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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나전사(朝鮮之螺鈿社)’와 한국 근대 나전칠기-IV
노유니아 도쿄대학 인문사회계연구과 Corresponding Author : junias00@gmail.com
참고 : 이 논고는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재, 2016, vol 49, no 2.통권 72호, pp.122-141(20pages)
글을 나누어 싣는다.
2) 주름질 기법의 발달
다카오카에서 귀국한 이들이 고국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전성규가 <담배상자(煙草盒)>와 <상자(手箱)>로 동상을, 김봉룡이 <화병(花瓶)>으로 은상을 받고부터이다(사진 13). 33 식민지
사진 13. 전성규(右), 김봉룡(左)의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 출품작 (동아일보 1925. 3. 4).
31 무사시가와 공방에서 인터뷰, 2015. 2. 20.
32 <전통공예 다카오카칠기 협동조합>에서 인터뷰, 2015. 2. 20.
33 동아일보, 1926. 1. 17, “萬國博覽會에 入賞된 朝鮮의 美術工藝品”; 동아일보, 1927. 3. 6, “水陸萬里거처온 光彩잇는 賞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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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조선에서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만국박람회에서 수상했다는 사실은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단지 나전칠기가 수상했다는 내용이 일편단률적으로 인용되고 있을 뿐, 그 박람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이었는지, 다른 출품작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간략히 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이 박람회의 공식명칭은 ‘현대산업 및 장식미술공예 만국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écoratifs etIndustriels Modernes)’로, 최초의 디자인 전문 박람회로 평가되고 있다. 이전까지의 박람회와는 달리, 모든 출품작에 대해서 전통 양식의 답습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혁신적인 디자인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람회 규칙 중 출품에 관한 일반조건으로 “본 박람회에는 공예가, 공장, 공업가, 모형 제작가 및 출판업자의 제작, 제출에 관한 신 도안및 독창적인 작품으로, 현대의 장식공예품에 속하는 것을 출품한다. 구식의 모사, 모방 및 위작과 관련된 것은 엄격히 배척한다.”34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귀국 후 삼청동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전성규와 김봉룡은 관청으로부터 만국박람회 출품자로 지정된 이후 역량을 총집결하여 표면 전면에 나전 장식이 들어가는 섬세하고 화려한 칠기를 만들어냈다.35 일반적인 시장에서 판매를 염두에 두고 만들던 대중적인 생활용품과, 처음부터만국박람회 출품을 목적으로 제작한 작품은 다를 수밖에 없다. 실물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아쉬우나, 신문기사의 사진을 통해 이들의 작품이 실톱을 이용한 주름질 기법을 적극 구사한 것을 알 수 있다. 곡선적인 당초무늬와 봉황의 섬세한 표현이 눈에 띄며, 특히 김봉룡의 화병은 그의 추후 작품양식을 예고하는 듯한 작품으로 20세기 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누보 스타일의 유리 화병을 나전칠기로 재현한 듯한 인상을 준다. 근대 나전칠기 중 조선시대 말기부터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제작된 나전칠기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런 가운데 현재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의 한국컬렉션 중, 1910년 일영박람회(日英博覧会) 출품작이었던 나전칠기 5점이 소장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36 이것들은 박람회 시작 직전인 1908, 9년경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중 한 점37(사진 14)을 예로 들어 살펴보면 사용된 기법은 대부분 끊음질이며, 따라서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느낌이 강하다. 나전의 면을 넓게 붙일 때에는 면 안에 선각을 많이 집어넣는 등 모조법(毛彫法)을 이용하고 있다. 사슴이나 다람쥐의 몸체는 완만한 곡선을 잘 표현해내고 있지만 포도알 원형의 곡선이 완벽하게 둥글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이렇듯 1910년까지 조선후기의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제작되고 있던 상황에서, 1920년대 초반 실톱을 사용한 주름질 기법으로 인해 이전까지의 나전칠기가 갖고 있던 표현의 한계가 극복되고 매끄러운 곡선 표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34 日本産業協会, 1926, 『巴里萬國装飾美術工芸博覧会事務報告書』, p.15.
35 동아일보, 1924. 11. 15, “三淸洞全成圭氏, 萬國美術工藝博에 라뎐칠긔를 출품하려하나 삼쳔원공비업서걱정”; 동아일보, 1925. 3. 4, “佛國巴里萬國博覽會
에 出品되는 朝鮮工藝品”; 동아일보, 1925. 3. 6, “파리박람회에 출품할 조선의 미술공예품, 조선물산계도 점차 多事”.
36 일영박람회의 조선통감부 출품과 그 행방에 관해서는, 노유니아, 2014, 「1910년 일영박람회 동양관의 한국전시」 『한국근현대미술사학』 제28호, 한국근현대
미술사학회.
37 작품의 제목은 붙어 있지 않다. plaque. 컬렉션 넘버 1910. 11. 30.
