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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리 시의 맛과 멋
김동원 시인 · 평론가
방언(Dialect , 方言)은 독립된 체계를 가진 한 언어의 분화체 또는 그 변종으로서 ‘사투리·지방어·지역어’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문헌 속에서 이 ‘방언(方言)’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김부식(1075~1151)의『삼국사기』(1145)로,「설총」조에 ‘(설총이) 방언으로 구경을 읽었다.(以方言讀九經)’고 하는 내용이 그것이다. 여기서 방언은 중국의 변방어인 한국어, 즉 신라의 말을 지칭한다. 기원적으로 방언(方言)은 ‘오방지언(五方之言)’의 준말로서 오방(五方)은 ‘동방(東方), 서방(西方), 남방(南方), 북방(北方)’의 사방(四方)과 ‘중방(中方=중앙)’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게 전국적으로 6개 구역(제주, 중부, 서남, 동남, 서북, 동북)으로 나뉘어진다. 제주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제주 방언, 중부 지역에서 사용되는 중부 방언, 전라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서남 방언, 경상도 및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 사용되는 동남 방언, 평안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서북 방언, 함경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동북 방언이 그것이다. 특히 지역 방언의 경우 험준한 산맥이나 큰 강, 넓은 삼림(森林), 늪지대, 바다 등의 지리적 장애로, 두 지역 간에 내왕이 불편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생긴다. 산맥에 인접할수록 투박한 거센소리 현상이 강하며, 부드러운 구릉과 들판은 상대적으로 말의 연음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밖에도 사용자들이 속한 사회적 신분이나 범주가 다른 데에서 비롯한 사회 방언이 있고, 사용자들이 사는 시간적 영역이 다른 데에서 비롯한 시간 방언이 있지만, 지역 방언만큼 두드러진 게 아니어서 이 글에서는 지역 방언을 위주로 한다.
한국문학에서 특히, 사투리를 활용한 시는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그것은 타향살이에서 느끼는 고향과 향어(鄕語)에서 오는 정서적인 친밀감과 동류 의식일 것이다. 사투리는 태중에서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란 뜻으로 ‘탯말’이라고도 부르며, 이후로도 새롭게 되살려야 할 모국어의 화신이다. 현대시사에서 방언 활용은 소월과 백석의 서북 방언, 김영랑과 서정주의 서남 방언, 이정록의 중부 방언, 김광협의 제주 방언, 박목월, 상희구의 동남 방언 등 풍부하다. 사투리는 우선 맛깔스럽고 말 중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자유롭다. 이는 수천 년 그 지형과 기후에 따라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신체의 언어이자 영혼의 언어다. 한 편의 시에서 사투리를 잘만 활용하면 사물 간의 미세한 감각의 차이를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 특히 의성어와 의태어의 사용은 행간의 움직임과 동작에 따른 오묘한 느낌과 감칠 맛이 있다. 사람과 사물의 상태와 소리를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생동감을 부여한다. 특히 의태어는 용언의 어근에 특별한 접미사가 결합된 상태인데, 이 경우 접미사는 시에서 아주 다채롭게 활용되며, 일부는 새로운 음운이 첨가되거나 탈락하기도 한다. 의성어 또한 소리를 현전하게 한다.
