예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요14:4)라고 말씀하시자 더 참을 수 없는 도마는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요 14:5)라고 여쭈었다. 주님의 사역이 죽음 저편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도마는 이해할 능력을 갖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천국으로 돌아가시면 어떻게 지상에 왕국을 세울 수 있을까 하는 커다란 의문을 도마는 가지고 있었다. 그의 의문은 믿지 못하는 데서 나왔다기 보다는 착각이나 혼란 때문에 생긴것같다. 도마의 질문에는 정직한 의문이 내포되어 있었다.
도마는 여러 가지로 추리해 보는 제자들의 의문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믿음으로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도마의 의문이 무엇이든 예수님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히 도마에게 은혜를 입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대답하셨다.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는 표본이요, 선생이며 영생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구약 속에 있는 예언과 상징과 표적을 성취하였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였다.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알파요 오메가이며 모든 것이시다.
3.도마의 정직한 의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다락방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던 날 밤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 때에 그는 바위산 골짜기를 배회하거나 한적한 산을 오르면서 고독과 슬픔속에 눈물짓고 있었을 것이다.
도마는 왜 참석하지 않았을까?
집회에 참석하지 못한 현대의 도마는 “하루 종일 힘들여 일했더니 너무나 고단해, 다락방까지 걸어가려면 내가 너무 지칠거야”라고 양햬를 구할 것이다.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지 않았던 진정한 이유는 예수께서 그 곳에 계시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마는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신 사실을 믿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에 있으면 직접 찾아가서 조문을 하게, 그러나 그리스도는 안계실 걸세”라고 말했다.
예화)
카나다의 어느 도시에서 선거로 당선된 기독교인 시장은 당선된 직후 비서에게 “수요일 밤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약속은 하지 말게”라고 부탁했다. 이상하다는 듯 비서가 쳐다보니까 시장은 “수요일 밤에는 나의 주님과 약속이 되어 있다네. 나는 주님과 만나는 약속을 꼭 지켜야 하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약속은 ㅇ하지 않을 걸세”라고 설명했다. 그 도시의 시장으로 봉직하는 동안 그는 빠지지 않고 수요일의 예배에 참석했다. 우리가 주님의 집에서 경배하지 않으면 많은 은혜를 스스로 잃어버린 것이다. 도마는 여러 가지를 잃었다.
1)도마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다.
텅빈 무덤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할 때 제자들은 다락방에 모여 닫아 걸고 제자들은 그 날의 당황스러웠던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문은 열리지 않고 닫혀 있는데 갑자기 예수께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우뚝서셨다.
이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주 예수께서는 두세 사람이 자기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그 가운데 자신도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마 18:20)
2)도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기회를 놓쳤다.
그날 밤 주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어떻게 예언했는지를 보여 주심으로써 이 자리에 있던 제자들에게 말씀을 이해하는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마음은 불이 붙고 밝아졌다. 그러나 도마는 구약의 예언 가운데 있는 중요한 이 에언을 배우지 못하고 말았다.
3)도마는 믿는 자와 친할 기회를 잃었다.
다른 열 명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아직도 하나님이 갈고 닦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거칠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믿는 사람들과의 교제로 자신을 갈고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성도의 교제에 머물러야 한다.
분명히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보석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을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므로써 하나님의 자손들은 강건해지고 성장하는 것이다.
(예)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이 열심히 예배에 참석한다. 왜 한번도 빠지지 않는냐는 질문에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 빠지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의심 있어도 교회에 빠지지 말라.성도의 모임에 있으면 성도들과만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거하시며 역사하시는 주님과 만나고 교제한다는 사실이다.이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이론적 증명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한 순간의 체험이 눈 녹드시 다 사라지게 만든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사람은 의심이 사라진다.
4)도마는 기쁨과 평강의 기회를 잃었다.
예수께서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고 이미 예수께서 나타내 보이셨던 베드로를 제외하고 제자들이 죽은 그리스도를 추모하기 위하여 모였다. 어찌된 일인가!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서 서 계시지 않은가! 살아계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20:19)라고 축복해 주셨다. 그런데 이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평강과 기쁨의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기분이 언짢은 채 교회에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와의 올바른 관계를 발견하고 유지하며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가르침과 영감을 받는다.
5)도마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위임받지 못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는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 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라”하시고, 또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하셨다(눅 24:27-28/요 20:21)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해야 할 사명을 부여해 주셨다. 그러나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사명을 부여받지 못했다.
6)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직접 보지 못하였다.
유령인줄 알고 놀란 제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하여 주님은 손, 발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다. 제자들에게 만져보고 확인해 보라고 하셨다. 못자국이 너무도 선명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도마에게 설명할 때 못자국의 상처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깊은 회의에 빠져 있는 도마는 제자들의 설명에 대하여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하였다(요 20:21-25)
도마는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와 열 제자들의 증거를 모두 거부하고 오로지 내가 직접 보고 확인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실증적인 방법을 고집했다. 정직한 의심은 강한 확신으로 변할 수도 있다.
7)절망적인 의심에 잠겨있었지만 도마는 확신을 가지려 하였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는 제자들의 한결같이 거듭되는 다짐은 다음 주일의 다락방 모임에 도마가 참석하도록 확신을 주려는 것이었다. 도마는 실망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문이 닫혀 있는 방으로 들어와 제자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눈은 도마를 찾으시더니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되라”(요 20:26-27)고 부탁하셨다.
(예화)빌리그래함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라 할때 나는 오늘 아침도 대화를
나누었기에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하면 이는 웃기는 일이다.
회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갈6:4)
8)도마는 오래동안 추구하던 증거를 찾았다.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아무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손이 열병있는 이마를 만지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어린 아이를 축복해 주는 것을 도마는 여러 차레 직접 본 일이 있다. 이제는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 볼 필요도 없다. 주님께서 말씀도 채 마치시기 전에 도마는 무릎을 굻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울며 고백하였다(요 20:28). 이 고백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이며 이전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의 어떤 형태의 확인보다도 더욱 분명하고 훌륭한 것이다. 도마의 음울한 의심은 빛나는 믿음으로 변하였다.
예수께서는 확실한 증거를 원하는 사람을 꾸짖지 않으셨다.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증거를 찾는 믿음은 어느 편이 더 훌륭할까? 한 때 의심을 많이 하였던 도마는 의심을 풀면서 자기의 갈 길을 찾았다. 도마가 그 동료들 가운데서 믿음이 가장 확실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알고 계셨다. 정직하게 의심하는 사람은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의심하는 것이 범죄는 아니다. 그러나 안믿겠다는 것은 어둠에 그대로 있겠다는 것이기에 불신앙의 죄이다. 정직한 의심과 불신앙은 다르다. 주님께서 도마를 제자로 삼으셨던 이유는 바로 의심나면 물어서 배우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오늘의 우리들도 모르면 물어보자.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일수록 총명하여 진다. 질문한다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영광스러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질문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기를 바란다.
9)도마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상처는 구세주의 고난을 상기시며 준다. 상처는 금과 은처럼 없어질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표지가 될 것이다.(벧전 1:18-19)
예화//부모가 없는 어린 소년이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그 집에 불이 났다. 이 층에서 잠을 자고 있는 소년을 구하려고 애쓰다가 할머니는 그만 불에 타 죽고 말았다. 불타는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살려달라는 소년의 울부짖음이 불꼿을 가르면서 흘러 나왔다. 집의 정면이 불길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한 사나이가 나와 이 층 창가에 닿을 수 있는 쇠파이프를 찾아 가지고 집의 뒷편으로 갔다. 몇 분간 그 사나이는 보이지 않더니 팔에 소년을 켜안고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른 가운데 사나이는 소년을 목에 메고 뜨거운 파이프를 내려 왔다.
