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호수다. 옛날에는 향어가 살았고,
지금은 누치·모래무지·쏘가리·붕어가 살고 있는 호수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호수다.
어쩌면 그가 카메라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필름 속에서나 존재하는 호수다.
바람이 불고 그때마다 잘랑잘랑 물결이 일렁인다.
만산 홍엽 중 호수에 진 단풍잎들이 물결을 타고 있다.
물새떼가 수면을 차고 솟아오르고 있다.
초저녁부터 얼굴을 내민 초승달이 호수에 빠진 채 단풍잎들 사이에서 일렁인다.
지금, 윗산 아랫산은 늦단풍이 들고 있겠다.
호수 밑바닥의 흙과 자갈 사이를 물고기떼들이 헤엄치고 있겠다.
이 호수에 사는 물고기들은 유난히 눈이 좋은 것 같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유난히 눈이 좋아 수미터 전방의 사람도 감지하는 물고기들이 허다하다.
특히 송어는 호수에 비친 사람의 그림자까지 알아보고 경계했다.
그는 지난 봄 피라미를 생미끼로 해서 향어를 낚아올린 적이 있다.
힘이 상당한 중형 스피닝 릴을 썼는데도 릴대가 휘어지다 못해 꺾일 정도로
향어는 강렬하게 저항했다.
이 호수로 낚시를 다니면서 수많은 어종들을 낚아봤지만 그토록 강렬한 저항과
맞부딪치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향어를 끌어올리는 동안 호수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그는 맥없이 호수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문득 이대로 물 속에 잠기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정신을 번쩍 차리고 보니 사력을 다해 릴대를 쳐든 채 물 속에 무릎을
담그고 서 있었다.
수심이 얕았기에 망정이었지 깊었으면 그는 호수에 잠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60센티는 될 듯한 대형어였다.
왜 그랬을까. 그는 향어의 입으로부터 찌를 빼는 것과 동시에 혀에 깊은 상처를
입은 향어를 호수에 놓아준 적이 있다.
“아침엔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더니……”
하늘은 올려다보지도 않고 텐트 속에서 얼굴만 밖으로 내민 채 낚싯대가
드리워져 있는 저녁 호수를 들여다보던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뒤이어 하려던 말은 별이 참 많이 떴다!일 것이다.
그가 능곡 어머니 집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간간이 비가 뿌려서 어머니는
오늘밤 낚시를 망설였다. 한데 그새에 하늘은 말끔히 개고 별이 저렇게 많이 떴다.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잔별이 수두룩하다.
잔물결 속에 초저녁부터 떠오른 초승달도 비친다.
“달 좀 봐라…… 꼭 누가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는 호수에 비친 초승달에게서 눈을 떼고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옅게 반짝이는 잔별들 속에 초승달이 빼꼼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괜히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딸애의 얼굴이 지나가서다.
자고 있겠지. 아내의 면셔츠를 친친 몸에 감고.
얼굴을 벅벅 문질러도 집을 떠날 때 왼손은 아내의 치마를, 오른손은
그의 배낭을 붙잡고는 함께 가자, 엄마 함께 가자, 보채던 모습이 시야에서
물러서질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차 있던 딸애의 조그만 눈.
그러나 딸애의 최종 선택은 언제나 그보다는 아내이다.
아내가 가면 가고 아내가 안 가면 저도 안 간다.
섭섭해 울기는 해도 결정은 그렇게 한다. 자면서도 딸애는 간혹 엄마, 하고 불렀다.
아내가 곁에 있어서 응, 하고 대답을 하면 내처 자지만 아내의 대답 소리가
안 들리면 딸애는 슬몃 눈을 떴다.
시야에 제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그애의 얼굴엔 더럭 겁이 실렸다.
그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다. 엄마 가져와…… 엄마 가져와…… 딸애는
그가 섭섭할 정도로 아내를 찾아대며 운다.
“저 위쪽 산간 지방엔 오늘 첫눈이 내렸대요 어머니.”
“벌써?”
“예.”
“아직 시월인데?”
“그러게요…… 그냥 흩날리는 눈이 아니었던가 봐요. 대설 주의보까지 내린 걸 보면.”
“그래? 오늘밤 안 추우려나?”
“추워도 끄떡없어요 어머니. 침낭이 있는데요. 작년에 좀 추운 것 같아서
침낭에다 오리털을 좀 넣었어요.”
“잘했구나…… 그런데 오늘은 밤낚시 나온 사람들이 없나보다. 사방이 캄캄해.”
겨울이 오기 전에 밤낚시를 할 수 있는 때로는 지금이 최적기인 셈인데,
다른 때 같으면 밤낚시를 하러 나온 사람들이 쳐놓은 텐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여기저기에서 깜박일 것인데, 오늘은 호수 주변이 캄캄할 뿐이다.
얼핏 저편의 호수 끝이 어디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어둡고 조용했다.
잔바람에 물결이 일렁이는 소리까지 귓전에 남았다.
