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들에게 똑같이 갚아주고 싶다.
증언자 : 이병의(남)
생년월일 : 1946. 7. 27(당시 나이 34세)
직 업 : 다방 주방장(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5월 18일 다방에서 주방일을 하다가 공수부대에게 두들겨맞아 부상당했다.
다방 주방장으로 생계유지
해남군 마산면 산막리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자라났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 배를 한 척 가지고 계셨는데 6·25전쟁이 나자 해창에서 국방군에 의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에 대해서는 항상 입을 굳게 다물고 계셨기에 나는 왜 아버지가 국군들에게 죽음을 당해야 했는지 잘 모른다.
위로 세 살 터울인 누님과 나를 키우시느라 어머님은 보따리 행상을 했다.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배를 곯은 적이 많았다. 나는 15세 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집을 나왔다. 그때부터 1980년까지 20년 동안을 안 해본 일이 없다시피 했다. 서울에서 군밤장사도 했고, 식당 홀보이, 다방 주방장, 여관 등 순천, 완도까지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그중에서 다방일을 제일 오래했다. 모아둔 돈으로 사업한답시고 양장점을 차려 망해 먹기도 하고, 석유집을 하다 돈을 몽땅 날리기도 했다.
1980년 5월에는 북동 시외버스공용터미널 부근 중앙상호신용금고 지하 삼원다방(현 백양다방)에서 주방장을 하고 있었다. 다방이 지하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잘 몰랐다. 손님들이 시내 곳곳에 공수부대가 쫙 깔려 살벌하다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5월 18일 권투선수 박찬희가 5차 방어전을 하는 날이라 권투경기를 보려고 손님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소란스런 소리가 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셔터문을 내리기 위해 나갔다. 셔터문을 막 내리고 잠그려 하는데 어디서 쫓아왔는지 공수부대가 '문 열어' 하는 소리와 함께 워카발로 셧터 문을 걷어찼다. 깜짝 놀라 지하다방으로 도망쳤는데 공수부대 5-6명이 뒤따라 들어왔다. 그들은 가타부타 말 한마디 물어보지 않고 곤봉으로 다방에 앉아 있던 손님들을 개패듯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둘렀다.
나는 주인 누나인 최정아 씨 치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누나가 학생이 아니고 다방 삼촌이라고 하자 누나를 몇 대 갈기더니 그냥 나갔다.
나는 또다시 공수부대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픈 몸을 이끌고 셧터 문을 잠그러 올라갔다. 어느새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밖을 내다보다가 다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방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 옆으로 돌아 비상문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그 문까지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 어귀에 사람들과 함께 서 있었다.
그때 맞은편에 있던 계엄군들이 '들어가라'고 소리치며 쫓아왔다. 나는 사람들 틈에 끼여 그 골목 마지막 집으로 들어가 친구와 마루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20여 명의 시민들이 있었는데 공수부대 10여 명이 쫓아들어와 사람들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나는 바로 옆 건물이 집인데 문이 잠겨 못 들어가 이곳에 있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공수부대가 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옆구리를 내질렀다. 나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와 동시에 곤봉과 워커발에 전신을 얻어터지고는 의식을 잃었다.
그 뒤 과정은 의식을 잃은 상태여서 잘 모르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와 여자 한 명만 끌려갔다고 했다. 공수부대가 나를 질질 끌고 가 트럭에 실으려고 하자 다방 옆 가게 할아버지가 그 사람은 다방 주방에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잠시 후 주위가 소란스러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친구들이 나를 다방으로 데려가 주방 안에 있는 방에 숨겨놓았다.
내가 의식을 차린 곳은 그곳이었다. 최정아 씨가 병원에 가자고 해서 친구의 부축을 받아 학생회관 부근의 복음외과로 갔다. 그 병원은 최정아 씨 단골 병원이었다.
거리는 굶주린 늑대가 마을을 쓸고 간 뒤처럼 적막하고 살벌했다. 병원에서는 우측 9번, 10번 늑골 골절이라고 하면서 입원을 하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미혼인 나는 병원에 입원해 봤자 누가 간호해 줄 사람도 없어 그냥 통원치료를 하겠다고 우겨 돌아왔다.
그 다음날(19일) 친구와 같이 재료상에서 양복을 빌려입고 한일은행 앞쪽으로 가는데 길가에 가마니가 덮여져 있었다. 시체인 것 같았다. 한일은행 앞은 데모군중과 계엄군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아픈 것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걸어갔다. 사람들은 6·25 때 빨갱이 들도 이렇게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이지는 않았다면서 같은 민족, 한 형제인 대한민국 군인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분노를 토했다.
20일부터는 아예 영업을 못 했다. 손님도 없었을 뿐더러 온몸이 붓고 허리가 펴지지 않았다. 첫날은 괜찮더니 다음날부터 턱이 붓고 옆으로 틀어져버렸다. 부축을 받지 않으면 단 한 발자국도 걸을 수 없었다.
21일 계엄군들이 철수했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몸이 아파 다른 것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 다음날 친구들이 와서 경찰서 앞에 있는 진주다방 주방을 보던 신봉선이 21일 건물 옥상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줬다. 나는 친구가 마지막 가는 길에 얼굴이라도 한번 봐야겠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힘들게 기다시피 해서 갔다. 참으로 인생이 허망한 것 같았다. 죽은 친구를 생각 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방 주인이 관을 사왔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학생들이 와서 봉선이 시체를 지프차에다 싣고 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몸이 많이 아팠기 때문에 병원에는 가지 못하고 다방으로 되돌아왔다.