고도한 감각과 상징성을 띠는 사투리와 달리, 표준어는 사투리와 사투리 시의 어조와 속도, 고저와 음색, 장단과 강약 등의 고유한 말맛을 살려낼 수 없다. 아닌게 아니라, 어떤 표준어로도 전라도 사투리의 자리토씨 ․ 이음토시 ․ 도움토씨의 어조를 흉내낼 수가 없다. 웅숭깊은 남도 사투리의 해학과 중의적 화법은 얼마나 해학적이고 얼마나 절묘한가. “어따, 거시기, 오메, 허벌나게, ~잉!, ~당께, ~허제” 라든가, “내가 어제 거시기랑 거시기 하다가 거시기한테 거시기 했는데 거시기 해브렀다.”에서 ‘거시기’의 그 종잡을 수 없는 속뜻은, 행간의 느낌을 얼마나 깊게 하는지 모른다. 그런가하면, “왐마, 오매, 어찌아스까나, 근디”의 감탄사라든가, “안녕하셨지라? 어디 아프당가? 고맙고만잉, 어따 징하게 반갑소잉~, 으메 좋은겨, 니미럴, 이거 우짠다유, 모라고라? 아따 껄떡대지 마쇼…” 등등, 남도 특유의 해학적인 말은 태초의 무슨 비밀이나 기호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만약 통일이 되어 우리나라 전역의 방언이 모두 사라지고, 한 가지 표준어로만 통용되면 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문법적 직관’이란 말이 있다. “모국어 화자는 어려서부터 모국어를 읽히는 과정에서 이미 문법을 내재화했기 때문에 문법을 따로 배우지 않더라도 자유자재로 모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이는 거의 본능적이다. 사투리 또한 그 지역의 자연과 기후, 음식 여하에 따라 독자적으로 형성된다. 사투리야말로 규격화된 인간의 사고와 방법을 다양하게 하며 유머러스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공통의 방언 사용자들의 기억과 감정을 이내 소환한다. 그리고 사투리야말로 기원의 말이자 참된 말이다. 한 민족의 정신과 문화는 모국어 속에 다 녹아있다.
이 글에서는 백석의「여우난곬족」(시집『멧새 소리』, 미래사, 1991), 박목월의「이별가」(『박목월 시전집』, 서문당, 1984), 상희구의「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 김용택의「마른 장작」, 서안나의 「동백아가씨」, 이정록의 「참 빨랐지 그 양반」을 중심으로 사투리 시의 고유한 멋과 맛, 그리고 방언의 미학을 감상해 본다.
서북 방언: 백석,「여우난곬족」
일제 강점기에서 백석(본명 백기행. 1912~1996, 평안북도 정주 출생)의 시는, 전통적인 소재로 자연과 역사를 주제로 한 공동체의 삶을 노래하였다. 그의 서북 방언은 내러티브한 방식으로 신화와 현실을 가로지르며 감각적 이미지와 함께 서정성을 확보한다. 이용악이 식민지 유랑민의 비애와 실향 의식을 파고들었다면, 백석은 유년기의 추억을 토대로 북방의 풍속/민속을 재발견하였다. 오산고보 출신의 선배 시인 김소월을 가장 흠모한 백석은, 해금(解禁) 시인으로는 사랑과 존경을 가장 크게 받았다. 소월의 절절한 민요조와 설화를 흡수하여, 그는 멀고 아득한 북방 정서를 차원 높은 민족예술로 승화시켰다. 담담하고 진솔한 고백체의 어조를 통해 삶에 대한 성찰과 극복 의지를 드러낸「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기생 자야와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은「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모닥불에 서린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픈 역사를 탁월하게 그려낸「모닥불」등, 수많은 명시를 낳았다. 특히「여우난골족(族)」은 북방 정서를 대표하는 시로 꼽힌다.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 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
열여섯에 사십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
육십리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촌 삼촌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 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로 샛문틈으로 장지문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백석,「여우난골족(族)」전문
「여우난골족(族)」은 친족간의 인정과 풍속이 자연스럽게 행간에 스며들어 있다. 부모를 따라서,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계신 큰집에서 맞은 명절날 이야기는, 과거 회상의 시점에서 그려져 있다. 어린아이의 관찰자적 시각으로 묘사된 이 시는, 일가친척들의 정겹고 풍성한 이미지가 생생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 시는 다섯 개의 장면에 대한 장황한 진술이 모여서 한 편의 시를 형성하고 있는데, 시의 초점은 서사적인 전개 과정에 놓여 있는 게 아니라 각 장황한 진술이 환기하는 의미와 정서에 맞춰져 있다. 이는 곧 판소리사설이 지닌 엮음의 표현 형식과 미학”(고형진,『백석시 바로 읽기』, 현대문학, 2006)에 해당한다. 그리고 여우가 나왔다 하여 붙여진「여우난골족(族)은, 일가친척이 모여 사는 정겨운 산골동네다. 인물의 외모와 성격이 실감 나게 묘사된 점은 “매감탕 같은 입술”의 “토산 고모 고모의 딸 승녀(承女) 아들 승동이”에서 보듯이, 리듬감마저 느껴져 이채를 띤다. 뿐아니라, 동일한 언어의 반복을 통한 말잇기 방식은 어느모로 전통과 습속의 계승이란 측면을 환기한다. 그리고 백석 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토속 음식에 대한 (공)감각적 묘사다.