탁탁탁…… 주위의 고요를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가 깨뜨렸다. 무를 써는 것인가.
무어라도 한 마리 잡혀야 매운탕을 끓여 저녁을 먹을 것인데. 벌써 8시가 지났는데.
예전에 이 호수에서 가장 많이 낚을 수 있는 어종은 향어였다.
그런데 저물녘에 호수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수원에서 왔다는 낚시꾼은 그의
오뚝이 찌를 보더니 이제 이 호수에서 향어는 사라졌다고 했다.
이 호수의 주인은 이제 붕어·누치·모래무지가 되었다고.
호수의 곳곳에 심심찮게 서 있던 향어 가두리가 거의 없어진 탓이라고 했다.
그에 따라 야생 향어도 이 호수에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고.
여름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흔적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낚시찌가 움직이는 기척은 전혀 없다.
수원에서 왔다는 낚시꾼은 지난 일 년 내내 이 호수의 상류에서 하류까지
낚시를 하며 살았다고 했다.
몸과 마음이 지쳐 요양 삼아 낚시만 하였노라고.
그에게 뭘 하느냐고 물어 회사 이름을 댔더니 낚시꾼은 용하구료, 했다.
아직 회사에 다니고 있다니 말이오. 더구나 자동차 회사라니.
그는 결혼 전에는 홍보실 업무가 자신하고는 맞지 않은 것 같아서 부서를
옮기거나 직장을 옮겨볼까도 생각했다. 결혼 후 그는 떠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새 자동차가 출시될 때마다 그는 최선을 다해 홍보 전략을 세웠고 사보에 실릴
사장의 권두언의 초고를 썼으며 자사의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유명인들을 취재해서
글을 쓰고 사진도 찍었다.
틈만 나면 회사 쪽의 의도나 기대와는 다른 기사가 나가는 언론과 시시비비를
가리며 밤을 새웠다. 결혼 후 무엇이 그런 일들을 다 견디게 했는지.
향어는 원산지가 독일이지만 이스라엘에서 개량되어 지금 형태가 된 말하자면
유럽 잉어였다.
우습게도 향어는 우리 잉어보다 이 호수의 수온이나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뛰어났다.
성장 속도 또한 우리 것보다 훨씬 빨라서 금세 성어가 되었다.
호수 근처엔 향어 가두리 양식장이 여러 곳이다.
양식장 근처에서 배회하는 야생 향어는 동작이 느리고 입질도 급하지 않았다.
먹이를 물어도 어찌나 찌의 움직임이 미미한지 찌 맞춤을 정확히 해도 야생 향어의
입질을 눈치채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야생 향어는 무엇이든 잘 먹는 잡식성인데다 소음에 대한 반응도 적고
수심층의 가장자리에 떼로 몰려다녀서 이 호수를 찾는 밤낚시꾼들을 기쁘게 했었다.
낚시꾼은 그의 오뚝이 찌를 바라보며 마치 옛 연인을 그리워하듯 말했다.
직장에서 떨려나고 향어를 낚아 팔아서 애들 엄마에게 돈을 부쳐주곤 했다고.
예전에는 취미로 한 낚시가 지난 일 년 동안은 돈벌이가 되어주었다고.
별 바쁠 것도 없다는 듯이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낚시꾼의 살림망 속에는
향어 대신에 잔챙이 붕어와 누치, 빙어 몇 마리가 담겨져 있었다.
그는 그런 줄도 모르고 어제 낚시 전문점에 들러 향어를 낚기에 안성 맞춤인
오뚝이 찌를 새로 구해 달았다.
꾼은 아니었지만 조황이 좋을 때면 그도 향어를 여러 마리 낚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개 이곳에서 버너에 불을 붙이고 매운탕을 끓일 놈만 빼고는
낚시가 끝난 후면 살림망에 갇혀 있는 물고기들을 도로 호수로 보내주었다.
집으로 가지고 가는 동안 죽는다는 게 어머니가 물고기를 도로 호수에 풀어주는 이유였다.
어머니는 절대 죽은 생선은 먹지 않았다.
거기에 다른 이유를 달 수 없었던 그도 낚시가 끝난 후에는 도로 놓아주고
돌아오는 게 일이었다.
어쩌면 그가 놓아준 향어를 다시 그 낚시꾼이 낚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호수에 들락거린 지 벌써 이십여 년이 되어서 이 호수에 대해서는 빤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낚시꾼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호수에서 이제 향어가 소멸 상태라는 걸 전혀 몰랐다.
“누군지 몰라도 말을 안 섞어도 저편에 우리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됐는데…… 동무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머니는 아무래도 주변에 밤낚시를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저는 지금도 좋은데요 어머니…… 어머니와 저 둘이만 이 세상에 있는 것 같고……
춥지 않으세요? 추우면 배낭 안에 담요 있어요. 꺼내다 두르세요.”
“아직은 괜찮다 딱 알맞아…… 커피라도 한잔 끓여주련?”
“예.”
