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기타의 인물
*1970년도 즈음의 출판물로서 이미 사망한 경우도 있으며, 최근의 일부 인물은 수록되지 않았음.
[알폰소 10세 (Alfonso X 1221-1284 일명 "ElSabio"[현명한 군주])]
그는 30년간의 재위 기간중 (1252∼82) 스페인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왕으로서 기록된다. 중세 로마 대법전이래 가장 광범위한 법전이라 할 수 있는 '칠부법전'. 역사책인 '총연대기'. 기타 천문학서 등 여러분야에 중요한 결실을 남겼다. 또한 4권. 420여곡에 달하는 'Las Cantigas de Santa Maria'(성모 마리아 찬가집)는 음악사적으로 보나 문학적으로도 중요한 곡집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정시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 스페인 산문의 창시자라고도 불리우는 알폰소 10세는 이 방대한 Cantiga들을 성모 마리아에 대한 예찬의 노래로 집대성했는데 특유의 갈리시아 지방(스페인 북동쪽 지방)언어로 쓰여졌다. 그 이유는 왕 자신이 지금의 표준어인 까쓰띠야어보다도 갈리시아 지방 언어가 보다 음악적이며 시적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사실 지금 학자들도 그렇게 평가하고 있다.) 알폰소 10세는 그 자신 스스로가 성모 마리아의 Trovador(음유시인)라고 자칭한 것처럼 직접 작곡과 시를 썼다. 400여곡의 Cantiga는 여러 능력있는 음악가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는데 당시 스페인 뿐만 아니라 국외의 유명한 시인과 음악가들이 모두 협력하여 집대성된 것이다. 특이한 점은 스페인에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던 이슬람권의 요소도 많이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Cantiga는 Narrative part가 있으나 10,20,30번 처럼 각 10의 단위로 나누어지는 곡들은 Narrative part가 없으며 모두 알폰소 10세 자신의 작품으로 일명 'Alfonso's Chant'라고 불리운다. 이 방대한 찬미가들은 모두 네개의 사본이 발견되어 오늘날 고증을 거쳐 연주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마드리드 근교의 엘 에스꼬리알 성당사본, 똘레도 대성당사본, 그리고 이탈리아피렌체사본이 그것으로 각기 사본에는 13세기 당시의 상용악기와 연주형태 및 연주 방법 등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 상세히 그려져 있으며, 그 시대의 복식, 풍속등을 엿볼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
[끄리스토발 데 모랄레스 (Cristobal de Morales. 1500-1553)]
16세기 스페인 종교음악의 틀을 만든 그는 당시 스페인의 '영광'으로 추앙받았다. 남부 안달루시아지방의 주요도시인 세비야(Sevilla)태생인 그는 1526-30년 사이 5년동안 까스티야. 아빌라 성가대장에 취임하여 활동했다. 그 후 1535년 파울로3세의 성가대 가수로 뽑혀 로마에 가게 된다. 10년간 그곳에서 활약하면서 미사곡집등을 출판하고 1545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후에도 여러 곳(똘레도, 말라가 등지)에서 성가대장으로 활약하는데 종교음악에 대한 비중이 매우 컷던 그당시 성가대장의 음악적, 사회적 위치는 대단한 것으로 각 도시의 성가대장들은 실제 그 시기의 음악적 흐름을 이끌어 나갔으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모랄레스는 140여곡을 종교적 합창곡을 작곡했으며 여기에는 23편의 미사곡, 91편의 모데트, 18개의 마니피카트 등이다. 그의 음악은 수준높은 다성음악기법과 힘차고 굴곡있는 감정 표현이 특징이다. 음악사에 길이 남은 팔레스트리나가 25년 선배인 모랄레스의 음악을 본보기로 삼고 공부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Tomas Luis de Victoria. 1548-1611)]
모랄레스의 음악적 유산은 그의 제자 프란시스코 구에레로(Francisco Guerrero)에 의해 이어지지만 그 후 스페인 황금시기의 종교음악은 토마스 루이스 데 빅토리아에 의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그는 아빌라 태생으로 그 곳 대성당 합창단원으로 있던 중 국왕의 후원으로 로마에서 팔레스트리나에게 배운다. 1569년 부터는 사회적 명성을 얻고 매우 출세를 하게 되나 이 모든 명예를 버리고, 1575년 성직자가 된다. 그 후 평사제로서 오직 종교음악에만 매진하여 세속곡은 한곡도 쓰지 않았으며 20여곡의 미사, 50여곡의 모데트등 모두 200여곡에 이른다.
[돈 루이스 밀란(Don Luis Milan) (1500~1566)]
1500년경 스페인에서 출생, 1566년 사망한 기타의 전신인 비에라 주자이며 기악 작곡가중 역사상 가장 오래된 사람이다. 2권으로 된 최초의 곡집인 "엘·마에로스트"는 1535년에 바랜시아에서 출판 했다. 유명한 "파바나"나 환상곡은 "엘·마에로스트" 곡집에 있는 곡이다.
[디에고 오르티스(Diego Ortiz.1510?-1570)]
마드리드 근교 똘레도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주요 음악가들에 비해 기록이 빈약한 편이다. 그러나 그가 연구, 저술한 이론서는 매우 귀중한 음악적 자료로서, 16세기의 음악을 재현하는 요즈음 더욱 더 그의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훌륭한 작곡가들의 작품들이 후세에 전하여 오는것은 인쇄 출판의 도움없이 어려웠듯이 당시 연주되던 관습과 여러가지 실례를 정리, 연구하여 학문적으로 설명한 음악 이론가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계승 발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것이다. 음악이론가들의 말없는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물론 오늘날에는 작곡, 연주, 음악학적 이론등 각각의 분야가 세분되어 전문화가 이루어졌으나 옛날에는 이 모든 것이 한사람에 의해 이루어지곤 했다. 오르티스 역시 당시의 음악적 실례들을 모으면서 자신의 작품을 작곡하여 수록했으며 그 당시 연주가의 입장에서 연주법을 충실히 설명했으며 더 나아가 음악적 근거까지 밝히고자 노력한 음악학자이기도 하다. 비올론, 즉 당시 비올라 다 감바에 대한 지침서인 이 책은 종지형 선율 및 punto, paso라고 표현한 음형에 대한, 장식적 변주에 대한 해설서(1553년)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 기악 연주의 실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이 책에서 그 실례로 쓴 악곡들(레세르카다)은 음악적으로도 훌륭하다. 오르티스의 레세르카다(Recercada)는 환타지아(Fantasia)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16-7세기 환타지아는 대위법적 기법을 취한 것으로 낭만파 시대나 그 후 자유로운 형식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환타시아는 엄격한 대위법이 주류를 이루나 리세르카레의 자유로운 변형이라고 생각되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명칭은 당시 류트 주자들에 의해 먼저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 그 밖에 이 시대에 참고될 기념비적 이론서로는 세비야 출신의 수도사이며 이론가인 후안 베르무도(Juan Bermudo. 1510-1565)가 쓴 '악기 해설서(Declaracion de Instrumentos Musicales, Osuna. 1555)'가 있다. 여기에는 당시 사용되던 클라비어코오드, 비우엘라, 기타라에 대한 언급이 자세히 되어 있다. 조율법, 연주법, 연주 관행등에 관한 설명이 매우 귀중한 자료로 여겨지는 책이다.
[루이스 데 나르바에스(Luis de Narvaez) (1510년경)]
1510년경 스페인에서 출생한 소경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실명전에는 마부였지만, 변주곡 형식의 선구자였으며 1538년에는 7개의 곡집을 출판했다.
[알론소 무다라 Alonso Mudarra(1510경 - 1570경)]
16세기 초 세빌리아에서 태어난 비엘라(Vihuela)주자이며 작곡가였던 그는 친왕령(親王領)의 공작가(公爵家)에서 성장하며 음악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세빌리아 사원(寺院)의 역승(役僧)으로 1556년 순시관(巡視官)에 임명되고 1566년에는 악장(樂長)이 되어 1568년에 사원의 오르간 건설에 참가하였다. 1546년 비엘라를 위한 세개의 곡집을 출판했는데 이 곡집에는 Cancion, Pavana, Galliard, Romanesca, Fantasia, Soneto 등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중의 가곡은 민요사(民謠史)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는 성직에 있으면서 종교음악, 궁정음악, 민중음악을 흡수하여 자신의 음악속에 반영시켜 오직 예술과 신(神)앞에 음악을 바친사람이라 할 수 있다.
[빈센조 갈릴레이(Vincenzo Galilei) (1520~1591)]
1520년 이태리에서 출생, 1591년 사망한 유명한 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아버지로서, 기타의 전신인 류트 주자이자 문학가로서도 유명 했으며, 1581년 "고대 음악과 현대 음악과의 대화"를 출판 했다. "류트"를 위한 6개의 소품등 다수의 류트 작품이 있다.
[안토니 홀보네 Anthony Holborne (1545경 - 1602)]
반도라(Bandora:류트족의 악기로 Bandora, Pandora라고도 부른다.) 작곡가로서 그의 명성이 한창 영국과 유럽대륙까지 전해지던 시기에 즈음하여 2년간 외국여행을 계획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그는 학식있는 신사였다고 전해지며 J. Dowland와도 친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다. 작품은 52개의 Lute를 위한 독주곡과 15개의 반도라(Bandora)를 위한 독주곡이 현재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전부 1976년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한 [Anthony Holborne 전집 제1권]에 포함되어 있다. 그의 곡에는 폴리포니(Polyphony; 둘 이상의 성부가 각각 독립적인 입장에서 대위법적 원칙에 맞게 진행되는 음악으로 르네상스시대에 발전하여 18세기 전반 바하를 정점으로하여 완성됨. 대표적 양식으로 Fuga형식을 들 수 있음)적 요소가 강하여 기교적으로도 힘든 작품이 많다.
[다울랜드 버드와 류트 음악 (1563-1626)]
다울랜드는 영국은 물론 그 당시 유럽전역에서 류트연주의 최고 명인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특히 그럴만한 까닭으로는 1579년 경에 외국으로 친성방문을 떠나는 사절단을 따라서 함께 여러나라를 방문하며 그의 류트음악을 들려주었던 문화 사절의 역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다울랜드는 오랜 여행후,84년에 귀국하여 88년에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음악학사가 되는 영예까지 받았었다. 다시 음악의 순례를 떠났던 그는 94년에서 95년사이에는 베네치아와 피렌체에 머물렀었으며, 98년에는 덴마크의 왕 크리치스인 4세를 섬기는 류트주자로서 8년의 세월을 보냈었다. 1606년에 런던에 돌아와서는 왕실부속류트주자의 지위에 머물렀다. 다울랜드는 문호 세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서, 영국 엘리자베드 왕조의 찬란한 문화시대의 교양을 지닌 예술인이었다. 감미로운 선율과 울림이 큰 화성의 류트반주에 의한 가곡을 노래하는 가수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그는 4권의 가곡집(순례의 위안) 외에도 80여곡의 노래로 가곡예술의 발전에 징검다리를 놓았다.(흘러내리는 나의 눈물)이라는 당시에 높은 인기를 얻었던 가곡을 기악합주용으로 편곡한(눈물의 파반)은 학문적인 관점에서 고음악재현이 활발해진 오늘말 자주 연주되는 음악의 하나가 되고 있다. '파이퍼 선장의 갈리아드'와 '엘리자베드 여왕의 갈리아드'는 그 당시의 센티먼트와 유머를 담은 곡으로 ,갈리아드는 16세기 행하여졌던 3박자의 경쾌한 춤곡이다.(존 랭턴경의 파반)은 느린 2박자춤곡의 우아함을 지닌 선율로서, 파반의 유래와 변천은 조금 복잡하다. 공작을 흉내내서, 위엄있는 모습으로 느리게 추어지는 이 무곡을 스페인의 기원으로 생각되고 있다. 종종 빠른 3박자의 갈리아드와 짝을 이루어 연주되는 경우가 있다. '탈리턴의 부활'과 '클립턴 부인의 정신'은 궁중음악 풍의 우아함을 담고 있다. 버드의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도 역시 엘리자베드시대 왕조의 최대의 음악가였다. 탈리스에게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탈리스와 함께 궁정예배당의 오르간 주자로 활동하는 한편 역시 탈리스와 함께 악보 출판에도 활발한 노력을 보여주었다. 영국 교회를 위해서 찬송가를 많이 썼던 버드이지만, 자신은 카톨릭 신자로서 카톨릭을 위한 미사곡도 많이 남기고 있다. 수록된 류트음악은, 버지널(16세기에 영국에서 유행되었던 쳄발로의 일종)의 특성을 류트 음악으로 옮기고 있었으며 또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영국 마드리갈의 개척자의 한 사람인 버드의 감각이 순수하게 담겨져 있다. '파반'과 '갈리아드'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류트음악내용을 들려주며, '나의 군주 윌로우비의 귀향'은 환영의 기쁨을 담은 밝은 선율로 넘친다. 엘리자베드 왕조의 가곡예술을 들려주는 6곡의 성악곡은 류트반주에 의해서 테너가 노래한다. 1597년 에서 1603년 사이에 출판되었던 제3권 까지의 노래집인 (Songs or Ayres)에 수록된 음악이 중신이다. 제1권에 실린 (그대, 매정스럽게, 나의 마음을 약탈해 가는가)는, "그대, 매정스럽게, 나의 마음을 약탈해 가는가, 그리고 나를 떠나려는가? 잘가오! 잘가오! 그렇지만 이제 아니 영원히 나는 헤어져야 하다니, 오 비참함이여! 달콤하게 입맞쳐 주오, 달콤하게 나의 보석같은 사랑아!" 라는 사랑의 호소이다. 제2권에 실린 (슬픔 이여, 멈추어라!)는 "슬픔이여, 멈추어라! 애처롭게 비참한 심경에 빠진 녀석에게 정말 후회의 눈물만 주다니. 가거라, 절망이여! 그대 고통을 안겨주는 두려움과 함께, 아 가련한 나의 마음을 놀라게 하지말아다오." 의 내용을 노래하고 있다. 제3구권의 (가장 낮게 자란 나무도 꼬대기가 있듯이)는 같은 사랑의 노래이면서도 재치에 넘치는 비유의 해학감을 담고 있다. "가장 낮게 자란 나무도 꼭대기가 있듯이, 개미도 제 고민거리가 있고, 파리도 분통함을 풀게되고, 조그만 불꽃마저 뜨거움을 지닌다오. 그리고 치렁한 머리결은 비록 조그맣더라도 그림자를 던질줄 안다오, 그리고 벌은 커다란 모습은 아니더라도 침을 간직하고 있오. 바다도 흘러온 근원이 있고, 그리하여 얕은 여울이 흐르듯, 거렁뱅이에게나 임금에게나 사랑은 한마음이라오." 제2권에 수록된 (시간의 맨 첫 자손이여, 옛 시간이여)는 교훈적인 내용을 상징적으로 시어에 함축시키고 있다. "시간의 맨 첫 자손이여, 옛 시간이여, 안락한 후계자여, 힘의 적, 사랑의 고뇌, 헌신을 마음에 품고, 호방한 젊은은 무담의 용기를 구하도다, 스스로를 위하여 속세의 행위를 구하지 않나니, 허나 한숨과, 눈물을, 맹세, 기원을, 그리고 희생을 생각하나니, 연극과, 가면, 마상창시합이라거나 창을 꽂는 궁리 이듯."
다울랜드는 1610년에 그의 아들 로버트를 위해서 리어경의시에 노래를 붙인(음악의 향년)에 실린(어둠에 쌓여 생각에 잠기오)는"어둠에 샇여 생각에 잠기오,대지는 슬픔이어라;지붕은 모든 즐거운 광휘를 막아 나에게서 절망하게 하니;습기에 젖은 검은 대리석의 벽은 아직도 흐느끼어;나의 음악은 지옥처럼 삐걱거리며 달콤한 잠을 막는 소리로 울려 버린다." (말해주오, 사랑이여, 언젠가 그대 찾을 수 있었던지)는 전기한 가곡집 제 2권에 수록되어있다."말해주오, 사랑이여, 언젠가 그대 찾을 수 있었던지, 변치않는 사랑의 마 음을 지닌 여인을? 오직 한 사람 뿐. 그 희귀의 모범은 누구일까? 그녀, 그녀, 그녀, 바로 그녀 인데, 그녀는 미와 사랑의 여왕이어라."
[가스파르 산스Gaspar Sanz(1640 - 1710)]
Robert de Vise(프랑스, 1650경 - 1725경), Fransico Corbeta(이태리, 1612경 -1681), Sanz를 일컬어 전고전시대(前古典時代)를 장식한 기타의 3대 거장이라 부른다. Sanz는 스레인의 가란다에서 태어나 살아망가 대학에서 신학학위를 얻고 이태리에 건너가 레리오 고리스다에게 기타를 배웠는데 그 당시 이태리는 기타음악의 전성시대였다. Sanz는 나폴리 음악교회의 오르간주자인 크리스토 바루.갈리산에게 오르간 연주법과 음악이론을 배웠으며 귀국 후에는 3권의 5현 기타책을 출판하였다. 제1권은 1674년 [기타의 理論과 奏法]에 곡집을 첨가한 책으로 출판되었다. 그중에 e단조의 조곡(組曲)이 몇해전 파리 국제기타 콩쿨의 과제곡으로 나타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Sanz의 곡은 de Vise의 곡과 같은 5현 기타용으로 되어있어서 현대기타의 제6현은 사실 사용하지 않아야 하지만 E. Pujol(1886년 스페인 태생 Vihella주자이며 기타리스트. 비엘라, 류트음악을 기타곡으로 옮기는데 공헌하였고 세계적 기타의 역사가로 권위를 갖고 있다.)의 편곡은 현대기타의 레파뜨와로서 제6현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훌륭한 것이며 세계 기타리스트의 애주곡으로 되어 있다.
[로베르트 데 비제(Robert de Visee) (1650년경-1725년경)]
비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확실한 전기가 전해 지지 않고 있으나, 17세기때의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이다. 후란시스코 코르베타에게 사사 했으며 코르베타가 영국을 떠난후 그의 뒤를 이어 받아 루이 14세의 궁정 기타 교수로 있었다. 1682년 루이 14세에게 바치는 많은 무곡을 파리에서 출판 했다.
