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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트레킹 <26일간>
<2002. 10. 26 ~ 11. 20>
10월 26일 (토)
찬 공기가 코를 자극하는 새벽(05:00)에 집을 나와 일행(조영순)을 만나
벗(강진호)이 수고해주는 차에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니 6시가 채 안되었다.
휘 돌아보니 한명학 형이 벌써 나와 손을 흔든다. 잠시 후 대장 조진수씨와 조명상 인형이 도착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대한항공 603편으로 홍콩을 향했다.
네팔까지는 직항로가 없는 관계로 불편하지만 홍콩이나 방콕 등 중간 기착지를 거쳐야 한다. 홍콩에(현지시간 11시30분경) 도착한 일행은 공항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이곳저곳 면세점 구경을 하며 네팔의 셸파등에게 줄 담배와 술을 구입했다. 지루하게 기다리다 17시경 떠나는 네팔행 비행기(네팔로얄 항공)에 탑승 약5시간이 경과한후 현지시간 저녁7시40분경 도착. 공항에서 화물을 카터에 옮겨 싣는 도중 팁을 얻기 위해 무질서하게 화물을 손대는 포터들의 실수로 셀파들에세 줄 술(양주2.5L) 한 병이 떨어져 깨졌다. 기분이 상했지만 그들은 손을 저으며 자기는 아니라고 피해버리니 말도 안통하고 팁이나 얻자고 한 그들에게 방법이 없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공항을 빠져나오니 듣던 대로 공기가 아주 나쁘다 냄새가 역하고 안개가 낀 것 같이 흐리다. 해발 1300m로 분지형 도시라 공장이 없는 도시인데도 매연등 각종 오염공기가 발산이 잘 안되기 때문이다.
공항 규모역시 옛날 제주공항 정도의 수준이다. 서울아리랑 식당에서 마중 나와 화환과 천을 목에 걸어주며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사진작가인 조진수 대장은 이번이 9번째 네팔산행이고 조명상 인형 역시 4번째이니 서로가 반가울 수밖에 없고, 얼마 전 서울에서도 만났다고 하니 서로 간에 대화도 훈훈하다. 그곳에서 우선 숙소(안나프르나호텔)에다 여장을 풀고 식당(서울아리랑)으로 가서 저녁을 나누며 그곳에서 담갔다는 동충하초를 한 잔한 뒤 내일부터의 일정을 상의했다.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후 발등을 보니 피가 흐른다. 다친 적이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지혈을 해도 곧 지혈이 안 된다. 알고 보니 식당에 갈 때 샌들을 신고 갔는데 식당에서 거머리가 물어뜯은 것이다.
조대장에게 이야기했더니 이곳에는 거머리가 많단다.(이 상처는 20여일이 지나서야 흔적이 없어졌지만 후에 조영순씨도 물렸는데 어떻게 된 건지 사타구니까지 올라와 물렸다한다)
서울과는 3시간15분 시차가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하루가 저물어 갔다.
10월 27일 (일)
이곳은 일교차가 심해 자다가 몇 번 추위를 느껴 조금 두터운 옷을 입고 잠들었다. 새벽 5시반경 일어나 창밖을 보니 어슴프레하다. 숙소의 위치가 시가지 중심 같은데 조용한 게 서울과 비교가 된다.
언제인가 몽골의 울란바르도에서도 이런 느낌이 들었는데 베트남의 호치민시와도 대조적인 것 같다.어쨌든 나는 조용한 아침 그 자체가 좋다.
식사 후(호텔 식사라는 게 빵 조각뿐이지만) 일행은 버스로 네팔의 두 번째 도시라는 포키라로 향했다.
이 도시는 네팔에서 인도로 가는 국도(고속도로라 하는데 2차선 도로임)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가는데 가다가 트리슐리 강에서 레프팅을 했다. 히라우리골린이라는 곳에서 시작하여(약 3시간가량) 우리골린 이라는 곳에서 마치고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러 점심을 한 뒤 다시 출발. 오우 5시가 넘어 포카라에 도착 사랑산아리랑이라는 한인식당에서 저녁을 한 뒤 맘스가든이라는 곳에서 여장을 풀었다.
얼핏 보아서 포카라도 우리나라 조그마한 지방도시의 한곳처럼 보인다.
숙소역시 서울의 장급 여관보다 시설이 못한 것 같다.내일은 이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좀슨이라는 곳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새벽 5시에 일어나 출발할 예정이다.
10월 28일 (월)
자다가 몇 번 깨어 소변을 보고나니 잠을 설쳤다.
새벽 4시반경 일어나 밖을 보니 컴컴하다. 서울 같으면 8시가 다되어가니 시차 때문에 잠을 설친 것 같다.
이른 아침 포카라 공항에 나가 6시30분발 좀슨행 경비행기(19인승)에 가이드,
셸파 등과 같이 탑승. 약 30분 비행 후 좀슨에 도착했는데 공항이 산속이라 매우 협소하다. 시골학교 운동장 서너배쯤 될 것 같다. 활주로 역시 한 라인으로 짧아 큰비행기는 이착륙이 불가능할 것 같다. 그나마도 오전에만 운항하지 11시 넘어서는 바람이 강해 이착륙이 어려워 운항을 하지 못한다고 한다. 근처 롯지에 들어가 미리 대기하고 있는 일행들과 상면,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아침식사를 하고 드디어 트레킹에 나섰다.
우리일행 5명을 제외하고도 가이드, 셀파, 요리사, 포터등 20여명이나 되니 든든하다. 짐을 나누어 멘 뒤 시가지를 빠져나가는데 군부대도 있고 롯지도 많다. 이곳에서 무스탕, 안나프르나, 닐기리, 틸리쵸, 다울라기리 등을 간다고 하는데 해발 2800정도 된다하니 지금 내가 백두산 높이정도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원 산행지는 다울라기리의 프렌치패스(5360)인데 고소적응을 위해 틸리쵸레이크라는 곳을 택해 트레킹 하는데 이번 트레킹의 리더 조진수 대장의 말에 의하면 이 트레킹에서 실패하면 다울라기리 산행은 어렵다 한다. 그는 이번 네팔트레킹이 9번째에서인지 베테랑이다. 트레킹 코스도 본인이 잡은 것이어서 그런지
자신이 있어 보인다. 동행하는 조명상씨 역시 4번째 트레킹이라 여유가 있어 보이였다.
좀슨. 공항 롯지를 출발한지 얼마 안 되는 곳에 롯지가 있는데 그곳에서 점심을 해먹은 뒤 출발하였는데 점심시간이 이른데도 다음 휴식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미리 식사를 하는 거다. 요리사와 키친보이들의 요리솜씨가 그런 대로 괜찮다. 식전에 미리 차를 가져오고 식후에는 누룽지 끓여 온 다음 후식으로 과일까지 준비해오는데 앞으로 식사에는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식후 틸라쵸를 향하다 16:00시경 첫 야영지에 도착했고, 이것이 네팔에서의 첫 산속 야영인 셈이다.
야영지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닐기리 산이고 그 왼쪽으로는 틸라쵸가 보이는데
7000이 넘는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데 기분 같아서는 정상까지 오를 수 있을 것도 같다.
중턱 넘어 눈이 쌓여있고 빙벽이 보이는 게 약간 겁도 나지만…….
야영지는 지리산 세석평전 비슷해 보이는데 군데군데 관목(낮은 나무)들이 있고 색깔이 붉은 것, 푸른 것도 있어 볼만하다. 이곳의 높이가 약3600 정도라 하는데 아직 고소증 염려는 안 해도 될 것 같다. 밤에는 일행들이(셀파,포터) 나무를 주워와 불을 지펴 추위를 견디며 잠이 들었다.
10월 29일 (화)
지난밤 잠들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자다보니 고소증이 온 것 같아 잠에서 깼다.
언제인가 말레이시아 키나바루산을 갔을 때 괜찮아 아직은 염려 없으려니 했는데 잠깐 올라갔다 오는 것과는 다른 것 같다. 대장 말에 의하면 낮에는 견딜만한데 밤엔 힘들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다.