그는 어머니가 텐트 속에서 일어나 물통 뚜껑을 열어 주전자에 물을 받는 소리를
들으며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지난 봄 여름 가을…… 그는 울적해져서 허리를 펴고 호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 이 호수를 잊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음이 쓰라렸고 괴로웠다.
검은 심연 같은 호수도 그를 나직이 바라보았다.
수면에 초승 달빛이 어룽지고 그 위를 가랑잎들이 가랑가랑 떠내려가고 있다.
그가 이 호수를 잊고 있었던 동안에도 호수는 조용히 쉬지 않고 움직였을 것이다.
그는 숨을 가다듬고 어머니 쪽을 돌아다보았다.
커피를 끓이느라고 달그락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건너왔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였다.
그는 잠시 담배 끝에 붙은 주황색 불 끝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럴 수도 있구나, 생각한다. 이렇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수도 있구나.
그는 담배를 한 모금 깊이 빨았다.
주황색 불꽃이 더 짙게 타오르는 걸 그는 먹먹한 마음으로 바라봤다.
밤이 되고서는 첫 담배다.
낮에 휴게소에서 차를 세워놓고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피운 후로는 두번째다.
그가 무엇을 해도 그러냐, 하는 어머니지만 그가 담배를 피우는 일은
사력을 다해서 말리는 어머니였다.
니 아버지가 폐암이었다. 너도 니 아버지 자식이다. 차라리 술을 마셔라.
담배는 절대 안 된다.
어머니는 내가 담배를 피우는 걸 보면 언제든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그대로
놓아버리고는 그를 따라다니며 지청구를 했다.
그 통에 어머니 손에 들려 있던 화분이며 과일 그릇이며가 얼마나 깨졌는지.
그는 어머니가 보지 않는 데서도 담배를 피울 때면 불량 소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사십이 다 되는 나이에 느껴볼래야 느낄 수 없는 야릇함이 섞여 약간은 위로받는
기분까지 들었다.
처음 다락방에 올라가 빠끔 담배를 피우다가 어머니에게 들켰을 때 그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버렸는지.
어머니가 커피를 타 담은 작은 알루미늄 보온통을 들고 나와 더듬더듬 그 곁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얼른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호수에 내던졌다.
버려진 담배도 물결을 타고 가랑잎처럼 떠내려갔다.
그는 호수의 물을 손주먹으로 퍼서 입 안을 헹궈냈다.
행여 냄새가 날세라 하하, 숨을 뱉어냈다.
“영 입질이 시원찮구나.”
그의 곁에 앉은 어머니가 보온통 뚜껑에 커피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그는 커피가 담긴 보온통 뚜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밤에 이 호수에서 마시는 커피 맛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아내는 벚꽃 피는 봄밤의 커피를 제일로 쳤다.
어머니는 이런 늦가을 밤이었고 그는 겨울이었다.
어느 해 봄밤에…… 텐트 속에서 먼저 잠든 어머니를 두고 아내와 그는 호수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만수 때라 연안의 산 그림자가 호수에 드리워져 호수 면은 어느 때보다도 깊어 보였다.
근처에 벚나무가 있었을까.
벚꽃의 애린 냄새가 봄바람을 타고 그들 곁을 살랑거렸다.
새로 돋은 나뭇잎 냄새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겨울을 보낸 뒤 폭삭폭삭해진 산길의 흙 냄새였는지도.
그는 뭐든 익숙한 게 좋았다.
오래 입은 셔츠가 좋았고, 오래 들고 다닌 가방이 좋았다.
책상의 위치나 식탁의 위치가 갑작스럽게 바뀌는 걸 그는 원하지 않았다.
손이 안 간 새것은 일단 거북했다. 그런 성격 탓이었을까.
아내와의 잠자리도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체위로 하는 게 좋았다.
그랬는데, 그 봄밤엔 물 냄새 벚꽃 냄새 흙 냄새에 이끌렸다.
아내의 입술은 부드러웠고, 목덜미는 따뜻했다.
생각해보니 아내가 그에게 먼저 몸을 열어온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마지막이었다.
봄밤의 호수 속에 아내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무엇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피부가 좀 차가운 편이었던 아내가 그날 호수에서는 아주 따뜻한 피부를 가진
여자로 변해 있었다.
그 봄밤에 호수에서의 아내와의 관계가 그에게는 그의 침실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진 첫 관계이며 마지막 관계였다.
승희가 그 봄밤에 생긴 것 같다고 아내는 수줍게 말했었다.
그 봄밤에, 이 호수에서.
“`「흐르는 강물처럼」이란 영화 보았냐? 아아 참 함께 본 영화였지야.”
“……”
삼 년 전에 어머니가 팔당 지나 능곡의 빈집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을 무렵에
함께 보았던 영화다.
어떻게 어머니와 영화를 볼 생각을 했던 것인지.
능곡이란 지명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 때 어머니는 그곳에 빈집을 구해두었다.
언젠가는 그곳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재봉질도 그만두고 마당이나 가꾸면서 살란다, 하였다.