[헨리 푸셀 Henry Purcell(1659 - 1695)]
17세기 후반에 단음악을 사용한 오페라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은 영국사상 최대의 음악가이며 오페라의 대가인 퍼셀이다. 그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쳤는데 그 이후 영국 극음악의 장래는 희망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바로크 중기(中期)에 있어서 영국최대의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대위법적인 기법에 영국과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받아 영국음악에 동화시킨 천재적인 이 음악가의 특성은 자유분방함에 있으며 아름다움과 영국풍의 성격이 풍부하게 발휘되어 있다.
[로메아우 J.P Rameau (1683~1764)]
Rameau는 프랑스의 디 죤에서 태어나 교회의 오르간 주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어린시절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했으나, 그 곳에는 작곡 선생이 없어서 작곡을 혼자서 공부했다. 그는 바하 보다 2년 먼저 태어나 14년 후에 사망했다. 그가 다른 음악가와 다른 점은 일류 음악이론가라는 점이며, 현재 음악의 통념이 되어 있는, 화성에 대응하는 사고의 기초와 화성학에 대응하는 학문의 기초를 만들었다. 즉, 현재 우리들이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화성학을 공부하지만 그 화성학이 음악 전체의 기초라는 생각을 갖게끔 만든 사람이 바로 Rameau이다. 그는 이론가다운 차가운 면이 작품이 나타나지만, 그와는 반대로 고도의 통속성(대중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말하는 통속성이란 후에 차이코프스키, 시베리우스, 모차르트가 갖고 있는 통속성을 의미한다. 결국 만인에게 사랑받아 연주되고 불려지는 소위 통속명곡을 쓴 작곡가이다. 여기에 실린 곡들은 원래 크라브상 곡으로 100년전부터 바이올린 독주곡으로 편곡되었고 바이올린 주자에 의해 원곡이 바이올린 곡으로 여겨질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이 곡은 각종 장식음부나 트릴이 왼손에 의해 1개의 줄만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느나 큰 연주장에서 연주할 경우 울림의 효과가 크지 않으므로 Ida presti & A.Lagoya의 연주에서 느낄 수 있듯이 2개의 줄로 연주하는 것이 더 나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도메니코 스칼라티 Domenico Scarlatti (1685~1757)]
J.S.Bach와 동시대 작곡가로 나폴리 오페라계의 중심 인물인 알렉산드로 스칼라티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 의해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을 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음악의 중심부로 특히 나폴리, 베네치아, 로마가 중심지였다. 유럽 각국의 오페라 극장은 이탈리아 가수와 지휘자가 독점하고 있었고 궁정은 이탈리아 연주와 교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스칼라티도 국내에서는 물론 34세 때에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궁정 쳄발로 주자, 44세 때에는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음악교사로 있었다. 쳄발로 주자로는 유럽에서 제1인자로 오르간과 쳄발로 연주에 능했던 Handel과 한때 경합을 겨루었다. 쳄발로 음악을 젊은시절부터 쓰기 시작하여 545곡의 소나타를 작곡했다. 이 소나타 형식은 후에 모짜르트의 소나타에 많이 사용되었고 이탈리아 소나타라고 하는 하나의 형식을 낳았다. Segovia에 의해 그의 소나타가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음으로써 그의 545 소나타가 기타계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이 곡은 기타곡으로는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곡으로써 리드미컬하면서 밝은 느낌의 곡으로 연주에 있어서도 큰 무리가 없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바하의 류트 음악 (1685)]
수 천년의 역사를 가진 류트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널리 사랑받았던 악기이다. 그러나 바흐가 태어날 무렵에 이 악기의 인기는 벌써 시들해져 있었고 18세기에 거의 잊혀진 악기로 물러나 있었다.바흐가 류트를 위해 쓴 작품들은 그러므로 이 악기의 운이 다은 후에 그 말미를 장식했던 작품들이라 할수 있겠다. 방대한 작품을 남긴 바흐는 소수이긴해도 몇몇 작품에서 류트를 비중있는 악기로 다루고 있다.그는 <요한 수난곡>에서 베이스 '아리오소'의 반주악기로 류트에 중요한 역활을 부여한 바 있고, 류트를 위한 독주곡으로도 7곡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음악학자들은 그 7개의 작품들을 놓고 처음부터 류트곡이었는가의 여부로 인해 골치를 앓아온 것이 사실이다. 류트 독주곡으로 남은 곡 중에는, 거트로 만들어지고 류트와 흡사한 음색을 내는 '류트 하프시코드'를 위한 곡들도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4곡은 바흐의 자필(혹은 그를 도운 필사가의 필적)로 볼때 애초부터 류트 곡이었음이 확실하다. 바흐의 류트곡들은 스타일과 작법에 있러서 그의 건반악기 작품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류트 곡이라는 것이 확실한 작품조차 악보상의 아무런 변화를 가하지 않고도 건반악기로 연주할 수가 있다. 형식적으로 이들 류트 곡들은 모음곡.프렐류드.푸가,즉 바로크의 주요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오리지날 류트 곡들이,바흐가 현악기나 건반악기를 위해 썼던 다른 어떤 곡들의 수준에 비해 부족함이 없듯이, 편곡된 류크 곡들의 수준 또한 그에 대등하거나 더 뛰어나다. 사실 오리지날 작품과 편곡된 작품의 구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크 작품에서 으례껏 중시되는 것은, 작곡자 자신의 편곡인가 혹은 다른 사람의 편곡인가 하는것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본질 때문이다.
[하이든 (1732-1809)]
젊은 하이든은 길모퉁이에서 무곡과 유행하는 세레나데를 연주하며 그의 회유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또 작곡가 니콜라 폴포라의 시종으로 잠시 있으면서 음악교육을 받는 것과 유복한 인사들에게 소개되어지는 댓가로 늙은 남자의 변덕을 참아야만 했다. 그의 제자였던 튠백작 부인은 하이든을 휘른베르그가의 남작 칼 죠셉에게 소개했는데, 그는 하이든을 1755년부터 1759년 동안 바이올리니스트와 작곡가로써 채용하였으며, 하이든은 그의 첫 현악 4중주 작품 1과 2를 남작을 위해 썼다. 몇개의 하이든 초기 현악 4중주곡들은 류트와 현을 위해서 편곡한 원고가 남아있다. 언제, 누구에 의해서 편곡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작곡자 자신에 의해 직접 편곡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바로코시대에는 류트를 위한 4중주곡들이 있었지만, 18세기 말 부터는 아주 진 부한 악기로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특별한 애호가들외에는 더이상은 알려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악 4중주 E장조작품 2의 2에서 편곡한 하이든의 작품은 원래 5악장으로 되어 있지만 류트를 위한 편곡에서는 알레그로, 아다지오, 미뉴에토와 트리오, 휘날레(프레스토)의 4악장으로 되어있다. 이 곡은 밝고 명랑하며 장식적인 구조로 해서 오히려 4중주곡이라기 보다는 만찬이나 즐거운 저녁시간을 위한 회유곡에 가깝다. 오늘날에는 바로크시대 큰 류트의 부족으로 대신 기타로 연주한다.
[루이지 보케리니 (Luigi Boccherini,1743-1805)]
8세기 말,르네상스시대의 종말과 함께 재능있는 아마츄어 귀족음악가들이 활동하는 시대가 시작된다. 전문가들에 의한 연주회는 사라져갔으며, 때문에 초기 실내악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를 띄고 있다.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1743-1805)는 이러한 과도기에 귀족들의 야유회를 위해 4중주곡과 5중주곡을 쓰느라고 그의 작품생활의 대부분을 헌신한 첫 희생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태리의 루카에서 태어난 보케리니는 이미 10대에 첼리스트로써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바이올리니스트인 그의 친구 필립포 만프레디와 프랑스 순회공연중, 보케리니는 마드리드로 갔는데 거기서 스페인 대사로부터 왕실의 후원을 받을 것을 권고받았다. 그러나 후원은 쉽게 얻을 수 없었고, 스페인에서의 1년 후에야 이루어졌으며 보케리니가 작곡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많은 작품들이 의뢰되었지만, 그 때까지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돈 루이스(Don Luis)왕자의 관심을 끌어, 그의 실내악단의 첼리스트겸 작곡가로 임명받았다. 보케리니는 그의 여생을 스페인에서 보냈다. 1769년에서 1785년까지 15년 동안 그는 돈 루이스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돈 루이스가 죽자 보케리니는 마드리드로 돌아가 오스나공작 부처의 살롱을 위한 음악 지휘자가 되었다. 그의 실내음악들은 스페인 귀족사회에서는 연주되어지지 않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하이든의 작품들을 출판했던 출판업자비에니즈사에 의해 그의 작품이 보급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프러시아의 프에드릭 빌헬름 2세는 보케리니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고, 1786년에는 보케리니를 그의 실내악단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그의 작품중에서도 가장 원숙하고 뛰어난 그의 말년의 작품을 포함해서 현이나 피아노와 현을 위한 4중주곡과 5중주곡들의 대부분이 프러시아왕을 위해 작곡되었다. 스페인 민속음악은 확실히 어느 정도는 보케리니에게 영향을 끼쳤다. 왕실기타리스트인 파드레 바실리오가 스카를랏티의 팬댕고(3박자의 스페인 무곡)를 멋지게 즉흥연주하는 것을 듣고서 감동한 보케리니는 1788년에 쓴 '두개의 첼로를 위한 5중주 작품 50의 2'의 첫악장 그라베에 팬댕고를 기타와 하프시고드를 위한 것으로 편곡하였다. 1799년에 보케리니는 많은 그의 피아노 5중주곡을 기타 5중주곡으로 직접 편곡하였다. 이들 중 6곡은 아직도 출판되지 않고 있다. 현악 5중주 E단조는 유쾌하기도 하고 심오하기도 한 작품으로써 현악 4중주의 개척자의 한사람으로 그의 명성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작품이다. 알레그로 모데라토,아다지오, 미뉴에트, 알레그레토의 4악장으로 되어 있다. 보케리니는 그를 받아준 스페인에서는 크게 인정받지 못 했지만, 유럽에서는 상당히 큰 명성을 얻었다. 1790년 한 독일사전에는 "위대한 이태리 기악 작곡가의 한사람...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하이든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고 쓰고 있다. 보케리니와 마찬가지로 하이든(1732-1809)은 그의 실내악 작품으로 해서 재능있는 아마츄어들로 부터 추앙되어졌다. 젊고 노력하는 음악가로써, 또 소나타와 3중주, 4중주 곡들을 작곡하여 그의 명성은 높아갔다.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성 스테판 성가대에서 17세에서 24세까지 8년간을 있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근근히 이어갔다. 보케리니는 1789년 12월 27일에 출판업자인 프레엘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섯곡의 기타를 위한 5중주를 완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여섯곡의 기타 5중주는 기타리스트인 베나벤테(Marquis Benavente)에게 헌정되었다. 이 곡들은 자신의 초기 작품을 각색한 것으로, 예를 들면 처음의 두곡은 작품 57의 피아노5중주를 개작한것이다. 만약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이 음악을 듣는다면 이 곡이 애초부터 기타를 위한 곡인가에 대해서 깊은 의혹을 품을 것이다. 어쨌던 우리는 이곡을 통해서 보케리니가 기타에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중주 제 1 번 D장조(Gerard No.445)에 있어서 제 1 악장의 발전부와 미뉴에트의 트리오 부분은 대위법적인 경향으로 쓰여졌음을 보여준다. 칸타빌레의 2악장은 아주 친밀하고 매력적인데, 여기에서의 화성적 탐구와, 마지막 악장의 발전부의 형식적인 전개에 있어서 이 작품이 보케리니의 말년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제 2 번 E장조(Gerard No.446)는 자유로운 전조(轉調)로 된 제 1 악장 다음에 아다지오 악장이 나오는데 아다지오에서 단순한 구성의 6/8박자의 알레그로로 쉬임없이 이어진다. 마지막 악장은 미뉴에트의 쳄포로 된 악장으로 싱코페이션이 흥취를 돋군다.장조와 단조 사이의 급격한 변화가 특색이 있는데 보케리니는 이에 "폴라카"라는 제목을 붙였다. 폴라카는 「폴란드 풍으로」라는 뜻이다. 6개의 기타 5중주를 개작한지 1년후인 1799년에 보케리니는 또 다른 초기의 작품들을 기타와 현악 사중주를 위한 곡으로 개작하였다. 그 당시에 개작한 여러 작품중에서 현재는 두곡만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제 7 번 E단조(Gerard No.451)는 보케리니가 1797년 경에 작곡한 피아노 5중주 작품 56-1을 개작한것이다. 이 곡은 다른 곡처럼 진보적인 양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세련되고 독립된 아다지오 악장의 양식면에서 고전적이라기 보다는 로코코 양식에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3악장 미뉴에토의 특징은 현저한 변화와 사운드의 자연스러움에 있다. 그리고,마지막, 알레그레토 악장에서는 놀랍게도 로코코 우형의 세련됨과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다.
[시마로사 D.Cimarosa (1749~1801)]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Cimarosa는 유년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나타내어 나폴리 음악원에 입학을 허가받았다. 여기에서 11년간 음악가로서의 교양을 쌓고 22세때 일약 유명해져서 그의 명성은 런던, 파리, 본을 위시한 전 유럽에 알려졌고 모짜르트를 능가할 만큼의 인기를 차지했었다. 프랑스 공화군에 의해 나폴리가 점령당했을 때 시민의 운동에 참가하여 수 개월간 감금되었다가 나폴리에서 추방당했다. 이 사건이 그의 건강을 해쳐 급사에 이르게 된다. 대단히 많은 곡을 작곡한 그는 오페라를 시작으로 칸타타, 교회음악,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등이 있으나 기타를 위한 곡은 없고, 현대의 기타리스트에 의해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 등이 기타로 편곡되어 있을 뿐이다. 대체로 기지가 풍부하고 밝고 생기가 넘치는 곡을 주로 썼으나 e단조의 소나타는 소나타 형식을 갖춘 소위 소나타라기 보다도 칸타타에 대응하는 소나타로서 기악곡 정도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이 곡은 오보에 콘체르토의 테마로도 사용되고 있는 아름다운 곡이다.
[마테오 알베니스]
마테오 알베니스(Mateo Albeniz, 1760 1831)역시 스페인의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 스페인에 만연하는 이태리풍조에 반기를 들고 피아노 의식음악과 스페인의 현대 오페라 음악을 작곡하는데 전념했다. 그의 아들 페드로 또한 스페인의 현대 피아노 주법의 창시자로서, 음악가정으로 빛난 이름을 얻기도 했다.
[호세 갈레스 Jose Galles (1761~1836)]
스페인 민족음악의 선구자인 파드레 안토니오 솔레르(P.A.Soler)와 같이 그 시대를 주름잡던 거장 도메니코 스칼라티(D.Scarlatti)의 영향을 받아 하프시코드를 위한 많은 소나타를 남겼다. 그의 곡의 특징은 끊임없는 정열과 우아함, 불규칙적인 리듬과 분방한 멜로디에 있으며, 그 시대의 다른 음악과도 비교가 된다. 정도를 걸었던 스칼라티의 형식과는 매우 대조적이며, 근대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레오나르 데 칼(Leonard de Call) (1768-1815)]
1768년 "윈"에서 출생, 1815년 "윈"에서 사망한 기타리스트이다. 플루트, 만도린, 기타는 물론 가곡의 작곡가로서도 유명 하였다. 작품은 "소나타", "플루트와 기타를 위한 세레나데", "기타 2중주", "만도린 독주곡" 등이 있다.
[페르디난도 카룰리 Ferdinando Craulli (1770-1841)]
나폴리에서 태어난 페르디난도 카룰리 Ferdinando Craulli (1770-1841)는 완전히 독학하여 연주가로서 이름을 날린 음악가이다. 그는 38세 되던 해 파리에 거주하였으며, 그 곳에서 많은 학생들과 사람들이 그의 비루투오스적인 자질을 보고 그를 따랐다. 그가 쓴 교본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되었으며 모두 합쳐 350권이 넘는 출판물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는 소르나 쥴리아니와 같은 수준의 음악가는 결코 아니지만 음악가로서의 성공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보통 수준의 아마추어가 즐겨 칠 수 있는 단순한 작품을 써서 당시의 대표적인 출판사에 의하여 쉽게 출판되었다. 카룰리의 작품에는 수 많은 독주용 소품 외에, 독주 소나타, 이중주 소나타, 수 많은 주제와 변주곡, 작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주곡과 "군대가 진군을 시작하다 The Troops Begin to Embark", "사나운 폭풍우 The Storm Rages" 등의 진기한 이름이 붙은 표제 음악이 있다.