밤새껏 고소증으로 고생하는 벗과 같이 지내다 보니 더더욱 일찍 일어난 것 같다. 시계를 보니 3시가 조금 지났다. 서울 같으면 6시가 훨씬 지났을 터이니 일어났겠지만 깊은 산이라 해는 일찍 지고 어둠이 길 수밖에 없지만 일찍 잠든 탓도 있으리라. 소변을 보고 옆 벗에게 상태를 물의니 견딜만하다고 한다. 남의 일이 아니다 싶은 게 걱정된다. 옆 텐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조대장이 안부를 묻는다.
낮에는 따뜻했는데 밤에는 춥다.
우리나라 1월의 추위와 비슷한 것 같다.
허연 달빛아래 닐기리 산이 보이는데 하얗고 거대하며 아름답다. 춥지만 않으면 더 많이 구경하며 이국에서의 새벽을 즐기겠는데, 춥고 떨리니 다시 침낭 속으로 파고 들 수밖에, 곁에 야영하는 가이드 셸파, 포터 등의 텐트를 보면 안쓰럽다. 침낭도 없이 모포 비슷한 것 한 장으로 밤을 새우려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안쓰럽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하다 깜박 잠이 들었다 깨보니 밖이 훤하다.
꿀차를 가져온 뒤 식사를 가져왔는데 갓 김치, 배추김치, 무김치, 샐러드 등
-일부는 우리가 서울에서 준비해왔지만- 요란하다. 식후에는 누룽지가 나오고 디저트로 사과까지 나오니 괜찮은 아침이다.
9시경 출발하여 12시경 중간 기착지에 와서 얼음 같이 찬 계곡수에 발을 담가보니 시원함이 뼛속까지 스미는 것 같다.
요리사들이 식사 준비하는 동안 셸파들이 근처 풀밭을 열심히 뒤지며 손으로 풀을 비벼댄다. 그리곤 그 풀 뭍은 손바닥을 긁어모은다. 이상하다 싶어 뭐하는 거냐. 물으니 웃으며 마리화나라 한다. 마리화나 말로만 듣던 환각제 아닌가. 그걸 모아서 담배에 묻히거나 말려서 피우면 된다는 것이다.
한 녀석이 나에게 피우겠냐고 권하기에 나는 담배도 안 피운다고 했더니 웃으며 가버린다. 고단하고 무료하고 그래서 담배도 일찍 배운 게 아닐까....... 20안팎의 나이에 처자식이 있다니…….
오늘 야영지는 일찍 도착했다. 2시 조금 지나서 도착했으니 말이다. 더 가서 야영해야 되겠지만 물 있는 곳 근처에 자리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란다. 물이 멀리 있으면 취사에 곤란을 받는다는 거다. 시간은 많고 햇살은 따뜻하게 비치고 가지고온 김병종의 화첩기행을 뒤적이다 조선시대 여류시인이자 기생인 이매창에 이른다. 서른일곱에 생을 마감한 부안 출신 기생인 그녀는 유희경을 그토록 좋아했고 한때는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도 교우를 나누었다는데 내가 가 보았을 때는 모두 허술하고 도로를 개설하느라 진흙탕 밭 가운데 있는 매창뜸은 찾기도 힘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 이화우 흩날릴 때 울면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서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
떠나버린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일까?
오늘은 시간이 참 많다.
책도 보고, 안마도 받고, 한가한 오후의 한때다.
10월 30일 (수)
자다가 깨어 화장실 다녀온 뒤 침낭 속에서 깜박 잠들었다가 깨보니 4시반이다. 몸을 뒤척여 보니, 침낭커버가 젖어 있다. 밤새 기온차가 그리된 것 같다. 고소증 때문에 깊은 잠이 안 오는 것도 탈이다. 같이 자는 벗은 끙끙 앓으면서도 곧잘 잔다. 여기가 해발 4000정도라 했으니 아무래도 힘들긴 하다.
오늘 트레이닝 트레킹코스로는 가장 높은 곳을 가고 내일은 하산한단다. 원래는 틸리쵸레이크까지 가려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 4600정도의 봉우리에서 되돌아 하산하기로 했다.
아침식사후 9시경 출발하여 산을 오르는데 두통이 나기 시작한다. 속도 약간 메스껍다. 아마 나에게도 고소증이 시작된 게 틀림없다. 혹시나 하고 가지고온 폰탈 2알을 먹었지만 효과가 없다.
입산 후 처음 파리를 봤다. 이 높은 곳에도 파리가 있을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4000이 넘는 곳에도 파리가 있다. 야크분뇨가 있고 버팔로 분뇨도 있지만 썩지 않고 그냥 마르던데 웬 파리일까.
시간이 흐를수록 두통과 호흡곤란이 심해진다. 허지만 견디고 가야하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4600 정도의 고지에 도착했다.
오늘의 산행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셈인데 두통과 호흡곤란으로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점심을 먹고 쉬는데 까마귀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문득 이 높은 곳에서 까마귀는 뭘 먹고살까 궁금해졌다.
셀파들이 쳐놓은 텐트에 들어가 쉬는데 두통이 점점 심해진다. 내가 조금 빨리 왔는데 오히려 몸에 무리가 됐다. 어차피 갈 길인데 쉬지 말고 가자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이었는데…….
양지쪽을 찾아 비스듬히 누워 쉬는데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셀파 등 일행들은 오늘의 산행이 끝났음이 좋은지 떠들어대며 담배도 피운다.
풀한 포기 없는 이 땅. 흙과 자갈 그리고 바위 계곡 아래로 흐르는 빙하수 그 위를 내리쬐는 태양, 이것들이 해발 4600이 넘는 곳의 전부다.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이는 37살이고, 제일 어린 사람은 15살 그 아이는 볼수록 안쓰럽다. 헌데 그건 내 생각일까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다. 앤도로지(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일할 수 있다는 게 즐거운 것이라 하니 좋은 일이다.
사람이 산다는 게 어떤 점에선 상대적이니까 그럴 수 있으리라 40kg이 넘는 짐을 지고도 웃으며 잘 견디어 오르니 말이다.
나도 기실 호흡장애와 두통으로 힘들긴 하지만 그 어떤 문명(?)과도 격리되어 하늘과 땅만을 본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싫지는 않다.
시간, 장소, 생각, 어느 것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인이란 것이 이런 게 아닐까?
아침에 출발할 때 가지고온 재킷을 셀파에게 주었다.
옷도 크고 여유도 있어 가지고온 것인데 주고 나니 기분이 좋다.
다음에 또 온다면 많이 가지고 와야지 아는 생각이 든다. 산속이라 해가 무척 빨리 진다. 그리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추위가 엄습해 온다.
쿠킹 보이가 한국커피라며 쌍화차와 인삼차를 가지고 왔다.(올 때 사온거지만) 시커먼 손등을 보면 내키진 않지만 웃는 표정이 착해 보인다. 어둠이 짙어오면서 고소증이 심해오는 것 같다. 저녁을 가져왔는데 영 목에 넘어가질 않는다.
속은 울렁거리고 답답하고 이제 시작인데 큰일이다. 이러다 나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되는데 걱정이다. 산소를 공급하겠느냐 묻는데 그건 안 된다 싶어 거절했다. 조대장이 고소에 견디라며 다이나믹스 한 알을 주기에 먹고 잠이 들었다.
10월 31일 (목)
엊저녁에 먹은 약 덕분에 밤새 소변보러 다니느라 고생했다.
저녁을 굶고 잤는데도 소변이 마려워 예닐곱 번은 깼고, 깨고 나선 덜덜 떨며 소변보러 나오고 했다. 물도 안 마셨는데 소변양은 왜그리 많은지, 놀랠 일이다.
결국 약 덕분에 잠을 설치고 만 것이다.
4시30분경 조대장이 깨운다. 어슴푸레 잠이 들었다는데 그나마 깨고 말았다. 일출을 보고 촬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도 없고 두통도 나고 답답하지만 이왕 온 거니 해보자는 심정으로 후레쉬를 켜고 산을 오르기 시작하는데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약 4800m높이의 봉우리라고 하는데 살을 에는 듯한 한기를 느낀다.
컴컴한 봉우리에서 한참을 떨다 사진을 찍었다. 조영순이 해병기를 가지고 왔기에 닐기리를 배경으로 하여 기념사진을 찍고 8시가 넘어서야 하산해서 꿀차로 빈속을 달랬다. (기대했던 사진은 후레쉬가 제대로 작동을 못해 수동으로 했는데 찍히지 않았다) 10시경 하산준비를 끝내고 되돌아 좀슨 공항으로 향하는 발길은 한결 수월하다.
