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2.5.) 우체국 공익재단에서 후원하는 '행복배달 소원우체통'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연말에 즈음하여 지역아동센터 어린이들과 함께하는 따뜻하고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저마다 그동안 갖고 싶고 받고 싶었던 선물을 자신만의 사연이 담긴 편지글로 작성하여 제출하면, 우체국에서 희망하는 물품을 구입하여 전달하는 조촐한 행사였습니다.
저 같은 어른들의 입장이야 이때쯤이면 늘 있는 의례로 생각하기 쉽지만, 아이들은 많이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동안 갖고 싶은 마음이 굴뚝보다 더 컸지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감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 짧은 편지 한 장으로 도깨비 방망이처럼 뚝딱, 해결된다고 하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들뜬 아이들의 발걸음과 재잘거리는 소리로 회의실이 일순간 즐거운 놀이터로 변했습니다. 차분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했던 우체국의 건조한 공간이 아연 활기로 가득찬 순간을 목격하면서, 기억 속에 까마득하게 묻혀 있던 동심이 파도처럼 일어나 거침없이 밀려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늘 함께하는 우체국, 그렇지! '우체국 유치원'은 어떨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잠깐이나마 가슴을 설레게 했습니다.
어린이 대표 세 명이 자신의 사연이 담긴 편지글을 발표하는 것으로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일 때문에 늦게 귀가하는 엄마의 밥 짓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 '그냥 밥솥' 말고 '압력 밥솥'이 필요하다는 다연이. 실직하여 일자리가 없는 아버지에게 차마 '에어팟'(무선 이어폰)을 사 달라고 입조차 벙긋 못했던, 엄마와 멀리 떨어져 사는 탓에 외로움을 너무 일찍 배운 은수...... 사연을 듣는 저의 눈시울은 이미 붉어져 있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로만 생각했던 제가 오히려 철들지 못했음을 거듭 확인해야 했습니다. 너무 일찍 철들어 버린 아이들의 봉숭아 빛 얼굴이, 편지를 받쳐 들고 있는 여리고 귀엽기 만한 열 손가락이, 단어 하나하나를 꼭꼭 깨물어 삼키는 붉고 앙징맞은 입술이, 아직은 더 높이 자라야 할 작은 키가 슬펐습니다. 보송보송한 얼굴에 깃든 그늘과 보일 듯 말 듯 불안하게 떨리는 이슬처럼 맑은 눈동자가 아팠습니다. 가난 때문에 돈 때문에 지친 엄마의 몸과 마음을 읽어 내는 어린 눈, 뒤집어 보지 않아도 추레한 아버지의 뻔한 주머니 사정을 진즉 알아 버린 멍든 동심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저는 그 시간을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고 싶었습니다. 아예 삭제해 버리고 싶었습니다.
마지막 발표는 자신을 예비 중학생이라고 소개한 민진이 차례였습니다. 장래 희망이 작가라는 민진이 말에 제 귀가 더 밝아졌지만, 아픔은 그만큼 더 커졌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을 잘 알면서 가족 생각은 안 하고 작가가 된다면, 가정을 책임지지 못할까 봐 두렵다는 민진이. 요즘 작가는 글을 써도 돈을 못 번다는 TV뉴스를 보고 잠을 설쳤다고 말하는 어린 마음이 밤새 앓았을 절망을 생각하니, 민진이를 둘러싼 이웃과 학교와 사회와 국가는 민진이의 맑은 영혼과 꿈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질문은 부메랑처럼 저 자신에게 다시 돌아와 가슴을 아프게 후벼팠습니다.
그래도 민진이는 씩씩했습니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작가가 되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 다부지게 말했습니다. 왕따여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맹장수술로 아프고 힘들었을 때도, 아무것도 못하는 나를 탓하며 잠들지 못했을 때도, 아무도 내 편이 없어 상처가 속으로 곪을 때도 꿈을 놓칠 수 없었다고. 그런데 아직은 새싹같이 파릇한 영혼이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모양새가 저를 아프고 또 아프게 했습니다. '삶'이라는 말을 상상할 수 없는 어린 나이에 '포기'라는 말을 덧붙여 사용하는 섬뜩함이 가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왜, 턱없이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못하는 자신을 느껴야 하는지, 자신을 탓해야 하는지, 상처가 속으로 곪아야 하는지, 저만 모를까요? 하늘은 알까요? 하늘의 뜻일까요? 안타깝게도 일찍 철들어 철심이 박힌 민진이 가슴은 이미 슬픔으로 짙게 녹슬어 버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민진의 꿈이 꿈처럼 허황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편으로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만의 글쓰는 이유를 당차게 밝혔기 때문입니다. ''힘들었던 나에게, 그때 나에게, 그리고 힘들어 할 수천만 명 중 단 하나의 마음이라도 토닥여 줄 수 있는 것''이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작가랍시고 나대지만 민진이처럼 글 쓰는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해 매일같이 방황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울 만큼, 민진이의 생각은 나이답지 않게 크고 깊었습니다. 자신의 글이 타인을 위로할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기특하고 아름다운지요. 게다가 이 세상에서 힘든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슬프지만 밝고 긍정적인 민진이의 마음가짐에 저는 기립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미래의 작가인 민진이가 받고 싶은 선물은 역시 예비 작가답게 캘리그라피 세트입니다. 민진의 크고 높은 꿈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이 작은 펜이 민진이의 꿈을 아로새기는 데 소중하게 쓰이기를 간곡하게 기도했습니다.
22명의 어린이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면서 많은 웃고 떠들었기 때문일까요. 먹먹했던 가슴이 많이 가라앉았습니다. 이제 행사는 우체국장인 제 마지막 인사만 남겨 두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의례적인 인사말 따위는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슬픔을 너무 일찍 배운 아이들에게 힘내라, 그래도 희망을 가져라는 둥 시답잖은 말은, 아이들의 어려운 처지를 다시 들쑤시고 낙인 찍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 자신에게, 이 세상에게 제발!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자랄 수 있도록 철 좀 들라고 외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 모두 빠져나간 회의실은 아무일도 없었던 듯 원래의 적막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절대 아무일도 없었던 건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이 없는 세상이란 이 텅 빈 회의실처럼 공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이 제대로 설 수 없는 세상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일 뿐입니다.
첫댓글 그런일이 있었군요. 글을 읽어 가며 가슴이 무거웠지만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신 임께 멀리서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조금은 마음이 가벼워졌으리라 생각됩니다. 미쳐 눈길을 줄 수 없었던 곳이 의외로 많음에 저도 먹먹한 심정입니다. 행사가 많은 연말에 건강 해하지 않도록 하십시요.
慈明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