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좋지만, 명절날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로 샛문틈으로 장지문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는 방안의 정경은, 마치 풍속화를 보는 듯해 너무나 정겹다. 식구(食口)란 말그대로 밥을 함께 먹는 사람을 일컫는다. 음식의 “맛은 육신과 정서에 사무친다. 먹을 때는 생활이고 먹고 싶을 때는 그리움이다. 맛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먹는다는 것은 삶과의 맞대면이다. 맛은 삶에 대한 직접성이다. 맛은 설명되지 않고, 다만 맛볼 수 있을 뿐이다.”(김훈, 소래섭의『백석의 맛』표4) 한 연구자(소래섭)에 의하면, “지금까지 알려진 백석 시 100여 편 가운데 음식이 나오는 시는 60여 편에 이르며, 등장하는 음식의 가짓수는 110여 종에 달한다. 배척한, 비릿한, 구릿한, 달큼한, 시큼털털한 등 맛을 표현하는 형용사도 23회나 나온다. 백석으로 인해 비로소 음식은 우리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으며, 맛을 즐기는 단순한 경험에 사유의 깊이를 더”했다.(소래섭『백석의 맛』, 2009, 프로네시스) 백석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잃어져 가는 민족의 원형 정서를, 풍속과 음식을 매개로 하여 사실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그가 구사한 서북 방언은 1930년대 유랑민의 서러움과 조국을 잃은 사람들에게도 애잔한 향수를 자아내며, 토속적이고 민속적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백석 특유의 공동체적 서사가 효과적으로 드러나 있다.
동남 방언: 박목월,「이별가」
박목월(박영종. 1916~1978, 경주 출생) 은, 정지용으로부터 ‘북의 소월, 남의 목월’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아호 ‘목월(木月)’은 ‘나무에 걸린 달’이라는 뜻으로, 그가 평소 존경하던 수주 변영로의 아호 중에 수(樹)자에 포함된 목(木)과 소월에게서 월(月)을 따왔다고 한다. 초기 그의 시는『청록집』(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3인 공저)에서 주옥같은 명시를 선보였다.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보는 듯 세련된 감각과 언어 율조는 탁월하다. 특히「나그네」는 7·5조 3음보의 율격을 구사해 율문의 격조(格調)를 더한다. 시적 여백과 함축적 표현을 통해 나그네의 유유자적함을 드러내고, 구름에 따라 흘러가는 달의 움직임에 빗대어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리고 있다. 목월의 출세작「하관」은, 죽은 아우를 땅에 묻는 형의 절절한 심경을 형상화하였다. 그는 시작(詩作)에서 정신적/정서적 염결성과 명징성, 신라 정신의 탐색과 서정의 미학을 추구했으며, 그 결과 한국 전통서정시의 일가를 이루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 후기의 시집『경상도의 가랑잎』(1968, 민중서관)은, 사투리가 어떻게 한 편의 시 속에서 향토적 정감을 불러일으키며, 마음 속 깊은 곳에 온전히 스며들게 하는지를 밀도있게 그렸다.「만술 아비의 축문」,「기계 장날」,「도포 한 자락」,「영탄조」등은, 경주 지방의 토속어를 구사해 사투리 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특히「이별가」는 경상도 억양과 특유의 강세가 행간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이별가」전문
시 「이별가」는「공무도하가」,「정읍사」,「가시리」,「진달래꽃」으로 연결되는 비극적 정한(情恨)의 시다. 이승과 저승의 단절과 이음을 상징하는 ‘강’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드러낸다. 죽어가면서도 사(死)의 비밀을 생의 한 부분으로 이어놓으려는 한국인 특유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다.「이별가」의 백미는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 니 흰 옷자락만 펄럭 거리고 / … // 오냐. 오냐. 오냐.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일 것이다. 물은 시적 공간에서 죽음과 재생의 장소로 이미지화된다. 생사의 고통인 차안(此岸)을 건너, 해탈의 피안(彼岸)으로 가는 불교사상이 시의 기저에 깔려 있다. 산 자의 혼을 부르는 초혼의식은 애절하다. "오냐. 오냐. 오냐." 그 거듭된 반복과 체념은, 죽은 자를 향한 목월의 연민과 공감이 잘 드러나 있다. 그리운 이와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에서 반복과 점층의 기법은, 사랑하는 사람과 끝내 재회할 수 없는 허무의 극단을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인생의 영고성쇠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와 바람을 통해 “인연의 갈밭을 건너” 허허롭게 들려온다. 그랬을 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란 방언의 되풀이는 형제간의 투박한 정감의 표현이자, 주술적인 방언이다. 나아가 생사에 대한 물음과 물음의 연속이다. 바람에 흰 옷자락이 펄럭이듯, 목월의 시는 언제나 허허롭다.