이상도 하지야. 저번 때는 해순 아줌마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서로
이러이러한 집에서 살고프다고 말을 허는데 헛간이 있고야, 마루가 있고,
마루 밑에 개가 있고, 우물이 있고 마루가 들여다보이는 흙담이 있고……
마당에 닭이 있고 돼지막이 있고…… 한참 하다보니까는 어디서 많이 본 집 아니냐.
이 집을 어디서 봤드라…… 생각해보니 부새가 우는 밤에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와버렸던 그 집이드라. 아버지의 말허리를 잘라가며 허구헌날 잘랑잘랑대며
싸웠던 그 집이어야. 징글징글허다고 도망쳐온 집인디…… 그리도 내가 가장 살고
자픈 집은 그 집이었던가 벼야.
어머니는 오래 비워둔 능곡의 집을 오래오래 손보았다.
어머니가 버리고 온 집처럼 우물도 없고 돼지막도 없었지만 어머니는 수굿하게
오늘은 풀을 뽑고 내일은 문종이를 바르고 또 오늘은 부엌에 가스 레인지를 달고
또 내일은 툇마룻장을 달아냈다.
사람이 거주할 수 있도록 집을 손본 후 어머니는 지금 삼 년째 마당을 돌보고
있는 중이었다. 뭔 일을 시작허믄 삼 년은 해야 빛이 난다, 하더니
삼 년째가 되는 올 봄 능곡의 마당에는 홍매화며 목련이며가 속속들이 피었다가
지고 채송화, 분꽃, 봉숭아 따위도 뒤이어 지나간 이 가을에는 울타리용으로
심어놓은 꽃사과나무에 구슬만한 꽃사과가 주렁주렁 열렸다.
어머니는 그때 그 영화관에서 구한 「흐르는 강물처럼」 패널을 능곡의 마루벽에
젊은 아이들처럼 걸어놓았다.
언제든지 어머니 집에 가면 몬타나였던가, 수려하고 활달하게 흘러가는 푸른 계곡
속에 멋진 호를 그리며 되풀이 떨어지던 흰 낚싯줄을 볼 수 있었다.
“참말 햇빛이 찬란했지야. 화면인데도 눈이 부셨어야. 그 송어 낚시가.”
“플라이 낚시.”
“으응, 그래 플라이 낚시…… 참 멋있었어. 콸콸거리며 끝없이 흘러가는
그 여울물이라니…… 그 위에 쏟아지는 햇빛이라니…… 이제사 말이지만 그때
그 영화를 보면서 장로교 그 목사 아버지 말이다.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나도 그런 아버지로 한번 살고 o드라. 다 늙은 나이에 주책이냐?
어린 아들들에게 물결 읽는 법이며 침묵 읽는 법을 가르치는 그 목사가 참
부러웠어야. 너그럽고 단아하고 때로는 엄숙한 아버지로서의 삶을 살아보면
좋겠구나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더란다.”
“저는 어머니가 그랬는데요.”
“어머니?”
“영화 속의 어머니요.”
“그렇지? 두 양주가 있었지? 근데 어머니는 잘 떠오르질 않는구나.
그래 어떤 장면이 좋았냐?”
“둘째아들이 누구였죠…… 다혈질적인 그 청년…… 왜 형과는 달리 제
근거를 못 찾고 일탈하다가 끝내는 길에 쓰러지고 마는 친구…… 아……
브래드 피트였어요. 그 반항적 기질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면서도 매우
섬세하고 다정하지요. 그 아들이 마을 축제에서 어머니랑 춤을 추는 장면
생각 나세요? 아들이 어머니에게 춤을 청하니까 그 어머니가 어찌나 수줍어
하던지요. 수줍어하면서도 아들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화면을 꽉
채웠는데…… 어머니를 본 듯했어요. 언제 한번 어머니랑 춤을 춰봐야지 했는데……”
“블루스 말이냐?”
“무슨 춤이든지 말이에요.”
“그것 참 즐겁겠구나…… 지금 한번 춰보련?”
“춤 신청은 남자가 하는 거예요, 어머니.”
“너도 나에게 남자인 게냐?”
누가 보지도 않는데 어머니는 입을 가리고 나직하게 웃었다.
그는 어머니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하늘의 초승달을 다시 한번 올려다봤다.
달은 그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듯 잔별들 속에 여직 가만히 있다.
저것 봐라, 어머니가 그의 팔목을 툭 쳤다. 깜박깜박 찌가 움직이고 있다.
어머니가 랜턴을 물에 비추려는 걸 그가 만류했다. 혹시 향어일지도.
야행성인 향어는 불빛을 아주 싫어했다.
깜. 박. 깜박. 미미하게 시작되었던 찌 놀림이 까…닥…까…닥으로 바뀌는 꼴이
향어의 입질이다, 싶다.
물고기의 입이 찌를 물고 스르르 들어갔다.