사진 14. 1 910년 일영박람회에 출품되었던 나전칠기, 영국박물관소장
사진 14. 1 910년 일영박람회에 출품되었던 나전칠기, 영국박물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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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규와 김봉룡은 1932년부터 개설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으로 약칭) 공예부에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조선미전에 출품된 나전칠기의 비율은 공예부 전체에서도 3분의 1에 달하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의 활약은 눈부셨다. 전성규는 제13회와 16회에, 김봉룡은 제13회부터 23회까지 매회 입선하였는데, 모두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기교가 두드러지는 작품들이다. 분량상 전부 서술할 수는 없지만, 전반적으로 세밀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는 용과 봉황의 모양, 문자의 표현, 반복되는 모란과 당초 문양의 시문 등에서 주름질 기법의 진보가 눈에 띈다. 실톱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주름질 기법은 근대 나전칠기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법으로 자리잡는다. 나전장식은 점점 더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근대 나전칠기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로 대표되는 민예운동파가 조선 백자, 목가구 등에서 발견했던 무기교의 미와는 정반대에 있는 가치관을 보여주게 된다. 일제강점기 공예시장에서 이런 미의식의 수요가 꾸준하게 있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2. 근대적 공예개념의 발아
다카오카는 지방의 작은 도시지만 파리에 거점을 두고 일본미술을 소개했던 유명한 미술상 하야시 타다마사(林忠正)의 고향으로, 이른 시기부터 해외박람회에 참가하면서 공예산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곳이다. 1893년 도야마현 공예품진열장이, 1894년 10월에는 도야마현립공예학교가 개설되는 등, 도야마현 중심지이자 일본에서도 굉장히 이른 단계에 공예관련 시설이 갖춰진 곳으로 평가된다. 1913년에는 현립공업시험장이 개설되기도 했다. 전성규와 동행한 나전 장인들은 수도였던 대도시 경성과 비교하면 규모가 작은 지방 도시로 이동한 것이지만, 칠기에 한해서 본다면 다카오카가 경성에 비해 더 다양하고 깊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들이 다카오카에 거주했던 당시, 다카오카에서 칠기제작에 종사하고 있던 직공수만도 천 명을 넘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38그 중에서도 전성규가 직접 무언가를 보고 배웠을 가능성이 높은 곳은 상품진열소이다. 상품진열소는 시의 직인들이 만든 물건을 위탁판매하는 동시에, 그들이 참고할 견본을 전시하는 곳이었는데 당시 100점도 넘는 칠기 견본을 일본 각지와 외국에서 수입하여 전시하고 있었다.39 또한 이름난 칠공예가들을 초빙해 강습회를 열거나 국내외 박람회참가를 지원하고, 미도리회(みどり会)라고 하는 다카오카
칠공인들의 교류회를 조직하는 등, 칠기제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전성규와 그 일행이 식민지 조선에서 내지 일본으로 이동한 것이 다른 미술가들처럼 유학이나 연수 등의 배움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미 기술이 숙련된 상태에서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간 것이었지만, 오히려 그들이 경험하고 배운 것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공예부문의 1세대 유학생인 도쿄미술학교 도안과 출신의 임숙재와 이순석이 각각 1928년, 1931년에, 칠공과 출신인 강창규가 1933년에 졸업한 것과 비교해보더라도, 이들의 도일은 훨씬 더 이른 시기에 이뤄진 것이기에 의미가 있다. 다시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여기에 일본이 식민지 조선 대표로 출품한 것은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의 고려청자 재현품 6점과 전성규, 김봉룡의 나전칠기 3점이었다(표 2). 일본이 조선미술의 정수로 꼽았던 고려청자와 나전칠기인 셈이다. 그런데 수상한 것은 나전칠기뿐이었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바꿔 말하면, 도미타의 청자가 제아무리 고려 비색을 완벽하게 재현해낸 것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답습에 그친 것으로 평가된 반면, 전성규와 김봉룡의 나전칠기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전통양식의 답습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새로운 디자인의 출품을 요구했던 박람회의 목적
38 富山県編, 1987, 『富山県史 7近代 統計図表』, 富山県, p.243.