한편 상희구(1942~, 대구 출생)의「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3시집『노곡동 징검다리』, 오성문화, 2014)은, 경상도 사투리 시가 갖는 미감에 닿아있다. 현대 사회에 사투리 시를 쓴다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일 수 있겠으나, 모국어의 다양성 측면에서는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온다. 표준말이 사회 전반을 점령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상희구가 보여준 경상도 사투리 시집은 괄목할 만한 작업이다. 시「딸구비」에서도 유감없이 보여주었지만, 그의 사투리 시어의 토속성은 맛깔스럽다. (소낙)비의 청각적 느낌과 비 갠 후의 파란 하늘의 시각적 분위기는, 감각과 동정(動靜)의 대비, 그리고 생동감을 준다. 반면, 그의 시「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은 사투리로 된 음식 맛의 미각이 도드라져 있다.
묻어논 짐장독 하나를 새로 헐었다고
동네 아낙, 대여섯이 대청마리 양지 쪼오에
오복히 모있다
모락모락 짐이 나는 방굼 해낸
따신 보리밥이 한 양푸이
허슬허슬한 보리밥을
누리끼리한 놋숟깔에다가
북태산겉치 퍼담고는
온통 군둥내가 등청을 하는
질쭉한 묵은 짐장뱁추짐치 한 잎사구를
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똥구락키 따배이로 틀어
보리밥우에다가 얹고는
뽈때기가 오볼티이겉치
미어터지두룩 아죽아죽 씹는데
그 맛이랑 기이
얼매나 기가 차던지
내사마 이때 망쿰은
사우가 꽃가매로
태야준다 캐도 싫더라
*북태산: 北泰山. 중국의 높은 산.
*따배이: 여인들이 물동이 같은 것을 머리에 일 때 머리가 짓눌리지 않게 머리와 물동이 사이에 짚 같은 것을 동그랗게 엮어 끼워넣었다.
―상희구,「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전문
시「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을 읽으면, 음식이야말로 그 고장 사투리와 찰떡궁합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질쭉한 묵은 짐장뱁추짐치 한 잎사구를 / 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 똥구락키 따배이로 틀어 / 보리밥우에다가 얹고는 / 뽈때기가 오볼티이겉치 / 미어터지두룩 아죽아죽 씹는” 이 재미나는 표현은, 말이 팔딱팔딱 살아 움직인다. 사투리는 우리말의 정감과 뿌리가 가장 잘 스며있으며, 비유와 과장, 메타포가 깔려 있다. 특히 경상도 사투리는 정(情)이 듬뿍 담긴 말맛이 좋다. 상희구의「두 손으로 부욱 찢어서 묵는 짐장뱁추짐치 잎사구 맛」은 90%가 사투리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는 우스꽝스런 행동 묘사로 시의 해학을 촉발하며, 꾸밈없고 소박한 정경이 장점이다. 김장 담근 날, 온 동네 아낙들이 한데 모여 음식 잔치를 벌린 장면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따배이”란 여인들이 물동이 같은 것을 머리에 일 때, 머리가 짓눌리지 않게 머리와 물동이 사이에 짚 같은 것을 동그랗게 엮어 끼워 넣은 걸 가리킨다. 이마에 물이라도 떨어지면 혓바닥으로 핥아먹으며, 골목길로 간동간동 걸어가던 옛날 여인들이 눈에 삼삼하다. “볼때기가 오볼티이겉치 미어터지두룩” 할 때 ‘오볼티이’는, 간난 아기 뺨에 젖살이 붙은 복스런 모습이다. 상희구는 사투리 시집을 쓰기 위해서 태어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어학자들까지도 그의 업적을 놀라워한다. 사전에 등재되지 않은 경상도 방언이 그의 열권의 시집에서 천방지축 뛰어논다. 상희구『방언시어사전』도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하니, 어떤 면에서는 대구 방언뿐만 아니라, 한국어문학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에게 “왜 사투리인가’라고 전에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사투리야말로 모국어의 미래이며, 들꽃이 예쁜 것은 온갖 다양한 모양의 꽃이 피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아닌게 아니라, 만약 들꽃이 한 종류라면, 얼마나 산천과 자연 풍경이 지겹겠는가. 표준어만 남은 우리나라를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방언의 미학을 추구하는 그에게 아름다운 것은 개성적이고, 개성적인 것은 조화의 다른 이름이다.