약 1시간 조금 넘게 걸어 전날(29일)잤던 야영지에 왔다.
엄청나게 쉬워진 길이다. 걸음은 빨리 했는데 괜찮은 것 같다.
계속 걸어 계곡이 있는 곳에서 점심을 하고 다시 하산 17:00시경 좀슨의 롯지(포카리틸리쵸)에 도착 저녁을 한 뒤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만족감에 일직 침낭 속에 들어갔다. 생애 처음 4900정도 된다는 고산을 오르내린 것이다.
11월 1일 (금)
며칠만에 롯지에서 편히 자고 나니 기분이 좋다. 새벽의 좀슨 시가지를 산책했다. 이곳은 포카라, 베니, 무스탕, 안나프르나, 틸리쵸 등 여러 곳을 갈 수 있는 교통요충지라고 한다. 우체국, 은행, 군부대 등 여러 시설이 있으나 시설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왜소하고 학교 역시 영 초라하다. 롯지도 많고 행상도 제법 눈에 띄나 시가지는 썰렁하다. 예전에는 비행기도 쉴 새 없이 뜨고 외국인도 많았다는데 마오이스트(모택동 주의자)의 출현으로 트레킹인 들이 급격히 감소해 시가지가 이렇다는 이야기다. 일자리 구하려는 포터들은 많은데 외국인이 없으니 썰렁할 수밖에 없는 일 아닌가.
아침을 먹고 서서히 출발준비를 했다. 드디어 다올라기리 트레킹을 위한 서곡이 울렸고 첫 도착지 마르파를 향했다.
가다가 무스탕 박물관에 들러 유물들을 구경하였는데 시설자체가 워낙 초라하다. 그나마 비디오 관람은 휴관중이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유물을 일부라도 구경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다. 다만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시설이 안돼 있다는 게 아쉽다.
오후 1시경 마파에 도착하여 다올라기리게스트 하우스라는 롯지에 여장을 풀고 점심은 수제비로 하였다. 이곳 쿡들은 한국인식당에서 차출되와서 그런지 그런 대로 괜찮다. 다만 밀가루가 품질이 떨어지는 건지 해발이 높은 곳이라 그런지 덜 익은 것 같은 맛이 나는 것이 흠이다. 식사 후 라마교 사원을 구경하고 편한 휴식을 취했다.
11월 2일 (토)
9시 조금 지나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바람이 제법 불고 기온도 낮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먼지가 날린다. 원래 바다였는데 지각변동이 일어나며 바다 속의 땅이 치솟아 산이 됐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흙이 갯벌의 검은 색깔에 미세하여 먼지가 많이 일어난다. 마스크를 하고 고글착용을 했다.
오늘은 간식으로 삶은 감자를 먹었는데 알맹이가 아주 작다. 헌데 맛은 괜찮다. 점심은 라면이었는데, 집에서 거의 먹지 않던 음식인지라 오늘도 역시 별로다.
오늘 야영지는 야크카라카라고 하는 곳이다. 17시경 저녁을 하고, 일찍 휴식을 취하며 후발대를 기다리는데 소식이 없다. 좀슨에서 출발할 때 포터가 부족하여 늦게 구하러 갔더니 없어 마파에 온 뒤 다시 좀슨으로 구하러 갔는데 그들이 아직 소식이 없어 걱정이 된다. 추워서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부다. 숨이 가쁘고 가슴이 조이는 것 같아 답답해 깼다. 고소증이 다시 시작된다는 증거다 셸파들의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이 들었다.
11월 3일(일)
새벽에 일어나 밖을 보니 컴컴하다 몇 시나 됐을까 헤드램프를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3시다 웅크리고 있다 다시 누워 잠을 청해보는데 옆의 벗은 계속 끙끙거리며 자는 것 같다. 답답함을 느껴 깨어보니 5시다. 고소증만 아니면 자신이 있을 것 같은데, 걱정이 많다.
산소공급을 받아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10여년 넘게 등산을 다녔고 그래도 연장자인 내가 먼저 산소공급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고……. 참을 때까지 참아보자…….
어슴푸레 밝아오는 것 같다. 움직여 보기 위해 밖으로 나와보니 어젯밤 늦게 포터들이 텐트와 나머지 짐을 가지고 온 것 같다. 우리포함 25명의 일행이 모두 합류한 것이다. 출발하기 전 들리는 말로는 어제 프랑스에서 온 여자가 그러는데 포터2명이 추위에 동사했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한다. 모두 20대 안팎의 젊은이들일텐데 방한복이나 신발이 형편없고 침낭도 없이 지냈을 것이 분명하다. 피어보지도 못한 젊은 끔을 허무하게 접었다 생각하니 우울해 진다.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국의 젊은이들에게 명복을 빈다. 우리일행도 20여명의 가이드, 셸파, 포터들이 있는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는 포터들도 있다. 손, 발등은 시커멓고 옷은 낡았고…….
백두산정상보다 높은 해발 40000을 넘은 곳에서 8시 조금 지나 출발했다. 도중에 이태리 팀들과 조우했는데 끝나가는 트레킹에서 나오는 즐거움이 보인다. 문득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은 달걀하나 빵 한 조각으로 대신하고, 계속 진행했다. 오후 두 시경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데 더럭 겁이 났다. 혹시 눈 속에 갇히는 건 아닐까 폭설이 되면 어쩌나하는 초조한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15시 조금 지나 오늘의 야영지 칼로베니라는 곳에 도착했으나 눈은 여전하다. 해발 4900정도 된다는데 눈 위에 텐트를 치고 일정을 마감했다. 산중턱이라 면적이 좁다보니 한쪽은 벼랑이다. 혹시 바람이라도 세게 불면 텐트가 날아가지 않을까, 그러면 속에 있는 우리는 어찌되나 하는 걱정도 들고 눈이 더 세게 내리는 것도 걱정이다.
텐트 속에 들어와 있어도 불안하다. 조대장에게 눈 걱정을 했더니 너무 걱정 말라며. 크게 내릴 눈은 아니라고 위로한다. 그래도 미심쩍다.
밤이 깊어갈수록 어려워지는 호흡과 두통 때문에 얼굴이 붓는지 움직이면 볼이 아프다. 언제부터인지 식욕도 부진해 졌다. 다행히 눈은 가늘어 진 것 같은데 바람이 부는 것 같다. 괜히 마음이 불안해 지는 걸 느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11월 4일 (월)
몇 번을 뒤척이다. 급기야 호흡이 힘들어 일어나 버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채 못 됐다.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 몸을 흔들어 대며 고소증을 견뎌내려니 힘들다……. 머리는 아프고 가슴은 답답하고 날씨는 매우 춥다. 풀 한 포기 없는 곳에 얼음이 끝없이 깔려있고 텐트 한쪽은 벼랑이다. 좁은 텐트에서 자다 옆 사람이 움직여 밀리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것 같은 조바심이 났다. 거기다 행동장비나 야영장비가 거의 없는 셸파들이 추위를 견디다 못해 혹 무리한 요구나 하지는 않을까 또는 슬며시 밤에 하산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등이 잠을 설치게 했다.
산소라도 마셔볼까 하는 유혹도 들지만 다들 자고 있고 또 첫 산소 이용자가 되기는 싫다는 마음에 꼬박 밤을 새웠다.
9시가 채 못돼서 출발, 오늘도 풀, 나무 없는 빙판 길을 오르내린다. 이런 길을 계속 걷는 다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점심은 죽 비슷한 걸로 채우고 나니 힘도 떨어지고 식욕도 떨어져 뭐 먹고 싶은 것도 없다.
담파패스라는 곳(약 5000정도)을 지나면서 곰배령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념촬영을 하는데도 힘이 없어 미소도 잘 안나온다.
히든벨리라는 곳에 도착했다. 14시도 채 안됐지만 취사 때문에 이곳에서 야영을 한단다. 바로 옆에 오슨트랠리야 팀(여1, 남3)들이 있어 같이 야영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산중이고 우리는 오르는 입장이라 분위기는 반대다. 오늘도 눈 위에 텐트를 폈다. 내일이 고비란다. 프렌치패스(5360)를 넘어가면 조금씩 고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저소증만 주의하면 된다고 한다.