그는 챔질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얼른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순간이다. 낚싯대에 걸려 올라오던 물고기가 무슨 까닭인지 다시 물 속으로
첨벙 빠져버렸다. 어둠 속에 긴장하고 있던 튼튼한 뜰채가 무색하다.
어머니가 대가 긴 뜰채를 내려놓으며 큰놈이었는데, 아쉬워했다.
향어였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옆구리가 누르스름하고 배가 붉은 야생 향어였을 거라고.
향어는 그랬다. 중량이 많이 나가 물 속에서 끌어내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그 사이에 장애물에 걸리면 영락없이 놓치게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번같이 다 건져올린 것을 공중에서 놓친 적은 없었는데.
그는 다시 찌 맞춤을 하며 찌 움직임이 좀더 예민해지도록 조개봉돌을 세 개나
나누어서 달았다.
떡밥에 번데기 가루를 조금 첨가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세하게 신경을 쓰다가 그는 오뚝이 찌를 바라다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이제 이 호수에서 향어는 거의 소멸했다는데.
“매운탕 끓여 저녁 먹긴 틀린 것 같은데요, 어머니.”
“안 잡히면 라면이라두 끓여먹자꾸나.”
“낚시 오면서 라면을 가져왔어요 어머니?”
“지난참에 옆 텐트에서 끓여먹는 거 얻어먹을 때 얼마나 맛있었냐?
그리서 내가 예비로 두 개 넣어왔다.”
“배고프세요?”
“아니 지금은 괜찮아”
뿌리째 뽑힌 국화꽃이 물 위로 떠내려가기라도 하는가.
물 냄새 속에 국화 냄새가 섞이었다. 서리 맞은 국화에서나 맡아지는 향이다.
꽃 냄새네,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마당에도 국화가 다 피었는데……
오래 가는 꽃이다…… 서리 맞고 눈 맞을 때까지도 피어 있지야.
어머니가 중얼거리다가 추운지 오소소 몸을 움츠렸다.
그는 곁의 방한복을 집어 어머니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어머니는 아직은 괜찮다, 하면서도 그가 걸쳐준 방한복을 꼭꼭 여미었다.
지금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다.
문득 그는 어머니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이 그 두 마디라는 걸 깨닫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주변 사람들이 안부를 물어오면 아직은 괜찮아요, 그랬고,
어깨가 시린 일로 인해 잠을 못 이루며 찬물과 더운물로 번갈아가며 찜질을
하면서도 병원에 가보자고 하면 지금은 괜찮아, 그랬다.
그는 아까 딸애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처럼 두 손바닥으로 다시 얼굴을 감싸고
벅벅 문질렀다. 손바닥에서 어분 냄새가 맡아졌다.
생각해보니 지금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다……라는 어머니의 말은 지난 일 년 동안
그가 가장 많이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지난 일 년 동안 어디서나 혼자 남게 되면 혼자가 된 그 틈으로 어김없이
아내 생각이 밀려들었다. 서류를 정리하다가도 택시를 잡다가도 그는 불쑥불쑥
혼잣말을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운전하고 가다가 격한
마음에 휩쓸려 가로수 밑에 차를 세우고서 그는 중얼거렸다. 지금은 괜찮아,
아직은 괜찮다.
“야야, 저기 좀 봐라.”
호수 맞은편에 좀 전에는 없던 불빛 서너 개가 깜박였다.
“동무가 생겼구나.”
“그렇네요.”
여러 사람인 모양이다. 두런두런 말소리가 물결을 타고 건너왔다.
“이놈들아, 오늘밤이 너희 제삿날이다.”
“3칸, 3칸 반짜리로 해.”
“이쪽이 좋겠는데…… 이쪽이 더 경사가 져.”
“너무 자신만만해하지 말고 좀 편한 자리로 하라구. 밤이잖아.
게다가 야생 향어는 없어요. 기껏 붕어나 잡을 텐데.”
“이 사람이 붕어 맛을 제대로 모르는군.”
향어. 이곳은 야행성인 향어가 활개를 치는 곳이다.
어장에서 먹이를 뿌려주는 시간이면 야생 향어들도 그 근처를 배회하다가
밤낚시꾼들한테 붙잡히곤 했다. 아침에 횟집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향어 조황이 좋을 때라면 지금 저들이 있는 자리가 터가 좋다.
향어들은 흙과 모래가 적절히 섞여 있는 바닥과 적절한 은폐물이 있는 곳을 좋아한다.
그래서 경사도가 좀 있는 곳이 향어를 낚기에는 이롭다.
이곳에 도착해 그도 저곳에 텐트를 칠까 궁리해보았다.
하지만 경사도가 너무 심해서 텐트를 치기에도 어머니와 함께 앉아 있기에도
불편해 보였다. 좀 나은 곳은 이미 텐트가 쳐져 있더니 아마도 그 속에서 저들이
밤낚시를 위해 잠을 자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끄러미 건너편 불빛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얼굴을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초승달이 여전히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야야.”
어머니가 그의 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어둠 속에서 수줍게 웃었다.