39 高岡市商品陳列所, 1922, 『高岡市商品陳列所年報』, 高岡市商品陳列所, p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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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2. 1925년 파리 만국박람회 조선 출품 목록
번호(No.) 분류(Classe) 작품명 출품자명
No.858 Cl.11 Assiette à gâteaux Tomita Gisaku
No.859 Cl.11 V Vase à fleurs en faïence Tomita Gisaku
No.860 Cl.11 Assiette à gâteaux Tomita Gisaku
No.861 Cl.21 Sac à main en jonc Tomita Gisaku
No.862 Cl.21 Sac à main en jonc Tomita Gisaku
No.863 Cl.21 Sac à main en jonc Tomita Gisaku
No.902 Cl.11 Vase à fleurs en faïence Kin Horyu
No.903 Cl.8 Boîte à cigarettes en laque Zen Seikei
No.948 Cl.8 Coffret en laque Zen Seikei
* CORÉE(Chosen)의 전시는 일본 섹션에 포함되었으며 그랑 빨레(Grand Palais)의 1층에 진열되었다. Kin Horyu와 Zen Seikei는 김봉룡과 전성규의 이름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
** Cl.8 목제, 가죽 예술 및 산업( Art et Industrie du Bois et du Cuir), Cl.11 도자 예술 및 산업(Art et Industrie de la Céramique), Cl.21 의류 악세서리
(Accessoires du vêtement). Commissariat général de la section japonaise, 1925, Catalogue Illustré de la Section Japonaise à l‘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écoratifs et Industriels Modernes를 참고하여 필자 작성
과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독창적인 디자인이 실현 가능해진 것은 실톱으로 인해 나전 표현의 가능성이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도미타 기사쿠의 경우에는 그가 직접 제작자가 아니고, 회사 대표의 명의로 출품한 것이지만 전성규와 김봉룡의 경우는 각각 제작자 본인의 명의로 출품했다는 것이다. 특히 제자인 김봉룡이 직접 자신의 명의로 출품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들 사이에 근대적인 공예가 개념이 싹터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들은 이미 다카오카 체류시에 일본의 농상무성공예전람회와 상공성공예전람회 등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조선미전에 공예부가 개설된 것은 1932년의 일이므로, 그들은 다른 공예가들보다 7년 이상 이른 시점에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하여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관전참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12년 이상 더 빨리 공예분야의 공모전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미전에 공예부가 개설되고 수년이 지나서야 공예와 공예가라는 용어가 정립됐던 것울 고려해볼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근대적인 공예, 공예가의 개념을 인식하고 실천한 것은 다카오카에 갔었던 이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조선나전사와 기무라 텐코와 전성규의 사례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조선 칠공예계의 사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전성규의 다카오카 체류 경험이 한국 근대 나전칠기에 끼친 영향은 주름질 기법의 발달이라는 양식적인 변화에서 보나 공예가로서의 의식이 형성되는 측면에서 보나 매우 크다.
그동안 일제시기의 공예사는 조선으로 건너왔던 일본인 공예가와 연구자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조선고적조사에서 발굴된 낙랑칠기로 인해 일본 공예계에서 불었던 복고 유행, 조선의 공예에서 자극을 받았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 운동,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등 도예가들의 가마와 재료가 되는 흙에 대한 조사활동 등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같은 시기의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의 영향관계와는 상반되게, 일본인 측에서 적극적으로 조선의 전통공예를 연구하여 자신들의 창작활동의 동력으로 삼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일본인의 활동은 인적교류라기보다는 조선의 옛 물건과 전통공예, 특히 도자를 매개로 한 자기학습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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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웠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일본으로 갔던 조선인 칠공예가들의 경험을 통해서 한국 근대 나전칠기 창작활동전반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일제강점기 공예사가 서술되어 왔던 일방적인 흐름에 가까운 관점과는 다른, 인적교류를 통한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층위의 시각을 제공한다. 조선나전사에 관한 연구는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지만, 기무라가 다카오카뿐 아니라 일본의 각지에서 판매활동을 벌였던 이상, 앞으로 계속해서 조선나전사 제작품이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본고에서는 다루지 못했으나 조선나전사가 다카오카칠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문제이다. 현재 다카오카시 미술관은 기무라가 귀국하면서 가지고 간 것으로 생각되는 이왕직 미술품제작소의 나전칠기를 소장하고 있다. 한편 다카오카칠기 관련 서적에 실린 다카오카칠기의 계보에는 기무라 텐코와 ‘조선인 직공’이 반드시 등장하는데, 현대까지 계승되고 있는 다른 공방의 계보와는 달리 기무라는 후대를 양성하지 않아 ‘조선인 직공’에서 계보의 대가 끊긴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다카오카 나전칠기에는 한국 나전칠기의 영향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으며, 일본에서 유일하게 칠기의 장식기법 중에서 오로지 나전기법만을 사용하는 나전칠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지역이라는 점은 결코 조선나전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를 기약하고자 한다.
“Joseon-Najeon Company” and Korean modern lacquerwares inlaid with mother-of-pearl
Junia Roh
Graduate School of Humanities and Sociology, University of Tokyo
Corresponding Author : junias00@gmail.com
Key Word Joseon-Najeon Company(Chosennoradensya), Jeon Sung-gyu, Kimura Tenko, Korean lacquerwares inlaid with mother-of pearl, Jureumjil(filing) technique Received 2016. 03. 23 ● Revised 2016. 04. 22 ● Accepted 2016. 05. 02
Abstract
It is known that Sung-gyu Jeon and several other Korean artisans were invited to “Joseon-Najeon
Company” of Kimura Tenko in Takaoka, Japan to teach the skills of making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however these artisans discovered a new tool called fretsaw during the visit, which can easily cut nacre. The introduction of fretsaw in the 1920s in Korea innovated the Jureumjil(filing) technique and dramatically changed the style of modern Korean lacquerware inlaid with mother-of-pearl. In this paper, I will focus on the case of Sung-gyu Jeon, Kimura Tenko and “Joseon-Najeon Company”. I will also examine why and how the Korean lacquerware artisans went to “Joseon-Najeon Company” in Takaoka and exactly what they did there. This analysis will help in discovering how the Korean artisans’ experience in Takaoka affected their works after they came back to 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