11월 5일 (화)
잠을 잤는지 느끼기 힘들 정도로 잠을 설쳤다. 집을 나선지도 벌써 10일이 됐다.
오늘이 이번 산행의 절정(?)이라 생각하니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한다.
배낭이래야 줄곧 옷 한 벌이 전부인 가벼운 차림이지만…….
프랜치패스까지는 약3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가면서보니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은데 가까워질수록 걸음도 느려지고 많이 쉬게 된다. 20여 걸음 걷고 쉬고, 또 걷고 쉬고…….헌데도 호흡하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바로 앞이 정상인데도 한참 걸렸다. 고소증만 아니면 얼마든지 견딜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아쉬움이 남는다.
11시경 드디어 프랜치패스에 도착했다. 해발 5360 뿌듯한 기분이 순간의 기쁨에 가득하다. 드디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갑자기 힘이 나는 것
같고, 마음이 평온해 진다.
아!! 이런 기쁨을 맛보기 위해 이토록 긴 고통을 참고 견디었을까? 웃음이 절로 난다. 기념촬영을 했다. 이제는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대장은 저소증을 조심하라고 한다. 힘이 나는 것 같다.
오늘은 디올라기리 B.C에서 야영을 한다고 한다.
4800정도의 높이라고 하니 어제 머문 곳과 비슷한 높이다. 내러가다 유럽(독일, 오스트리아) 2팀과 조우했다. 이곳까지 오며 여러 차례 유럽인들만 만났다. 그 중에서도 독일 팀이 단연 많다. 역시 독일민족은 강인한 것 같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주위를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다.
갑자기 굉음이 울리기에 주위를 살펴보니 건너편(디올라기리 정상)에서 빙벽이 떨어져 나가며 흰눈이 안개처럼 날린다. 아! 저게 눈사태인가 보다. 소리도 굉장하지만 모양도 장관이다. 근처에 있다가 눈사태 만나면 꼼짝없이 흔적도 없어질 것이다. 그대로 끝이리라.
약 두 시간을 넘게 걸어 다올라기리 BC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독일인들이 벌써 자리를 잡고 텐트를 쳐서 자리가 없다.
이곳에서 야영하기로 했는데 차질이 생겼다. 앤도로지(가이드)는 한 시간 가량 더 가면 야영할만한 곳이 있으리라고 한다. 달리 방법이 없다고 걸음을 재촉해 보지만 마음엔 걱정이 쌓인다.
해가 짧은 산속이고 보니 쉬 어두워지는 것 같다.
어둑해지는 길을 걸으며 군데군데 바위가 있는데 자세히 보니 얼음 위에 바위가 얹혀 있다. 어떻게 된 건지 바위 위에 얼음이 없고 얼음 위에 바위가 있다. 한 두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곳이다. 손으로 만져보니 틀림없이 얼음이다. 아스라이 먼 계곡에는 만년설이 녹아 있다. 땅은 꽁꽁 얼었고 추위는 밀려오고 조금씩 불안해 진다. 얼마나 지났는지 물이 보인다.
한 시간은 족히 지났다. 여기서 야영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먼저 하산한 취사 팀들이 보이지 않지만 이미 어두워 진행하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몇 사람이 그들을 찾으러 가기로 하고 우린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해는 이미 기울었고 시장하다. 시간은 흐르건만 취사팀 찾으러 간 사람들은 소식이 없고, 이럴 때 무전기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만 아쉽다.
밤늦게 먼저 갔던 취사 팀들이 눈 속을 헤매며 왔다. 일부는 그곳에서 야영하기로 하고 일부만 왔단다. 재펜 BC까지 갔다고 하는데 거리가 제법 먼 것 같다.
손전등도 없이 이 컴컴한 밤길을 다시 온 것이다. 늦게나마 저녁을 먹게 되었고 추위와 배고픔이 해결됐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해발 4300이나 되는 곳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뻔 했다. 오늘도 눈 위에서 잠자리를 한다.
이제 눈 위에서 그만 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1월 6일 (수)
자다가 얼굴이 아파 견딜 수 없어 깼다. 만져보니 양 볼이 잔뜩 부풀었고 입술이 서너 군데 터졌다. 어제 쉴 때부터 얼굴이 뜨겁고 콧김도 뜨겁게 나와 더럭 겁이 났었는데 몸살이 아닐까 걱정된다. 거울이 없어 볼 수도 없고 다시 드러누워 침낭에 얼굴을 파묻고 몇 번이나 뒤척거려 보지만 잠도 오지 않고 얼굴은 화끈거리고 잠을 잘 수가 없다. 소변도 마렵지가 않다. 혹시 저소증이 아닐까 걱정하다가 새벽3시경부터는 아예 일어나 침낭을 뒤집어쓰고 앉아 호흡을 고르며 몸을 앞뒤로 계속 흔들어 보지만 효과가 없다. 화끈거리는 얼굴엔 로션을 바르고 비벼보지만 효과가 없다.
너무 추워 옷을 입은 채 침낭에 들어가 잤는데 침낭 위가 입김에 얼은 것 같다. 텐트도 얼었는지 불빛을 비추니 천장이 하얗다.
옆 친구는 계속 끙끙대며 잔다. 얼마나 웅크리고 흔들며 견뎠을까 어슴푸레 아침이 오는 것 같아 시계를 보니 6시가 넘었다. 그래도 잘 견뎠다 싶고 빨리 하산하고 싶다.
8시경 출발하면서 어제 미리 하산한 일부 셸파들이 걱정된다. 이 추위에 별 사고 없이 무사해야 될텐데 불안하여 일찍 출발한 것이다.
한 시간 가량 지났을까 재팬BC에 있는 그들을 만났다. 우리는 웃으며 어제 야영한곳을 코리아BC라고 부르자고 했다.
약 두 시간 더 경과한 지점에서 빙벽과 빙벽의 사이 허리길인데 위에서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칼리칸타키 강의 상류계곡이 시작되는 곳이라는데 정말 위험하다. 산에 흙이 단단한 게 아니고 얼었다 녹았다하여 부풀어 있는 것 같고 돌과 흙이 뒤섞여 잘못 밟으면 흙과 돌 부스러기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한 발자국 옮길 때마다 신경을 곤두새우고 움직이지만 줄곧 흘러내린다. 12시경 물 있는 곳에 도착하여 수제비로 점심을 했는데 뜨거운 국물이라 속이 풀린다.
걱정을 많이 한 지역이었는데 별 사고가 없어 다행이었고 로프는 꼭 준비해야 될 것 같다.
다올라기리BC에서 이태리BC까지는 위험한곳이 많은 곳이다.
현기증이 날 뻔한 곳도 있어 여간 조바심이 난 것이 아니다. 왼쪽편의 풀 한포기 없는 급경사 길에 미끌어졌다하면 100m 넘는 계곡 아래로 그냥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고 그냥 끝장이다. 그래서 앞만 보고 걸었지만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표현이 안 된다. 길이 없다싶어 겁이 났지만 가까이 가보면 아주 좁게 그곳에 발을 기긴 흔적이 있어 그곳을 걸어 나왔지만 정말이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등산하는 전문 등산인도 아니데 로프도 없이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조금만 더 가면 이태리 캠프에 도착하게 되고 그곳부터는 평탄한 하산길이라는 기대가 있긴 하지만…….
오랜만에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의 흔적을 발견했다. 한국에서 봤음 지나쳤을텐데 반갑다. 야, 이곳에서 이런 것을 보다니 다름 아닌 라면봉지다(신라면) 쓰레기지만 반갑다. 누군가 한국인이 이곳을 지난 것이 틀림없다. 언제 왔다가 갔을까, 라면 먹는 모습을 그려보며 웃음이 난다.
오후 3시경 이태리 BC에 도착했다. 오늘의 야영지다.
아직 해는 남아있고 쉼터도 충분한 면적이고 나무도 있고 며칠만에 여유 있는 휴식을 가져본다.
5360의 산을 넘은 것에 대한 성취감과 힘든 고소증과 저소증을 견뎌가며 산소공급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만족스럽다.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도 몸살 한번 앓지 않고 이곳까지 온 것도, 얼굴은 붓고 입술도 터지고 며칠 밤을 새벽에 일어나 침낭을 뒤집어쓰고 어려움을 극복하고 했다는 것이 스스로도 매우 대견스럽다.