“내가 시를 한 편 썼는디야 한번 볼라냐?”
“시를 쓰셨어요?”
“그래.”
“언제요?”
“아까…… 매운탕에 넣을 무 썰다가 말이다. 저 달이 하도 이뻐서 말이다.”
“한번 읽어보셔요.”
어머니가 주머니에서 부시럭부시럭 종이 쪽지를 꺼내더니 랜턴을 그 종이 쪽지에
갖다대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낭송해볼 양을 하다가 어머니는 아무래도 멋쩍은지 아니다,
됐다며 도로 종이 쪽지를 도르르 말아버렸다.
그는 하하,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흔쾌하게 웃는 웃음이다.
저럴 때의 어머니의 모습은 꼭 소녀 같다. 어둡지만 않다면 귀밑이 붉어진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읽어보셔요, 어머니…… 어머니가 썼다고 생각 마시고요.
다른 사람이 쓴 시를 낭송한다고 생각하세요. 나랑 호수나 듣지 누가 듣는다고 그러세요.”
“그럴까?”
“예.”
어머니는 이 호수에 사는 물고기와는 달리 눈이 밝다.
어깨는 닳아졌어도 눈은 밝다. 눈 밝게 허는디는 당근이 최고란다.
어머니는 어디에 거처하나 한켠에 당근을 심어놓고 늘상 뽑아서 먹곤 했다.
재봉질을 하다가, 물을 길으러 가다가, 바깥에서 돌아오다가, 낮잠에서 깨어나서,
닭모이를 주다가 어머니는 주홍색 당근을 쑥 뽑아 흙을 털고 아삭아삭 베어 먹었다.
능곡 마당에 맨 먼저 심은 것도 당근이었다.
종이에 적힌 글씨가 그에겐 흐릿한데 어머니는 눈도 안 찡그리고 낭송했다.
초저녁, 그 하늘의 밤 안개 더미들, 속을 찬찬히 헤치고 내 걸음을 따라나오는
너의 옥 같은 이마. 네가 나에게 준 마음들이 호수에 잠긴 오늘, 너를 빠져나온
너의 둥근 발걸음이 돌아서서 다시 간 곳, 서편 하늘 중간쯤 곡선으로 구부러진
처음 바로 그 길.
그는 자신도 모르게 눈자위에 손을 가져갔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눈물이다.
그는 멋쩍어져서 괜히 물에 잠겨 있는 뜰채를 조금 옮기었다.
어머니가 시를 썼던가?
가끔 아무데나 뭔가를 적고 있던 어머니를 종종 보아왔지만 시장 볼 거리를
메모하거나 누군가의 생일이나 혹은 셈할 돈을 체크하거나 기록하는 줄 알았지
어머니가 시를 쓰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전혀 몰랐다.
하긴 아내가 말해주기 전에는 자신이 그렇게도 상처받기 싫어하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는 몰랐다.
노골적으로 적대 감정을 드러내는 맞은편의 정과장과 필요할 때면 점심 식사며
저녁 술을 함께하는 그를 아내는 의아해했다.
한 사무실에 앉아서 그럼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아내는 당신은 상처받기 싫은
거예요, 쏘아붙였다.
상처. 상처받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만 아내의 말이 왜 그렇게 가슴에
맺혔는지.
당신은 상처받기 싫어서 누구하고도 깊은 관계를 안 맺어요.
심지어 아내인 나하고도. 깊은 관계를 안 맺으니 화낼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죠.
사람들은 그런 당신을 부드럽고 대인 관계가 원만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막상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누가 적극적으로 당신을 변호해줄까요?
그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쌌다.
누가? 아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어머니 외에는. 정형외과 의사는 어머니의 어깨가 다 닳아졌다고 했다.
어깨를 너무 썼어요. 뼈가 다 닿아졌어요.
사람마다 표현하는 방법이 다 다르겠지만 뼈가 다 닿아졌다는 말이 주는
참담함이라니. 대체 노동을 얼마나 해야 뼈가 닿아진다는 말인지.
뼈가 닿아진 어깨를 하고선 저 텐트 속에서 무를 썰다가 말고 저 달에 반해서
시를 쓴 어머니가 생소한데도 눈꺼풀이 뜨거워지는 건 또 어인 일인지.
“시 같냐?”
“좋은데요, 어머니.”
“니가 시를 아냐?”
아니오, 그는 웃었다.
“처녀 적엔 시인이 되고 싶었지야.”
처녀 시절? 그랬겠지.
어머니에게도 처녀 시절이 있었겠다. 소녀 시절도 신생아 시절도.
그런데 왜 처음부터 어머니는 저 모습이었던 것만 같은가.
처음부터 어머니로 태어났을 것만 같은가. 어머니에게도 좌절된 꿈과 희망,
바스라진 욕망이 있었을 텐데.
“내가 시인의 꿈을 품은 적이 있다는 걸 아는 분은 니 아버지뿐이다.”
아버지.
그는 또 한번 괜히 뜰채를 매만졌다.