몇 주일이 지난 후 이 소년을 보호해 줄 사람을 결정하려고 마을 회의실에서 회의가 열렸다. 모인 사람들은 짧은 말을 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원하였다. 첫번째 사람은 “나는 큰 농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오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두번째 사람은 “나는 교사입니다. 나에게는 큰 도서관이 있어요 소년을 훌륭하게 기를 수 있습니다”라고 자기가 소년을 맡는데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발언을 했다. 이동네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는 부자입니다. 나는 이 소년에게 농장, 책, 교육, 그리고 돈이나 여행등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겠다고 약속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소년이 함께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했다.
의장은 “또 말씀하실 분 없습니까?”라고 의견을 물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도 끌지 못하고 맨 뒷자리에 있던 낯선 사람이 일어났다. 앞으로 걸어 나오는데 얼굴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듯이 보였다. 정면으로 나와서 그는 소년 앞에 똑바로 섰다. 낯선 이 사나이는 주머니에서 천천히 손을 꺼냈다. 사람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지금까지 마루바닥만 쳐다보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 사나이는 손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상처를 쳐다 본 소년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이 사나이는 소년의 생명을 구해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의 손은 드거운 쇠 파이프를 잡고 오르내릴 때 심한 상처를 입었다. 소년은 껑충뛰어 낯선 사나이의 품에 안기며 그에게 자기의 생명을 의지하였다.
농부가 일어나고 교사도 갔다. 부자도 가고 사람들은 모두 떠났다. 소년의 생명을 구한 그 낯선 사나이만이 외로이 남긴 채 모두 가버렸다. 상처입은 손은 다른 어던 말보다도 더욱 효과적인 연설을 한 것이다.
결 론
오늘날 많은 이해관계는 우리의 헌신봉사와 싸움을 걸고 있다.
나이가 젊거나 늙거나 가릴것이 없이 돈, 교육, 명성 환락의 도전을 받는다. 그러나 자기의 손을 들어 올림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신 분이 수십 세기를 왕래하신 길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열심당원 :시몬
누가 6:12-19
들어가는 말
1.이름
열 두 사도 가운데는 잘 알려진 시몬 베드로와 잘 알려지지 않은 셀롯 시몬 두 사람의 시몬이 있었다. 열광자의 이름은 사도들의 네 가지 명단 가운데 언급되어 있다.(마 10:4/막 3:18/눅6:15/행1:15). 어느 전설은 그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를 좇으라는 부름을 받았다고 전한다. 신약성경에는 셀롯 시몬의 개인적인 역사가 없을 뿐 아니라 열 두 사도의 거의 끝머리에 기록되어 있다. 특별한 재능 있든 없든 그의 이름은 그가 열광적이며 성급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본 론
1.시몬은 열광자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마지막으로 강력한 지파로 등장한 셀롯(열심당)등 예수 시대에는 여러 파가 있었다. 시몬은 “열광적”을 의미하는 카나나이오스(Kananaios)라고 한다. 사실상 카나나이오스는 열심당에 대한 아람어인데 이는 누가가 고쳐서 “시몬”이라고 부른 단언이다(눅 6:15). 가나안인이라고 잘못 쓰여진 단어는 지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옳게 쓰여진 카나나이스라는 단어는 “정치적인 명칭”이다. 시몬은 유대의 극단주의자이다.
1)셀롯(열심당)의 기원
주전 167년예루살렘 근처서 살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났던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에게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유대의 종교적, 정치적인 독립을 쟁취하려는 사움에서 그의 아버지를 도왔다. 그후 “대장장이”로 알려진 장남인 유다 막카베오가 지도자로 계승되었으나 로마군의 정복으로 막카베 시대는 막을 내렸다.
2)로마제국시대(해롯 왕)
외교적인 방법으로 준평화 상태를 유지했으나 그러나 헤롯이 죽자 팔레스타인은 중에 갈릴리 태생 유다가 궁궐을 습격하고 병기고를 부수어 자기를 따르는 자들 을 무장시켜 유혈폭동을 일으켰다. 얼마 안되어 유대 총독으로 새로 임명된 퀴리노는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자 이를 계기로 다시 유다에 의해 전국적인 폭동이 일어났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유혈참극 속에서 유다는 살해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셀롯이라고 알려진 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3)바라바
외국의 세력에는 단호하게 대항하는 혁명주의자의 이름을 가진 셀롯은 자기들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투쟁할 때 무모하고도 냉혹하게 모든 이익을 포기해 버렸다. 이들은 살인과 폭동죄로 복역하다가 예수님 대신으로 석방된 셀롯 사람 바라바의 착상이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때 셀롯인들은 유화정책을 쓰는 사람이라고 지목되는 사람은 모두 살해하면서 실질적인 내란을 일으켰다. 셀롯인들은 포위, 공격하는 로마군에게 장기간 대적하여 그들의 분노를 격화시켰다.
4)사해의 서쪽 해변에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인 마사다에는 천여 명의 셀롯인들이 최후까지 로마군에 항재하다가 지도자의 불을 뿜는 열변에 호응하여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도 끊었다. 그들은 광적인 애국자이며 자유투사였고 로마제국의 점령에 항거하는 과격파였다. 셀롯 시몬의 종족들은 외국의 세금부과에 반대하여 투쟁했으며 자신들의 의견을 고무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음모를 꾸미고 종교적인 열성이란 이름을 빌어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난폭한 테러를 자행하였다. 시몬은 그와 똑같은 주의, 주장을 가진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정치적인 모험은 가금 더 큰 위험을 가져오기도 했을 것이다.
2.변화된 시몬
아주 열광적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유용하게 될 수도 있다. 시몬은 주님에 의하여 변화 되었다. 극과 극은 만나는 것인가? 유유상종인가?
1)시몬이 온유하신 예수님에게 어떻게 하여 이끌렸을까?
첫째로, 예수님은 대단한 열성을 가진 분이셨다.
자신의 안락을 돌보지 않고 희생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행하였다. 너무도 힘겹게 일했기 때문에 어느 날 격노한 폭풍우 속에 있는 배에서 잠이 든 때도 있었다. 예수게서는 생활하면서 최종 목적을 위하여 온 정력을 솓으셨다. 예수님은 어떠한 방해와 역경 속에서도 죄절하지 않았고 꺼지지 않는 정열을 가지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시몬이 꿈꾸고 있는 것보다도 더 신성한 왕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시몬의 새대에는 가난한 자는 마음대로 강도질을 하고 과부는 재산을 사취하고 일꾼들은 낮은 품삯과 불법적인 세금에 시달렸다. 이스라엘 백성이 더이상 핍박을 받지 않을 살기 좋은 시대에 대하여 예수께서 말씀하실때 시몬은 귀를 기울였다.
셋째로, 시몬은 직접 기적을 보았다.
그는 휴머니스트였기에 병자를 고치고 수천 명을 먹이며 물이 포도주로 변하게 하며 죽은자를 사리는 등 예수께서 성취하시는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이전에 시몬은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을 본 일이 없다.
넷째로, 시몬은 예수께서 귀신을 쳐 쫓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통렬하게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 예수게서 이방인의 단을 폐하고 환전상을 좇아내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것을 시몬은 목격했다. 시몬은 부패하여 민족에게 도무지 흼아을 줄수 없는어 유대교에 대한 이 조치를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의거라고 잘못 이해한 것 같다.