한쪽 귀퉁에서는 포터, 셸파들이 모여 트럼프로 오락을 한다.
이 또한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다. 며칠만에 주민이 살고 있고 사람의 흔적이 있는 돌탑 묘비가 있는 곳에서 있다는 것이 산행이 끝난 것 같은 기분이다.
대장에게 다이나믹스 한 알을 달래서 먹고 소변이 나오길 기다리며 모닥불에 몸을 녹인다.
이제는 고생을 다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은 이태리인들이 야영을 했던 자리라 이태리 BC라 하는 것 같다. 이곳부터 사람이 살수 있는 지대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야영지는 3대가 함께 사는 움막 롯지며 공터다. 인근에는 키 작은 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높이가 1m도 안 되는 관목이지만 생명이 잇는 식물 아닌가. 여기는 활엽수가 없다. 모두 침엽수이며 드문드문 있고 죽은 고목도 잇다 그리고 풀도 있다. 이제부터는 모닥불도 지피고 언 몸도 녹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오는 도중 풀은 봤지만 이제 나무도 많이 오게 될 것이다.
주위에는 묘비가 둘 있는데, 독일인과 프랑스인의 묘비다. 아마 이곳이나 이 근처에서 죽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움막 같은 집. 롯지에는 어린아이가 셋 있는데 그중 여자 아이가 참 인상적이다. 7~8세쯤 되 보이는데 껌벌(모포와 비슷함)이라고 하는 걸 두르고 문설주에 기대서 있는데 도무지 표정이 없다. 초콜릿과 사탕을 주어도 받고 그냥 사람들을 응시할 뿐이다. 한참이 지나도 다른 곳으로 옮기지도 않고 그냥 서서 응시할 뿐 표정도 없다. 거기다 맨발이다. 슬리퍼도 없이 서있는 모습이 영 찡하다. 몇 번을 사탕 초콜릿 주었으나 그냥 받을 뿐이다.
우리나라 아이 같으면 해맑은 표정에 뛰놀며 의사표시도 자유스러울 텐데, 나이답지 않게 무표정한 얼굴에 우리모습과 텐트만 주시하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 아이 할아버지는 금년에 60이라는데 7~80 늙은 할아버지 같다. 추위와 빈곤이 이렇게 만든 것 같다. 우린 신발 속에 양말을 두텁게 신고도 춥지 않을까 걱정하는데 이곳은 맨발도 있으니 환경에 적응하여 사는 게 동물이 아닌가.
저녁에는 프렌치패스 무사통과 기념으로 전원에게 100루피 특별 팁을 지급하고 밤늦게 모닥불을 쬐다 오랜만에 눈밭을 벗어나 인가가 있는 곳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들었다.
11워 7일 (목)
어제는 편한 잠을 잤다. 해발 3660이라는데 저(고)소증이 모두 해결된 것 같다. 얼굴도 한 꺼풀 벗겨지고 입술은 터진 게 아물지 않고 얼굴, 손등은 부기가 여전하지만 하산길이란 게 마음을 편하게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부터 모닥불 쬐다 식사 후 8시경 하산을 시작했다.
어제의 그 어린아이는 어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사탕을 쥐어주고 손을 흔들었지만 약간의 미소만 머금은 채 표정이 없다 아침부터 마음이 무겁다.
이제부터는 계곡, 폭포, 풀, 나무 등이 많다는데 마음이 한결 편하다. 내려오다 크고 흰 꼬리가 긴 원숭이가 높은 나무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멀리서 봐도 꾀 크다.
이제 본격적인 트래킹이 시작되는가 보다.
오늘은 이태리에서 왔다는 사람 10여명과 조우했다.
12시도 채 못 되 계곡 물이 흐르는 곳에서 점심을 하고 오후 3시경에 해발2500정도 된다는 도반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오늘의 야영지다. 오늘도 날씨는 청명하고 기대하던 롯지도 있다. 참 다행한일은 콜라가 꼭 5병 남아있다는 것이다. 일행5명에 딱 한 병씩이다. 안성맞춤이다. 오랜만에(마르파에서 출발 한 후 처음) 머리도 감고, 발도 씻고 그리고 나서 콜라한병 그야말로 금상첨화 온몸이 상쾌해 진다. 이 맛이 진짜 콜라 맛이라고 조명상씨가 한 마디 한다.
롯지라 해야 헛간 같은 집이 두 채있다. 한곳은 문이 매달려 있지만 다른 한곳은 헛간이다. 그래도 흐르는 물에 손, 발을 씻는다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언제 왔는지 아침에 헤어졌던 여아의 오빠(?)와 엄마가 와있다. 아마 여기까지 와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해 가나보다. 여기도 물건 없긴 마찬가지 같은데…….
오늘은 약 6~7시간 걸었지만 풀과 나무 계곡 폭포, 빙산들을 번갈아 보며 오니 별로 지루함을 못 느꼈다. 오늘도 독일 사람들을 만났다. 역시 독일인은 강한 것 같다. 이제부터 활엽수도 제법 많고 오래된 가느다란 대나무도 여러 곳에 산재해 있으며 그 사이를 하산하다보니 우리나라에서의 하산길 같은 느낌도 들었다.
뒤늦게 도착하는 포터들을 보노라면 문득, 이들은 온몸으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등에 맨 짐은 끈을 이마에 연결하고 두 손은 등짐을 붙잡고 두발은 걷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은 총 동원된 셈이다. 이러니 온몸으로 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밖에……. 저녁에는 이 나라 축제(띄아르)를 기념하여 이곳의 전통술(럭시)을 무한정(?) 공급하기로 하여 실컷 놀게 했다.
이제 몸이 풀리는걸까 저녁식사후의 나른함과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11월 8일 (금)
일어나 주위를 살피니 일본인 셋이 이곳에 와서 죽었는지 묘비가 있는데 소화 46년 6월4일이라 기로되 있다. 70년대 초반일 것 같다. 엊저녁에 왔던 홀랜드인 남녀도 텐트를 걷고 출발준비를 한다.
오랜만에 아침 세수를 하고 나니 기분이 상큼하다. 8시 조금 지나 출발 약 1시간지나 버펄로 농장을 만나 셸파들이 모여 젖을 짜 마시는 걸 구경하고 10시30분경 야크 방목장(밴시카르카라는 곳)에 도착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라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버펄로 젖을 얻어 마시고 점심을 수제비로 해결한 뒤 출발하려는데 그곳 사람이 전지약을 얻으려하기에 석청을 구해오면 바꾸기로 하고 오늘 야영지를 알려주면 내일 아침8시까지 가져오겠다고 약속하고 헤어진 뒤 엄청난 폭포를 수도 없이 보며 오르내리다 마치 설악산 금강굴을 오르는 곳 같은 위험한 계단을 오르면서 셸파가 멀리서 폭포 옆에 조그마한 수영장같이 보이는 곳이 온천(다또바니)이라고 한다. 또, 계단을 거의 오르며 오른쪽으로 바라보니 엄청난 바위산 처마같이 생긴 곳에 14개나 되는 석청집이 보인다. 거무스레한 것과 노랗게 보이는 모여 있는데 멀리서 봐도 굉장히 큰 것 같다. 말로만 듣던 석청집을 보게 된 것이다. 사람의 접근이 어려울 것 같아 보인다. 고개를 넘어서는 곳에 비석이 있는데 두 사람이 99.10.13. 29살, 31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되있다. 독일인인 것 같다. 아직은 젊은 나이에 실족한 것이 아닐까 안타까운 생각이든다.
오후 3시경 바가르브디라 불리우는 마을의 학교에 도착했다. 시설이라곤 형편없는 산 중턱에 조그마한 건물과 100여 평도 안 되는 운동장이지만 평평한 곳이라 이곳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여기가 해발 2100정도라 하니 많이 내려온 것 같다. 저녁은 이곳 닭을 볶아 왔는데 오랜만에 먹는 음식 이어서인지 맛이 좋다. 두 마리를 볶아 왔는데 한 마리에 1200루피를 주었다하니 이곳 화폐단위가 1달에 75루피 정도니 마리당 16불(한화 약20,000)을 준 셈이다. 버펄로 고기가 5Kg에 약 600루피라는데 비교가 안 되게 비싸다. 이곳 사람들이 닭을 좋아한다지만 너무 비싼 것 같다.