[페르난도 소르(Ferrnando Sor 1778-1839)]
19세기초 고전파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카탈로니아 출신의 작곡가 겸 기티리스트였던 페르난도 소르를 들 수 있는데,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다른 작곡가의 작품보다 오늘날 널리 연주되고 있다. 그는 본명이 호세 마카리오 페르난도 소르스 이 소르스(Jose Macario Fernanado Sors y Sors)이며 1778년 2월 14일 (1880년 2월 17일생이라는 설도 있음)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였다. 소르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초까지 활약한 가장 위대한 기타리스트이며 이태리의 쥴리아니 (M.Giuliani)와 함께 고전파의 쌍벽을 이룬 존재였다. 5세 때부터 작곡을 할만큼 신동으로 주위의 주목을 받을 만큼 천부적인 음악의 재질을 타고 났으나 그이 부친은 그가 군인이나 문관이 될 것을 기대했었다. 부친이 사망한 후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소르는 카탈로니아의 몬토세라토 수도원 부속학교에서 바이얼린, 첼로, 화성학, 대위법 등을 공부하여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태리 가극이 전성을 이루었고 오페라에 감명을 받은 소르는 최초로 [칼립소섬의 텔레마코]라는 오페라를 작곡하여 1797년 8월 25일 바르셀로나의 프린시플 극장에서 상영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20대 초반에, 고야의 후원자이기도 하였던 알바 공작부인의 가족으로 살았다. 그 뒤에는 당시 막강한 메디나셀리공작의 후원을 받게되었으며 오페라, 교향곡, 오라트리오, 3개의 현악4중주, 여왕봉 찬가, 피아노 또는 기타반주의 스페인 가곡등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편안했던 이같은 생활은 요셉 보나파르트가 스페인에서 괴뢰 정부를 세움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소르는 그 당시 고야를 포함한 많은 스페인 지식인들과 함께 프랑스 해방 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지원으로 스페인의 왕위가 부활되자 현명한 소르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망명하여 예술가로서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런데, 소르는 이 망명으로 인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더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그의 오페라 "신데렐라 Cendrillon"가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 1823년에서 1830년까지 무려 104회나 공연되었다. 그의 기타 연주도 런던과 파리에서 계속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로 인하여 기타의 대중적인 인기가 다시 살아났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가 기타에 전념하게 된 것은 케루비니의 격려와 모렛티의 기타연주를 듣고 나서부터라고 하는데, 파리와 런던 등 유럽 각지를 돌면서 순회 연주회를 가져 절찬을 받았으며, 또한 기타 음악 교사와 발레음악 작곡가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1817년 소르는 영국으로 건너가 마침 기타음악의 개화기였던 런던은 소르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기타연주에 열광적으로 호응하였다. 또한 소르는 Op.1 6개의 위악곡을 1819년 출판하였으며 기타를 위한 작품활동은 물론 오페라 작곡과 상을 계속하여 호평을 받았다. 런던시대의 소르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가장 화려한 명성을 떨치는 시기였으나 경제적으로는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1823년 파리에서 신작 발레 [신데렐라]를 상연한 후 당시 연주가들이 동경하던 러시아의 여행에서 7현 기타를 사용하던 그곳에서 6현 기타의 묘기를 보여 절찬을 받았다. 페데르부르그 (레닌그라드)에서는 국왕 알렉산더 1세의 장례를 위한 장송 행진곡을 작곡하였으며 모스크바에서는 니콜라스 1세의 즉위축하를 위한 발레 [엘큐르와 옴파레]를 작곡 상연하였다. 그후 파리에서 런던, 다시 파리로 돌아와 많은 콘서트에서의 활약과 오페라의 작곡을 계속하여 그의 위대한 재능과 빛나는 업적을 남겼으며 만년에는 빈곤과 병고, 사랑하는 딸의 죽음 등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생활끝에 1839년 7월 13일에 사망하였다. 소르는 '주제와 변주'형태를 좋아해서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노래를 주제로 변주곡들을 만들어냈는데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주제에 의한 변주곡도 그 유명한 예이다. <말브로우>변주곡에서 그는 고전적 전통에 의한 작법을 쓰면서 후기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의 스타일을 혼용하고 있다. 소르가 영국에 거주하는 동안 쥴리아니와 예술적 대립, 즉 소르의 우아하면서도 밝은 대위법적 악풍과 쥴리아니의 호화스러우면서도 직선적인 악풍으로 청중들까지도 두파트로 분리시켰다. 소르는 아구아도(D.Aguado 1784~1849 스페인)와 깊은 우정을 나누면서 한때는 수년간 동거도 하였으며 서로의 예술을 깊이 연구하였다. 아구아도의 손톱을 사용한 주법에 반하여 소르이 손톱 없이 하는 연주로 상반된 주법을 사용하였으며 서로 존경하며 우의를 두텁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소르는 두사람을 위한 연주회용 2중주곡인 [두 친구]를 작곡하였으며 이곡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계적 기타리스트들에 의하여 자주 연주되고 있는 명곡이다. 그의 많은 교육적인 작품은 기타의 연주 수준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쓰여졌으며, 매우 흥미롭게 쓰여진 그의 교본은 스페인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는 교본에서 기타의 기술적인 면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으며, 손톱의 사용이 편하다고 쓰고 있다.
[마우로 쥴리아니 Mauro Giuliani(1780 - 1840)]
고전파 음악의 또 다른 대표적인 음악가로는 이탈리아 출신의 마우로 쥴리아니(Maro Giuliani 1781-1828)가 있는데, 그는 바이얼린의 N. Paganini(1782 - 1840), 피아노 연주의 F. Liszt(1811 - 1886)에 필적하는 명성을 지닌 기타 연주의 대가였으며 F. Sor와는 3살의 차이가 있었지만 런던 음악계에서는 동시대의 라이벌이었다. 그는 1781년 보로니아에서 출생하여 1829년에 작고한 이탈리아의 기타리스트로서 스페인의 소르와 더불어 당시 가장 위대한 연주가 였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 플루트, 기타아 등을 공부 하였으며, 20살때에 이탈리아 제일의 기타리스트로 군림하였다. 그가 기타연주가의 대가로서 유럽전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처음 갖게된 것은 1800년경이었고 1807년에는 비엔나에 정주하였다. 비엔나에서 그는 슈베르트, 베토벤, 웨버, 훔멜과 같은 당대의 대작곡가들과 사귈 수 있었다. 안톤 디아벨리와는 특별한 친분을 가지고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베토벤은 자기작품 몇가지를 쥴리아니를 위해 편곡하여 1813년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초연(初演)시 바이얼린이나 플륫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악기로 반주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그곡들은 확실히 발표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23년 런던으로 건너가 연주했는데 거기서 그는 매우 유명해져서 런던에서 새로 발간된 한 기타연주 관계지는 그의 이름을 따라 [쥴리아니아드(Guilianiad)]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현재 아마 가장 많이 알려진 쥴리아니의 연주용 작품이라면 기타와 현악을 위한 협주곡 A장조 Op.30으로 이곡은 그가 작곡한 네개의 협주곡 중의 하나이다. Op.15"화려한 소나타" Op.71"3개의 소나티네" Op.69.70"가타아 콘체르트" 등의 걸작을 비롯하여 플루트, 바이올린의 작품, 그리고 기타아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등 300여 곡이 있다. 그는 수백곡의 피아노 작품을 작곡했지만 거의다 없어지고 현재는 디아베리 왈츠를 주제로한 베토벤의 <33개의 변주곡 작품번호 120>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작품 특성은 고전파의 정통적인 형식에 비엔나풍이 더해진 매우 맑고 유연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Sonata Op.15, C장조 Allegro 제1악장과 대서곡(大序曲) A장조에 있어서는 피아노 소나타와 유사한 소나타 법칙을 기초로 하여 작곡된 훌.스케일.피스(Full Scale Piece)가 그 특징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쥴리아니의 고도로 발달된 기교를 필요로 하는 것인데 다이나믹(강약법)에 대한 구조적 감각의 세련도를 요구하고 있다. 대서곡(大序曲)은 단조로 엮어지는 짧고 느린 서주가 있는 뒤, 장조의 소나타 악장이 전적으로 전개되는 곳이다. C장조 부분의 Allegro는 슈벨트적인 음형으로 속삭이듯하며 바로 진행된다. <소나티네 A장조 작품 68>은 소나타 보다 적은, 즉 축소형 소나타이다. 이곡 1악장은 A장조 2/4안단테 소스테누토 템포의 68마디밖에 안된다. 우아하고 품위있는 멜로디를 기타와 피아노가 서로 주고 받음이 특이하다. 제 2악장 역시 짧다. 빠른 론도의 곱고 귀여운 듯한 노래를 번갈아가며 하는데, 마치 하이든이나 클레멘티의 어린이들을 위한 곡 같다. <화려하고 큰 소나타 d단조 작품 102>는 스케일이 크고 비루투오적 요소를 내포한 콘서트용 작품으로, 이 두악기의 테크닉을 시험하는 좋은 곡으로 꼽히고 있다. 시작부터 무겁고 엄숙한 아다지오 부분이 지나면, 빠르고 기교를 요하는 알레그로로 이어진다. 2악장은 여자의 머리카락과 같이 매우 섬세하며, 수준 높은 테크닉을 요한다. 3악장 알레그로는 하이든풍의 고전파 형식의 미뉴엣과 트리오로 이루어진 직선적이라 볼 수 있는 악장이다. 소르는 주로 파리와 런던에서 인기를 얻었는데, 반하여, 쥴리아니는 1806년에서 1819년까지 비연주회 평과 다른 음악가들 간의 교우 관계와 그의 생애에 대하여 광범위하고 흥미롭게 연구하여 학위를 받았다. 그 논문 제목은 "클래식 기타의 탄생과 마우로 쥴리아니의 생애와 그의 작품에 나타난 당시 비인의 기타계"이다. 쥴리아니는 소르보다 더욱 많은 작품을 작곡하였는데, 소르의 작품 번호가 70번에 이르고 있는 데 반하여 출판된 쥴리아니의 작품은 151번에 이르고 있다. 쥴리아니의 성격은 다소 낙천적이었다고 생각되며, 그는 소르와 마찬가지로 가난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톤 디아벨리(Amton Diabelly) (1781)]
디아벨리라면 출판사 이름이나 피아니스트로 흔히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타곡도 많이 손을 댄 작곡가이다. 1781년 9월 6일 잘쯔부르크(Salzburg) 근교 마테시(Mattesee)에서 태어나 1858년에 작고한 그는 소년시절 미카엘 베른(Michaelbeurn)수도원의 성가대에서 음악을 배운 후, 잘쯔부르크대성당에가 계속했다. 신부가 되는 것을 원했던 부모뜻을 따라 뮌헨의 라틴어학교에서 공부를 한 후 라히헨하슬라하(Reichenhaslach)수도원에 들어갔다. 미카엘·하이든(Michael Haydn)과 친해져 그에게 작곡 공부 및 여러 거취문제를 상의했다. 1803년 바바리아 수도원을 나와 속세로 탈속애 비엔나에 갔다. 비엔나에서는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에게 배우고 베토벤, 슈베 르트 등과도 사귀었다. 피아노와 기타렛슨으로 생활을 하던중 카피(Cappi)를 만나 1818년 출판사를 설립, 1824년에는 독립해 단단한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돈도 많이 벌었다. 1807년 같은 나이 또래의 음악친구 쥴리아니를 만나 음악적인 친분뿐만 아니라 따뜻하고 뗄레야 뗄수 없는 긴밀한 우정을 나누었다. 그 무렵 기타는 왕궁의 높으신 어르신내들 앞에서만 연주를 많이 했고 대중들 사이에서는 반주구실 밖에 못했다. 쥴리아니가 새로 소개한 테르쯔(terz)기타와 피아노와의 2중주곡을 디아벨리는 작곡해, 대중들 앞에서 직접 연주함으로써 보급에 힘썼다. 쥴리아니의 <작품 30, 36, 37 협주곡> 연주 및 디아벨리 출판사에서 스코어 출판도 이 무렵이었고, 불우했던 기타리스트들을 도움은 물론 출판도 많이 해주었다. 베토벤은 1823년 디아벨리의 왈츠를 주제로 하여 33의 피아노 변주곡을 작곡 하였다. 작품은 피아노곡 이외에 소나타, 기타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등 다수의 기타 작품이 있다.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 (1782-1840)]
10세기가 될 때까지 기타라는 악기는 적어도 스페인 바깥에서는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낸 좀 희귀한 악기에 속했다. 스페인에서 기타는 이미 16세기경에 국민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밖의 나라에서는 보다 미묘하고 색채적인 류트에 밀려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가 어려웠다. 스페인에서도 르네상스및 바로크 시대를 살았던 이름 높은 음악가들은 기타보다 비후엘라(Vihuela)라는, 기타와 흡사하게 생겼지만 현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악기를 선호했다. 비후엘라는 기타보다 민속악기라는 측면이 조금 더 강했다. 그리고 17세기경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서 기타 음악이 유행했던 것은 다분히 일시적이고 소박한 이유에서 연원한다. 즉 귀부인들이 연가를 반주하거나 그 어떤 개인적인 감정을 털어 놓는 일에 기타를 좋은 반주악기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밖의 현악기들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서야 일반의 관심을 끌 수가 있었다. 그런 시기에도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기타 연주의 거장들이 속속 탄생했다. 어떤 악기에 대한 대중적인 흥미의 많고 적음은 그 악기를 위한 음악이 얼마나 많이 작곡되었나에 달려 있으며, 동시에 그 악기의 연주법이 조직적 체계를 이루고 있는지에 달려있다. 이를테면 만돌린의 예를 들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만도리도 아주 널리 퍼진 아마튜어 악기였다. 이 악기는 기타의 사촌쯤으로 여겨졌는데 위대한 니콜로 파가니니(Nicclolo Paganini)가 자기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운 악기기도 했다. 파가니니의 집에 있는 악기로는 이 만돌린이 유일한 것이었다. 1795년, 파르마(Parma)로 간 파가니니는 알렉산드로 폴라에게 바이얼린을 교습 받는 가운데 기타라는 악기를 발견했다. 바이얼린 교사 롤라는 학생들을 반주하는데 이 기타를 자주 사용했는데 나중에 파가니니도 그런 방법을 애용하게 되었다. 파가니니가 일찌감치 만돌린이란 악기에 눈을 떴기 때문에 나중에 기타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결심하게 되었다는 추론은 타당한 것이다. 파가니니는 결국 바이얼린의 대가(Guilio Regondi)나 루이지 레냐니(Luigi Lignani)등과 더불어 기타 연주에 있어서도 손꼽히는 전문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해 파가니니의 전 작품 중 65%의 작품에서 우리는 기타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의외로 기타 독주를 위한 작품은 극히 적다. 파가니니는 기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기타를 사랑한다. 기타가 갖고 있는 화성 때문에... 어디로든 여행할 때 기타는 떨어질 수 없는 나의 벗이 된다. 작곡을 할 때 어떤 환상이나 악흥이 떠오르지 않으면 나는 기타를 손에 든다. 기타는 바이얼린이 해 줄 수 없는 어떤 화음을 내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랜드 소나타 A장조>는 파가니니가 바이얼린과 기타를 위해 쓴 몇 안되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 초연은 친구이기도 했던 기타의 대가 레냐니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이얼린이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다른 소나타들과 비교하면 이 소나타는 기타가 그 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여기서 바이얼린은 부수적 위치로 내려앉고 있다. 이곡의 작곡에 관해서는 파가니니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많다. 그렇지만 그 일화들은 대부분 각색된 거다. 알려진 얘기로는 레냐니가 기타와 바이얼린을 위한 소나타에서 늘 자신의 파트인 기타가 부대적 역할에 지나지 않음을 불평했다고 한다. 그래서 파가니니는 기타를 독주악기로 하는 소나타를 한곡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작 연주할 때는 파가니니에게는 기본적인데 그 치는 바이얼린 파트를 맡겼다는 얘기도 있다. 파가니니가 기타를 연주할 때만 하더라도 그 소리가 오늘날 처럼 낭랑하게 울려 퍼지거나 하지 않았으며 또 여섯줄도 아니었다.
[앙트완느 메송니에 Antoine Meissonier (1783-18?)]
앙트완느 메송니에 Antoine Meissonier (1783-18?)는 1814년 출판사를 설립할 당시에 이미 연주가 및 교사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이 출판사는 카르카시의 작품을 비롯하여 많은 기타 작품을 출판하였다. 그가 작곡한 단순한 기타 독주곡은 우아하며, 나름대로의 맛을 지닌 초보자에게 알맞는 작품이다.
[디오니시오 아구아도 Dioniso Aguado (1784-1849)]
아구아도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바실리오 신부 Padre Basilio(미구엘 가르치아 Miguel Garcia) 에게서 기타를 배웠다. 그는 소르나 쥴리아니와 마찬가지로 기타 기보법의 개량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기타레슨 Escuela de Guitarra"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그의 스승에 대하여 "손으로 익힌 것을 지면상으로 표현할 기회를 갖지못한 불행한 사람들 중의 한명"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1825년 아구아도는 파리를 방문하였는데, 이는 당시 파리에서 한창 존경을 받고 있던 소르를 만나기 위한 것이라고 전하여진다. 그들은 기타의 기술적인 면에서 매우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구아도의 온화한 성격으로 인하여 매우 친하게 되었으며, 이 같은 우정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아구아도는 손톱을 사용하여 안달루시아 지방의 기타리스트들의 연주에서 볼 수 있는 빠른 연주를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소르는 풍부하고 깊은 음을 내는 데 더욱 역점을 두었으며, 이 점은 선율적인 요소를 흠뻑 지니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파리에서 한 동안 같이 지냈으며, 소르는 이 우정을 기념하기 위하여 Op.41의 "두 친구 Les Deux Amis"를 작곡하였다. 아구아도의 작품은 파리에서 환영을 받았으나,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1838년 말경 마드리드로 돌아가 눈을 감을 때까지 그 곳에서 생활하였다. 그는 교육적인 작품 외에 작품 번호 16의 판당고와 같은 스페인 냄새가 풍기는 작품 뿐 아니라 안단테, 왈츠, 미뉴에트 등의 모음집을 출판하였다.
[루이지 레갸니 Lugi Legnani1790-1877)]
레갸니는 1790년 11월 7일 이태리의 훼르라라에서 출생한 기타리스트이다. 9살때 라벤나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악, 기타를 포함한 여러가지 현악기의 연주등 음악 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테너 가수로서도 할약 했지만 1816년에 라벤나극장에서 연주를 인정 받고 그 후 1819년 밀란에서 기타 솔리스트로 대성공을 거두고,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 당시 유명한 음악사가였던 마리아노 소리아노 푸에르테스는 마드리드에서 그의 연주회를 듣고 난 후, "이탈리아 출신의 기타 거장인 루이지 레갸니씨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환상곡과 화려한 변주곡, 그리고 자신의 독주곡을 연주하였다. 그의 손은 매우 빠르게 움직였으며, 깊고 노래하는 듯한 아름다운 음을 내었다. 특히, 저음현에서는 더욱 훌륭히 연주하였다. 앙코르가 계속되어 그 날의 프로그램을 다시 한번 반복한 뒤에도 앙코르는 끊이지 않았다." 레갸니는 기타를 공부할때 카룰리의 교본을 사용 했다고 하지만, 거의 독자적인 연구로서 습득 했다고 하며, 그의 뛰어난 연주 기교는 쥴리아니를 누를 정도 였다고 한다. 1819년 "윈"에서 활발한 연주를 한다음 도위치 각지와 스위스, 러시아등을 연주 여행하였다. 레갸니는 고금을 통한 유례없는 연주가로서 그 당시에 많은 음악 애호가들에게 절찬을 받았고, 바이올린의 귀재인 니콜로·파가니니의 반주자로서도 여러번 연주 여행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윈의 유명한 악기 제작가인 리즈나 스타훼르에게 그 자신이 설계한 기타의 제작을 의뢰하여, 악기 제작 기술 향상을 위해 협력 했다. 레갸니는 1862년경 귀국하여 바이올린과 기타의 제작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877년 87세의 고령으로 라벤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작품은 "36의 기상곡"을 비롯한 250여 곡이 있다.