“너는 어려서 기억이 안 나겠지만 병원에서 처음 네 아버지는 삼 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단다. 그런 네 아버지가 아홉 달을 버티었다. 너와 나 때문 아니었냐.
늦게 본 자식이라고…… 너를 얻느라고…… 이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원. 병원에선 기적이라고 했어.
이십 년을 채워야 연금이 나오는데 이십 년을 채우기에 아홉 달이 모자랐단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네 아버지는 오로지 너와 나에게 연금 혜택을 주고
가겠다는 그 일념으로 삼 개월을 지나 아홉 달을 버티었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더구나. 이십 년에서 모자란 아홉 달을 채우시고선
돌아가셨다. 편안히 가셨어. 그날은 마침 새 달이 시작되는 날이었단다.
달력을 넘겨놓고 잠자듯이 가셨어.”
“……”
“얘야.”
“예, 어머니.”
“얘야. 이런 얘기를 들었다. 어디라더라. 티베트인가…… 그 나라의 어느
오지를 여행한 사람이 전하는 말이었는데 그곳 사람들은 말이다.
자신이 죽을 때를 미리 안다는구나. 그곳 노인들은 대부분 한평생을 일하고
절약하고 소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인데 누구나 수술칼 한번 몸에 대지 않고들
그렇게 건강하게 산단다. 아흔 살 백 살 되는 사람이 흔하디흔하다고 해.
그곳을 여행했던 어떤 사람이 그 마을에서 어떤 노인이 죽은 날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말이다. 신새벽에 사다리를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지붕 귀퉁이를
고치고 내려와서는 아침을 잘 먹고 상을 물린 후에 며늘애가 바깥에 나가려고
대문을 나서니까 불러놓고 그러드란다. 야야, 나는 이제 갈란다. 잘 놀다 오려무나.”
“……”
“나갔다 와 보니 고요히 갔다는구나.”
“……”
“하긴 내가 자란 마을에서도 그런 일은 있었지. 사작나무 옆집에서
있었던 일이야. 그 집 아들이 네 외삼촌과 동갑내기였다. 새우가 잡힐 때면
말이다. 바다에 나가서는 건성건성 새우를 한 소쿠리 건져다가 우리 집
마당에 놓고 가곤 했어야. 아이구, 그 새우. 따로 뭐 양념 헐 것도 없어야.
얼망이에다 붓고서 맑은 물에 잘잘 씻어서는 탁탁탁 치면 술렁술렁 껍질이
벗겨져야. 수염 달린 것을 들고 초고추장 찍어 먹으면 반짝 하는 새에 한
얼망이는 다 없어지곤 했어야. 아이구 그 새우 생살이 말이다 입 안에서
잘잘 녹았단다…… 내 입성이 그랬으니……”
어머니는 그만 말을 멈추었다. 그는 멋쩍게 웃었다.
생새우 얘기를 하다가 어머니는 아내 생각이 난 모양이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별 요구 사항도 없던 어머니였지만 이따금 아내와 불화를
일으켰는데 매번 죽은 생선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었다.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낙지죽을 끓여내시라고 하니……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아내는 노량진 수산 시장에까지 나가서 아내 생각으로는 물이 좋은 낙지를
사가지고 와 어머니가 이르는 대로 낙지죽을 끓여내보지만 어머니는 한술도
뜨지 않았다. 왜 안 드시냐고 하면 죽은 낙지여서 못 먹는다는 것이었다.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너무도 생선을 좋아했으나 숨이 죽은 생선은 절대 먹지 않았다.
냄새가 난다는 것이었다.
살아 있는 해삼, 살아 있는 멍게, 살아 있는 전복.
다른 때는 괜찮다가도 몸이 아플 때면 어머니는 숫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아픈 몸이 살아 있는 생선을 부르는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 그 바닷가에서 먹었던 살아 있는 것들을.
한번 아내는 낙지를 사러 수산 시장에 갈 때 주전자를 챙겨갔다.
주전자 꼭지로 공기가 드나들어 낙지가 숨죽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면서.
아내는 살아 있는 게를 사와서 물에 담가 어머니 앞으로 가져가서 어머니
보세요 살아 있죠? 확인시키고는 그를 불러 칼과 도마를 내밀었다.
펄떡펄떡 뛰는 게의 다리를 잘라달라고.
나는 무서워서 못하겠어요, 눈물을 글썽이며.
그때만 아니면 아내와 어머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아니라 어머니와 딸같이
잘 지냈다.
“마저 얘기 하셔요 어머니. 사작나무 옆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으응, 그래……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지. 그 집 할머니가 가실 때 말이다.
손자를 등에 업고 있었단다. 한나절 내내 손자를 잘 봐주고 있던 양반이 마당에서
멍게 손질을 하고 있던 며늘애를 야야, 하고 부르시더니 등에 업고 있던 손자를
풀러 건넴서는 나는 인자 가봐야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시더니 낮은 베개를 찾아
베고 평소대로 이마에 팔을 얹고 낮잠에 들 듯이 그렇게 가셨다는구나.”