어떻든 요리사 크리스나의 솜씨가 칭찬할만하다. 창도 한잔 곁들여 마시며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창이라 부르는 술은 우리나라 막걸리와 비슷함) 발효가 잘되면 맛이 막걸리 버금간다고 한다.
헌데 내가 맛본 창은 발효가 덜되어서 인지 맛이 없었다.
며칠 전 있었던 조영순과 한명학 사장간의 의견충돌은 잘 마무리되었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11월 9일 (토)
자다가 편두통 비슷한 통증이 와 깨어보니 새벽 4시다 앉아서 밤을 새우는데 닭 우는 소리가 들린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소리다. 민가 곁에 오니 좋다.
기지개도 켜고 마을을 돌아보고 수도가 있기에(산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 공동 사용하는 것) 머리도 감고 발도 씻었다. 식사를 마치고 출발 준비를 하며 어제 버펄로 농장(말이 농장이지 서너 마리 방목하는 정도) 사람을 기다려 보지만 소식이 없어 포기하고 가자했더니 조대장과 조사장이 틀림없이 올 테니 기다려 보자고 한다. 8시가 다되어 가는데 정말 그들이 왔다. 두 사람이 왔는데 냄비에 석청이라며 벌집 채 담아왔다. 놀랠 일이다. 세 곳을 뒤졌다는데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전지약을 얻기 위해 고생고생 하면서 메고 온 것이다. (전지도 없이 컴컴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전기시설이 없는 산속에서 전지약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일깨워 주는 일이다. 내년에 오겠다고 약속하면 그 동안 많이 따놓겠다는 약속까지 하는 걸 보면 대단한 일이다.
석청을 구하려다 생명을 잃는 이도 있다고 들었는데…….
출발하려는데 마을학교 선생이라며 학생들 학용품 값이라도 도와달라기에 500루피(약 7불)주었다 한다. 가난한 나라의 아픔이 짙게 베어나는 것 같다.
다올라기리BC 이후지역의 기온은 낮에는 영상이고 아침이나 저녁은 우리나라 초겨울 같게 느껴진다. 그리고 밤에는 춥다. 오늘의 목적지는 무리라고 한다.
깎아지른 듯한 비탈길 꼬불꼬불한 구절양장의 길을 걸으며 옛날 영월의 비행기재를 넘던 생각이 난다. 하도 꼬불거리고 높아 그곳 사람들이 비행기재라 불렀다는데 흡사한 길이다. 11시30분경 주계바니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해발 1500정도 된다는데 점심을 먹으며 오늘 야영지를 무리가 아닌 캄라로 바꾼다는 게다. 무리에는 마우이스트가 출현하는 곳으로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오후 3시반경 칸라 마을에 도착 야영준비를 했다.
해발 1500정도라는데 이는 어제와 비슷한 고지대이다. 마을 옆 논두렁에 야영준비를 하고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손, 발을 씻고 양말도 세탁했다.
오랜만에 여유 있게 비누를 사용하며 얼굴을 씻는데 무척 깔끄럽고 감각이 둔한 게 얼굴에 꺼풀이 아직 덜 벗겨진 것 같다.입술은 터진 게 아직도 아물지 않았고 광대뼈 있는 쪽은 시커먼 딱지가 더덕거리고 눈자위도 부어있고 어느 나라
거지가 이런 모습일까. 거울이 없어 볼 수 없는데 다행이다.
마을에 있는 나무에 매달린 순달라(귤)를 먹었다. 열매가 파랗고 싱싱하긴 한데 너무 조그맣고 씨가 많은데 흠이다. 당도도 약하지만 속은 익었다.
서울을 떠난 지 꼭 보름이다. 달력이 없으니 매일매일 손꼽아 헤아려 가늠한다.
야영준비를 마치고 나니 마을 어린애들이 모여든다. 거의 모든 애들이 맨발에 코 흘리고 땟국물 흐르는 모습이 어릴 때 우리모습과 흡사한 느낌이다.
그땐 6.25 직후여서 손등은 터지고 코 흘리며 눈곱까지 주렁주렁 매달렸던 모습
검정고무신에 검정 무명옷 그런 모습들 이였는데 별반 차이가 없다는 느낌이다.
한국과 다르게 특이한 점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는 논은 모두 계단식이라는 것이다. 평지는 좁고 경작지는 필요하고 결국 산을 깎아 계단식 농토를 만들 수밖에 없다. 듣기로는 북한의 김일성이 이곳의 형편을 보고 이북산간 지방에 계단식 농토를 만들었다가 홍수가나서 실패를 했다는데 여기는 집중호우는 없는지 곳곳이 계단식 논, 밭이다. 이곳도 지금이 겨울이라서 벼는 이미 베고 흔적만 있는 곳이 많다.
11월 10일 (일)
마을 논에서 자고 보니 고(저)소증도 말끔히 가셨다.
5시경 기상하여 밖을 보니 어슴푸레 밝아오는 것 같다.
골짜기에 가서 얼굴을 씻고 오니 쿡팀에서 변함없이 차를 가져왔다. 꿀차, 인삼차, , 쌍화차, 커피 등 가지고 온 차를 하루에 세 번씩 변함없이 마셨다. 이제 거의 동이난 모양이다.
아침부터 마을 애들이 몰려와 구경한다. 앤드로지를 불러 사탕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다 떨어졌다 한다. 제법 가져온 것 같은데 소진됐나 보다.
좀 많이 가져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에 안타깝다. 뭔가 주긴 줘야겠는데..
이제는 민가들이 보이고 사람들이 보이고 길도 한결 순해졌다.
목적지가 가까워 올수록 사람의 냄새가 진해지는 것 같다. 어린애들도 자주 보이고 사람들의 모습에 생기가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러니 보이는 사람도 그래 보이는 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민가를 지나며 순달라도 사먹고 창도 마시고 요플레도 먹고 콜라도 마시며 가벼운 마음이 된다.
버머하라 빌리지라는 곳을 지나 중식을 하고 다르방으로 향했다. 오후4시가
넘어서 라또릉가(해발 1050정도)라는 곳에 이르렀다.
마을에서 야영을 못하고 조금 떨어진 곳의 강가에 야영준비를 했다. 가게는 있지만 롯지가 없고 마을에는 마우이스트가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6.25때 빨치산이나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처럼 낮에는 양민과 구별이 안 되고 밤에 출현한다는 게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강가에 가서 씻고 오는데 군데군데 화장터가 보인다. 여기는 물 흐르고 공터가 있으면 화장장이 있는 게 특색인 것 같다. 저녁을 먹고 환담을 나누다 대장이 가이드에게 마우이스트 동정을 물으니 벌써 두 번이나 다녀갔단다. 그들이 돈을 요구하기에 얼마간 주었다며 진짜 마우이는 아니고 가짜라고 한다. 알면서도 안 줄 수 없어 주었다며 또 올지 모른다고 한다. 마우이를 피하여 온다고 왔는데 결국 그들의 수중에 걸려든걸까?
영 불안하다. 옮기자고 했더니 밤이 깊어 어렵다며 셀파들이 교대로 불침번을 설테니 자라고 권한다. 누워 이생각 저생각 하며 불안을 달래며 잠을 청해 본다.
11월 11일 (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어 귀를 기울여 들으니 셀파들의 목소리다 그들이 밤을 새워 수고하는 거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자고 있었지만 교대로 밤새워 경계근무를 한 것 같다.
오늘이 야영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정말 기분이 좋다.
틸리쵸에서 3일, 디올라길에서 9일 모두12일간을 텐트 속에서 보냈으니 지겹기도 하다. 그 동안 세수도 못한 날이 대부분 이였으니 발인들 씻고 잤겠는가! 허나 이제 가는 날까지 그런 일은 없으리라.
아침을 먹으며 둘러보니 인원이 얼마 안 된다. 궁금해서 알아보니 일부는 벌써 출발했다 한다. 언제부터인가 민가가 보이기 시작하자 일부 포터들이 따로 행동하는 것 같다. 식사도 잠도 따로 하는 것이다. 그들이 받는 일당에서 식사비를 절약하기 위해 민가에서 얻어먹거나 사먹는다는데 그게 더 저렴하다는 거다. 여태 몰랐는데 취사반에서 식사를 사먹으며 같이 행동한 것이었다.
