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406 사순절 제25일 변화(마 19:29절)
마 19: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개역개정)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새번역)
금요일(4/8일)에 죽촌경로당의 어르신들이 봄 나들이를 간다. 교회가 주관하는 효도관광 보다 당신들끼리 다녀오시는게 더 마음이 편하다고 해서 수년 전 부터 우리 교회에서는 관광버스를 제공해 드리는 정도로만 봉사를 한다. 경남의 가거대교 쪽 돌아보고 오는 것이 요즘 봄 여행의 추세인가 보다. 5월 초에 화농, 부마 경로당의 여행도 그 쪽으로 잡혀 있단다.
달리 도울 일을 찾다가, 여행 중 만날 위험을 준비토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 여행자 보험을 가입해 드리겠노라 죽촌마을 이장님과 통화를 했더니 요즘은 농협회원들의 관광여행 시에는 농협에서 여행자 보험을 지원해 준다고 한다. 참 잘된 일이다.
야외 활동이 많아지는 때에 뜻밖의 위험에 처하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영화로 나왔길래 보았다.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127시간"이다.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 등반 중 떨어진 육중한 바위에 오른 팔이 끼인 채 조난돼 닷새간 홀로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투쟁을 벌이다 자신의 팔을 직접 절단한 채 생존해 돌아온 실존 인물 애런 랄스턴의 삶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뒷 담화에 의하면 주인공 제임스 프랑코를 제외하고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은 애런과 함께 지내는 실제의 지인들이란다. 영화를 위한 약간의 각색만 있을 뿐 우리는 애런의 조난과 생환의 실제 상황을 본 것이나 다름 없다는 얘기다.
온갖 힘을 써도 도무지 빠지지 않는 오른 팔!!!
고립되어 있던 닷새 동안 주인공은 그동안 살아온 방식, 직장이나 친구들과의 관계, 가족들에게 소홀했던 자신의 모습을 '처절하게' 반성하게 된다. 이 절망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는 그가 가지고 있던 카메라에 고스란히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들을 담아 둔다.
죽음 앞에서의 희망!
죽음의 위기 앞에서 그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그 스스로 뼈를 부러뜨리고 무딘 등산 칼로 자신의 팔을 자른 후 탈출에 성공한다. 제살을 깍는 아픔이란 말만 들었지...... 영화의 그 장면은 차마 못보겠기에 스킵 스킵..... 주인공이 환시처럼 보았던 일들 즉, 가족들과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내게 되는 꿈은 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되고 결단의 동기가 되었노라고 애런은 말한다.
영화 "127시간"의 주인공 애런 랄스턴에게 오늘 본문을 덧입혀 본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새번역, 마 19:29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속박하는 것을 버린 사람은 버린 것 보다 더 많은 것과 더 소중한 것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 마가는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새번역, 막 10:30절) 이라 말하는데,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 처럼 그 분의 약속 앞에 서면 '여러 배'가 되었든, '백 배'가 되었든지 간에 보상해 주시고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는 의미로 읽혀 진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나의 이해는,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는데 있다.
전토는 살아가는 기반을 의미한다. 본토를 떠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또 새로운 거처를 약속하지 않았던가! 눈에 보이는 비옥한 땅을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그 반대편 기슭에 믿음으로 터잡을 수 있었던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었으리라 싶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짧은 글에서 땅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지적한다.
한 농부가 땅만 충분하다면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고, 악마도 무섭지 않다고 큰소리쳤다. 이를 듣고 악마는 그를 유혹에 빠뜨리기로 한다. 농부는 개인 땅이 없는 소작인이다. 그러던 중 저축한 돈과 새끼 말 한 필과 꿀벌 절반을 팔고, 아들을 하인으로 보내고, 형에게 모자라는 돈을 빌려서 간신히 약간의 자기 땅을 마련한다. 농사는 풍년이 들어 빚진 것을 모두 갚았지만, 그는 점점 더 많은 땅을 원하게 되어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고, 또 다른 땅을 찾아 바시키르의 유목지로 간다. 그곳의 촌장은 본인이 하루 동안 걸어서 돌아다닌 하루치의 땅을 모두 천 루블에 팔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쉼없이 초원을 걷고 또 걸었다. 마침내 출발지로 돌아왔을 때, 농부는 피를 토하고 죽어 버린다. 결국 죽어서 땅에 묻힌 그가 차지 할 수 있었던 땅은 정확히 2미터 가량 밖에 되지 않았다.
