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대왕 시절에 이완 대장은 유명한 명장이었다
그의 머리가 명석하다기보다도 부인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부인은 형편 없는 박색이어서 장군조차 소실을 들여 생활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완 대장은 한 밤중에 대궐에서 입궐하라는 명을 받게 되었다.
조복을 차려입고 입궐하려고 하는데 부인이 나와서 조복 자락을 잡고 어디를 가시냐고 물었다.
보기에도 마땅찮은 마누라에게 심통이 난 장군은 발로 툭 차면서, “이거 왜 이러느냐?” 하였으나 부인은, 아무리 오밤중에 입궐하라는 명이 있었어도 명색이 무관인데 조복은 안 될 말이라며 무장을 전부 갖추어다 놓고는 바꿔 입으라고 하였다.
장군도 느낀 것이 있어 무장을 갖추고 다시 출발했다.
대궐에 도착하여 돈화문을 들어서는데 양쪽으로 우거진 송림에서 갑자기 화살이 날아와 투구에 꽂혔다.
그때서야 부인의 비범함을 알아차렸다.
계속 걸어가는 중에도 화살이 날아와 가슴에 꽂혔다.
명색이 대장인지라 내색하지 않고 걸어 들어가자 임금이 문간에 나와 계셨다.
북벌계획을 다 세워 놓고 맡길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신 것이다.
임금은 반갑게 안으로 맞이해서는 별 말 없이 오밤중에 술상을 차려다가 이런저런 담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이완 대장이 집에 돌아가려고 하자, 벼루집을 꺼내어 붓 한 자루를 내주며, “사신이 중국에서 귀한 것이라고 하여 가져왔는데 혼자 쓰기보다 경과 나누어 써야겠소.” 하셨다.
잘 챙겨서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는데 부인이 들어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부인이 다 듣고 나더니, 밤중에 장군을 부를 때는 이유가 있는 것이라며 또다른 것은 없느냐고 재차 물었다.
붓 한 자루를 받아왔다고 하였더니, 그 붓 좀 보자 하여 받아서는 이리저리 살펴보다 갑자기 다듬잇돌에다 붓을 놓고 방망이로 내리쳤다.
그 안을 잘 살펴보니 종이쪽지가 하나 들어 있는데, 그 안에 북벌계획이 써 있었다.
마지막까지 시험해 보신 것이다.
그래서 이완 대장은 부인 덕에 한 나라의 명장이 될 수 있었다.
*이완(李浣)[1602~1674]은 효종의 북벌정책을 보필하며 국방 체계와 군비, 병력 정비에 기여하였던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한성부판윤과 공조판서, 형조판서,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무신으로서 현달하였고, 야심찬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는 특이한 성격으로 인하여 야사와 설화의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다.
「이완 대장과 부인의 지혜」는 이완 대장보다는 그 부인의 지혜와 관련한 이야기로, 여성지혜담이기도 하다.
여성지혜담의 유형은 어떤 인물이 어떤 대상을 위해 지혜를 발휘하느냐에 따라 남편 문제 해결형, 시댁 문제 해결형, 자식 문제 해결형, 친정 문제 해결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이완 대장과 부인의 지혜」는 남편이 처한 여러 가지 위기를 아내가 지혜로 모면해 주는 대표적인 여성지혜담이다.
이완 (李浣 ; 1602~1674)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인 무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수일(守一)의 아들로서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한 뒤 이서(李曙)의 추천으로 만포첨사가 되고 1627년 영유현령, 1629년 상원군수, 1630년 숙천부사를 거쳐 1631년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별장(別將)으로 출전하여 정방산성(正方山城)을 맡아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후 함남 ·황해도 등 여러 곳의 병사를 주로 역임하였다.
1639년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당시에는 드물게 무신으로 승지가 되기도 하였다. 1640년 청나라가 명(明)을 치면서 전선(戰船) 120척과 공미(貢米) 1만 포(包)를 요구해왔을 때, 임경업(林慶業)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고의로 배를 파손하고 풍파를 만난 것처럼 꾸며 청에 피해를 과장하여 알리는 한편, 명나라에 출전 사실을 알려 충돌을 피했다. 1649년 효종 즉위 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명에 대한 은혜를 갚고, 청에게 받은 치욕을 씻는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북벌을 계획하고 군비확충책을 펼침에 따라 북벌과 관련된 요직을 두루 맡게 되었다. 즉, 포도대장을 거쳐 1650년에는 어영대장에 올랐으며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을 다스리기 위해 포도대장을 거듭 맡았다.
이즈음 어영청 병제와 군비의 정비에 힘썼다. 즉, 어영청의 군안(軍案)을 바꾸어 어영청에 소속된 원군(元軍)을 2만 여 명으로 대폭 확대하고, 이들에게 지급되던 군보(軍保)도 종전 1보(保)에서 3보로 늘려 8만 여 명의 군보를 확보하는 한편, 안산 덕물도(德勿島)에 둔전(屯田)을 설치했다. 1653년(효종 4)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의 천거로 최고 정예부대인 훈련도감의 대장에 종래 공신이나 국왕 외척만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특별히 임명되어, 현종대에 걸치도록 16년 동안 직책을 유지하는 한편,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형조판서 ·포도대장 등을 겸임하였다.
1669년(현종 10)에 훈련대장에서 물러난 이래 관직을 계속 사양하였으나 1674년에는 수어사를 거쳐 우의정이 내려졌다. 말먹이를 직접 줄 만큼 확고한 자세의 무장으로서 정치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효종의 북벌정책을 보필하여 국방체계 ·군비 ·병력을 정비하는 데 많이 기여하였다.
무신으로서 현달하였고 야심찬 북벌 정책을 추진했다는 특이한 성격으로 인하여 야사와 설화의 소재로 많이 채택되었으며 박지원(朴趾源)도 소설 《허생전》에서 실명으로 등장시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