[마테오 카르카시 Matteo Carcassi(1792-1853)]
카룰리의 독보적인 지위는, 이탈리아 태생의 젊은이 마테오 카르카시 Matteo Carcassi (1792-1853)가 파리에 옴으로써 도전을 받게 되었다. 카르카시는 그 당시 이미 각지를 여행하면서 연주하는 비루투오스로 널리 이름이 나 있었으며, 출판사를 가지고 있던 메송니에 Meissonier와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하여 그의 작품은 쉽게 파리 사람들에게 소개 되었다. 카르카시의 작품은 카룰리의 작품과 같이 단순하게 쓰여졌을 뿐 아니라, 카룰리의 작품보다 강한 선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기타의 하이 포지션을 유용하게 이용하고 있다. 그는 또한 [윌리엄 텔 William Tell], [프라 디아볼로 Fra Diavolo] 등 당시 유행하고 있던 오페라 중에서 대표적인 멜로디를 편곡한 환 상곡을 즐겨 출판하였다. 그밖에 당시에 이들보다 재능이 뒤떨어지는 두 명의 기타리스트가 출판계로 뛰어들어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비인에서, 피아노와 기타 교사로 널리 알려진 안톤 디아벨리 Anton Diabelli(1781-1858)는 1818년, 피터 카피 Peter Cappi와 함께 카피.디아벨리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1824년에는 이 회사를 사들여 혼자 경영하였다. 그 후에 그는 슈베르트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상류 음악계로 뛰어들었다. 그가 매우 유명하게 된 동기는, 그의 작품인 왈츠가 베토벤에 의하여 33개의 변주곡으로 작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수 많은 기타 독주곡은 주로 아마튜어를 위하여 쓰여졌으며, 그의 재능이 좀 더 잘 나타나는 기타 이중주곡이나 작은 실내악곡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흥미가 없다.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
1797년 1월 31일 오스트리아 "윈"에서 출생,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일기로 "윈"에서 작고한 도위치 로만파 초기의 대 작곡가 이다. 처음에 바이올린을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형에게 배웠으며 성악, 올겐, 콘트라 베이스 등을 당시 교회의 합창 대장 이었던 리히텐다르에게 배웠다. 1816년경 슈베르트는 시인이며, 기타 연주에 우수 했던 케르나로 부터 기타에 대한 최초의 감명을 받았다. 그가 기타를 좋아 하게된 이유로는 그 자신은 물론 친구의 대부분이 피아노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작곡의 대부분도 기타로 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생활이 빈곤하여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책과 노트와 기타이외 가구라고는 별로 없었다. 그의 작품중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아집 처녀"를 비롯하여, 가곡의 대부분의 반주는 기타 반주로 썼다. 또한 슈베르트는 현악기 제작가 슈우타우와 궁주(弓奏) 기타를 고안 제작하여, 1824년에 "A단조 소나타"를 작곡 하였다. 이 곡을 일명 "알페지오네 소나타"라고 부른다. 또한 슈베르트의 유일한 실내악 작품인 "기타, 플루트, 비올라, 첼로를 위한 4중주 G장조"는 그의 유일한 실내악 작품으로 전 5장으로 된 일품이다. 그가 사용한 기타는 전부 3개이며 그 중 1개는 슈베르트 박물관에, 1개는 "윈"의 후란코 바르가 또 1개는 "리하르트 슈미트"의 소장으로 되어 있다.
[레오나르드 슐츠(Neonard Schulz) (1814)]
1814년 "비인"에서 출생, 1860년 런던에서 작고한 오스트리아의 기타리스트이다. 슐츠의 작품중 Op.90 "12개의 연습곡"은 유명하다.
[줄리오 레곤디 Giulio Regondi(1822-1872)]
줄리오 레곤디 Giulio Regondi(1822-1872)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 소년으로 이름났으며, 그의 아버지라고 자칭하는 사람과 함께 유럽으로 여러번 연주 여행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남자는 결국 레곤디의 성공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가지고 도주하였다. 당시의 잡지 "하모니콘 Harmomicon (1831,P.200)" 중 "딜레탕트의 일기"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를 보면, 레곤디의 런던 출현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날 음악계에 있어 경이로운 일은 줄리오 레곤디이다. 스페인 기타를 연주하는 이 소년은 전문가들 조차 놀라게 할 뿐 아니라 기쁘게 한다. 이 매우 흥미로운 천재 소년-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지만-은 리용에서 태어났으며, 겨우 8살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단지 그가 어려운 부분을 정확하고 깨끗하게 연주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는 리듬과 선율을 정확히 연주할 뿐 아니라, 어른들도 부러워하는 표현력과 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재능은, 마음의 초자연적인 활동에 의하여 단절되거나, 또는 보통 사람들의 지성이 발휘되기 시작할 때에 없어져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를 보면 단지 조숙성이 놀랍고 감탄스러울 뿐이다." 사실 레곤디는 잇달은 연주 여행에서 계속하여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의 시적인 해석이 담긴 연주는 많은 청중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유명한 비인의 작곡가들은 기타를 즐겨 다루었으며 노래의 반주 악기로 사용하였다. 슈베르트와 폰 베버도 기타 주자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기타 반주가 붙은 가곡을 출판하였다. P.J. 본 P.J.Bone은 "기타와 만돌린 The Guitar and Mandolin(Schott, London, Revised edition 1954)에서, 슈베르트의 작품에 나타나는 많은 반주부는 기타를 대상으로 쓰여진 것이다. 그의 초기 가곡 중 많은 부분이 기타 반주를 가진 작품으로 쓰여진 것이며 후에 가서야 피아노 반주로 작곡된 것이다. 그의 작품의 많은 반주부를 보면 기타의 영향과 특징이 역력히 나타난다. 사실상, 이 곡들은 기타 반주에 의한 작품들이다."라고 쓰고 있다.
[호세 비니아스(Jose Vinas) (1823-1888)]
1823년 9월 27일 스페인 바르세로나에서 출생, 1888년 사망 했으며, 기타, 바이올린, 피아노 연주로 유명 했으며,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21세기 부터 구라파 각지를 연주 여행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만년에는 마드리드와 바르세로나 음악원의 교수로서도 존경을 받았다. "독창적인 환상곡"등의 기교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다.
[죠셉 페럴 Joseph Ferrer(1835 -1916)]
스페인에서 태어나 Jose Broca에게 사사하여 수년 수 기타교수와 연주가로서 성공하여 1882년에 파리에 Cmedie Francaise의 기타리스트로서, 수종(數種)의 악기를 교수하였으나 바르셀로나에 돌아가 Liceo의 음악학교 기타교수에 임명되었다. 그의 작품으로는 기타독주를 중심으로 2중주곡, 기타와 피아노, 기타와 플륫, 성악과 기타 등 약 100여곡에 달하지만 그의 곡은 별로 연주되지 않고 있다. 그는 A. Cano와 같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낭만성으로 누구에게나 호감을 갖게 하는 일반성(一般性)을 지니고 있다.
[프란체스카 타레가 (Francisco Tarrega Eixea) 1852-1919]
기타는 악기사상 가장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가진 발현악기이며 비엘라(Vihuela) →류트 (Lute)→기타(Guitar)의 과정을 거치면서 개량, 보급되어 16세기경부터 기타음악은 시인 에스피넬(V.Espinel), 의사 아마트(J.C.Amat)에 의하여 발전되었고, 코르베타(F.Corbetta), 산즈(G.Sanz), 드.비제(R.de Visee)등으로 더욱 찬란한 전고전시대를 형성하였으나 바이올린 등 궁현악기의 발달로 말미암아 기타는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모레티(Moretti), 아구아도(D.Aguado)등에 의하여 기타음악이 재현되면서 소르(F.Sor) 쥴리아니(M.Giuliani), 카룰리(F.Carulli), 카르캇시(M.Carcassi)등이 계속 출현하여 기타음악은 제1기 황금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황금기 이후 19세기로 접어들면서 피아노의 발달과 오케스트라의 확대, 바그너에 의한 오페라의 부흥으로 기타음악은 역사상 가장 쇠퇴현상이 일어나면서 기타는 단지 노래와 춤을 위한 반주나 일반 대중들의 오락악기로서 다루어져 왔다. 예컨대 슈베르트는 피아노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는 가곡의 반주로 피아노 대신 기타를 대용으로 쓰곤 했던 것이다. 그후 많은 관심있는 음악가들이 기타의 연주법의 개발에 우선적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타는 대규모 연주홀에 부적합하다는 근본적인 단점을 갖고 있었으며 기타 음악의 작곡도 그 기술적인 화려한 면에 늘 묶여 깊이 있는 곡이 나오기가 어려 운 상태였다. 이때 스페인에서는 현대 기타음악의 시조이며 기타의 로만시대를 장식한 거봉이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은 프란체스카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가 1852년 11월29일 스페인의 바렌시아주 카스텔론의 빌라레알에서 한 가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레가는 8세때 맹인 기타리스트인 마누엘 곤잘레스(M.Gonzales)에게 최초로 기타지도를 받고 이어 훌린안 아르카스(Fulian Arcas), 토마스 다마스(T.Damas)에게 사사하였다. 타레가는 한 후원인의 도움으로 바렌시아에서 공부를 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후에는 브리아나로 가서 기타교수 생활로 가난하게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브리아나의 재벌을 만나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고 1875년에는 콩쿨에서 1등을 획득했으며 피아노, 바이얼린족곡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얻었 다. 그 후 타레가는 기타리스트로서 마드리드에 데뷰이래 스페인은 물론 런던, 파리, 스위스 등을 연주 여행 했으며, 기타의 "사라사테"라는 절찬을 받았다. 그는 기타에 관한 일관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공부한 그가 기타에 전념하게 된 것은 마드리드 음악원에 입학하고 부터였다. 기타의 어떤 모습도 타레가가 이 악기로부터 회의를 품도록 만들지 못했다. 마드리드 국립음악원을 졸업한 타레가는 그곳 알함브라극장에서 기타연주회를 성공적으로 가졌으며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등 전국 주요도시의 순회 연주회에서 타레가 특유의 신선하고 독특한 연주를 하여 절찬을 받았다. 1881년에는 파리, 런던등지에서 연주, 귀국후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연주여행을 가졌고 결혼하여서는 바르셀로나에 정주하였다. 타레가는 겸손, 온화, 학구적인 성격으로 그는 화려한 스테이지에서 멀리하는 한편 기타 예술의 탐구를 위한 엄격한 수도자의 생활을 하였다. 타레가가 이룬 많은 업적 가운데 일부는 기타로 하여금 그 소리가 더욱 맑게 울려 퍼지도록 한 것과 기타의 울림에 풍부한 색채감을 준것, 그리하여 복잡한 악곡들로 기타로 연주할 수 있게 한 것 등이다. 이 모든 업적은 기타의 주법 개발과 기타의 디자인 혁신으로 인해 가능했다. 타레가는 음색의 가능성을 무한히 확장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타레가가 기타를 위해 손을 댄 작품으로는 기타자체를 위한 오리지널 작품과 모차르트, 하이든, 슈베르트, 베버 그리고 바그너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편곡작품이 있다. 이 위대한 기타 음악가의 작품에서 우리는 대단한 개성과 스페인의 철저한 향토성을 감지하게 된다. 그는 투리나(Turina), 토로바(Torroba), 팔라(Falla), 빌라로보스(Villa Lobos)로 이어지는 스페인 음악의 첫주자였다. 단순하고 명상적인 <전주곡>은 Lagrima(눈물)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마주르카의 두 제목은 여자의 이름을 나타내는데 그 특징은 틀림없이 음악에 비추어져 있는듯 싶다. "13개의 전주곡", "알람브라의 회상", "아라비아 기상곡" 등 작곡, 편곡을 합해 300곡 이상의 걸작이 있다. 타레가는 젊었을 때부터 지병인 안질로 계속 번민해왔다는 중풍이 발작하여 1919년까지 고생하던 끝에 그해 12월 5일 바르셀로나에서 서거하였다. 타레가는 생애의 반을 손톱을 사용한 주법으로 연주했으나 자신의 손톱에 결함이 생겨 손톱없이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을 수개월간 연구끝에 바르셀로나에서의 마지막 연주회까지 손톱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타레가의 직계문하이며 유일한 생존자 에밀리오 푸홀(E.Pujol 1886~ 스페인)은 타레가가 손톱없이 연주하게 된 원인은 타레가 자신의 손톱에 결함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도 살이외의 불필요한 물질을 사용하여 탄주하는 것보다 신경과 직결될 수 있는 살을 사용함으로서 감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현대의 기타리스트중에서 타레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며 타레가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지금의 기타는 진로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타레가는 종래의 기타연주나 작곡에서 철저한 개혁을 하였으며 아구아도 주법을 떠나 기타 연주 기법의 백지상태에서 기타가 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한까지 연구 , 개척하였다. 왼손의 운지법, 오른손의 탄주법, 또는 음색, 음량의 풍부한 변화와 화음의 확충등, 수 많은 업적은 우수한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20세기 기타 르네상스를 낳게 하였다. 현재 타레가의 유해는 출생지인 카스텔론에 안장되어 있으며 프라아나에는 타레가 일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기념상이 세워졌다.
[이삭 알베니즈 I.Albeniz (1860~1909)]
이삭 알베니즈(Isaac Albeniz)는 1860년 카탈로니아의 캄프로돈에서 태어나 1909년 피레네 산맥의 캄포 레 바인스에서 세상을 떠난 스페인 작곡가로서 피레네 북부 사람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9C경 스페인 문화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한사람인 그는 카탈로니아 태생이면서도 안달루시아를 더 사랑했다. 4살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질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이유로 그는 피아노곡을 주로 작곡했지만 기타 선율 또한 그의 귀에 늘 가깝게 들리곤 했다. 그는 피아노곡을 씀에 있어서 기타나 스페인 음악을 특별히 모방하지 않았으나 그 두가지 요소는 그의 작품에서 강하게 느껴지고 있다. 알베니즈의 피아노곡을 기타곡으로 편곡하는 것이 마치 본 음악으로 다시 환원시키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그는 자신을 무어인이라고 자칭했으며 그의 음악예술인 피아노 기술이 성장한 곳도 남부지방이었다. 무어적인 리듬과 음색, 그리고 생동감 있는 그의 작품은 스페인 민족의 특징을 말해준다. <카탈로니아 카프리치오>는 현재 6개의 앨범이 남아있는 <에스파니아 모음곡 Op.165>중의 한 곡이다. Cordob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로 옛날에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주에서 장엄한 종의 음이 울리고 돌연 빠른 템포의 무곡으로 변한다. 난무하는 Zapateado (자바티아도)와 비약하는 멜로디의 화려한 소품이다. 이 곡은 복잡한 정경과 이야기가 있는 분위기가 넘치는 곡으로 결혼식장, 세레나데를 노래하는 사람, 기타를 뚱기는 사람, 춤을 추는 사람, 병사의 무리, 밤의 정경, 군중, 자스민 향기, 이러한 것들의 소재를 한데 모아 만든 곡으로 연주하는 사람의 감성과 발상의 지식, 터치의 기술, 음악과 무용의 폭넓은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곡 이다. 이 곡에서 Albeniz는 그의 초기적보다 자유롭고 철저한 작곡개념을 위주로 하는 공식적인 작곡법을 나타내었다. 이 작품의 대단한 화려함은 Debussy와 Ravel의 피아노 음악에서 영향을 받았다.
[에릭 사테 Erik Satie(1866 - 1925프랑스)]
근대 프랑스 음악의 지도자격인 E.샤티는 1866년 5월 17일 융플래르에서 해운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어머니가 별세한 후 1878년 12세때에 파리로 이주하여 그해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육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도중에 그만두고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하였다. 1887년 최초의 피아노곡집을 출판했으며, 1890년에는 調表와 마디줄을 폐지한 3곡의 [그노시엔(Gnossiennes)]을 작곡, 점차 특수한 악풍으로 파리에 알려지게 되었다. 1890년 그는 드뷔시와 알게되어 그에게서 얼마간의 영향을 받았다. 그후 작곡을 계속하면서 1905년 댕디가 주관하는 스콜라 칸타룸에 입학하여 루셀에게서 대위법을 배웠으며, 1909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11년 라벨의 주선으로 독립음악협회에서 "사티의 밤"을 개최한후 점차 유명하여졌다. 그는 점점 기묘한 제목을 붙인 피아노 小品들을 多作하였는데, 1911년에 [말의 옷차림으로(En Hibit de Cheval)],[엉성한 진짜 전주곡(개를 위하여; Veritables prelues Flasques-pour un chien)],[바싹마른 태아(Embryons Dessches)],[한세기와 순간(Heures Seculaires et Instantanees)]등 유우머러스한 반면 서정미와 고전적인 맛이 넘치는 곡들을 썼다. 1915년 그는 낭만주의 게르마니즘을 배격하고 간단명료한 객관주의 미학을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6인조는 그의 가치를 발견한 이후 그를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불렀다 한다.