다섯째로, 시몬은 자신의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임을 밝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요 3:13) 유대의 선지자들은 하늘의 인자가 이 땅에 내려와 사악한 무리들을 멸하고 신성한 왕국에서 공의를 펴 영원히 다스린다고 예언했다. 시몬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 언제인가 로마군을 팔레스타인에서 몰아낼 혁명을 위한 능력을 가진 개혁자를 예수 안에서 발견했다. 메시야가 이 땅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이미 임하였다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도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스라엘에 세울 정치적인 왕국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았음에서도 볼수 있다.
2)예수께서는 왜 시몬을 원하셨을까?
사도 가운데 셀롯인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심을 받는 예수님의 사역에 오점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몬을 택하신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백성들의 여론에 좌지우지되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시몬에게 주의를 환기시켜고 격렬한 시몬의 마음을 가라 앉히셨다.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선택하는 데에 타산적이고 세속적인 지혜는 무시한것 같다. 예수께서는 조용한 태도를 갖거나 피동적으로 순종하는 무리들을 일률적으로 사도로서 택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각양각색을 망라한 소규모의 집합체가 되기를 원하셨다. 시몬은 위험스러운 것을 맏는 자격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3)시몬은 반대자와 화해했다.
마태와 시몬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을까? 마태는 세리로서 로마제국에 팔렸던 사람이고 시몬은 로마를 증오한 사람이었다. 시몬은 열렬한 애국자였으나 마태는 매국노였다. 마태는 로마제국의 도구였으나 시몬은 압제자의 적이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여건에서 만났기 대문에 분명히 마태는 시몬이 속해 있는 셀롯인들의 암살대상자 명단 위쪽에 자리잡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바다에 다리를 놓으셨다. 개인적인 증오심은 예수님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에 의하여 극복되었다. 이들이 조그마한 단체 속에서 화평하게 살 수 있다면 복음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불화를 치유할 능력을 가진 것이다. 시몬과 마태의 화해는 복음의 화해능력을 증명해 주었다. 예수게서는 인간과 화해하시고 인간들은 서로 화목하였다.
4)시몬은 열성적으로 헌신했다.
열광 그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정열을 좇는 목적에는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열정은 이성을 제약하는 수가 많으며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수도 적지 않다. 때로는 사람의 편견이 열광적인 색채를 띄게 되면 편견을 더욱 깊게 만들기도 한다. 지식이 없는 열광은 그릇된 교리나 이단, 심지어는 종교재판에까지 공격적으로 돌진하게 만든다. 잘못된 열광은 상대편이 진실하게 되는 사이에도 자기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할 수 있다. 열광적으로 파괴적인 방법을 썼을지도 모를 시몬도 아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만난 시몬의 열광은 자제되고 정화되어 바른 방향으로 흘렀다. 만일 족쇄를 벗어난 그의 열정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는 얼마나 훌륭한 영적인 군사가 되겠는가? 주님은 강건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원하셨다. 비록 셀롯인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도들은 셀롯 시몬의 의견에 동정했을 것이다. 시몬의 열정은 사도들 전체에 불을 당겼다. 그의 열정은 쉽게 옮겨졌으며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자극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다른 사람을 불붙게 한다.
5)시몬의 미움은 사랑으로 변했다.
십자가를 위하여 칼을 포기한 시몬은 계속 예수님을 좇았다. 십자가의 처형이 있던 전날 밤에 그는 다락방에 주께서 열 명의 제자앞에 나타나신 첫 부활절에도 참석하였다.
주님의 변화시키는 능력을 통하여 시몬의 정치적인 야심은 온화한 포부로 바귀어 부드러워졌다. 호전적인 기질은 전도활동의 동기로 변하였다. 왕국에 대한 의견은유대를 위한 편협한 애국심으로부터 온 세상을 위한 정열로 성장했다. 생명을 위하여 압제정권과 큰 싸움을 할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통하여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깨달았다. 주님을 만나고부터 시몬은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하여 정열을 쏟았다. 시몬은 예수님과 함게 하면서 온화하게 변했다. 증오로 시작한 사람이 사랑으로 일생을 마쳤다.
3.우리에게도 시몬과 같은 뜨거움이 필요하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대단한 열성으로 증거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행 17:6)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 열정 때문에 수십 년이 흐르기도 전에 복음은 힘차게 퍼져 나갔고 3세기가지 로마제국의 십분의 일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학생이 학문 속에서 전문지식을 얻기 위하여 한밤중에 기름불을 땠다면 그는 부지런한 사람이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기 위하여 시간을 들였다면 당신은 그와는 좀 “다르다”. 당신이 주일과 똑같이 월요일에도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은 대단히 신앙깊은 사람이다.
이것은 사도의 시대로 되돌아가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복음을 말하자 총독 베드로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행 26:24)라고 크게 소리쳤다. 만일 베스도가 무덤에서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 바울과 자기의 위치를 바꾸고 싶을 것이다.
마리아는 일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기름을 발라 드리며 주 예수께 아낌없이 많은 것을 바쳤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잃은 것 모든 것을 진심으로 계산해 보고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이도의선교사 헨리 마틴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심으로 노력했다. 혜린 마틴은 인도의 해변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에서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불태우고 싶다”고 했었다. 스펄젼은 성실함이 영혼을 전도하는 가장 근본이 되는 자질이라고 말했다.“당신의 교회에 어떻게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느냐?”하는 질문을 받은 스펄젼은 “열성을 가진 열광자를 보내 주십시요”라고 대답했다.
바울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게 하듯 하라”(골 3:23)고 역설했다. 베드로는 열심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에게 권면했다.
셀롯 시몬은 예수님에게 무조건 감동될 수 있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장래에 천국이 우리의 집이 된다는 것과 시험이 있을 때마다 우리를 살펴 주시는 구세주를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깨달을대 우리는 진정으로 기뻐서 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작은 일에 관심을 가지며 진실로 영원한 것이라 생각되는 것에 더욱 감동한다면 우리도 시몬을 더욱 많이 닮게 될 것이다.
4.시몬의 순교
시몬은 소아시아, 북아프리카, 흑해 지역과 바벨론 등지에서 복음을 전한 것 같다. 어떤 이야기는 그가 페르샤에서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시몬의 상징은 성경에 누운 물고기이다. 이것은 고기를 낚는 어부가 말씀을 전파하여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것을 가리킨다. 이는 오순절 후에 시몬이 그 어떤 제자보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철저하게 살았는지를 보여 준다. 시몬은 우리의 냉담함과 영적인 불구됨을 꾸짖는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
맺는 말
1.자기의 개인적 야먕을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키는 훈련을 했다.
보인의 야망은 민족해방이었으나 진정한 해방은 복음화에 있으을 알았을 때, 그는 과감히 자신을 두렸다. 사람마다 자기의 소원이 있고 자기의 이사이 있고 자기 뜻이 있고 열심이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가?’라는 사실이다. 내 야망이 준미의 뜻 보다 커서는 하나님의 일을 할수가 없다.
2.나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과 조화
진리를 절대로 타협할수 없다. 그러나 정치, 경제, 문화의 소산은 다양하므로 이를 양심의 자유라하고, 다양할수록 발전한다. ‘모든 것이 다좋으나 저 사람이 있어서 싫다는 사람은 좀더 자라야 한다. 더 성숙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서로의 생각을 용납해 주는데 있다.