“……”
“처음에는 어린 너를 데리고 이 호수에 올 적에는 마음이 슬프고 서럽고
그런 때만였단다. 다 지난 얘기다만은 고만 죽고 싶을 때면 너를 데리고 여기에
왔구나. 세상이 어디 만만한 게 한 대목이나 있더냐? 그냥 지나가는 일이 없는
게 인생사지마는 유독 나한테만 그래 보이더라. 한 가지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어야.
에누리가 없었어야. 그때마다…… 여기에 와서 마음을 달래보고 달래보고 그랬구나.
내 마음을 달래기에는 여기가 가장 알맞은 장소였어. 너를 데리고 이 세상을 사는
일이 쉽지 않았더니라. 온통 마음을 달래며 보낸 평생이었지 싶어야. 달래고 또
달래고…… 또 달래고 그랬구나. 근데 얘야. 요즘은 이상허다이. 내 마음을 달래보고
달래볼 적엔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이 호수가 요즘엔 자꾸 말을
걸어온다. 잘잘거리는 물소리가 꼭 너그 아버지 목소리만 같어야.”
“……”
“나도 다 살어서 그러꺼나?”
“그런 말씀 마세요.”
“얘야…… 언젠가 내가 했던 말 잊지 않았겄지야?”
“무슨 말 말씀인가요?”
“승희 에미 처음 내게 인사시키려고 데려왔던 날 내가 한 말 말이다.”
아, 그날. 아내는 그가 어머니에게 인사시킨 첫 여자였다.
처음 사랑한 여자라는 뜻이 아니라 그는 결혼할 여자, 한 사람만을
어머니에게 인사시키리라 생각하고 있어서 아내와 결혼할 생각이 굳어진 뒤에야
어머니에게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내내 마음이 밝아 보였다.
손수 만두를 빚어서 만두국을 끓여주었고, 손수 재봉질해서 만든 색색의 손수건을
아내에게 선물로 주었다.
아내는 지금까지도 그 손수건을 가지고 있다.
곶감을 띄운 수정과까지 잘 먹은 뒤였다.
문득 어머니가 열어놓은 방문으로 성큼 들어온 봄볕을 이윽히 바라보더니
그들 둘을 무릎 아래 앉혔다.
서약을 하나 받아놔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목소리가 너무나 차분해서 그와 아내는 긴장을 했다.
어머니가 내미는 종이에는 훗날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게 되면 꼭 요양소에
보낸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어머니 얼굴에 어른거리는 봄볕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종이를 내밀며 거기에 손도장을 찍으라고 했다.
느닷없는 어머니의 제의에 그보다 더 당황한 건 그때는 처녀였던 아내였다.
아내는 어머니에게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하면서 눈물을 비쳤다.
어머니는 아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치매에 걸려서 하는 행동은 아무 의식도 없이 하는 것 아니냐?
그것 때문에 너희들이 상처받을까봐……
자식이 되어서 어찌 요양소에 보내냐면서 집에 두고 그 고통을 겪는 사람을
내가 많이 봤어. 그 생각을 하면 끔찍해서 그런다. 요양소에 보내는 건 잘못이
아니야.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인데 너희는 못 그럴 게 틀림없으니 내가 정신
말짱헐 때 서약을 받아놓으려고 하는 게야. 그날 어머니는 기어이 그와 아내에게
손도장을 찍게 했다. 주인집 마당의 매화가 피어 꽃 그늘을 이루고,
뒤꼍의 감나무에서는 감꽃이 지고 있던 평화로운 봄날이었다.
“내가 다시는 이런 말 안 할 것이다마는 그날의 서약은 꼭 지켜야 한다.
해순 아줌마를 보렴. 해순 아줌마가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었겄니. 말 한마디
울리게 안 하던 깔끔했던 사람이 아조 자식들을 닦달을 허는 가비드라.
며느리는 다니는 직장도 그만 쉬고 있다더구나. 해순 아줌마가 맑은 정신이
들어서 자신이 자식들한테 어찌 했다는 걸 알게 된다고 생각히봐라……
그 사람 혀를 깨물 것이네. 남의 일 같지가 않어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희들
앞길을 가로막고 너희들 일상 생활을 못하게 훼방놓겠거니 생각하면……”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아니다…… 이런 얘기는 정신 말짱헐 때 해둬야 써…… 그때는 내가
나랄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뭐라든 요양소로 보내다오…… 꺼림칙하게 여길
필요 전혀 없어야. 그때는 내가 나라고 헐 수 없으니까…… 옆에다 두고
부끄럽고 몹쓸 에미 만들지 마라.”
“그만 하세요, 어머니.”
“약속을 해라.”
“……”
“약속을 해.”
“……”
“응?”
“예……”
첫댓글 새 글이 올아와 기다리고 있으려나 하고 몇번을 들락거렸는데 오늘 만났군 내 발자국이 희미하나마 길을 만들어놓았을걸?
애련도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