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리(滿洲里)를 찾아서
1.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나온 만주리(滿洲里)에 대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卽黑龍江臚濱縣治。北倚金源邊堡。爲中東鐵路入境首站。清光緖三十四年。依三十一年中日北京條約。開爲商埠。
흑룡강성 루빈현의 소재지이며, 북쪽으로는 금원 국경요새가 있다. 중동철도의 첫 번째 역이있고 청나라 광서34년(1908)에 31년의 중일북경조약에 의거해 통상항구로 개항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논점은 바로 중동철도의 첫 번째 역(驛)이 있다는 글이다.
아래 그림에서 현재 만주리(滿洲里)의 위치를 보면 과연 중동철도의 첫 번째 역이라는 말이 타당성을 가질수 있는 지 매우 큰 의문이 들게 된다.
중동철도는 일명 만주(滿洲)횡단철도를 말하며 처음에는 동청(東淸)철도라 하였다가 1920년부터 중동(中東)철도라 하였다. 중동철도의 시발점이 만주리(滿洲里)에서 시작된다고 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음에 따라 고찰해 보면, 만주리(滿洲里)는 북만주(北滿洲)에 위치하며 또한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만주를 장악하기 위해 최초 부설한 사실 그리고 1945년이전 만주가 현 신강(新疆)북부지역에서 알타이산(백두산)북쪽까지의 광대한 지역이었다는 진실의 역사는 만주리(滿洲里)의 위치가 현 알타이산의 좌측 어디인가에 위치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깨닫게 해준다.
만주리(滿洲里)라는 지명은 위대한 조선인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1900~1972)장군의 ‘우등불’에 나오며, 현대 중국 돈황(敦煌)연구의 대가 창수홍(常書鴻,1904-1994)의 여정을 통해 그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2.
먼저 우등불에 나오는 철기(鐵驥)장군의 기록을 고찰해 보겠다.
<흑룡강에서의 구국 항전은 넨즈산에서 짤란툰으로, 짤란툰에서 싱안으로 차츰 후퇴작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길림, 요녕 두 성(省)에선 수많은 의용군(義勇軍) 가운데, 일년에 걸친 항전에서 만 수천명이나 희생되었다.
그래서 차츰 한 무리씩 러시아 국경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마점산과 연병문 휘하 두 군대병력을 모두 합쳐 중동철도의 서부 지선 대흥안령(大興安嶺) 분수령 밑의 싱안에서 항전을 벌였으나, 이 싸움을 최후로 우리는 대세에 몰려 러시아 국경을 넘어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호롬바일로 밀리고 만주리(滿洲里)를 거쳐 러시아의 다우리야라는 곳으로 발을 딛게 되었다. 때는 10월말경, 호롬바일 사막에서 불어치는 몽고 바람과 싱안령의 고원 기온은 벌써 그 일대에 눈은 얕은데가 70~80cm, 깊은데는 1m50~60cm나 쌓아 놓았다. 눈이 이렇게 많이 온 데다가 기온은 나날이 내려가 영하35도를 가리켰다.
수만 병력이 몰려 있는 교통 공구를 총동원하여 러시아 국경을 향해 퇴각했다. 짤란툰 북쪽 4,50리쯤에 마차를 나누어 탄 경찰대 일행이 이르렀을 때, 별안간 그 곁 산골에서 일본 기병(騎兵)과 백계(白系)러시아 기병인 듯한 군마가 나타나 기습을 가했는데 전부 몰살당했다는 것이다.
침울한 마음을 안은 채 부대는 곧 러시아 땅으로 넘어섰다. 첫 역이 만주리(滿洲里)의 건너편 쪽으로, 러시아측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나 혹은 경제적으로 국경 제1의 큰 역이었다. 이름은 다우리야
그때 만주리(滿洲里)에 들어간 군인은 약 2만여명이었다. 우리는 북으로 수송되었다. 정규군으로서 러시아 국경을 넘어 한꺼번에 들어간 군대는 마점산, 소병문 휘하의 2만명으로 가장 많은 숫자였다. 또 이에 전 중동철도의 역원이 넘어왔다. 그리고 각 민중 사회단체의 대표들 즉 항일군을 지원한다는 후방에서부터 그대로 퇴각해 왔기 때문에 가족전체를 동반하고 있었다.