3.성숙한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던 훈련의 배경
H.S의 지배에 자신을 맏겼을때 시몬이 시몬되었고, 복음의 일선지도자가 됨에는 H.S의 도우심이 있었다.(행 1:6) RA. Torry는 “셩령을 얼마나 붙드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얼마나 붙느시느냐가 문제이다”라고 했다.
「주여! 오늘 성령으로 붙잡힘 받아 주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는 하루를 시작하지 않게 하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고는 말하지도 말게 하시고, 시작도 말게 하소서」
꼭 필요한 사람:작은 야고보
마태복음 10:2-4)
들어가는 말
새 성전을 건축하면서 건축의 책임을 맡고 있던 천사가 성전완공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약속을 했답니다. 건물이 올라가면서 사람들은 “누가 상을 받을까?”추측을 했습니다. 설계자일까? 아니면 청부업자인가? 조각가? 목수? 구리를 다루는 기공자일까? 건축일을 하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서 일했기 때문에 완성된 성전은 걸작품이 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남루한 옷을 입은 한 시골의 노인이 수상자로 발표되는 순간, 모두 깜짝 놀랐다. 도데체 이 여인이 무슨 큰일을 했다는 말인가? 이 여인은 石公이 대리석을 실어 나르기 위해 데리고 오는 황소에게 건초를 충실하게 먹였을 뿐이었다. 작은 일과 눈에 뜨이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작은 야고보는 말하고 행한 기록이 없다. 다만 12제자의 일원으로 선택을 받고 주님이 주신 사명을 훌륭히 성취하였다는 것만 남아있다. 학자들은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하여 한일이 없어서 잊혀진 제자라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많은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본 론
1.이름
주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는 야고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3명있다. 교회사에서 이 세사람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자주 혼동을 일으키게 한다.
1)12제자 가운데 중요한 제자
//요한의 형제로서“우뢰의 이들”이라는 별명을 가진 성격 급한 사람인데
헤롯대왕에 의하여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한 분이다.(행12:1)
2)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주님 부활하신 후, 율법에 대한 이해를 둘러 싸고 예루살렘에 총회가 소집되었을 때,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 발언하였다. 교리적이고도 명확한 발언을 한 후, 예루살렘의 지도자로 부각된 사람이다.(행1:14, 15:13)
그는 처음 부터 형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다.(요7:5)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고전15:4) 이때 결정적으로 주님은 단순히 육신적인 형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구세주로 오신 분이심을 신뢰하고 그의 삶이 변화를 일으키게 되었다.
3)12제자 중 9번째로 기록된 작은 야고보(마10:3, 막3:18, 눅6;15, 행1:13)
2.가족관계
1)아버지는 알패오였고 어머니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함께 있엇던 마리아이다. 그러나 또 다르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은 “작은 야고보”라 부르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세베대의 아들 아교보보다는 키가 작았기 때문에 불려졌던 것으로 봅니다. 우리 사회의 어느 회사 같은 데서 일을하다 보면 Miss김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흔히 “Miss김”이라고 부를 때, 여러 Miss김들이 한꺼번에 대답을 하게 되므로 “작은 Miss김, 또는 큰 Miss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별할 필요에 의해서 “작은 야고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발견한 사실은 이 야고보는 키가 작았던 사람이며, 이 사람의 어머니는 마리아이고, 아버지는 알패오였으며, 요세라는 사람과 형제였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에게는 마가복음 2장 14절을 보게 되면 또 한 명의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저에게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레위는 세관에서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레위를 다른 말로 말하면 마태로서 레위라는 이름을 마태의 다른 별명이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레위를 가리켜서 알패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마태가 야고보의 형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교 훈
1)열심당원이었다.
명단순서 도마(마태)->작은 야고보 ->다데오,시몬로 되어 있다.
민족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모름지기 그리스도인들은 다 민족에 대한 관심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그리스도인들이 애국심을 가질때 빠지기 쉬운 오류 가운데 하나는 애국심이 곧 신앙이라는 착각을 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민족주의 보다 더 크다. 이렇게 나라찾기 운동에 열심이던 사람들이 어느 날 민족이라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이상이 있다는 것을, 민족이라는 것보다 자기의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더 숭고하고 더 위대한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민족을 위한 열심에서 그들이 복음을 위한 열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고 참으로 귀하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사랑 선교회-김한식 선교사
*성서조선-김교신 정신을 요구되는 현장이 한국이다.
2)형제간
마태(세리)친로마-앞잡이
야고보(열심당)반로마-저격수
예수님은 우리 사회 가운데서 한 계급만 사랑하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이상이 높으셨읍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급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자기 제자로 삼고 싶어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인들을 죽이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뛰어다니며 로마인들을 죽이기 위한 음모와 저항 속에서 그들의 청춘을 불사르던 사람들도 주님은 사랑하셨으며, 그런가하면 로마에 아부하지 않고는 자기 목숨을 지킬 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관리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람도 주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가지지 못한 자도 사랑하십니다!
(왜? 현실 참여를 안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진정한 기독교는 가진 사람에게도 예수가 필요하고, 그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꼭같이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여당도 필요하고 야당도 필요한 것입니다.
3)겸손한 사람
이 제자에 대한 별명을 “작은 야고보, 그러나 꼭 필요했던 제자”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그는 항상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키가 작았을 뿐아니라 아주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아마도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항상 불평하는 무엇인가 말이라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하는 사람은 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기 좋아했으면 한 마디 쯤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타난 야고보의 기사 가운데는 말이 안 되는 소리 한 마디조차 없었읍니다. 참견도 안 하고 떠들지도 않고서 그냥 그 자리에 있기만 했던 사람, 이 사람은 참으로 겸손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숨어서 자기의 할 일을 열심히 했던 사람인 것 같은 인상을 우리에게 줍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바울의 친구 이야기)
아리스다고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이름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 제자는 바울과 함께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설교한 일도 없습니다. 기적을 행한 일도 없습니다. 또 위대한 어떤 가르침을 교육시킨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어려울 때는 항상 옆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갇혀 있었을 때에도 바울과 함께 있기를 원하여 자진해서 수감됩니다. 바울이 배에서 파선하고 어려웠을 때에 아리스다고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무인도인 섬에 도착해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을 때에도 그는 거기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수난의 현장에 아리스다고는 언제나 거기에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 중에 이 아리스다고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필요합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굉장한 일을 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거기에 꼭 있어주는 사람이 우리에게 얼마나 힘잉 되어 주는지요! 저는 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제가 설교 할 때에 그냥 앞에 앉아 있어 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는데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면 설교자는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에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주는 사람, 이 사람은 작지만 필요했던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정말 필요했던 제자였습니다.
4.순 교
“그는 한때 훌륭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일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금욕적인 자기 수양에 누구보다도 힘썼던 제자였다. 열 두 제자 중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한 제자가 이 작은 야고보였다.”
유세비우스는 이 사람에게 이런 별명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약대의 무릎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늘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 작은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이 떠들며 아우성치고 있었을 때에도 말없이 문자 그대로 작은 구석에 들어가서 무릎 끓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 작은 야고보가 아닌 야고보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예수님의 우편에 앉혀 달라고 선거 운동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말하기보다는 기도를 더 즐기고, 설치기보다는 자기가 있어야 할 조용한 자리에서 말없이 그 자리를 메꾸며 하나님 앞에 할 일을 다하고 있던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해서 유세비우스는 말을 계속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서 제일 예수님을 닮았던 제자가 작은 야고보였다”
그리고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해서 이런 재미나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는 제일 미남이었다” 화가들이 그림을 그릴 때에 이 작은 야고보를 제자들 중에서 제일 미남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을 보실 때 제일 미남을 뽑아내시면 그 사람이 틀림없이 작은 야고보입니다.