[앤리크 그라나도스 Enrique Granados y Campina(1867 - 1916 스페인)]
근대 스페인의 걸출한 음악가로서 알베니스와 함께 스페인 근대파 음악가들의 선두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당대의 명피아니스트였으며 마넹, 티보, 카잘스, 생상스 등과도 활발한 연주활동을 하였으며, 피아노 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여 "아카데미 그라나도스"라 칭하여 교사로서 교육의 선두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정작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 것은 18세기 스페인 화가 Goya의 그림에 의한 가그 [고예스카스(Goyescas)]로서 이다. 이것은 그가 같은 이름으로 되었는 피아노 곡집에서 소재를 얻어 만든 것인데, 1912년 피아노 모음곡 [고예스카스]를 써거 1914년에 파리에서 발표하여 크게 성공한 후 1916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에서 이 작품을 상연하였는데 연주를 마치고 되돌아 오던 중 1916년 3월 24일 영국 해협에서 독일 잠수함의 포격 받는 바람 에 그가 탄 세색스호가 침몰되어 1916년 3월 24일 부처가 함께 바다 밑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그의 가장 대표작은 피아노를 위한 전4권 12곡의 [스페인 무곡집]으로 그중에 No.2, No.4, No.10을 기타로 편곡 소개한 것이다.
[마뉴엘 데 팔라 Manuel de Falla 1876-1946]
1876년 스페인의 카디스에서 출생하여, 1946년 아르헨티나에서 사망한 작곡가이다. 최초에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마드리드에서 페드렐에게 작곡을, 트라고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20세기 스페인 음악을 대표하는 스페인 최대의 작곡가인 그는 1910년대의 {사랑은 마술사}와 {삼각모자}등으로 각광 받기 시작하였으며 인상주의적인 수법으로 {스페인 정원의 밤}을 써서 크게 성공했고 인상파로 부터 신고전주의로 방향을 바꿨던 그는 스페인 국민주의의 원조인 페드렐에게 사사받으며 스페인 음악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러 일으키어 스페인 민족음악을 그대로 소재로 삼지않고 그것을 소화시켜 분위기를 더 높게 승화시켰던 세계적인 작곡가이며 피아노 연주자로서도 이름이 있던 인물이다. 중요한 작품으로는 오페라 "무상한 인생", 바레 음악인 "삼각 모자", "사랑의 마술사" 등이 있으며, 기타의 작품으로는 "드빗시"의 죽음에 바치는 "오메나헤"가 있다.
[구스타프 사마쥐(Gustav Samazeuilh) (1877)]
구스타프 사마쥐(Gustav Samazeuilh)는 1877년 보르도에서 태어난 작곡자이자 비평가이다. 그는 쇼송, 댕디, 뒤카로부터 작곡을 사사했고, 바이얼리니스트 유진 이자이와 바이얼린-피아노의 자크 티보와 알프레드 코르트를 위해 곡을 써 주기도 했다. 그는 또한 드뷔시, 파야, 뒤카, 댕디 등의 작곡가들이 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많은 곡들을 편곡한 바 있다. 그의 저서중 잘 알려진 것으로는 1847년에 출판된 <현대의 음악가들>, 뒤카에 대해 쓴 논문, 그리고 작곡가 사후에 쓴 리하르트 쉬즈라우스에 대한 회고록 등이 있다. 세고비아에게 헌정된 그의 <세레나데>는 곡의 성격이나 리듬, 장식 효과, 음색 등에서 전형적인 '스페니쉬'기타의 특질이 모두 적용되는, 가장 정통적인 요약이라 할만한 곡이다. 스페인 태생의 작곡가라도 그 보다 더 스페인적인 작품은 쓸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미겔 료벹(Miguel Llobet) (1878)]
타레가의 위대한 계승자로 알려진 료벹은 1878년 10월 18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한 기타리스트 이다. 조각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그림 그리는 것으로 자랐고 일찍부터 기타와 친할 기회가 많았다. 바르셀로나의 시립 음악학교에서는 첼로의 거장 "파블로·카잘스"와 동창이었고 이때부터 아르카스 문하의 마힌·아레그레에게 기타를 배웠다. 1901년 바렌시아 음악 학교에서 기타리스트로서는 처음으로 연주회를 가졌다. 3년간에 걸쳐 스페인 각지의 연주회에서 명성을 얻은 료벹은 1904년 파리에 데뷰하여 연주가와 교수로서 성공하여 Albeniz, Ravel, Debussy, d’Indy, Dukas, Faure 등의 상찬을 받았고 벨기, 영국 등지에서도 연주회를 가졌다. 1910년 부터 1912년에 걸쳐 남미 연주 여행은 타레가 주법을 전한 큰 역활을 하였으며 남미의 기타 음악은 료벹에 의해 개안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후 북미를 방문하고 1918년 다시 남미에 갔으며 1919년부터 1920년까지 프랑스를 중심으로 연주, 다시 귀국하여 1921년에는 도위치, 오스트리아에서 30회 연주회를 가졌다. 덴마크, 스웨덴, 폴란드, 이태리, 체코 등지에서도 초청되었으며 1928년에는 료벹 탄생 50년을 축하하는 축하회를 베르린에 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1931년 워싱턴의 실내 음악제에 출연 하였고, 그해 가을 또 다시 각처에서 명성을 떨쳤다. 1937년 스페인 내란으로 공격을 받아 그의 일생을 마쳤다. 작품으로는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엘 메스트레를 들수 있으며 아메리아의 우서, 슬픈노래, 상인의 딸, 도적의 노래 등 주로 카타로니아 자방의 민요나 무곡을 소재로한 작품이 있다.
[마리오 로드리게스 아레나스(Mario Rodriguez Arenas) (1879)]
1879년 9월 30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브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출생한 기타리스트 이다. 1903년 부터 "바이레"에게 기타를 "엔리게 모레라"에게 이론을 사사 했으며 아르헨티나의 민요를 소재로한 작품과 기타교본, 음계와 알페지오, 연습곡 등이 저명 하다.
[호아퀸 튜우리나(Jonquin Turina) (1882~1948)]
1882년 멕시코에서 출생, 1948년에 작고한 스페인의 피아니스트·작곡가 겸 지휘자이다. 마드리드 음악원에서 수학하고, 1905년 파리에서 단디에게 사사했다. 팔랴, 알베니스 등과 더블어 스페인 민족주의 음악에 공헌 했으며, 인상파의 수법에 의한 현대적 작품을 많이 썼다. 1912년에 발표된 교향시 "로시오제의 행진"을 비롯하여 "판당길로", "소나티네", "타레가 찬가", "세빌리아나"등 빼어난 작품이 있다.
[마누엘 폰세(Manuel Maria Ponce) (1885~1948)]
1885년 멕시코에서 출생, 1948년 작고한 근대 멕시코의 대표적인 음악가 이다. 멕시코 시립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1903년 도이치와 이탈리아에서 유학하였다. 멕시코 국민음악학원 교수겸 피아니스트, 그리고 멕시코 교향악단의 지휘자로 활약하였으며, 40세에 파리의 폴 듀카에게 사사한 정열가이기도 하다. 세고비아에게 "기타의 바하"라는 찬사를 들은바 있으며, 만년에는 멕시코 국립음악의 수립에 노력하였다. 1940년에 세고비아를 위하여 작곡한 "남(南)의 협주곡"을 비롯하여, "3개의 소나타", "3개의 멕시코 민요", "12개의 전주곡", "스페인 홀리아의 주제에 의한 32개의 변주와 푸가"등이 유명하다.
[어구스틴 바리오스 AGUSTIN BARRIOS 1885-1944]
1885년 5월 5일 파라구아이 산 후안 바우티스타 데 라스 미시온네스에서 태어나 1944년 8월 7일 엘살바도르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위대한 기타 연주가이자 작곡가이다. 1900년 국립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1910년경 남미.중남미 각지로 연주여행을 계속하였던 그는 1916년 브라질에 가서 15년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2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예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으로 A. Segovia를 만났다. A. Segovia는 이때 Barrios에게 기타 음악해석에 따른 조언을 요구했는데 이때 Segovia는 Barrios의 기타주법(양손의 독특한 Touch)을 자신의 기술로 만들었다. 유명한 스페인의 기타 제작가 Santos Hernandes는 그의 회고록에서 "Segovia는 처음으로 남미에 돌아왔을때 완전히 그 태크닉을 체득하였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Mangore라고 하는 이름은 파라구아이의 대삼림(大森林) 속에 살고 있는 대추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Nitsuga Mangore(註;Nitsuga를 거꾸로 읽으면 Agustin이 된다)로 만들었다. Barrios는 기타 작곡가.철학자.신학자.시인이었고 또 여러나라 말에 통달하였다. 그는 바하를 열심으로 연구하였지만 시종 민족성의 토대 위에 그의 음악을 승화시켰다. 그의 음악에 있어서 중요한 공적은 아메리카 대륙의 민족학교 에스쿠엘라 마고레아나(Esucela Mangoreana)를 창설하고 스페인 기타계의 움직임에 대하여 남미의 민족색이 넘쳐 흐르는 곡을 예술적으로 높여가는 운동을 볼 수 있었다는 공헌이 있다. Barrios의 기타음악에 대해 작품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Segovia 뿐만 아니라 H. Villa-Lobos(브라질의 위대한 작곡가.기타리스트)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Barrios의 작품 "사랑의 고백(Congession)을 듣고 그 영향을 받아 Villa-Lobos는 전주곡 1번 (e minor)을 썼고 "향수의 초로(Choro da Saudade)를 듣고 [Choro Tipico #1]을 작곡했다. 또 미구엘 쵸베는 Barrios에 대하여 "Barrios는 'Estudio de Concierto'에서 기 타 역사상 100년 후에나 겨우 보편적으로 될것을 빨리 해결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메리카 대륙에 있어서 위대한 악성으로 존경받고 있는데 기타 연주의 초인적이 그것에 대하여 깊은 교양과 숭고한 인간적 정신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존 윌리엄즈의 연주 레코딩이 있기는 하지만 A.segovia는 그때 이후 그에 대한 경원하는 마음에서인지 그의 작품은 일체 연주된 판이 없다. [La catedral]과 [Ras Abejas] 는 그의 좋은 작품으로 색체나 음향의 전달성은 끊임없이 흐르는 무궁동기법의 빠른 텀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곡이 좋은 보기가 되겠지만 어떠한 곡이 대부분 음계(스케일)적이라 해서 아포얀도로만 연주해선 안된다. 결국 아포얀도의 남용은 속도에 제한과 음색의 다양성에 부족을 가져다 주며 기술상 오른손 놀림의 곤란을 감수해야만 된다. 이것들은 아포얀도로도 되겠지만, 슬러의 첫머리만 아포얀도로 탄주했을 때와 음색의 다양성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도밍고 프라트(Domingo Prat) (1886-1944)]
1886년 3월 17일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출생 하였으며, 1944년에 사망한 기타리스트 이다. 1898년부터 1904년까지 미겔 료베트에게 사사 했으며, 1905년부터 2년 간을 타레가에게 사사 했다. 1907년 프라트는 타레가의 음악과 기법을 소개하기 위하여, 아르헨티나의 수도 브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 갔다. 그 후 이론을 마누엘 부르게스와 어거스틴 카사도에게 사사 했다. 1919년 다시 바르세로나로 돌아가 결혼한후 영주를 위하여 아르헨티나로 갔으며, 그 곳에서 "아카데미아 데 기타라 프라트"(6년 과정)을 창설 하여 우수한 문하생을 배출 시켰다. 다수의 작곡, 편곡 외에 명저 "기타 사전", "기타 기초 기교 교본"등이 있다.
[오스카 에스플라 Oscar Espla(1886)]
J. Turina, J. Rodrigo와 같이 현재 스페인 원로음악가 중의 하나이다. 그는 스페인 동부의 민속음악을 연구하였으며 때로는 특별한 음계를 사용했고 표현주의적인 면도 보여주었다. 작곡가이며 평론가인 에스폴라는 처음에는 토목기사였으나 음악을 독학하였으며 후에 철학으로서 학위를 받기도 했다. 그는 독일에 유학하였는데 1909년 [동양풍의 모음곡](Suite levantina)으로 비인에서 음악상을 받았다. 1931-1936년 국민음악회의 의장이 되었으며 1936년 마드리드음악원장을 지냈고 프랑코의 반란으로 일시 벨기에로 망명하였다가 1951년 다시 귀국했다. 그는 스페인의 민요를 수집하여 동양적 음게에 의한 대규모적인 작품을 작곡하였다. 그는 Falla와 함께 스페인 음악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오페라 [잠자는 미녀], 칸타타 [악마의 크리스머스], 교향시 [에로스의 꿈], [돈키호테], [행복] 등이 있다.
[에밀리오 푸홀(Emilio Pujol) (1886)]
1886년 스페인의 그라나딜라에서 출생한 푸홀은, 현대 기타아음악의 시조인 타레가의 직계문하인중 유일한 생존자로서, 그리고 권위있는 가타아 음악역사가로서 독보적 존재이다. 어려서부터 반두리아를 배우고, 바르셀로나 시립 음악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4살때 그가 소속한 합주단이 파리에서 연주하였을때, 소년 푸홀의 뛰어난 솜씨가 프랑스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이것을 계기로 타레가의 문하생으로 기타공부를 하게 되었다. 1912년 런던 베히스타인홀 연주회의 대성공을 깃전으로 하여, 14년의 영국 연주와 19년의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의 연주회 등, 세계적인 대가로서의 풍모를 과시 하였다. 22년 파리로 이주한 후 베를린과 로텔단의 연주는 특기할만 하다. 47년 리스본 국립음악학교 교수를 거쳐서, 이탈리아 기지 음악원에서 기타아 음악사를 담당하였으며, 현재 모교인 바르셀로나 음악원의 교수로 있다.(기지음악원 기타아 과는 65년 기지 백작 사망후 폐쇄되었음) 푸홀은 타레가의 영향을 받아 오른손 손톱을 사용하지 않는점이 현대의 다른 기타리스트들과 다르다. 그리고 푸홀의 최대 업적은 전고전과 그 이전의 기타아 음악의 연구와 현대에의 부활에 있다. 작고한 부인 마틸드 게르바스는 플라멩코 주법의 명수로서, 팔랴의 오페라 "꿈없는 인생"중에서 "스페인 무곡"과 무용 조곡 "삼각모자"중의 "실내의 춤"이 부부 2중주의 레코드로 나아있다. 푸홀의 레코드중에는 비엘라의 연주로 된것도 있는데, 이것은 마리아 시드의 노래, 루이스 밀란과 펜사드르 등의 16세기 스페인 가곡의 반주음악이다. 작품으로는 "로맨스", "세실리아", "요람의 노래" 등이 유명하며, 밀란, 무다라, 나르바에스, 산스, 비제, 바흐 등 고전을 비롯하여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팔랴 등 근대 작곡가의 작품에 이르는 폭넓은 편곡 작품과 "타레가의 주법에 의한 합리적 기타아교본" 등 저서가 있다.
[파드르 산 세바스티안(Padre J.S.San Sebastian) (1886)]
파드르 산 세바스티안(Padre J.S.San Sebastian)은 참고 서적을 찾을때 호세 안토니오 데 도노스티아(Jose Antonio de Konostia)라는 이름 아래에 나오기 마련인데 파드르로 시작되는 이름은 그의 세례명이고 호세로 시작되는 이름은 그의 바스크 이름이다. 그는 1886년 산 세바스티안에서 태어나 16살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성직을 받았다. 그는 오르간과 바이얼린을 공부하였고 프랑스에서 살던 여러해 동안엔 작곡을 공부하였다. 그가 열정을 쏟은 것은 무엇보다도 바스크 민요를 수집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시골을 두루 여행하기를 반복하면서 수많은 곡들을 모아 편곡하였던 것이다. <슬픔>은 <바스크 전주곡집>중의 한 곡인데, 단순하면서 대칭적인 구성이 정교한 대위(對位)를 이룬다기 보다는 기타 저현부의 울림이 슬픈, 단조의 노래이다.