며칠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망월동에 장례치를 때는 참석했다. 그 친구 고향은 전북이었는데 1983년인가 1984년에 지역개발협의회에서 천만 원을 준다고 묘를 이장하라고 해서 아마 그 집에서 옮겨갔을 것이다.
하마터면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뻔
6월초가 되자 몸이 점점 더 심하게 아파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이라고 해봤자 어머님이 1979년에 돌아가셔서 큰집과 친척 몇 분만이 살고 있을 뿐이다. 한 달 보름 정도를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생활했다. 그러면서 몸에 좋다는 것은 똥물에서부터 별의별 것을 다 먹었다. 그때 국군통합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매형이 군의관한테 약을 처방해 주기도 했다.
나는 5·18이 끝나고 바로 시골로 갔기 때문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젊은놈이 몸 아프다고 일도 안 하고 먹고 지내는 것이 친척들 보기에 싫을 것 같아 한 달 보름만에 광주로 올라왔다.
당장 살 방도 없는 나는 친구 어머님이 혼자 사시는 곳에 가서 그분의 도움으로 같이 생활을 했다. 맞아서 골병든 데는 약도 없을 뿐더러 쉽게 낫지도 않았다. 그러는 동안 결혼이라도 할 요량으로 모아둔 돈은 어영부영 다 써버렸다.
중국에서 온 15만 원 짜리 약이라는 것도 서너 번 사먹고, 한약을 몇 달간 먹었더니 많지 않은 돈이 금방 바닥이 나버렸던 것이다.
피붙이라고는 누님 한 분밖에 안계셔서 당장 내가 스스로 벌어 먹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할 형편이라 아픈 몸을 이끌고 다방 주방장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무슨 날벼락인가?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삼청교육대 입소장이 날아왔다.
그 몸뚱아리에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가면 영락없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빠질 구멍이 없는가 궁리를 했다. 그때 먼 친척 여동생의 소개로 만나게 된 여자가 있었는데 입소일이 12월 9일이라 그날로 결혼 날짜를 잡아 면장에게 사정을 했다. 결혼하는 날이니 뒤로 연기 좀 해달라고 사정사정하여 그 고비를 넘겼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입소장이 나오지 않았다.
일 년에 3, 4개월 일하고 7, 8개월을 쉬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그럭저럭 생활을 했다. 당연히 생활이 쪼들렸다.
그 뒤 아는 사람이 1983년쯤에 중앙정보부에 신고하라고 서류를 가지고 왔다. 그래서 서류를 작성해 보냈더니 서류가 틀렸다고 다시 신고서류를 하라고 했는데 연락이 두절되어 신고를 하지 못했다.
내가 복이 없는 놈인지 늦장가들어 어렵게 낳은 아들놈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았다. 어떻게 아들놈을 살려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후환이 두려워 부상자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도 못 했다. 결국 아들놈을 잃고 난 후 적극적으로 부상자회에 나가 활동을 하고 있다.
우리 부상자들은 꽤나 사정이 복잡하다. 이번에 추가신고자 중 512명이 인정을 받았는데 그중 60명이 무급처리를 받았다. 부상자는 등급이 1급에서 4급까지 있는데 60명은 그때 맞은 것은 인정되지만 지금은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무급처리 한 것이다.
건강진단이랍시고 피검사, 소변검사 등 아주 형식적인 검사 정도만 해가지고 무급판정을 할 수 있는지...... 아무튼 그놈들은 사람 새끼들도 아니다. 부상자들 대부분이 후유증으로 골병이 들어 시달리고 있는데 외상이 없다고 인정하지 않는걸 보면 때려 죽여도 속이 안 풀리겠다.
나도 이미 허리가 어긋나서 제대로 쓰지 못할 뿐더러 갑자기 멍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통증이 시작되면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있으면서 안정을 취해야 한다. 귀가 아파 병원에 다녀도 병원에 다닐 때뿐이고 아프긴 마찬가지다. 제발 병원다운 병원에서 정밀진단이라도 받아보고 속병이 뭔지 알았으면 좋겠다.
지난번에는 부상자회 회원 중 무급처리를 받은 회원들이 시청에 농성하러 갔다. 하지만 대답은 무지막지한 백골단한테 얻어터져 부상자라는 것이었다. 1980년에 그놈들이 그렇게 때려 병신 만들어놓은 것도 부족해 또 우리를 구타해 회원인 이삼학 씨가 전남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사분란하게 하나가 되어 저 못된 놈들에게 대응하는 일이다. 둘로 나뉘어 있는 부상자회도 실상을 보면 감투싸움에 불과하다. 어느 집단이건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런 차이를 극복하고 하나되기 위해 서로 마음을 터놓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1980년 5월만 생각하면 골머리가 아파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피가 거꾸로 솟구칠 것 같고, 이렇게 골병들어 골골거리면서 살아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그놈들한테 똑같이 갚아주고 싶다.
무급처리된 우리 부상자들을 회유하느라 특별법 제정 운운하지만 어디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60명 중 20명만 구제를 해주겠다느니 하면서 또 어영부영 넘어 가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 같다. (조사정리 이현주)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