그는 미남이었고 화려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 그 주님이 넘 좋아서, 떠들면 주님의 영광이 가리울까 봐 조용조용히 평생을 주님 앞에서 숨어서 주를 섬겼던 이 아름다운 제자 작은 야고보는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나중에 시리아에 가서 전도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에 의해서 시리아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쳤는데도 야고보의 목숨이 쉽게 끊어지지 않자 그들은 톱을 가지고 작은 야고보를 켰습니다. 역사가 지나간 후일의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야고보를 묘사할 때 그의 인생을 상징하기 위해서 톱그림을 그려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묘사를 합니다.
그는 처음에 예루살렘에 묻혔다가 나중에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집니다. 그러다가 A>D. 572년에 로마로 그의 유해가 옮겨집니다. 로마에 이 사람이 묻혀 있던 그 교회를 처음에는 성 빌립과 성 야고보의 교회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나중에 교회 이름을 “거룩한 사도의 교회”(The Church of the Holy Aplstle)라고 바꾸었습니다.
*벼룩-자기 키보다 200배 점프
*파리-성냥개비(비례-사람-6m나무든다)
*1880년에 어느 이름없는 의학도가 학비 빌려고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여름에 너무 더워서
냉수 한 잔을 청하여 얻어 먹었다. 가난한 집에 우유를 가져다준 소녀를 눈여겨 보아 둔다. 20년후 병원의 외과주임은 어는 여인이 병원에 실려서 큰 수술을 받게되고 수술비 걱정을 하자 어느 분이 대신 지불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겨 두었다. 눈물이 가득고여 감격어린채 편지를 본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 귀가 적혀 있었다. “ 우유한잔으로 지불은 끝났습니다. Howad A. Kelly”
맺는 말
1.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
그것은 작은 사람이 되는 훈련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작은 것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시하셨습니까? 생각나십니까?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씀을! 그런데, 이 세계에서 사실은 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작으면서도 제일 큰 것을 좋아하는 민족은 어느 민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구의 휴마라는 유명한 사람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는 이야기를 해서 현대인들은 다시 작은 것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큰 것만 생각한 나머지 환상적이고 공상적인 것을 좇아다니기 시작합니다.
##이어녕(문교장관)씨의 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는 작은 것을 지향하여 성공한 일본인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작은 것이 귀한 일을 하면 더 귀하게 여겨진다.
2.성실성
*교회 어려운때 꼭 나오는 사람!!
*목사가 기도를 부탁하고 싶은 사람이 되라
작은 것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는 말처럼 작은 것에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큰 것도 알 수가 있습니다.(큼직한 것에만 관심있고, 작은것에 소홀하지 말라)
오늘날, 우리는 작은 것에 대해서 주님 앞에 얼마나 신임을 받고 있는지요? 이 작은 야고보가 남긴 교훈은, 그는 별로 요란스럽지 않은 인생을 살았고, 별로 선전할 만한 것이 없을 지 모르지만 그는 “작지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자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제자“였으며, 오늘의 우리들에게는 이런 제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려면 내가 어떤 사람인가라는 자기 인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허하게 자기위채에 서서 종의 직분을 수행하며, 설치지도 않았고, 참견하지도 않았으며, 그러나 조용히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서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던 아름다운 제자였습니다.
작지만 필요한 사람:작은 야고보
마태복음 14:12-24)
들어가는 말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인 유다라고 불리운 사도가 열 둘 가운데 두 사람 있다. 요한은 유다가 다락방에서 예수께 질문한 때를 기록하면서 배신자와 조심스럽게 구별하느라고 "가롯 유다가 아닌 유다가.."(요 14:22)라고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마도 유다라는 오명 때문에 마태와 마가는 유다의 다른 이름을 사용했을 것이다. 마태는 유다를 "레베오, 성을 다대오"(마10:3)라 불렀으며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막 3:18). 그러나 누가는 그를 그대로 유다라고 했다. (눅 6:16/행 1:13) 두 사도의 명단을 비교해 보면 세 가지 이름이 동일인임을 알게 된다.
유다의 가족관계는 알려진게 별로 없다. 초대 교부 가운데 제롬(Jerom)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으로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유명한 학자였다. 제롬은 다대오라는 제자에 관해서 "세 이름을 가진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본 론
1.생애
성경에는 열 두 제자의 명단이 언급되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이 사람이 등장한 예가 한 번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에게 별명을 붙이면서 "성경에 꼭 한 번만 나타난 제자"라는 표현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롯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말씀에서 "가룟유다가 아닌"이라는 부분을 잘못 읽어 "가룟유다가"라고 읽게되면 안됩니다. 가롯인이 아닌 유다는 "예수님이 메시야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우리에게는 나타내 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왜 안나타내시려 합니까"라는 질문을 예수님께 던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내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저와 함께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23,24절)
이 말씀에서 예수께 질문을 하는 모습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유다 다대오라는 인물이 출현하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1)성격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은 잘 아시겠지만, 어떤 학생들이 질문을 많이 합니까? 대체로 머리가 좋고, 공부에 대한 향학열이 있는 사람만이 질문을 하게되는 것이지, 아예 공부하는 것에 관심도 없는 사람은 질문을 안 합니다.
어떤 상황에 굉장한 관찰력이 있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라는 점을다데오의 질문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질문 내용은 "예수님께서 정말 메시야라는 사실을 제자들인 우리에게는 말씀해 주시고, 증거도 보여 주시고, 확신시켜 주셨으면서도 세상을 향해서는 주님 자신을 왜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주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빨리 세상에 알리셔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일종의 선교적관심을 지닌 질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는 놀라운 교훈과 진리를 자기만독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는선교적 차원으로서 포용력이 넓은 제자임을 알 수 있다.
2)별명
어떤 사람의 별명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은 내 습관이나 취미, 그리고 사람됨이나 특성을 알려 주는 중요한 단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유다의 별명에 담겨진 것은 다대오라는 말의 뜻은"사랑스러운"이라는 뜻이다. 다대오라는 말의 "찬양"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인 레비야스라는 말은 본래 히브리어의 명사[렛]에서 나온 것으로 "가슴"이라는 뜻입니다. 이 가슴은 어떤 깊은 마음이나, 심성을 가리킬 때 쓰여지는 단어였습니다. 혹은 "사랑스러운"그리고 "가슴"이라는 두 별명의 뜻에서 사랑과가슴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성격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또 사랑을 주며 그리고 깊이 있고 조용한 자신의 어떤 가슴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가 있었던 이미지를 가진 제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켜 줍니다.
이 사람의 인물됨을 초대의 어떤 교부가 기록한 책 가운데서 아주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만큼 신빙성 있는 그런 문서는 아니지만 좋은 단서로 채택될수는 있는 그 문서에 보면 단편적으로 열 두 제자의 인물 비교를 하는 장면에 이런기록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유다는 가롯유다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었던 제자이다.
또 가롯 유다가 불평을 하고 있었을 때에 이 사람은 찬양하고 있었다."
가롯유다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씻기기 위하여 값 비싼 옥합을 깨드렸을 때에그 기름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데 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라고 불평을합니다. 그러나 그 곁에서 유다 다대오는 찬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제자들이 떠들썩하면서 소리지르고 흥분할 때도 유다 다대오는 말없이 고요하게 한 구석에 있었던 제자입니다. 제자들이 분쟁을 일으키고 아우성을 칠 때도 어느 편에도 감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던 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입니다. 모든 제자들이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었을때 조용히 한 옆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었던 제자!