[빌라-로보스의 생애 (Rio de Janeiro 1887.3.5~Rio de Janeiro 1959.11.17)]
중남미에서 출생한 최대의 작곡가로써 브라질에서 명성을 떨친 문인. 역사가이며 아마튜어 음악가였던 부친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는데 어린 시절 첼로와 클라리넷을 공부하였을 뿐 아니라 피아노를 비롯하여 각종 현악기, 특히 브라질 기타의 연주에 능숙했다. 1887년 3월 5일 리오데지네이로에서 출생하여 이미 15세 때는 오케스트라의 첼로 주자가 되었다. 1905년 부터 민요 채집을 시작하였고 작곡 공부도 했으며 1907년 내셔널 콘서바토리 음악원에서 본격적인 학문을 훈련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사적으로 그 연구를 계속했다. 1912년 스스로 네번째의 가장 대규모적인 브라질 대륙 깊숙한 지방의 풍속과 음악의 조사를 착수하여 브라질 음악의 특이한 성격을 깨닫고 1915년 이후 작품에 강한 향토적 개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기타에 강한 애착을 가지고서 기타 반주를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가를 지방 민요 가수들로 부터 배웠다. 그러므로 그가 나중에 첼로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기타를 위한 수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콘서바토리에서 배웠었다. 10대(代) 시절부터 기타를 들고 거리의 방랑 음악가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했던 적이 있는 그는 동부 브라질을 답사한 이후 20대(代)부터 모든 분야에 걸쳐 작품을 열심히 발표하기 시작하여 브라질 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1923년 36세때 처음으로 유럽에 건너가 파리에서 유학.런던, 빈, 베를린 등을 방문 구미각지(歐美各地)를 돌며 활동(자작지휘등)을 계속하였는데 브라질 시절 못지 않게 그의 명성은 각국에 알려졌다. 한편 그는 조국의 음악 환경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있는 힘을 기울여 "빌라-로보스 관현악단"의 창립과 브라질에 있어서 바하의 대작 초연 등 각지의 관현악단 합창단의 지휘자로 있었으며 학교용의 민요 수집을 완성했다. 해가 거듭함에 따라 그는 국제적 존재가 되어서 브라질 뿐만 아니라 신대륙음악 수준을 높힌 작곡가로서 우러러 보게 되었다. 빌라-로보스는 평범하지 않는 다산(多産)의 작곡가였다. 그의 작곡의 수는 넘버링의 방식여하에 따라서 800편에서 2000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의 가장 개인적인 혁신은 악기의 앙상블에 의해서 주로 야외에서 연주되어지고 브라질과 인디안의 민속음악의 요소들을 넣은 갖가지로 얻어진 소품들을 쵸로의 예술적 음악의 영역속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자신의 작품들은 바하로부터 인상파에 걸친 유럽음악의 기교와 브라질 민속음악의 요소와의 융해로 특징지워진다. 기타곡은 그의 위대한 작품 리스트 중에서는 미미하게 보이나 언제나 유닉크한 미(美)를 높여 현대 기타음악의 귀중한 레파트와로써 애주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기타곡중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1908~1912년에 지은 "Suite populaire bresilienne" 와 1920의 Choro no.1 1929년 파리에서 작곡한 "12 Etudes"라는 작품. 1940년 리오데자네이로에서 쓴 "5 Preludes"로써 이 작품들은 연주자로 부터 최고수준의 기교적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현대의 다른 작곡가에 비하여 기타의 성능을 독특하게 살려서 연주자와 청취자 양편에서 모두 풍부한 음악적 아름다움을 마련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와 친교가 깊은 탁월한 연주가 세고비아는 연습곡집을 스카를랏티와 쇼팽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양손의 연주기법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말 중요하고 더불어 연주곡으로서도 지속적인 심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언급하면서 보내온 빌라-로보스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의 초연에도 힘썼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폰세의 여성적 작품에 대조되는 남성적인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항상 굵은 선과 가냘픈 두개의 선이 조직되어서 열정과 감미로움을 주는 그의 곡상은 엄밀한 규칙이라기 보다는 즉홍적인 남미의 리듬과 함께 그의 작품의 특징으로 이루고 있다. 또한 2개의 조성으로 한개의 작품이 짜여지거나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을 교차시키는 3부 형식과 같은 곡을 보여주고 있다. 전주곡 다섯개는 개개의 특성이 뚜렷한 곡이고 그 표현하는 기법이 다양해서 그 어떤 기타곡과는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되는 곡이라 할수 있겠다. 주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다. 오페라 [Izaht]1912, 희가극 [말라자르테]1922, 교향곡 11곡, 교향시 [아마존 유역],[브라질풍의 바하], 14곡의 쵸로스, 기타를 위한 12개의 연습곡, 기타를 위한 5개의 전주곡, 기타협주곡(Rio.1951), 가곡 [브라질의 세레나데] 등 다수가 있다.
[프랭크 마틴 Frank Martin(1890)]
금세기 전반의 걸출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젊은 시절 파리에서 수학했으며 1928년경부터는 스위스에 돌아와 작곡활동과 평론, 교수(자신이 음악학교를 창설하였다)에 이르기까지 활약하였다. 현재 유럽 악단의 최고령자의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오라토리오 [땅에 평화를 1945], 협주곡, 관현악곡, 피아노 등 각 분야에 걸쳐 우수한 작품을 썼다. 마르틴은 쇤베르크와 그 유파에게서 배운 12음기법(12音技法)을 사용하면서도 거기에 구속받지않고 때로는 조성음악(調性音樂)과 혼용(混用)하는 자유로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기타독주곡 <4개의 작품>에도 그러한 마르틴의 작풍(作風)은 잘 표현되어 있어 현대 기타음악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J. Bream에게 바친 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모레노 토로바 Federico Moreno Torroba(1891)]
부친은 유명한 오르간주자로 그의 지도하에 음악생활을 시작한 Torroba는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마드리드 왕립 콘세르바토리오에서 수학했다. 알베니스, 그라나도스, 팔랴, 튜리나 등 스페인의 많은 작곡가들이 프랑스에 유학하여 대성하였으나 토로바만은 젊은 시절 프랑스에 가지 않았다 한다. 그는 스페인에 머물러 작곡에 열중하였는데 처음 오케스타라곡을 많이 써 스페인 독특한 오페레타, 즉 [사루스에라]같은 작품은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뒷골목 처녀] [가라바의 여자와 몬테가르메로] 등이 그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타를 갖고 있었으나 1920년에 처음 세고비아의 연주를 듣고 세고비아를 위하여 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세고비아 자신도 토로바를 자기에게 협력해주며 레파뜨와를 넓혀준 최초의 작곡가였다고 말하고 있다. 토로바의 곡에는 Sonata, Concerto와 같은 형식악도 있으나 그와 같은 어려운 곡보다는 스페인 무곡과 민요를 주제로한 것중에 보다 좋은 작품이 있다. 그는 맹인 작곡가 로드리고와 함께 만든 2막 오페레타 [푸른 악마(Elduend Azul)]도 남기고 있다.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
1893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태생, 독학으로 공부하여 15살에 그라나다에서 데뷔, 연주회에서 외면당한채 살롱음악을 위한 악기 정도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기타를 하나의 독자적인 연주악기로 개발하여 17,18세기의 인기를 재현하였다. 그의 업적은 단순히 연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거듭하여 새로운 주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보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기타소리가 작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오른손의 손가락끝과 손톱을 동시에 현에 튕기는 방법을 찾아내었고, 여러 작곡가들의 곡을 기타용으로 편곡 연주하였다. 그의 기타에서 영감을 얻은 많은 작곡가들은 많은 곡을 그에게 헌정하여 레파토리를 넓혔다. 세고비아의 연주는 섬세하면서도 낭만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크라이슬러는 "세계에는 참으로 위대한 현악주자가 두명있는데...이들은 카잘스와 세고비아이다." 라고 말했다. 세고비아가 한말중에 가장 인상깊은 것은 '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것보다 감동을 주는것이 더 좋다.'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금세기 또 한사람의 유명 음악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기타 소리는 작지만 멀리까지 울린다고했던 스트라빈스키의 말은 맞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세고비아 본인에게 꼭 맞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어떤 악기 하나에서 어떤 연주가 한 사람이 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어낸 것이다. 현대의 연주회 악기로서의 기타는 세고비아가 개발해내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었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연주회 마다 열성적인 젊은 기타리스트들의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게 된 것도 연주가로서, 편곡자로서, 또 교사로서 그가 이룬 뛰어난 업적들의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3개 세기에 걸치는 레퍼토리의 연주회는 곧 세고비아의 광대한 활동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즉 그는 편곡자, 특히 바하 편곡자였고, 잘 알려지지 않은 기타 음악을 발굴해 내는 탐험가였으며, 당대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그를 위해 곡을 쓰게함으로서 기타리스트들의 연주레퍼토리를 막강하게 한 장본인이었다.
1.세고비아의 제자들 세고비아에게 귀중한 레슨을 받은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결코 적지 않다. 물론 마스터클래스에서 몇 번 레슨을 받은것으로 제자라는 호칭을 써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기타란 악기가 어느 일정기간 동안 한 스승에게서 배우지 않으면 아무래도 그 스승의 테크닉을 몸에 완전히 익히기 어려운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고비아의 제자라 할만한 인물은 다수이다. 유명한 인물들로는 존 윌리암스, 알리리오 디아즈, 오스카 길리아, 호세 토마스, 호세루이스 곤잘레스, 크리스토프 파크닝등을 들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세고비아의 기술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배워온 재능 있는 연주가들임에 틀림없다. 세고비아는 마스터클래스의 경우에도 우수한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을 구별하여 특별히 출중한 생도이외에는 그 레슨을 모두 조교 역인 디아즈나 토마스에게 돌려버렸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디아즈 자신도 술회한 바 있으며 레슨을 받은 많은 사람들의 감상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곧 세고비아 자신이 지명한 우수한 생도가, 실은 세고비아의 레슨을 받기 전에 이미 상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디아즈, 토마스, 호세 루이스의 예를 들면, 그들은 다년간 세고비아의 문하에서 지도를 받아왔으나, 그것은 그들이 그전에 사사받은 바 있는 사인즈 데 라마자의 지도 기간에 비해 10분의 1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놀라운 일인지 모르지만 이것은 다른 제자 기타리스트의 경우에도 거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세고비아의 "진짜" 제자는 1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반면, 전술한 이들 제자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이들 제자들은 모두 다른 관점에서 세고비아를 술회하고 있다. 먼저, 세고비아를 존경하고 자신이 제자였음을 정말 기쁘게 생각하며 찬미하는 사람들로는 호세 토마스와 마쓰다 아끼노부가 해당될 것이다. 다음으로, 디아즈나 호세루이스의 경우인데, 이들 또한 세고비아의 업적을 찬양하는 동시에 은사로서의 세고비아는 그들의 또 한사람의 스승이었던 사인즈 데 라 마자와 거의 동격의 평가를 하고 있는 경우이다. 그리고 끝으로, 존 윌리암스와 파크닝의 경우인데, 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추구하여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인물들이다. 바꾸어 말하면 항상 그들의 생각 속에는 세고비아의 풍조에 대한 "주저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2.세고비아의 연주 스타일 그러면, 약2회 정도 세고비아의 어드바이스를 받은 줄리안 브림과 예페스의 경우는 어떠한가. 브림은 세고비아를 존경한 인물이었으나, 세고비아의 연주 스타일을 따르는 데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한편 예페스는, 오히려 세고비아를 관찰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길을 추구하여 성공을 거둔 예이다. 예페스의 연주 특히 젊은 시절의 연주는 다분히 의식적으로 세고비아와 정반대의 음악 표현을 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그런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또한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잘 알려진 연주가들인 마뉴엘 바루에코와 데이빗 럿셀의 면에서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그들은 거의 완전한 세고비아 주법을 부정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바루에코는 자신이 언명한 바가 있으며, 럿셀은 그 연주 스타일에서 안티.세고비아임을 증명하고있다. 그들은 브림이나 예페스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반세고비아의 기치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그러한 경향은 점차 강해지고 있는 듯하다. (연주 스타일면에서) 그렇다면 세고비아는 정말 낡은 스타일의 인물인가. 아니,결코 그렇지 않다. 그의 연주를 실제로 알고 있는 사람. 혹은 그가 남긴 방대한 레코딩을 접한 많은 수의 사람들은, 역시 세고비아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역시 세고비아는 "기타리스트"이상의 "대예술가"라고 칭호를 받아야 옳지 않을까 싶다. 세고비아의 연주에 불만을 갖고 있는 젊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그의 리듬과 독특한 세고비아류의 노래를 혐오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가 연주하는 곡은 악보를 보며 음부를 쫓아가며듣는 류의 그런 연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다시 말하거니와 그의 연주는 그만이 해낼 수 있는 대예술가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고비아가 싫은 이유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그의 연주의 훌륭함에 초점을 맞추어 보지 않으면, 결코 세고비아의 위대함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만이 표현할 수 있는 곡-사실상 하나의 장르를 이룰 만큼 많다-은 비교할 대상이 없을 만큼 훌륭한 연주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이 문제는 연주에 있어 "기타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주는 것 같다.=역자) 금세기 초에 활약하였던 스페인의 저명한 음악가 루이스 미류트는 타레가를 찬양하는 글 속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마도 작곡가로서의 타레가는, 페르난도 소르의 위치에는 이르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기타의 진짜 위대한 면을 발견해낸 것은 타레가라고 생각한다."타레가의 예를 들어 세고비아를 말함은 무리가 있겠으나, 이 문장 속에 나타나는 "기타의 위대한 면"을 실현한 것이 세고비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기타라는 악기가 고유의 노래하는 기타의 음을 내지 않을 때, 그럼에도 기타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날 기타 계에는 "향이 없는 커피"와 같은 상황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세고비아는 그 자신이 기타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인물로 자기 자신을 생각하였다. 초월적인 테크닉, 독특하고 매력적인 톤,-이것들은 그의 신체의 거대함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손의 거대함과 관계가 있다. 그의 양손은 마치 글로브와 같아서 오른손의 지두는 충분한 압현이 가능했다. 그 결과는 매우 달콤한 음색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특히 그의 왼손은 실로 은혜로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타를 지판상에서 압현할 때, 프렛 가까이에서 압현함은 상식이며, 어느 교본에나 언급되고 믿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실상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이나, 세고비아의 경우는 그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사실상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매우 굵었으므로, 프렛중에 손가락을 대어도 프렛 가까이에 지두가 놓이는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또한 프렛 위에 손가락이 놓여도, 결코 찍찍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지두가 굵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전성 시대에, 연주회에서 찍찍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던 사람은 세고비아뿐이었다. 이런 점이 바로 세고비아의 신체상의 장점이었다.
[바다 빅포드(Vahdah Olcott Bickford)]
오하이오 출신의 여류 기타리스트이고, 미국 가타아 음악 개척자로서도 유명하다. 9살때부터 기타아를 시작하여 마누엘 페레르에게 사사하고, 15세부터는 로스엔젤레스에서 기타아 교수를 시작한 천재이다. 1915년 만돌린겸 기타리스트이고 피아니스트 마이클 빅포드와 결혼 하였으며 뉴욕 콩쿨에서 금상 획득을 비롯하여, 1923년 "로스엔젤레스 기타아 협회"를 설립하는 등, 부군과 더불어 의욕적인 교수/연주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피아노 반주의 "콘체르트 로만티카", "7개의 독주곡집"을 비롯하여 다수의 작곡/편곡 작품 등이 있다.
[마리오 카스텔뉴에보-테데스코 Mario Castelnuovo-Tedesco (1895-1968)]
이태리 태생의 세계적인 작곡가로 패젯티에게 사사 받음. 그의 작품은 과장을 피하여 감상미를 없애 버리고, 고아하나 아름다움을 강조하여 섬세하고 세련된 서정을 특색으로 한다. 그의 대표작에는 가극 {라 만도라고라},{쥴리아스 시저},{옛말}바이옥린 협주곡, 기타 협주곡 등 많은 기타곡과 실내악, 성악등을 남겼다.
[로기노 세인트 마자 Regino Saint de la Maza(1897 - 스페인)]
20세기 전반, 세계최고의 기타 교수로서 연주가겸 작곡가이다. 1939년 맹인 천재작곡가 Rodrigo의 세기의 명작 {아란훼즈 기타 협주곡]을 초연한 이래 기타라는 악기가 지니는 모든 표현력을 세계에 널리 인식시키는데 일단은 커다란 역할을 하였던 인물로 평가된다. 1935년과 1966년에 마드리드 국립음악원 기타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며 유럽각지와 남북 아메리카 지역을 순회 연주여행하여 A. Segovia와 함께 커다란 명성과 성공을 얻게 되었다.
[알렉산더 트랜스만 Alexandre Tansman 1897]
바르샤바 음악원에서 표톨리텔에 작곡을 사사 1920년 파리에 건너가 바벨, 프로란슈미트와 지휘자 고르슈만 등과 교우후 현대주의의 수법으로 폴랜드 음악에 새로운 감각을 담은 작품을 내어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던 그는 피아노와 지휘에도 명성을 날려 각지를 순회 연주 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쇼팡의 영향을 받았는데 후에 시마노브스키. 스트라반스키. 라벨등의 작품에 가까워졌다. 그는 때로 재즈의 요소도 넣어 사용했으며 폴랜드 민족음악에 기초를 두고 모든 기법을 가미하여 서정적이며 다이나믹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폴랜드 음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에게는 Suite (폴랜드 조곡)을 위시하여 몇개의 기타곡이 있다. {탄스만}의 3개의 소품집은 어떠한 때에도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성격적으로 항상 우아한 취미를 갖고 있는 그의 음악적인 방향과 일치하는 작품으로 자유로이 노래하는 가운데 멜로디는 일정한 주제와 발전을 가지고 조용히 끝난다. 특히 세번째의 곡 {오리엔트 자장가}는 중근동제국의 분위기를 가지고 셋잇단음표에서의 동양미의 흐름은 더한층 이 곡에 애착을 갖게한다. 꾸밈음과 쉼표 그리고 무리화음에 강약은 참으로 효과적인 것을 주게 되는 곡들이다.
[프란시스 폴랜스 Francis Poulenc 1899-1963]
프랑스 현대 음악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사람, 1947년 {미요}의 귀환을 축하하는 오페라 부라티레시아스의 유방을 작곡하여 새로운 현대 작곡가 중에서 가장 순수하고 깊이 있는 유니크한 존재가 되었다. 그의 음악적 특징은 젊고 신선한 시적 감정이 풍부하며 자유스런 멜로디와 매혹적인 관능성과 세련된 취미등을 살린 것이라 하겠다. 단지,기타 작품은 만년에 "이다.프레스티"를 위하여 쓴 29마디의 사라반데 하나임이 유감스럽지만 이곡의 간결하고 자유스런 형식은 위에 기술한바 사실로서 잘 표현된 높은 기품이 깃들인 곡이다. 지극히 단순하고 고아하게 서정적인 기분으로 연주에 임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개방현의 울림에 수평진동을 가져다주고 같은 형식일때는 변화를 시도해도 좋을 것이다.
[미구엘 를로베]
미구엘 를로베는 낭만주의의 기타리스트-작곡가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다. 그는 기타의 특징을 최대한으로 살려 작곡을 하는데, 마치 쇼팽이 기타를 위해 작곡한 듯하다. 그는 타레가의 제자로서 타레가와 같은 작곡자, 편곡자 및 연주가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시아 세비오 Issias Savio(1900 - 1944)]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나 8세때 피아노를 시작, 루다스 알바에게 기타수업을 했으며 1918년 M. Llobet를 알게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타레가 기법을 배웠다. 알젠틴, 우루과이 연주여행 후 브라질에 가서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리오데자네이로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부터 상파울에 정주하여 연주, 작곡, 교육에 종사하며 1947년 상파울 연극음악 콘세르바토리오에 브라질 최초의 정규과목으로 기타과의 창설에 성공하여 주임교수가 되었다. 교육, 작곡, 편곡외에도 고전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타연주가, 작곡가의 연구에 헌신하여 악보 및 기타문헌을 방대하게 수집하였다. 그의 작품수는 300여에 이르기도 한다.