어쨌든 홀가분한 마음으로 출발준비를 했다.
8시경 출발하여 바삐초울이라는 마을에 오니 길에 붉은 현수막이 매달려 있다.
섬짓한 생각이 들어 알아보니 마오이들이 11일부터 13일까지 전국에 차량통행금지 총파업 명령을 내렸다는 거다. 파출소는 파괴되었고 불탄 자국이 있는데 경찰들은 도망가고 없다고 하니 아찔하다. 설마 하면서 불안을 느꼈는데 정말 뭔가 닥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걸음을 빨리 했다.
11시 넘어 다또바니 마을에 도착 조그마한 유황온천이 있는데 노천 온천이다.
달걀 썩는 냄새가 지독하게 나고 물이 흐려 머뭇거리다 들어갔는데 온도도 알맞고 물이 계속 흐르는 것 같다.
밑바닥이 시멘트가 아닌 흙과 돌이기 때문에 흐려 보이는 것 같다.
롯지에 들러 점심을 들고 베니로 행하는데 이젠 길도 넓고 걷기도 수월하다.
오후4시가 넘어 베니에 도착했는데 곳곳에 군인이 있고 검문소도 있다.
군부대도 보이고 도시가 면소재지보다 더 커보이는데, 이곳에서 차가 대기하다포카라로 이동하게 되는 게 일정인데 황당하게도 도시의 교통이 완전 마비됐다고 한다.
베니-포카라 교통도 두절되어 차가 올 수 없다는 연락이 왔고 포카라까지는 걸어서 이틀 걸리는데 이곳 롯지(예티호텔)에서 3일간을 머물러야 한다니 답답한 일이다. 롯지에서 여장을 풀고 그래도 내일은 방법이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래도 군인들이 있고 치안이 있는 국가인데.. 스스로를 달래며 기대를 하고 짐정리하며 간단한 세탁도 했다. 오랜만에 나무침대에 누워보니 마음이 한결 편하다. 그 동안 자일도 없이 절벽같은 비탈길, 통나무로 된 외나무다리 하얀 눈길 등을 고(저)소증 속에 잘 견디어 왔다. 생각하니 흐뭇하다.
예상 못한 일로 3일간을 머문다는 게 답답하긴 하지만 내 힘으로는 가당찮은 일이고 좀슨에서 만났던 포터들이 오늘을 끝으로 떠났다. 그래 잘 가라고 손 흔들어 주고 나니 섭섭한 마음도 든다.
11월 12일 (화)
늦잠을 자려고 버렸는데도 5시에 일어났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 할 일없음이 무료하다. 오전에는 베니 시가지를 구석구석 놀아봤다. 조그마한 도시가 우리나라 면소재지보다 조금 큰 것 같은데 읍소재지만큼은 안 되는 것 같다.
고유떡(?) 전병 등을 맛보았는데 떡은 안남미로 만든 거라 끈기가 전혀 없고 달기만한 게 더 먹을 생각이 없다. 전병도 맛이 형편없다.
서울과 전화를 시도했으나 콜렉트콜이 안 되는 곳이라 한다.
오후에도 지루하기는 마찬가지다. 여독을 푼다고 생각하면서도 교통이 묶여 못 움직인다. 생각하니 심기가 편치 않다. 이곳에서는 제일 좋은 숙소라 하는데 우리나라 장급여관 수준도 안 되는 곳이다.
프랑스인 7~8명이 40일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온다는데 놀랍다. 우린20여일이 채 안됐는데도 지쳤는데 그들은 표정들이 밝다. 하지만 그들도 교통이 묶여 이곳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바나나, 땅콩, 토마토 등을 사다먹으며 무료한 시간을 달래본다. 토마토, 사과 등은 알맹이가 무척 작고 맛이 없으나 농약이나 거름을 주지 않고 재배된 터라 그냥 우적우적 먹어도 된다.
15시 넘어 한국인이 왔다. 송파에 사는 이초성이라는 젊은인데 베이징에서 기차를 타고 왔다는데 속으로 놀랬다. 이 청년도 발이 묶여 같이 지내게 됐다.
시가지가 좁아 구경할 것 도 없고, 그 외 다른 적절한 것도 없으니 지루하게
느껴진다.
저녁에는 창을 한잔 마시고 환담을 나누다가 내일 18시 이후에 교통통제가 해제된다는 말을 듣고 혹 내일 늦게라도 출발이 안될까 기대를 해보며 잠이 들었다.
11월 13일 (수)
강제로 휴식하는 마지막 날이 밝았다.
지루하여 몇 번 시가지를 돌아봤더니 이젠 흥미가 없다.
점심은 닭도리탕이 나왔는데 서울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았건만 여기서는 벌써
몇 번 먹었다. 저녁6시 이후 해제된다기에 몇 번 출발교섭을 했지만 안 된다고 한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방법이 최선이다. 이곳 숙소도 이제 만원이다. 하산하여 잠깐 들리는 지역인데 교통이 마비되니 더 이상 방이 없다. 셸파들에게 주었던 방도 비워 달랜다.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자는 상황이 발생된 것이다.
오후에는 김병종의 화첩기행을 다 읽었다. 정지용의 이야기를 읽으며 집 떠난 지 20여일의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 어쨌든 내일은 출발이다.
엉망이 된 얼굴이 걱정스럽다. 허물은 벗었지만 아직도 때 같은 허물이 남아있고 얼굴이 벌건데 내가 봐도 엉망이다. 거기다 수염까지 길렀으니...
주위에선 수염이 괜찮다고 기르기를 권하지만 남의 이야기이니까 그런 게 아닐까!
밤늦게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물건 확인해보니 조대장가방이 하나 없어졌다. 내용물은 빈 가방이지만 고가품 이라고 한다. 갑자기 분위기가 엉망이 되버렸고 책임 셀파를 찾으러 나갔지만 밖이 불안정하다고 못나가게 한다.
참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11월 14일 (목)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다 싶어서인지 새벽4시도 못되어 일어나 짐을 챙기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주차장으로 행했다. 정류장도 강을 건너는 좁은 다리를 이용해야만 하는 형편이데 벌써 외국인을 포함 초만원이다. 3일간 교통 두절됐다가 해제(?) 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숙소에서 운영한다는 버스를 탔는데 말이 관광버스지 낡은 건 고사하고 실내도 너무 좁아 다리를 제대로 펼 수가 없다. 지붕 위까지 가득한 다음에야 출발했다. 길도 좁고, 포장이 안 된 길이라 속력을 낼 수도 없는 형편이지만 움직인다는 그 자체가 신나는 일이다.
가다가 화장실 갈 일이 생기면 아무 곳이나 정차한 후 편한 곳에서 일을 치른 후 출발이다. 약 4시간 가까이 달린 후 우리는 포카라에 도착했다. 20여일 전 산행을 하기위해 좀슨으로 갈 때 왔던 도시라 반갑다. 포카라에는 한국식당(사랑산 식당) 앞에 차가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여러분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오랜만에 실로 오랜만에 식당에서 지은 밥을 즐겁게 먹고 베니에서 만난 이초성씨와도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 동안 정들었던 포터, 셀파등과 헤어지자니 아쉽고 석별 파티를 제대로 못해준 게 아쉽다. 마오이들이 출현하지 않았거나 가방분실 사고만 없었어도 창과 럭시만은 실컷 마시며 웃음을 나누었을 텐데, 일일이 작별을 나누며 순간순간 얼굴들을 뇌속에 남겨본다. 크스리나, 낙파, 마르파, 쉬링, 도로지셀파, 임마르... 또다시 이들을 볼 수 있을까. 아니 영원한 이별이 될지 그 누가 알수 있으리..그래 잘있으라!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라면 영원히 잘있으라.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대들에게 할말은 오직 이것뿐.. 잘있으라!
어느 책에선가 읽은 것 같은 글귀를 되뇌며 대형버스를 타고 손을 흔들며 이별을 나눴다. 차가 워낙 낡아 목적지까지 갈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면서도 마음이 홀가분하다. 일행 8명이 대형버스를 타고 국립공원 치트완으로 가는 길은 오랜만에 여유가 있고 시원스럽다.