유다라는 말의 뜻은 "찬양"입니다. 그러나 가롯유다가 좋은 이름을 가졌으면서도이름 값을 하지 못했고, 다대오 유다는 정말 이름 값을 했던 제자입니다. 문서는 모든 제자들의 사랑과 인정을 가장 많이 받았던 그러면서도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하고 언제나 조용히 자기의 할 일을 하던 제자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인물 연구를 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요한이 [적극적인 사랑의 사도]라면, 이 유다는 [조용한 사랑의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유다는 떠들썩하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면서 제자들을 화목하게 만들었고, 주님을 찬양하며 불평과 원망대신에 자기의 할 일을 꼬박꼬박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호칭 문화가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의사인 누가]를 부를 때 그이름 앞에 애칭을 붙여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식으로 제자의 이름을 그냥 부르지 않고 다대오 유다, 사랑받고 있었던 유다로 불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유다, 사랑하는 유다여"라고 문서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사람이 사랑을 받았다고 해서 앞에 나와서 설친 사실도 없고, 여진히 조용하게 자기분수를 지키면서, 그러나 자기의 몫을 다하고 있었던 제자였습니다. 이름이 없었지만 고요하고 우리 모두에게 애정을 받을 수 있었던 참 좋으느제자가 바로 유다 다대오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추리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사람들은 벽을 쌓으려고는 하지만,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벽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래서 벽 뒤에 숨고 상대을 벽 뒤에 물아 붙이려는 그런 세대의 풍조는 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는 사람이 오늘 우리의 주위에는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제자는 조용하지만 열 두제자 가운데서 얼마나 필요한 인물이었습니다.
2.순교
시리아로,아라비아로,페르시아로 찾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특별히 가장 많은 활동을 한 중심지는 아르메니아입니다. 그 도시에서 그는 정말 놀랍고 눈부실만한 선교 활동을 한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둘이서 동역하면서 A.D. 301년에 벌써 그 나라가 기독교화될 만큼 복음으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는 다시 해외 선교를 나갔다가, 시리아라는 곳에서 칼을 맞아 마지막 순교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3.교훈
다데오에게는 특기가 없습니다. 어떤 굉장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도 성경에는 없습니다. 또 다른 제자들을 인도할 만한 지도자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닙니다. 또다른 제자를 전도하는 일 가운데 앞장을 섰던 제자도 아닙니다. 많은 제자들에게서 주의를 끌만한 두드러진 인물이나 개성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사람을 열 두제자중에 한제자로 선택하셨을까?
예수님은 인격의 질적인 특성때문에 유다 다대오라는 제자가 주님의 제자들 가운데도 필요하다고 주님이 판단하셨기 때문에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데오의 삶을보면서 긍정적으로 사는 훈련을 배웁시다. 오늘날 주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는 신앙을 떠나서 자기 신념을 믿어야 한다는 식의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기독교 신앙이 수용하기가 곤란하고 난처한 이론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을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삶을 긍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밝은 면을 바라보는 습관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두운 곳을 쳐다보게 되면 불평할 것은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불평할 어떤 일들이 우리의 생활 중 없는 때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유다 다대오는 늘 밝은 면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이 찬양과 감사와 그리고 조용한 섬김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밝은 면만을 바라보는 훈련! 성도들의 교제에 있어서도 내가 상대방의 밝은 면을 바라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다. 똑같은 양의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은 물이 이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은 컵의 물이절반 이상이나 찼다고 감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이 마른 사람에게 물은 똑같은 물이지만, 양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같은 양의 물이지만, 두 사람에게 전혀 다른 반응과 자세를 가져오게 만듭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입니다. 삶 그 자체의 밝은 면만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지 안ㄹ 수가 없습니다.
2)삶의 동기에 있어 이기적인 욕망보다도 이타적 사명이 얼마 만큼 내 삶의 동기가 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 내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이기적인 욕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불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얻고 내가 인정을 받는 그런 것이 더 커다란 동기가 아니라, 이타적 사명인 남을 유익하게 만들며 다른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이것이 더 커다란 삶의 동기가 될 수 있다면, 그만큼우리는 삶을 건강하게 긍정하면서 살려는 자세가 확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3)우리가 인생을 긍적적으로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찬양과 감사를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가장 작은 것에도,가장 사소한 것에도 늘 주님 앞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찬양합니다"라는 말을 하며, 그래서 주님의말씀 그대로 "범사에 감사하는" 훈련을 생활화하는 일입니다. 금년 한해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더 많이 주님을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더 많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항상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승리로운 삶의 이 두가지 요소는 성경에 거듭 강조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양과 감사입니다. 내 마음속에 얼마 만큼 찬양이 넘치고있는가, 그리고 내 마음속에 얼마만큼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이웃들을 향한 감사가있는가라는 것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한 두번, 또는 이따금씩은 찬양하고 감사할 수 있지만, 어떻게 늘 찬양하고 감사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 입니다. 그러나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기록하면서 항상 감사할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찬송하라는 19절의 말씀은 "계속하여 찬송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찬양하며 계속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승리로운 삶의 중요한 비밀로서 에베소서 5:18의 말씀을 그 대답으로 드리려고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이 말씀은 성령의 충만한 상태를 술 취함과 비교하고 있습니다. 술취해서 생기는긍정적인 현상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술 취하면 기분이 좋게 되고 또 노래하는현상이 나타납니다. 술 취하면 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성령에 취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을 때, 계속적으로 갖게되는 삶이 찬양과 감사를 강조하는 삶입니다. 계속 노래하고 기분이 좋으려면 술취한 사람들은 계속 마셔야 합니다..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에 충만하면 비로소 항상 찬양하고 감사하는 삶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계속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참으로 저를 지배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열망 가운데서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 바치고 정말 주 앞에 순종하기를 원할 때, 성령께서는 내 자신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욱 나를 지배하시기를 원하고 계시는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고 내 의지를 주님 앞에 드리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유다 다대오의 삶이 가능할수가 있습니다.
맺는 말
결론적으로 이 제자는
"이름은 없었으나 이름 값을 하고 간 제자,
이름 없이 빛도없이 주님을 섬긴 제자,
유명하지 않았으나 필요했던 제자"
이러한 이유로 이 제자를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 중 한 몫으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나는 베드로같이 될 수 없습니다.나는 하루에 삼천명을 회개시킬 수는 없습니다.그러나 얼마든지 우리 가운데 유다 다대오는 될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록 유명한 사람이 안 되어도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셨다면 내 이름 값을 다하여 조용히 이름없이 모든 것을 긍정하고 이 삶을 기쁨과 감사와 찬양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정말 필요한 사람은 어쩌면 더 많은 베드로보다도 더 많은 유다다대오일지도 모릅니다. 한국 문화의 가장 심각한 약점 중의 하나는 졸병이 없는문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 목사 한 사람이 우리 문화를 가리켜서 "졸병이 없는 문화"라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어린 아이에게 "너 커서 뭐가 될래?"라고 물어보면 거의 전부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다 대통령이 되면 졸병은 누가 합니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행복한 졸병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대통령의 곁에서 그를 보필하면서 자신의 위치를 지켜 가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의 가장 커다란 비극 중의 하나는 부목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부목사가 없겠습니까? 사실 부목사님은 상당히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목사를 천직으로 생가하는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나는 머리가 될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지도자를 돕는것이 내 직분입니다. 여러가지로 내 천성이나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를 생각할때 나는 이 자리에서 이 위치를 지키면서 일하다가 죽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래서 겸손히 그 위치에 서서 평생을 그일로늙어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라는 말입니다.