[호아퀸 로드리고 JOAQUIN RODRIGO (1902)]
기타아를 위한 <아란훼스 협주곡>를 내놓아 세계에 이름을 떨친 화퀸 로드리고는 1902년 바렌시아 근처인 사훈토에서 태어난 스페인 음악가이다. 3살 적 장님이 된 그는, 어려서부터 바렌시아 음악원의 후란시스코 안티오크에게 작곡법을 배웠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유럽여러나라를 여행한 직후 작곡한 그의 첫 데뷰곡인 교향적 스케치<홍굴라레스>는 1924년 바렌시아 교향악단이 초연해 호평을 받았다. 1927년 파리로 간 로드리고는, 뒤카에게 작곡법을 배우고, 화야와 친해졌으며, 음악의 필수 동반자인 터키 피아니스트 캄히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후 모리스 엠마뉴엘과 앙드레 삐로에게 음악학을 계속 공부한 뒤, 1939년 스페인으로 돌아와 <아란훼스 협주곡>을 작곡, 사인스 델 라 마사에게 헌정.초연해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로드리고는 기타아를 연주할 줄은 몰랐지만, 이 악기의 독특한 작곡기법으로 <즐거운 소나타>와<스페인 소나타>등을 작곡했고, 매우 포플러한 <토니딜라와 환딩고> 2중주곡과 노래와 함께 연주하는 <휠리아스>.<카나리아스>.<3개의 스페인 노래>등이 유명하다. 더우기 로드리고의 기타아 협주곡들은 현대 세계에서 최고 정상급으로 꼽히고 있는데, 그 까닭은 음량이 적은 기타아일지라도 특성을 잃지 않고 오케스트라아와 멋진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의 작곡기법은 스페인 특유의 리듬과 민요와 카덴짜를 바탕으로 하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 기우는 형틀과 신고전적인 화성과 가락, 그리고 현대 불협화음을 사용함으로써 18세기 이래 스페인 국민음악과 선배들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국제성을 띄워 풍융한 음악으로 빛을 발하며 치달았다. 1954년에 작곡된<어느 귀 신사를 위한 환타시아>는 세고비아에게 헌정.연주된 곡이지만, 17세기 선배대가 가스파르 산스를 위해 쓴 작품으로도 보고 있다. 한편 성음에서 내놓은<축제 협주곡>도 유명하며, 기타 이외 바이올린을 위한<여름 협주곡> 그리고 첼로를 위한<경쾌한 풍의 협 주곡>도 잘 알려진 곡들이다. <기도와 춤>은 1962년 프랑스국영방송국 음악콩쿨에 11등을 한 곡으로, 원래 화야를 존경해 작곡한 찬가인데 알릴리오 디아스에게 헌정.연주함으로써 인기를 현대기법의 명곡이다. 무조의3/4박자 하모닉스주법의 전주로 시작해 장식음과 아르페지오(분산화음)와 트레몰로주법이 번갈아 교체되는 매우 신비롭고 명상적인 곡이다. <저기 목동들이 가네>와 <산타아고 데 콤포스텔라 길을 따라>는 <3개의 작은 소품들>가운데 2곡이다. 먼저 <저기 목동들이 가네>는 크리스마스 캐롤곡상으로, 같은 음높이로 되풀이 되는 오스티나토 베이스주법과 인상적이고 몽롱한 조성은 로드리고의 작곡 특징을 엿 볼수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걸음따라>는 스페인 북서지방에 위치한 옛도시의 희미한 추억과 반항을 음미하여 얻어진 작품이다. 이 도시는 한 때 라 코르냐주의 수도였고, 현재는 카토릭 주교관구와 대학교가 있으며, 세고비아의 여름 기타아 학교로 유명한 도시이다. 또한 중세 시절엔 사도 성 야곱의 무덤이 있다고 믿어, 예루살렘과 더불어 제일의 성지순례지로 이름을 떨쳤다. <3개의 스페인 소품들>은 <환당고>와 ,파스칼리아>와 사파이테아도로 이루어진 곡인데, 1954년 <어느 귀신사를 위한 환상곡>작곡 몇주 전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첫번째 <환당고>는 18세기경으로 부터 스페인 남부 안다루시아 지방의 후라멩꼬 민요와 춤곡으로, 3박자와 6박자를 지녔다. 이곡은 등불 킬 무렵에 많이 불려지고, 느린 춤곡에 때로는 발라드풍의 노래도 곁들여지는 경우도 있으며 가끔 끝부분에 가서 치달아 격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 환딩고는 3곡의 소품가운데 가장 유명해 자주 단독으로 연주하는데, 중간 트리오 부분을 제외하고는 보통 테마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세빌랴나스>영향을 받은듯 매우 복잡한 악기와 춤곡멜로디 스타일을 지녀 18세기 마드리드 특유의 경쾌함과 화려함을 지녔다. 두번째 <파시칼리아스>는 샤콘느와 비슷하게 느린 3박자의 춤곡이다. 마지막<사바테아도>는 스페인 남쪽 안다루시아의 3박자를 지닌 춤곡이다. <헤레스의 들판>도 스페인 헤레스의 정경묘사곡으로, 로드리고 독특한 기법으로 풍토내음이 물신 나는곡이다. <옛사라반다>는 스페인의 유명했던 비웰리스트 루이스 밀란은 <엘 마에스트로>를 출판해 비웰라를 위해 <환타시아>.<사랑노래>.<소네트>.<로망스>등 그 무렵 스페인 왕조의 우아함을 연상케 하는 곡을 많이 작곡했으며, 까스띠아에 신사를 위한 학교도 세운 멋장이였다. <즐거운 소나타>는 로드리고가 즐겨 작곡했던 3악장 형식으로 <스페인 소나타>와 같이 기타아로 된 명곡이다. 이 곡은 날카로운 불협화음으로 매우 유모스러운 도메니코 스카를랏타 음악을 다시 부르는 듯 하나, 궁극적으로 볼 때 최근의 근대 클래식 소나타 형식을 구하고 있다. 또한 로드리고는 여러 악기-피아도,바이올린.첼로등-로 바꾸어 많은 소나타를 작곡했다. <헤네랄리훼 곁에>는 스페인의 여러 풍경 가운데 가장 인상 깊은 아름다움을 묘사한 곡이다. 훼네랄리훼는 알함브라궁전과 같이 연결된 신비스러운 정원으로, 누구나가 다 스페인에서 제일의 명승지로 꼽고 있다. 향기롭고 살랑거리는 듯한 미풍과 멀리서 들리는 은은한 교회 종소리와 함께 정원의 꽃들은 주위를 막아주는 상록수들 덕으로 그들의 편안한 안식처에서 너울거리며 춤추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안락하고 정취가 깃든 분위속에서 기타아는 한껏 그 본연의 넋을 울릴 수 있는 것이다.
[빈센토 아센시오 Vincento Asencio (1903)]
스페인에서 출생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그는 현재 바렌시아 음악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예페스(Narciso Yepes, 1927- )는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작곡법과 화성학을 배웠다. 작품은 스페인의 민족적 소재를 현대적 수법을 사용하여 이지적(理智的)인 작품을 만들고 있다. 세 사람의 찬가집중 Tango에서 볼 수 있는 복잡한 리듬과 새로운 멜로디는 흥미로운 감을 준다. 이곡은 스페인의 국민시인 F. Garcia Lorca에게 바친 곡이다. 기타외의 작품으로 피아노곡,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 등이 있다.
[마리아 루이사 아니도(Maria Lusia Anido) (1907)]
190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금교 모론에서 출생한 아르헨티나의 여류 기타리스트.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기타아를 배우고, 7살때에 1년동안 도밍고 프라트에게 사사했다. 그 밖에 로블레도에게 4개월간 배운것을 비롯하여, 렐로우프와 료벳에게도 사사한 바 있다. 18년 11살때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명기 토레스(A.de Torres - 타레가가 아끼고 사랑하던 기타아)로 첫 리사이틀을 갖고 절찬을 받은 바 있으며 아니도의 천재는 프라트가 말한 "어제는 나의 제자였으나, 오늘은 나의 동료이고, 내일 나는 그녀의 찬미자가 될 것이다."라는 격찬으로 잘 설명된다고 하겠다. 29년 료벳의 제 4회 남아메리카 리사이틀에서 2중주를 연주하여 상을 받은 일을 비롯하여, 현재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거장의 한 사람이다.
[루이제 발커 (Luise walker) (1910)]
1910년 비엔나 출생. 8세때 기타를 시작하여 13세때 비엔나에서 데뷔하였다. 비엔나 국립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면서, 아니도. 프레스티와 더불어 20세기 3대 여류 기타리스트였다. 그녀 작고의 "작은 로망스"라는 포퓰러한 곡이 전해진다. [호세 무노즈 몰레다(Jose Munoz Mollida)]
호세 무노즈 몰레다(Jose Munoz Mollida)는 카디츠 출신으로 마드리드 음악원 시절 여러차례 상을 받았고 1934년엔 스페인 정부가 주는 로마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그의 사중주곡 F단조는 산타 세실리아 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은 작품으로 이탈리아 사중주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몰레다는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의 많은 영화음악을 비롯하여 다양한 작곡활동을 펴왔고 수상 경력 또한 광범위하다. 1960년에 그는 마드리드의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지명되었고 현재 바르셀로나의 산 호르헤 왕립 음악원과 발렌시아의 산 카를로스 왕립 음악원의 교수로 있다. 세고비아에게 헌정된 그의 <주제와 변주>는 광대하고도 청명한 선율을 바탕으로 다섯개의 변주가 전개되는데 주제와 변주가 모두 단조로 되어 있다. 제1변주는 빠른 템포의 춤곡풍으로 시작되어 랩도디풍으로 변해간다. 제2변주는 목가(pastoral)적인 느낌을 주며 제3변주는 경쾌한 3박자 리듬의 곡이다. 제4변주는 주제를 반복 대칭시켜 나란히 열거하고 있고, 제5변주는 행진곡풍으로 시작되어 다양한 변주를 거쳐 다시 주제로 돌아간다.
[로스 로메로스 (1918)]
로메로 일가 - 1918년 안달루시아 지방서 태어난 아버지 세레도니오(Celedonio)와, 1938년생인 장남 세린(Celin), 둘째 페페(Pepe), 막내아들 앙헬(Angel) - 가운데 페페 로메로가 현재 제일 유명하다. 그는 스페인 남단 말라가에서 태어나 아버지에게 3살때부터 기타를 배운 후 세빌리아의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극장에서 음악 대학 기타교수로서 있으며, 후진양성과 기타연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1957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이민을 한후 그들의 미국에서의 첫 공개 무대출연은 1961년이었고 그로부터 매년 100회에 가까운 연주를 하여 왔다. 그들의 연주 곡목은 바하와 비발디로부터 집시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고 그들의 즉흥 연주는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솜씨로 인정되고 있다. 스페인의 현대 작곡가인 로드리고(Joaquin Rodrigo)는 그들을 위하여 「4개의 기타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여 주기도 하였다.
[페페 로메로]
스페인 남단 말라카에서 태어난 페페 로메로는 로스 로메로에서 가장 뛰어난 기타리스트이다. 로스 로메로는 아버지 첼레 도니오, 형 첼린 로메로, 페페 로메로, 그리고 동생 앙헬 로메로로 이루어진 4부자의 기타합주단이다. 페페 로메로는 아버지와 함께 세빌리아의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극장에서 데뷰하였다. 그 후 1960년부터 현재까지 미국과 유럽등을 연주여행하고 있다. 현재는 남 캘리포니아 대학 기타 주임교수로 있다.
[존 보다 John Boda 1922]
위스콘신 주 보이세빌리 태생. 켄트 주립대학과 이스트만 음악학교졸업, 1956년 작곡 부문 박사학위 습득. 피아노가 그의 주연주악기였기 때문에 가장 탁월한 프랑크린 .카르나한 과 호세 .에카니즈를 스승으로 하였다. 1946년에서 47년에 그는 죠지.쉘의 제자로서 지휘자 역할은 하였다. 그때부터 미국남부에서 지휘자로서 또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왔다. 1947년 부터 프로리다 주립 음악대학에서 음악이론, 작곡, 피아노의 교수로 있으면서 작곡부문 학위논문 심사 위원장직을 맡아보았다. 그의 작품으로는 루터란 아워 코오러스를 위한 곡들과 벤자민 어워드퍼 콰이뮤직, 오란도 오케스트라 그리고 기타를 위한 작픔도 포함하고 있다.
[이다 프레스티 (Ida Presti) (1924)]
1924년 프랑스 출생. 6세때부친에게 기타를 재우기 시작하여 10세때 파리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져 천재 소녀라는 극찬을 받았다. 그녀가 13세 되던해 (1938년)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죽고 어머니와 3살된 여동생을 돌보면서 생활을 꾸려 나가야만 했다. 그후 전쟁과 힘든 고난의 순간들을 겪었던 그녀는 그때를 결코 되새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1943년 그녀가 19세때 Henry Rigaud와 결혼한후 1년뒤에 딸 Elisabeth를 낳았다. 그 시기에 그녀의 어머니는 두번째 결혼을하여 Gina를 낳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의 남프랑스에 살았으며 가끔 정부기관을 위한 연주회를 준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정기적인 연습은 하지 못하였으나 종종 새벽 2-3시까지 짚시 친구들과 기타를 치며 어울렸다. 또한,프레스티는 아주 맑고 고운 목소리와 초고음 소프라노의 음성을 지녔기에 그후 파리의 Gaveau홀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녀는 악보없는 즉흥연주를 좋아하였으며 유명한 기타리스트 Alexandre Lagoya가 Sor의 연습곡중 하나를 특별하게 만든 곡의 세번째 멜로디를 즉흥적으로 멋지게 연주하여 라고야를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후 알렉산더 라고야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였으며 이중주 파트너가 되었다. 그들은 한때 솔로 연주를 뒤로하고 이중주 연주로 높은 활기를 보였으며 그 당시 그녀는 많은 곡을 작곡하였다. 세계 제 2차 대전후 그녀 나이 20세때에는 놀랍게도 그녀를 `여성 모짜르트`라고 칭하였으며 프랑스,이태리,폴란드,독일,마르코,인도네시아 그리고 영국등지로 연주여행하였다. 그녀의 아랑훼즈 협주곡은 라디오 방송에서 즐겨 애용했다. 그녀는 화려한 독주자로 활동하던 30대 초반에 알렉산더 라고야와의 사이에 두번째 딸 Sylvain을 낳았다. 알렉산더 라고야와의 이중주는 역사적인 큰업적을 남겨 오늘날 '아사드 형제'등 많은 이중주단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녀의 교수법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마치 흐르는 샘과 같은 풍부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배우는 학생들로부터 표출할 수 있도록 각자 알맞은 운지와 각 음절마다에 음악적 실험과 관찰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43세의 여생 가운데 33년 동안이나 전문 기타리스트로 지냈으며 그녀의 작곡, 작품들도 녹음,취입되었다. 우리는 그녀의 음악을 통해 기타음악 애호가가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는 기필코 그녀를 위한 두번째 장례식을 치뤄야 할 것이다.
[스테픈 도드슨 Stephen Dodgson (1924)]
런던 왕실음악 아카데미 기타교수인 Dodgson은 Hector Quine교수와 함께 공동으로 만들어낸 기타 연습곡집Ⅰ.Ⅱ권에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된 설명을 붙인 10여곡씩의 연습곡집이 있고 15년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작곡한 기타협주곡도 남기고 있다.
[김 형 주(1925 - 한국)]
우리나라 음악계의 중추적 위치에서 평론가.작곡가로 활동하는 선생은 1925년 12월 4일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났다. 일제시대의 불우했던 환경 속에서도 일찌기 어렸을 때부터 강렬한 음악에의 열망으로 독학을 해 오다가 중학교 시절부터 본격적인 음악 수업에 들어가 외국인 선교사로부터 작곡을 공부하였고, 22세 되던 해인 1947년 당시 서울대학교 음악과에 재학중 현악4중주곡을 발표하여 음악계에 데뷔한 이래 많은 작품활동을 하여 두차례에 걸쳐 작곡 발표회를 가졌으며, 오래 전부터 현재까지 KBS음악 해설위원으로 있다. 대표작으로는 [5개의 관악기를 위한 음악].[실내악을 위한 환상].[6분을 위한 환상], 피아노곡으로는 [방울 전주곡]외 다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동심].[야상곡].[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시적 명상], 가곡 80여곡 이상 등, 이 외에도 다수의 작품이 있고 근래에 들어서는 무조의 기법에 의한 현대풍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또한 저서로는 [전통화성학] .[명곡해설전서] .[세계의 작곡자].[음악 감상법]등이 있다.
[나르시소 예페스(Narciso Yepes) (1927)]
나르시소 예페스는 뛰어난 음악가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음악을 이해하여서도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천부성을 가졌고 기교적으로 완전한 그는 듣는이로 하여금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1927년 남부 스페인의 로르카에서 태어났다. 바렌시아 음악원에서 음악의 기초를 기제킹과 에네스코에게 배웠다. 20세 때 스폐인 국립교향악단과 로드리고의 <아랑훼즈 협주곡>을 연주해 크게 성공했다. 그후 10줄 기타를 창안하여 넓은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 영화 '금지된 장난'의 음악을 기타 한대로 완전무결을 담당 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예페스의 특징은 꾸준한 자기 개척을 통한 완벽한 묘미와 기술, 한치의 흐틀림이 없는 정확한 연주이다. 그는 현재 유럽,미국,일본에 정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그는 기타아곡을 편곡하기도 하고 수없이 작곡하였다. 시험적인 수년간을 지낸후, 그는 기타아의 기교를 혁명적으로 발전시킴과 동시에 기타아 역사상 처음으로 악기의 영역을 의미있게 넓혔다. 예페스의 레파토리는 실내악 즉, 기타5중주나 비발디의 협주곡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레나타 타라고 (1927)]
여류 기타리스트 레나타 타라고는 1927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 출생하였다.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하는 카르타냐 지방은 전통적인 대 기타리스트를 배출한 곳으로서 소르, 타레가를 비롯해서 그들의 제자인 로베에트와 뽀르가 모두 이곳에서 태어났다. 타라고의 부친은 로베에트의 수제자로서 우수한 기타리스트 겸 민속음악 연구가로서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다. 타라고는 이러한 부친으로부터 기타를 배움으로서, 손톱을 사용하지 않고 손끝으로, 튕기는 로베에트를 통한 오르독스한 주법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타라고는 현대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중에서도 특히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연주자에 속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손톱을 사용하지 않는 연주법에 의해, 최고의 명기로 인정되는 그녀의 애기(愛器) 토레스가 내는 음의 울림은 깊고도 깊은 인상을 남겨준다. 더우기 타라고는 여성 기타리스트 다운 부드럽고 정서적인 표현을 보여주기 때문에, 특히 그녀의 주법의 장범이 잘 살려지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리듬감과 색채감이 예민한 것은 더욱 말할 나위도 없다. 최근의 녹음에서는 오른손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손가락으로 손톱을 쓰는 것 같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레오 브로우워 Leo Brouwer (쿠바)] 작곡가이자 기타연주가로서 쿠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0년대부터 꾸준히 새로운 음향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성공된 특이한 작품을 써왔다. 그의 대표적인 곡은 [무용 찬가].[끝없는 나선계단].[특징있는 무곡].[3개의 스케치]등으로서 가장 현대적 수법인 조성의 복합과 탈피를 사용하는 전위물을 창작하였다.