땅에 대한 관점의 변화!
땅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자에게 주시는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가족, 친지는 삶의 울타리이다. 비비고 설 언덕이다. 내가 울산에 있을 때 같은 교회를 섬기던 장로님이 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신다. 그 분은 지금 내가 사역하고 있는 익산이 고향이다. 그를 만나서 들었던 이야기이다.
국내 굴지의 회사 중견 간부였다가 목회를 하게 되었다.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하려는데 고향에서 부모님과 친척들이 함께 하자고 권하더란다.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사양을 하였단다. 그리고 교회가 세워져 있지 않은 울주군 천성면 어느 상가 지하에서 개척을 했단다. 생면부지의 땅에 교회를 세우니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었을터. 엎친데 덮친격으로 입주했던 상가는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 앉을 위기에 처했었는데 은행의 도움으로 뜻하지 않게 그 상가 건물을 인수하게 되었더란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그 지역에 대규모 주거단지가 조성되면서 목사님의 상가는 아파트부지에 포함되게 되었는데, 시공사 간부 되는 이가 목사님을 찾아와 말하더란다. 돈을 원하는 대로 드릴테니까 건물을 자기들 한테 꼭 파시라고. 그래서 목사님이 말했대지. 나는 돈을 얼마나 받아야 하는 지 셈도 할 줄 모르니 차라리 예배 드릴 수 있는 교회 건물만 하나 지어 달라고. 그 간부는 너무도 순수하게 그들의 요구에 응대하는 목사님께 감동을 받고, 이왕 짓는것 제대로 된 교회 하나 지어드리겠다고 재주껏 기술을 발휘해서 교회를 지어 주더란다.
몇 년 전, 헤어진 지 10여 년 만에 그 목사님 부부를 만났다. 내가 알기에 천성 지역은 깡촌이었다. 그곳에서 개척을 했다기에 얼마나 어려울까 염려부터 했었다. 익산으로 돌아오기 전 잠시 들러 기도해주고 가라 붙잡길래 차를 앞세우고 따라 갔다. 교회 간판이 붙어 있는 7층 건물 뒷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내려서 들어가면서 몇 층을 쓰느냐 물었다. 이 건물 전체가 교회란다. 그리고 차를 마시면서 저간의 꿈같은 얘기를 전해들었다.
문자였던 말씀을 따라 '떠났더니'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 역사하신게다.
아버지의 집은 힘이요, 수고한 자들에게 주시는 물질적 보상이다. 본문에 앞 서 한 부자 청년의 고민으로 부터 시작된 베드로의 질문을 주목해 본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새번역, 마 19:27절)
현실적인 부요함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증거로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부자 청년의 경우와, 수고한 것을 기억하고 응분의 댓가를 바라는 베드로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부자가 지나갈 수 없는 바늘 구멍은 사실 그대로 바늘 구멍이다. 1세기 예수의 말씀에 언급된 바늘 구멍은 예루살렘 성벽에 세워진 작은 문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중세 시대에 세워진 문에 기초한 것으로서 1세기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크레이그 키너, 《IVP 성경배경주석》,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2001년. 113쪽)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말씀하신다. 에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가난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경제적 지위와 그들이 누리던 일상의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거하며 자기들의 것을 나누는 또 다른 사람들의 손길로 살아간다. '물질이 목적'이었던 삶에서 '물질은 수단'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영생을 소유한 체로 말이다.
여기에 우리를 일군으로 불러 주신 더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우리 손에 있다.
"127 시간"의 죽을 뻔 했다가 다시 살아났던 애런 랄스턴에게 다시 돌아가 보자. 그는 여전히 새로운 활력과 도전으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우리는 안다. 그가 알던 사람들로 부터 그를 아는 사람들에게로 지평이 넓어졌고, 그가 하던 일에서 그가 해야할 일들로 장막터가 넓어졌다. 가족, 친구, 하는 일 모두에서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눈깜빡 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