미국 교회에 보면 어떤 사람은 평생 부목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직분으로평생을 늙어 가면서도 그냥 기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부목사들은 그 직분을 원목이 되기전의 실습과정 정도로 여기는 것입니다. 머리 역할을하려고만 하면 누가 손의 일을 하며, 누가 발의 역할을 하고 누가 심장의 역할을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이 모든 직분이 다 필요한 것입니다. 머리는 하나만 있으면족합니다. 저는 이 문화 비평가의 말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 교인들에게 필요한말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졸병이 없는 문화,,발이나 팔의 역할을 안맡으려고 하는 문화" 이것이 한국 사회의 비극이며 교회의 비극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베드로가 필요하지만 더 많은 유다 다대오가 필요합니다. 이름 없이빛도 없이 주를 섬기는 더 많은 제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한편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표면에서 일할 사람은 하고, 숨어서 일할 사람은 숨어서 일해야 하며 저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주의 이름만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나라만 확장될 수있다면 그냥 기브고 그리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도를 구하는 우리에게 유다 다대오와 같은 아름다운 주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시도록 기도하십시다.
구원 받지 못한 제자:가롯 유다
마태복음 27:3-10
들어가는 말
1.유다에 얼킨 그림이야기
1)화가 엘 그레코(El Greco)는 교회로부터 사도 개개인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유다는 비열한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따로 그리지 않았다. 배신 직전의 순간을 묘사하는 「겟세마네의 그리스도」라는 그림ㄴ에서 오른쪽 구석에 간신히 보일만큼 그려 넣었다.
2)한 화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하여 시실리 성당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을 그리기 위한 모델로 아주 적격인 순진무구한 열 두살 짜리 아이를 발견하였다. 몇년 후 그 화가는 고난주간 까지 유다를 제외하고 모든 인물들을 완성했다. 어느 날 오후 화가가 앉아 있는 술집에 만취된 얼굴로 비틀거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화가는 아직 그리지 않은 유다의 모델로 이 알콜 중독자를 선태가히기로 작정했다. 화가는 그 사람을 성당으로 데리고 가서 비어 있는 벽을 가리키며 유다의 포즈를 취하여 달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부랑자는 흐느껴 울면서 “당신은 나를 기억 하지 못합니까?” 하며 버럭 화를 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 그림을 가리키면서 “오래 전에 나는 저 아이의 모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유다에 대한 표현들
1)웝스터 新 學生辭典//“배신자, 특히 우정을 가장하여 배신하는 사람”
2)유다색갈//붉은 머리카락. 유다나무//유다가 목 매여 자살한 나무
3)유다염소//도살장으로 가는 가축을 앞에서 인도하는 동물
4)유다의 키스//비열하게 남의 등을 찌르는 가면을 쓴 친절한 행위
5)유다사제//예수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세속적인 이단자
6)유다 구멍//감방 안에서는 볼 수 없고 밖에서만 들여다 볼 수있는 구멍
3.유다의 저주 받은 이름
저주하는 뜻에서 사도들의 이름 중에 맨 끝 자리에 있다. (마10:4/막 3:19) 주님은 왜 이런 인물을 택하셨을까? 처음부터 배신의 위험을 알고 계셨을까? 운명적으로 배신자로 태어난 사람인가, 배신행위를 하지 않을수 없었던가?
본 론
Ⅰ.타락되기 이전의 유다
1).존경받는 사람
귀족적인 요소를 모두 갖추고 “찬양받는다”는 뜻을 지닌 자랑스런 이름을 가진 유다의 출발을 훌륭했다. 헤브론 남쪽 조그만 성읍 유다 이쉬 케리옷(Judas Ish Kerio -th) 출신으로 갈릴리 출신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제자가 되었다. 유대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지 못하였기 때문에 불성실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2).잠재능력이 있었다.
주님이 택하셨을 때에는 배신자가 아니었다. 암살할 의도를 가지고 기회만 노리는 흉악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옆에 앉아 있는 사람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주님은 12제자를 택하시기 전날 밤, 철야기도를 하시고 신중히 사도들을 선택하셨다.(눈 6:12-12) 유다는 높은 이상을 가졌으며 약속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적임자였다.
3). 특권을 누렸다.
다른 사도들 처럼 유다도 예수님을 다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다니면서 이야기도 하고 밤 하늘 아래서 함께 앉아 떡을 떼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유다는 산상수훈을 들었으며, 소경이 다시 보게 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다. 폭풍을 잠재우며 귀신을 쫓고 성전에서 강도들을 몰아내고 어린 아이를 안고 축복해 줄 때 유다는 예수님의 앞에 있었다. 유다는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전도하러 다니기도 했으며 귀신을 내쫓기도 하였다.(눅 10:17-20)
4).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회계를 보는 직책을 가졌다.
유다를 열 두 제자의 회계로 택한 것은 동료들이 그를 상당히 신임하였음을 말해 준다(요 12:6). 마태가 세리였기 때문에 돈을 다루는 데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다의 재정적인 전문지식도 다른 사도들보다 돋보였다. 또 그는 믿을 수 있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서 동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들 전원의 동의를 받아서 그는 돈을 가방에 챙기고 지불하는 책임을 맡았다. 제자로 출발할 때에 그는 신중하고 정직했으며 유능하고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2.타락하는 유다
1).유다의 타락의 실례
유다가 산헤드린에 돌아온 것은 예수님의 육신을 가혹하게 처형하기 전에 예수님의 무죄함을 탄원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유다가 산헤드린에 돌아 온 것은 예수님의 무죄함보다는 자신의 조에 더욱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유다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어떻게 한 가지 사건 속에 뒤섞일 수 있을까에 대한 표본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말씀하셨다. 유다의 배신은 인간을 대속하기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의 하나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또 우다가 행한 일은 너무도 극악하기 때문에 유다는 차라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더 낫다고 라르치셨다. 그러나 배신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유다에게는 배신자의 길을 스스로 택한 책임이 있다. 어떤 사람이든 종교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 넘기지 않을 수 없었는데 바로 이 어떤 사람이 되글 선택한 사람이 유다이다. 유다는 스스로 운명을 결정했다.
2)타락의 단계
만일 유다가 자신이 저지른 무서운 죄에 대한 책임을 알았다면 그는 왜 그렇게 악하게 타락했을까? 유다를 타락하게 만든 요인은 무엇이었슬까?
(1)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환상에서 점차 깨어났다.
유다의 사악한 행동은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라 몇 단계를 거쳤다. 예수를 따르겠다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 유다는 자신이 배신자가 되리라고는 꿈엗 생각하지 않았다. 서서히 악의 길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예수께서는 뮤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여러 차례 경고하신 일이 있으셨다. 유다는 세속의 왕국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메시야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고 통치할 것을 기대했다. 유다는 새로운 왕국에서 영광과 권세를 누릴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예수님의 사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너무도 거리가 먼 것임을 깨달았다. 왼편 빰도 갖다대라는 교훈과 내일을 염려하지 말하는 충고, 이 땅에서 재물을 쌓아 두지 말라는 충고와 적을 사랑하라는 충고 등은 유다의 생리와는 상반되는 말씀이었다. 오천 명을 먹인 후 예수께서는 가까운 제자가 아니면 모두 자기로부터 떠나라도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요 6:68)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답하였다. 이 때 예수께서는 유다에게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ㅑ 너희 가룟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고 직접 경고를 하셨다. 요한은 이에 덧붙여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킴이라 저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 6:70-71)고 썼다.