[김 용 호 (1933 - 한국)]
전남 여수에서 5월 19일 태어난 그는 1958년부터 여수 고등학교, 여수 여자고등학교에 재직 10년간 몸담아 오다가 1970년부터 서울에 거주하면서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72년도 서울음악제에 공모작품, 가곡<승무>가 당선된 이후 1975년 10월 13일에는 기타 작품만의 작곡 발표회를 처음 가졌으며, 1977년 3월 28일 가곡 및 기악곡의 작곡 발표회가 있었다. 특히 1978년에 全日本 기타 콩쿠르 작곡 부문에서 [韻]이라는 독주곡으로 特別賞을 받기도 하였다. 주요 작품은 가극 [소나기].[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 Composition for E].[피아노를 위한 3개의 단상], 교향시 [동해].[현악4중주 3장의 상악].[바이올린 협주곡 1번 G장조].[기타와 소프라고, 플루트, 종을 위한 4중주],가곡 70여편과 기타(Guitar)작품은 20여편에 달한다. 저서로는 [새 바이올린 교본].[김용호 가곡집].[음악통론]등이 있다.
[루이스 피포 Luise Pipo 1933]
스페인 그라나다 출생. 젊을 때 부터 대가의 풍모가 엿보이는 작곡가. 현재 파리에서 살며 좋은 작품들을 내고 있다.
[베렌트 (Sigfned Beherend) (1933)]
1933년 독일 베를린 출생. 거의 독학으로 공부하여 18세때 첫 리사이틀 후일약 독일을 대표하는 기타리스트로 성장하였다. 레파토리는 실내악, 콘체르토, 전위음악등 광범위하며 작곡과 연주를 겸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줄리안 브림 Julian Bream (1933)]
1933년 7월 15일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난 기타 및 류트 연주자. 어려서는 그의 아버지에게 배웠고 14살때 켈텐햄(Cheltenham) 기타 서클에서 연주를 했다. 1750년 런던에서 데뷔했는데 이후 전 영국을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클래식 기타의 연주는 대중적이지 않아 브림의 성공적 데뷔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1950년 데뷔 직후 브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류트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곧 그 분야의 권위가 된 그는 연주회 프로그램에 덜 알려진 옛 음악을 적지 않게 삽입시키곤 했다. 엘리자베드 시대 음악에 관한 테너 피터 피어스와의 공동연구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바 있는데 버클리(Berkeley), 브리튼(Britten), 헨체(Henze), 티페트(Tippett)등 주요 작곡가들이 그 영향을 받아 류트와 성악을 위한 작품을 썼다. 브림은 1954년 스위스에서의 연주회를 시발로 유럽전역의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1956년 브림은 빌라 로보스를 만나는데 이를 계기로 그의 기타 협주곡을 영국에서 처음 연주하기도 했다. 1958년 이후 브림의 시야는 미국 뿐만 아니라 극동 지역까지 크게 넓혀졌다. 줄리안 브림 콘소트(Julian Bream Consort)가 결성된 것은 1959년의 일이었다. 처음에는 몰리(Morley)의 콘소트 레슨교본 Ⅰ권을 연주하기 위해서 였는데 이 그룹의 성공은 르네상스 시대 콘소트 음악의 대중적 인기를 끌어 모으는 부수적 효과까지 거두었다. 이를 지켜본 몇몇 작곡가들은 기타음악의 효용성을 깨닫고 작품을 썼으며 베네트의 쳄버 앙상블을 위한 협주곡, 브리튼의 녹터널, 월튼의 다섯개의 바가텔 등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브림은 기타의 모든 페퍼토리에 대해서 풍부한 지식과 이해를 갖고 있다. 그의 화려한 스타일, 밀도 깊은 음색은 그의 연주를 듣는 일을 하나의 감동적인 경험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1964년 브림은 OBE(Officer of the British Empire 서훈의 일종)로 임명되었다. 또한 1968년 서레이(surrey)대학으로부터 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니이보리(H.Niibori) (1934)]
1934년 일본 동경에서 출생, 11세 부터 기타를 시작 했으며 중.고등학교때 부터 합주 지휘자로 활약 하였다. 청산 학원 대학에서 교육학과 음악을 전공하여 졸업과 동시에 기타음악 교육계에 투신하여 새로운 기타 합주법과 지휘법을 개발했으며 특히 특수 기타를 고안 개발하여 세계 최초의 기타 합주단(75명)을 편성 75곡 이상의 레퍼터리로서 현재 월 5회 이상의 발표회, TV 출연, 레코딩(24매 발매) 등 기타 음악 사상 유래없는 신 기원을 수립 하였다. 1965년 유럽 각지를 시찰, 일본 최초 "국립 음악대학" 기타 강사로 초빙 되었으며 전국 교육 기타연맹 이사장에 임명 되었다. 수년전 일본 최초의 기타 전문 학교인 "일본 기타 음악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학장으로 취임 했으며 "니이보리 기타 음악원" 원장으로 현재 소화(昭和)의 영웅으로 불리우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 기타 교칙본", "새로운 기타 메소드", "기타 합주 앨범", "새로운 기타 합주 명곡집" 등이 있으며 다수의 편곡이 있다. 특히 "니이보리 기타 실내합주단"이 연주하는 레코드의 일부를 "니이보리"선생으로 부터 기증 받은 것을 한국의 클래식 기타 팬을 위하여 CBS 서울 기독교 방송국에 녹음 비치 하였으므로 기타 음악 애호가들의 많은 감상이 있기 바란다.
[존 윌리암스 John Williams (1941)]
20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기타의 황금시대가 출현되었으니 Bream과 Williams라는 기타계의 두 거장들에 의한 폭넓은 연주활동과 그들이 연주하는 프로그램의 내용이 참으로 다양한 가운데 현대 작곡가들의 훌륭한 새로운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두 연주가의 연주에 고무된 많은 작곡가들이 다투어 그들에게 기타 작품을 헌정하여 기타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데 일익을 맡기에 이르렀고, 마치 좋은 연주자등 유럽 음악계의 많은 중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Britten, Martin, Barkely, Benetled, Dodgson, Malcomlm, Duarte등 유럽 음악계의 많은 중진들이 그들의 작품들을 Bream과 Williams에 의하여 초연되도록 전개되었으니 기타계로서는 레파토리의 확장과 기타음악가의 발달을 꾀하게 되느네 하나의 전기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연주가가 훌륭한 작품은 만든다고 할까? 아뭏든 현대에 들어 기타는 일반 음악가들의 뒤늦은 맹렬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뚜렸하다. 1941년 호주 맬버른 줄생. 기타리스트인 부친에게서 기타를 배운후 세고비아의 제자가 되었다. 런던 왕립 음악 국립학교를 졸업한 그는 한때 프로그래시브라는 그룹을 이끌었다. 그의 연주는 경제적인 기교의 구사, 명료한 음색으로 청중을 휘어잡았다. 세고비아는 '20세기 기타의 왕자가 출현하였다.'고 칭찬하였다.
[게르겔리 사르케지]
"처음에 나는 첼리스트로 출발했으나 결국엔 한 사람의 음악가가 된 감이 든다." 게르겔리 사르케지의 약간 아이러닉한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실 그는 평범한 연주인은 아니다. 그는 연주가이며 악기 제작자이며 또한 능력있는 편집자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샤르케지는 실내악연주자이며 다른 여러 악기를 위한 반주 역활도 즐겨한다. 그가 관심을 두는 음악은 아주 다양하다. 민속음악을 포함, 중세기 음악으로 부터 바로크 작품에 이르기까지를 그는 열성을 갖고 탐구하고 연주한다. 그가 음악원에서 실제로 공부한 것은 작곡과 첼로였다. 국내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미 중세 트로바토크 음악과 바로크 음악, 르네상스 음악등을 녹음, 여러 종 출반한 바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악기는 하프시코드, 오르간, 첼로, 비올라, 다 감바, 레벡, 다양한 종류의 류트, 기타, 백 파이프, 유태 하프, 실로폰, 타악기 등이다. 믿을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악기와 다양한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하는 그의 음악세계는 방대한 만큼이나 깊이도 있다. 이번 앨범은 그러므로 바흐음악의 위대함이나 류트의 매력과 더불어,게르겔리 사르케지라는 독특한 음악가의 세계를 접하는 기쁨을 안겨 줄 것이 틀림없다.
[에두아르도 훼르난데즈(Eduardo Fernandes) (1952)]
훼르난데즈는 1952년 우루과이의 수도인 몬테비데오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음악 애호가로서, 그 영향으로 그는 7살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첫 수업부터 라울 산체스 선생에게 기타를 사사하기 시작한 훼르난데즈는 그 뒤에 기도 산토르솔라에게서 음악 전반에 관한 수업을 받으며 자기 자신만의 독자적 음악 표현의 기초를 쌓기 시작했다. 연주와 이론에 대한 기초를 탄탄히 다진 그는 그것을 완벽하게 실천하기 위하여 아벨 깔레바로에게서 4년간 사사하며 깔레바로의 주법을 몸에 익혔다. 연주가로서의 데뷔는 1963년, 그의 쌍동이 형과의 이중주로 시작했다. 솔로 활동은 71년 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콩쿨 수상경력은 1975년 세고비아 국제 기타콩쿨 우승과 같은해 파리 국제 기타콩쿨 2위를 차지했다. 파리콩쿨 사상 1975년의 17회 대회 만큼 치열했던 대회는 매우 드물다. 이 대회는 아벨 깔레바로의 제자들 끼리의 실력 대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1위는 아르헨티나의 로베르토 아우셀, 2위는 훼르난데즈, 3위는 마우엘 알헬 히로제(Miguel Angel Girollet)였다. 그 다음해인 18회 대회에서 다시 알바로 삐에리가 우승함으로써 17회, 18회 파리콩쿨 출신이 오늘날의 남미 솔리스트 커렉션을 이루게 되었다. 1977년 뉴욕 데뷔를 함으로써 국제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1983년의 런던 공연이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영국의 데카(DECCA)사와 계약을 맺게 되어, 이후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훼르난데즈의 레파토리는 실로 광범위하며, 이미 발표된 CD로도 기타의 주요 레파토리는 거의 커버하고 있다. 특히 그가 협연하는 연주회를 본 사람은 모두가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훼르난데즈는 한번 이혼한 경력이 있는데 지금의 부인인 아나 토레스는 현재 인기있는 작곡가 이다. 훼르난데즈는 그의 아내가 작곡한 곡을 연주회 때 곧 잘 연주한다. 뿐만 아니라 훼르난데즈는 자기나라의 작곡가인 라마르케 폰스와 헥토르 토사르의 기타곡도 잊지 않고 녹음해 오고 있다. 특히 토사르에게서는 바쁜 와중에도 3년간 작곡 수업을 받아, 오늘날 훼르난데즈는 공부하는 기타리스트임을 알 수 있다.
[아마트의 기타교본 (1956)]
비우엘라의 황금 시기는 짧았고 16세기에 거의쇠퇴해 버렸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중부 유럽이나 영국에서 애용된 류트가 나라에 따라서 다르지만 1700년부터 그 후에도 수 십년에서 백여 년 간이나 전통을 유지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에 비하면 참으로 그 생명이 짧았던 악기였다. 그러나 마치 그것과 대신하듯, 전에는 비속한 것으로 멸시당해 왔던 민중의 기타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기타의 새로운 대두를 알리는 최초의 증좌는 아마도 1596년에 바르셀로나에서 그 초판을 본 것 같은 -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오늘날 남아 있는 판이 1627년 이후의 것으로 초판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지만 - 한 권의[기타 교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후안 카를로스 아마트(카탈로니아 식으로는 조안 카를레스 아마트 1572-1642)라고 하며 대단히 취미가 다양하고 아는 게 많은 의학사(醫學士)이며, 이 책 외에도 [카탈로니아 어에 의한 속담 격언집]같은 책도 내고 있다. 물론 본업에도 열심이어서 페스트에관한 소논문이나 라틴어에 의한 [의학의 성과(成果)]라는 저서도 있었다고 한다. 아마트의 [기타 교본]은 장,단 양조를 합쳐 24개의 주요 3화음을 설명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압현(왼손)의 '급소'를 가르쳐준, 지금 식으로 말하면 '코드 네임에 의한 속성 반주법'이라고나 할 것이었다. 오늘의 눈으로 보면 '단순 소박'하게 보이는 이 [교본]은 16세기 말이라는 시점에서 볼 때 커다란 빛을 비추고 있다. 즉 교회나 궁정에서는 아직도 복잡한 폴리포니가 우세하던 시대에 음악을 애호하는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화음으로 반주되는 1개의 선율'이라는 개념과 습관이 이미 분명하게 존재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귀중한 증거 문헌인 것이다. 또 아마트가 이 소책자를 저술한 '주된 동기'로서 '스페인 사람의 성급함'을 들고 있는 것은 흥미 깊다. 요약하면 " 아뭏든 기타를 남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성가시고 귀찮은 일은 없고 대개의 선생은 사흘이면 실증을 느끼고 만다. 그래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안타까운 기타의 초심자들을 위하여 전에는 한 번도 나온 일이 없는 이 입문서를 세상에 내보낸다."는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은 아마트의 기타가 조금 전과 같이 4코스가 아니고 5코스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르네상스의 4코스 기타에 낮은 1코스를 더한 형이었다. 그리고 지금 말한 대로 이 악기는 오로지 라스게아도, 즉 현을 긁음으로써 화음을 내어 노래(또는 아마도 피리나 비올 같은 선율악기도)를 반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데이빗 러셀 David Russel]
스페인 메노루카 섬에서 자라면서 6세때에 아버지로 부터 처음 기타를 배웠다. 16세때 다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로 이주해서 재즈 기타리스트로 부터 정식 수업을 받았으며 런던에서 헥토르 콰인 교수에게 사사받았다.
그후 스페인에서 호세 토마스를 만나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첫 공식 데뷔는 1976년 캐나다, 미국에서 있었다. 기타 애호가클럽에서 만난 여인과 결혼하여 지금은 부인의 고향인 스페인 갈리시아 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부연 설명 하게되면
1953년 스코틀랜드 태생인 러셀은 그의 나이 6살때 아버지를 따라서 Menoruca로 이사를 했고 여기서 젊은시절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훌륭한 기타연주가였는데 러셀의 첫번째 기타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러셀은 런던의 London Royal Academy of Music(런던 왕립음악원)에서 Hecotr Quine과 함께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서 2년만에 줄리안 브림 상을 수상했고 Vaughan Williams Foundation Scholarship을 부여 받았습니다.
그후 Jose Thomas에게서 더 배운후에 1975년 Santiago de Compostela의 Ramirez 상을 받기도 합니다. 그후 1976년 런던예술협회에서 '올해의 젊은 음악가'에 올르게 됩니다.
그의 수상경력은 1977년 Benicasim Competition에서 일등을 한 것을 비롯하여 Tarrega의 작품을 훌륭히 연주한 연주가에게 주는 Special Francisco Tarraga Prize를 받고 같은해 Palma de Mallorca에서 열리는 Andres Segovia Competition에서 일등을 합니다.
그후 그는 전세계를 돌며 많은 자선콘써트를 하기도 하며 연주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Santorsola, Morel, Assad 같은 많은 작곡가 들이 그를 위하여 작곡을 해주었고 그는 이러한 작품들을 캐나다의 Overture, 영국의 Guitar Master and Phoenix, 벨기에의 G.H.A, Polski Nagranya 등에서 녹음을 했습니다.
그는 최근에 런던왕립음악원협회에서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합니다.
[가즈히토 야마시다 (1961)]
1961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생. 8세때부터 아버지에게 기타를 배웠으며 나가사키기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본격적 음악수업을 시작했다. 1974년 일본 나가사키 및 도쿄에서 그의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 나르시소 예페스에게 사사 했으며, 1977년에 제이 토마스와 안드레 세고비아에게 기타강습을 받았다. 그후 각종 세계 기타 콩쿨에서 우승함으로서 음악 평론계 및 언론계로부터 그의 음악적인 예술성 및 다양한 표현력에 대해 놀란만한 찬사를 받았다. 이 젊은 거장은 탁월한 기교와 독특한 표현기법으로 찬사를 받고 있으며, 기타 음악의 지평을 넓히려는 강한 의지로 관현악곡들을 기타용으로 편곡. 연주. 레코딩까지 하면서 열심이다. 그의 음악은 젊은이의 실험에서 나온 특이한 메뉴로만 취급할수 없을 정도로 원숙하고 농밀하다. 그의 편곡 구석구석에는 원곡에 대한 치밀한 연구와 노력의 흔적이 베어있다.
최근 발매CD : "Toccata in Blue"의 수록곡 : C.domenico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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