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시집 |서평
잠으로의 초대
- 김재근 시집 『같이 앉아도 될까요』
황정산 (시인, 문학평론가)
김재근의 시집 『같이 앉아도 될까요』를 읽다가 세 번이나 잠이 들었다. 결코, 재미없거나 지루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짐 자무쉬의 흑백영화 같은 그의 시들이 나를 잠과 꿈의 세계로 인도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시들에서는 현실과 꿈, 깨어있음과 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 김재근의 시들을 읽다 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이게 된다. 그의 시에는 알 수 없는 생소한 단어, 새로운 장소나 사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가 제시하는 일상적인 사물들은 낯선 세계를 만들어 낸다.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재배치된 사물들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들고 그래서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서로의 막다름이 되어두자
서로의 바퀴를 굴리며
친절한 얼굴이 등 뒤에 있다고 믿으며
오늘은 뒤로 가는 풍경이 되어두자
낮달을 보면
어제의 목이 말라
햇빛을 우회하는 그들 속으로
눈먼 나비가 몸을 숨기듯
방금 떠오르는 동사자의 흰 눈알로 내륙에 눈보라가 내린다
- 「서로」 부분
제목은 “서로”이지만 이 시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들은 서로 관련이 없다. 낮달과 목마름, “눈먼 나비”와 “동사자의 흰 눈알” 사이에 우리는 합리적 연결고리를 찾기 쉽지 않다. 시인은 이 연결되거나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물의 연관이 사실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순차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혼재되어 함께 존재하는 그런 시간 속에서 우리는 “눈먼 나비”처럼 몸을 숨기고 이 알 수 없는 세상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사물과 그것들의 이행은 합리적 관련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설명될 수 없는 우연의 시간 속에서 한때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다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이 시집의 거의 대부분의 시에 잠이나 꿈이 등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꿈에서 사물과 사건의 연관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애초에 우리의 삶에도 이런 합리적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집 맨 앞에 실린 다음 시는 마치 서시처럼 이 시집의 전체 분위기와 김재근 시인의 시적 지향을 보여주고 있다.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닿기에
여긴 너무 멀어 몸은 어두워진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몸은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바깥에서 몸 안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아
말없이 서로의 젖은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숨소리 같아
잠 속을 떠도는 몽유 같아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 「장마의 방」 전문
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특별한 사물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단지 시인이 방안에 앉아 빗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인이 그려낸 모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간단하지 않은 이유는 “고요해 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요해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고요하니까 빗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시인은 비가 온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방안에 그리고 어둠에 유폐된 시인은 비를 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는 구체적 촉감으로의 대면은 “서로의 젖은 목을 매는 일”처럼 위험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비가 온다는 사실은 “잠 속을 떠도는 몽유 같”이 시인의 의식에서 희미하게 감지될 뿐이다. 이 잠 속에서 몽유병자처럼 떠도는 의식이 우리가 보는 현실이 아닌가 시인은 생각한다. 서로 고립된 우리는 모든 사물의 연관과 인간적 관계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꿈속에서처럼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다. 그것은 유폐된 방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장마를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일상적이지만 항상 낯선 이 세계를 그려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허상 속에 있는 것인가를 시인은 묻고 있다. “몸이 빗소리를 모”으듯 그 낯선 허상들을 모으는 일이 바로 김재근 시인의 시 쓰기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시인은 왜 이런 시 쓰기를 하는 것일까? 다음 시가 이 질문에 답을 해 준다.
이불을 덮어줄게
오래오래 잠들어
내일도 모레도 오지 않을 테니
감은 눈이 평평하다
원근이 사라지고
근시가 지나가고
판자처럼 납작해지는 꿈
그만 눈을 떠야 하는데
도화지에 번지는 물감처럼
눈알이 젖는다
- 「캔버스」 부분
시인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판자처럼 납작해지는 꿈” 속의 삶이라 생각한다. 사회는 우리를 잠들게 해서 오래 깨어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납작한 인식으로 원근도 시간도 파악되지 않은 납작한 평면적 인식으로 살게 만든다. 시를 쓰는 것은 그런 현실에서 눈을 뜨고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쉽게 볼 수는 없다. “그만 눈을 떠야 하는데”하고 생각하지만 기껏해야 “도화지에 번지는 물감처럼 // 눈알이 젖”어 흐릿하게 세상의 모습을 어렴풋이 인식할 뿐이다. 하지만 분명하고 납작한 캔버스 안에 세상의 진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흐린 시선으로 보이는 세계가 훨씬 풍부할 뿐 아니라 그 안에 진실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시인은 생각하는 듯하다.
시인은 이렇게 이 납작한 세계에 저항하기 위해 시를 쓴다. 그럴 때 세상은 좀 더 부풀려 풍성해지고 나 아닌 타인의 삶이 비로소 내 삶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수해야 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다음 시는 이런 시인의 의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너는 아프다
아픈 너를 보며
같이 우울해야 할까
혼자 즐거워도 될까
처음 걷는 사막처럼
처음 듣는 빗소리처럼
어디서부터 불행인지 몰라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몰랐다
너를 위한 식탁
창문을 비를 그렸고
빗소리가 징검다리를 건널 때까지
접시에 담길 때까지
그늘이 맑아질 때까지
고요가 주인인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너를 위한 식탁
촛불은 타오르고
촛불 위를 서성대는 그림자
너를 밝히는 시간
너를 기다리는 시간
시간을 함께 나누려면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할까
...(중략)...
너를 지울 수 없어
너를 잊을 수 없다
너를 인정해야 할까
불행이 너라면
우리가 불행이라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여기밖에 없어서요
- 「같이 앉아도 될까요」 부분
우리는 모두 아프다. 하지만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의 모습을 안다는 것은 멀어져야 보이는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시인은 그것을 “시간을 함께 나누려면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할까”라고 자문하고 있다. 알지만 함께 하지 못하고, 함께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나와 너의 사이이다. 그럼에도 “너를 지울 수 없”고 “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불행한 존재이다. 그러나 시인은 기꺼이 이 불행을 감내하고 옆자리에 같이 앉기를 선택한다. 사실을 그 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것만이 너와 나를 함께 식탁에 앉혀 살아가게 만든다고 시인은 우리에게 에둘러 말하고 있다.
김재근의 시는 잠처럼 꿈처럼 몽롱하고 애매하다. 사물들은 모두 연관을 상실하고 흐릿한 풍경 속에서 고독하게 존재하고 있다. 그것들 사이에 인과관계나 선후관계를 만들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은 깨어있는 인식의 명증함이 아니라 사실을 왜곡하고 진실을 감추는 일이라 시인은 생각하는 듯하다. 그래서 꿈 같은 모호한 세상으로 시인은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모든 인위적인 연관을 끊어내고 나와 대상과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세상을 재구성한다. 그것은 우연이 지배하는 흐린 불확실성의 세계이다. 그 흐릿함 속에 흔적으로 남아있는 진실을 찾는 일이 바로 시인의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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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산|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활동 시작했으며 2002년 《정신과표현》으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저서로는 『주변에서 글쓰기』, 『쉽게 쓴 문학의 이해』, 『소수자의 시 읽기』 등이 있으며 시집으로는 『거푸집의 국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