(2)유다는 탐욕스러웠다.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께 바르는 것을 본 유다는 마리아의 행동에 대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어찌하여 주지 않느냐?고 비난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오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고 유다에 대하여 고발했다. 유다의 말에 예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여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요12:7)고 말씀 하셨다. 인간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유다의 그 동기는 악이며 마리아의 동기는 숭고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탐욕은 죄로 인도하기 때문에 십계명의 “탐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이웃의 명예를 탐하면 거짓이나 중상을 하게 된다. 이웃의 재산을 탐하면 도둑질을 하게 된다. 유다의 탐욕은 주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를 유다는 여러 번 들었다. 우리가 신랄하게 유다를 질책하기에 앞서 시간과 재능과 재주와 기회, 혹은 돈을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원숭이의 욕심)
예수님의 진실한 마음에 대한 유다의 환멸이 이 늘어나고 탐욕이 커지면서 배신의 무대는 설치되었다. 주님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절박한 재난으로부터 자신을 구할 방법을 유다는 찾았다. 배신 행위는 너무도 사악한 일이기 때문에 누가는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눅22:3)고 했다. 요한은 이 끔찍한 짓을 설명하기 위하여 배신 행위에 두 번 사단이 들어갔으며(요 13:2,27) 유다는 사단에게 문을 활짝 열었다고 말하였다.
3).유다에 대한 주님의 경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첫번째 경고를 하셨다. 예수님의 눈이 유다의 발에서부터 굳어진 얼굴로 더듬어 올라갈 때 유다가 ㅈㅎ금은 회개하는 낌새를 느끼셨다. 아무도 유다가 회개하는 것을 알아차라지 못했을 때 분명히 유다는 긴장하고 불안한 가운데 앉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더욱 강퍅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예수님의 두번째 경고는 유월절 식사 때였다. 사복음서는 제자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팔 것이라고 선언하심으로 제자들에게 폭탄이 떨어졌다고 기록한다. 충격을 받아 깜짝 놀라 조용해진 제자들은 제각기 ”주여, 내니이까?“라고 여쭈었다. 유다를 가리키면서 ”주여, 이 사람입니까?“하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러한 의심 속에서 유다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의 무서운 반사적인 행동 때문에 유다가 스스로 자신의 흉악한 죄를 깨닫기를 예수께서는 원하셨다. 그런데 유다는 위선자답게 ”랍니여 내니이까?라고 물으니 예수께서는 “네가 말하였도다”라고 대답하셨다(마 26:25). 예수님을 노리는 유다의 시한폭탄의 시계소리는 다른 제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세번째 경고는 베드로가 요한에게 누가 배신자냐고 손짓을 할 때였다. 요한은 예수님의 옆 자리에 앉았으며 유다는 그 맞은 편의 옆에 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3:23-26). 제자들은 귀한 사람에게 첫번째로 찍어주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찍어주는 의미를 아무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귀한 대우를 받으면서 유다의 얼어 붙었던 양심이 녹았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호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두려움과 회개의 기미를 함께 나타내 보이면서 유다는 마귀의 충동을 받아 그 즉시로 자리를 떴다. 유다가 제사장들과의 약속이행을 결심한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 13:27)고 말씀하셨다. 밖은 칠흑 같은 밤이었으므로 유다의 마음도 깊은 절망의 늪을 헤메고 있었을 것이다.
4).유다의 입맞춤
유다는 제자들이 은밀하게 기도하는 곳을 알고 있었다. 그 곳은 유다도 예수님과 함께 자주 갔던 곳이다(요 18:2). 유다는 제사장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은전 30냥을 받으려고 갔다.
그 후, 겟세마네에서 고뇌의 기도를 하고 자고 있는 제자들을 깨우셨다.(마26:46)
제자들이 선생을 만나면 어깨에 손을 얹고 입을 맞추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다. 이것은 뚯이 통한다는 신호였다. 원래 입맞춤은 마음에서 우러난 친절한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입맞춤으로 배신하는 것은 가까운 친구의 찻잔에 독약을 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5.유다의 비극적 종말
유다도 베드로처럼 용서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가 용서를 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회개했으나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 유다는 양심의 가책은 느꼈으나 회개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예수께서 체포된 유다는 그 밤을 캄캄한 곳에서 숨어 지냈다. 이튼날 아침 예수께 선고가 내려진 사실을 알고 유다의 마음은 슬펐다. 은전 30냥이 그의 손에서 화근거리기 시작했다.
유다가 발걸음을 재촉하여 회당으로 돌아와 안으로 들어가서 비탄에 잠겨 가지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게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조롱했다.
예수님과 교제하고 가르침을 받아 감동했던 죄인 유다는 죄책감음 느끼지 않을 수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온전한 회개가 아니었다.
유다는 큰 나무가 서 있는 근처의 벼랑을 기억하고 있었다. 나뭇가지 너머로 뱟줄을 던져 단단하게 잡아매고 밧줄의 한 쪽 끝은 목에 감아 매듭을 지은 후 낭떠러지로 껑충 뛰었다. 다락방에서 베드로가 말한 유다의 죽음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행 1:18)고 설명하고 있다.
유다의 상징은 은전을 떨어뜨리는 지갑과 교수형 집행인이 갖는 올가미이다. 그의 상징은 완전히 비어 있어서 선을 행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함을 가리키기도 한다. 유다의 비극에서 얻는 중요한 한 가지 교훈은 인간의 타락과 인간의 더러움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싹이트고 자라나기 때문에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숨겨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죄는 공개되기 전에 오랫동안 보이지 않고 가리워질수 있다.
3.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유다의 삶은 우리에게 얼마나 엄숙한 교훈을 남깁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신앙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각자가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1).“가면을 벗고 자신에게 솔직하라”
가룟 유다는 가면을 벗지 못하고 이중인격적인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 노릇을 하다가 그만 죄악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속으로는 도적질하고 훔치는 일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가장 정의의 투사인양 행동하는 그런 게임을 하지 마시고 우리는 가면을 벗으십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십시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발견하십시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2).“자기의 의를 버리라”
본문에서 우리는 가룟 유다가 퍽이나 잘난 척을 하던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면 얼마나 좋겠소”라고 고함을 치는 이 가룟 유다의 모습에서 얼마나 자기의 의를,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참 신앙을 소유하기 제일 어려운 사람,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자기의 의를 고집하는 사람, 굉자한 자기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구원받기 가장 어려운 사람입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십니다. 내 의를 버리십시다. 내가 주장할 의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나의 구주요, 주님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의 의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만을 나의 주님으로 믿을 때,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중생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가 다시 태어날 때,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중생의 씻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새롭게 하심입니다.
결 론
당신과 나는 어떠한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책임을 알고 있다. 우리를 변하게 해주십사고 그리스도께 간구할까? 혹은 직접 그리스도를 찾아 “주여, 주여”하며 부르짖을까?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길을 우리가 성공적으로 행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가룟 유다와 함께 기억되도록 할 것이냐 또는 우리만이 기억되도록 할 것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유다의 일생이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을 때 열 한명의 제자들이 남았다. 맛디아가 유다의 자리를 이어 받았지만 어느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을 열 두번째의 사도로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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