밤늦게 약 6시간 이상 걸려 치르완에 도착했다. 계절이 겨울이어서 인지 6시 넘으며 컴컴해 진다.
국립공원에 있는 마천리조트 주차장에서 군용트럭 비슷한 차를 타고 1km가 넘는 강을 건너갔다.(강은 모래와 강물 속을 3번이나 꿰차고 차바퀴가 거의 거의 빠져가는 길을 건너갔다.) 방가로에 여장을 푼 우리는 내일 있을 사파리 구경을 위해 슬라이드 설명을 들었다. 말이 들은거지 대강 눈치로 보고 듣고 한 뒤 네팔식 뷔페로 저녁을 했다. 식단은 단조롭고 식생활 문화가 틀려 어려움이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숙소에 오니 호롱불이 두 개 켜있다.
하나는 숙소용이고 다른 하나는 화장실용인데 어릴 때 생각이 나는 일이다. 샤워도 할 수 있는데 태양열로 데운 물이라 한정된 양에 미지근할 뿐이다.
11월 15일 (금)
아침 일찍 일어나 메인 광장에 모여 2~4명씩 코끼리 등에 타고 산책을 나섰다. 두 시간 가까이 밀림 속을 산책했는데 코끼리 냄새가 심하게 난다.
매, 사슴, 코뿔소 등은 봤으나 사파리라는 재미는 별로 이고 밀림 속 상큼한 공기가 좋다. 아침 햇살이 숲 속 나무를 비켜나며 비취는 것은 인상적이다.
아침은 빵인데 쏘시지 한 조각 없는데 아쉽다. 오전에는 코끼리 사육장에서 코끼리 생태 등을 돌아보고 오후에는 다시 코끼리 등에 타고 숲 속을 헤맸지만 기대에는 영 못 미쳤다. 수확이라면 코부라 크기의 큰 뱀을 보았는데 두 사람이 꼬리를 붙잡아도 뿌리치고 가버렸다. 저녁에는 식당 앞 광장에서 화롯불을 켜고 민속놀이를 하는 것을 구경하고 숙소에 돌아와 샤워를 하려 했더니 찬물만 나와 포기하고 잠들었다.
11월 16일 (토)
아침에 랜드로바를 타고 강가로 나가 카누에 나누어 탄 뒤 약 40여분간 물길을 따라 내려간 뒤 다시 차를 타고 밀림 속을 다녔다.
사람의 발자국이 심했던지 약 1시간 이상 밀림 속을 헤맸지만 사슴과 개미집 외에는 본 게 없다. 밀림 사파리라하여 내심 기대하는바가 컸는데 실망이다. 짐을 챙기고 강을 건너 주차장에 오니차가 바뀌었다. 고장이 나서 수리중이란다.
그럴 줄 알았다. 이제 룸비니로 간다. 인도 쪽으로 약 4시간 달려 숙소에 도착 늦은 점심을 하고(도중 식사할 곳이 마땅치 않음) 석가 탄생지와 근처에 있는 아시아 불교 사원을 몇 곳 돌아보았다.
중국불교, 미얀마 불교, 힌두교 사원 그리고 우리나라 대성석가사 등을 돌아보고 마침 식사 때라 공양을 권해서 식사한 뒤 두 시간도 채 안되었지만 저녁 겸 식사를 한 뒤 컴컴해서야 숙소에 돌아와 인터넷을 해보려 했더니 연결이 안 되어 포기하고 오랜만에 집에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숙소다운숙소에 온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이 숙소는 시내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불교성지 참배객을 생각해 지은 호텔 같다. 침대에 누우니 낮에 요괴(?)들을 본 게 우습게 떠오른다.
11월 17일 (일)
오늘은 카투만두로 간다.
10시30분경 숙소를 나와 약 40여분 걸려 공항에 도착했는데 공항의 시설이나 활주로 역시 초라하다. 공항시설은 시골 공동 정류소 같이 빈약하다.
평야가 적고 산이 많은 나라여서인지 경제 사정 때문인지 이유는 모르겠다.
12시30분 카트만두 비행기가 30분을 더 지났건만 감감무소식 답답하다. 이곳 비행기 사정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다. 차라리 일찍 버스를 이용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든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비행기가 도착했는데 이 비행기 역시 19인승으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다행인 것은 일기가 바람 없이 맑다는 거다.
이륙하여 카트만두로 향하는데 왼쪽으로 히말라야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장관 이다. 기다림에 지쳤던 일도 다 잊어버리고 탄성만 나온다.
낮게 나는 비행기에는 이런 구경거리도 있다는 걸 알았다.
공항에 내려 마중 나온 분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 고물 버스에 탔다.
다행히 다 고쳤다는 거다 늦게 점심을 마치고 다가고트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이곳도 교통이 혼잡하기는 마찬가지다. 고속도로도 2차선에 곳곳이 패이고 꼬불길이니 얼마나 열악한가 속도도 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차 꽁무니에 경적을 울려 달라고 적혀 있으니 알만한 일 아닌가(추월을 허용하기 위해서인 듯) 거기다 차도 우측에 핸들이 있는 차와 좌측에 있는 차가 엉켜있고(차도는 우리나라와 반대)
곳곳이 검문소와 차량통행료를 징수키 위해 대나무로 차단기를 설치 수동으로 작업하며 통행료를 받고 있으니 상상으로도 느껴지는 일이다.
이곳기름 사정도 여의치 않은지 주유소에서 기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인도에서 구입한다는데 기름 값이 오른다하여 주유소에서 팔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사정해가며 조금씩 구해 넣고 어두운 고부랑 밤길을 달리는데 상대편에서 오는 차를 보면 한쪽으로 비켰다가 다시 가는 형편인데 하도 꼬부랑길이라 영 답답하기도 하고 더럭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산 정상 가까이 가는 길이라 좁고 꼬불거리고 어두워서 더욱 어려운 것 같다. 저녁 7시가 넘어서야 히말라야클럽이라는 곳에 도착. 9시에 저녁을 한 뒤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잠들었다.
11월 18일 (월)
해뜨는 모습을 보자는 연락이 와서 옥상에 올라가 보니 정말이지 해돋이가
볼만하다.
솟아오르기 시작하며 인근히말라야산들을 비치는 것도 멋있지만 산을 헤치고 오르는 모습은 실로 멋있다. 햇무리 같이 겉에 빙빙 도는 게 보이며 이글거리는 모습은 내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멋있다.
아쉬운 건 추위에 떨면서 본다는 것이지만 정말 멋있다 느껴졌다.
어제 저녁에는 어두워서 약간 초초하기만 했는데 숙소를 떠나오면서 보니 그게 아니다. 꼬불거리는 길이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재미있다.
서울아리랑에 들러 김사장과 같이 화장장에 들러 죽은 이들을 태우는 것, 재를 강물에 흘려보내는 것 친척들이 강가에서 삭발하는 것 등을 보고 원숭이 공원에 들러 공원 꼭대기에 있는 사원(라마, 힌두, 불교) 등과 카트만두 시가지를 둘러본 후 오후에는 파칸시티에 들러 박물관 관람을 했다. 당시의 건축물에 목공예품이 걸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밤에는 시내 번화가를 구경하고 아리랑에서 석별의 만찬을 나눈 뒤 숙소에 돌아와 네팔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11월 19일(화)
드디어 출국의 날이 왔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부정확하다더니 9시30분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네팔트레킹도 마감할 때가 온 것이다. 약 30분 지연 출발한 뒤 방콕에는 14:15분경(현지시간)도착 약 11시간가량 머문 뒤 서울로 출발하게 되는데 사연인즉 네팔비행기 도착시간이 부정확하여 자칫 연결 비행기를 이용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경우가 있어 취한 선택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지루하고 지루한 대기시간 이곳저곳 면세점을 구경해 보지만……. 드디어 20일 새벽 1시경 대한항공 652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돌아가니 만감이 교차된다.
특히 고소증에 고생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젖어있다보니 피로는 밀려오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20일 새벽 7시 30분경 드디어 인천공항에 비행기는 도착하고 긴 여행의 막은 내렸다.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니 마음도 포근해지고 가볍다.
이번의 긴 여행이 내 자신 되돌아보는 기회가 된 게 큰 보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