영하 40도로 떨어지는 시베리아의 추위는 북만주(北滿洲)보다도 훨씬 더 사나웠다. 다우리야에 들어서 무장을 해제한 다음 러시아 측에서는 서둘러 몇 개의 열차 위로 마구 올라가라고 요구했다. 이유인즉, 일본 추격부대가 뒤를 따르며 국경 저쪽에서 러시아측에 강경한 항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우리야(Dauriya)는 러시아 지명으로 만주리(滿洲里)에서 서북쪽 직선거리로 약 56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현 지도상에서 보이는 다우리야는 황량한 벌판에 덩그러니 위치한 지역으로 전략적, 경제적 국경 제1의 큰 역하고는 아무 상관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철기(鐵驥)장군은 다우리야가 만주리(滿洲里)의 건너편 쪽이라고 기록했지, 지금의 조작된 지명처럼 서북으로 56km나 떨어져 있다고 기록하지는 않았다. 즉 현 북만주 위쪽의 만주리와 다우리야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세계전사에 전무후무한 영웅담을 기록한 철기(鐵驥)장군의 청산리대첩이 일어난 곳이 정확히 조선사오천년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알타이산 이북 현 예니세이강의 발원지에서 멀지않은 곳이었음을 우리는 이전의 글들에서 고찰해 보았으며 따라서 조선독립군이 일본군을 피해 철수해간 만주리(滿洲里)또한 알타이산 이북에 있었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아래의 글은 이런 우리의 고찰을 더욱 정확하게 해주고 있다.
3.
현 중국 최고의 초기 돈황(敦煌)연구가는 창수홍(常書鴻, 1904-1994)이었다.
그는 1927년23세 나이로 프랑스에 가서 서양 예술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아름다운 예술품에 빠져들어 서양문화에 매료되면서 조국의 저급한 문화에 자괴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935년 여름. 센 강변의 고서점에 들러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Pelliot)가 돈황석굴에서 촬영한 사진 묶음인 6권짜리 돈황도록(頓煌圖錄)을 접하게 된후, 그는 돈황 예술품들의 생동력에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경악했다.
<피렌체 화파(畫派)의 창시자 조토(Giotto Di Bondone)보다 700년전, 유화(油畫)의 창시자 반 에이크(Jan Van Eyck)그림보다 800년전의 엄청난 작품들로 시대는 물론이고 기법이나 수준도 돈황석굴의 작품들이 더 선진적이었다>
결국 그는 1936년 가을, 귀국 열차에 올라 돈황(頓煌)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 여정이 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만주리(滿洲里)에 도착한 후 돈황으로 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 만주리에서 돈황까지는 직선거리로 무려 2,100km에 달한다. 바보가 아닌이상 돈황을 가는데 멀리 돌아서 갈리는 없는 일이다. 그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이동한 것인데. 상식적으로 돈황과 가까운 곳에서 내려 이동하는 것이 상식이고, 따라서 창수홍(常書鴻)이 내린 만주리(滿洲里)는 러시아가 부설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일부분으로 돈황에서 북쪽으로 알타이산 서북쪽의 현 시베리아 횡단철도노선 근방에 위치해야 글의 앞뒤가 맞아 떨어지게 된다.
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정차역이 철기(鐵驥)장군과 조선독립군, 중국의용군 2만명이 수용되었던 톰스크를 지나 노보시비르스크-옴스크-투먼-예카테린부르크로 이어지고 또 조선독립군이 알타이산 이북의 청산리(靑山里)에서 싸운 뒤 북쪽으로 이동한 것이고 또 현 만주리(滿洲里)가 북만주 위쪽으로 러시아 국경과 접한 지역이니, 1949년 이전 역사속의 만주리(滿洲里)는 알타이산의 서북쪽 현 옴스크(Omck)와 노보시비르스크 사이의 어느지점이 되어야 한다.
현재의 길들은 옛길을 기준으로 새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현재 이 지역의 복잡한 도로 노선중에서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아래쪽으로 뻗어내린 노선중에 만주리(滿洲里)가 위치했을 것으로 추론해 본다.
4.
이를 지도로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2024.11.10.松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