서남 방언: 김용택,「마른 장작」
한때 나는 연애시의 절창인 김용택(1948~, 전북 임실 출생)의「그 여자네 집」(시집『그 여자네 집』, 창작과비평, 1998)에 푹 빠져 살았다. 그 시를 읽은 다음 날부터 “살구꽃이 피는 집”을 예사로 지나치지 않았다. 혹여,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가 올 것만 같아,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을 기웃거리곤 하였다. 참으로「그 여자네 집」은 오랫동안 내 흉금을 파고들었다. 그때까지 읽은 사랑시 중에서 가장 유장하였고 애틋한 여운을 남겼다. 무엇보다 내가「그 여자네 집」에서 가장 좋아한 시구는 전라도 사투리의 탄사(‘하따’)와 여운(‘-이이’)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에서 “하따”와 “―온다이이”의 뉘앙스는, 젊은 내 감성의 갈피를 마구 흔들어 놓았다. 처녀와 흰 눈송이와의 조응도 그렇거니와, 근원적인 설렘을 환기하는 아름다운 행간이 있었다. 나는 그때 전라도 사투리 말의 곡선과 첫사랑의 향기가 이렇게도 아프고 고울 수가 있을까, 하고 속엣말을 하였다.「그 여자네 집」은 모국어의 원형질 같은, 잠재의식 속에 내재한 그 어떤 사랑의 영원성을 일깨운다. 이처럼 시인의 첫사랑의 기억은 수채화처럼 곱게 번져,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서 살구 꽃잎으로 떨어져 파문(波紋)지고 있었다.
그 후, 김용택의 시「마른 장작」(시집『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2006)을 접한 후 또 한 번, 전라도 사투리 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 어쩌면 사투리는 마음의 둥지이며 칼 융(스위스 정신과 의사. 1875~1961)이 꿰뚫어 본 인간 집단무의식 세계가 만든 상징어일지도 모른다. 사라져야 할 변방어가 아니라, 원형 심성에 가장 가까운 현대시의 이미지 보고(寶庫)이다. 빠르고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삶에 좀더 웃음과 마음의 여유를 제공하고 영혼을 치유하며 느림의 미학을 지향하는 게 사투리이다. 그런 사투리 시「마른 장작」은 토박이말의 결과 감성이 아주 잘 직조되어 있다.
비 올랑가
비 오고 나먼 단풍은 더 고울 턴디
산은 내 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큰일났네
내 맘 같아서는 시방 차라리 얼릉 잎 다 져부렀으먼 꼭 좋것는디
그래야 네 맘도 내 맘도 진정될 턴디
시방 저 단풍 보고는
가만히는 못 있것는디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게!
거시기 뭐시냐
저 단풍나무 아래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나는 시방 바짝 마른 장작이여! 장작
―김용택,「마른 장작」전문
“아, 이 맘이 시방 내 맘이 아니여! / 시방 이 맘이 내 맘이 아니랑게!” 괜시리 김용택의「마른 장작」을 읽어 설랑, 이 가을밤 내 맘이 삙허다. 아니, “거시기 뭐시냐 / 나도 오만 가지 색으로 물들어갖고는 / 그리갖고는 그냥 뭐시냐 거시기 그리갖고는 그냥 / 확 타불고 싶당게”. 정말로 그러고 싶당게. “비 오고 나먼 단풍은 더 고울 턴디 / 산은 내 맘같이 바작바작 달아오를 턴디”. 하필, 그 여시를 만난 날「마른 장작」에 꽂혀 설랑, 몸달아 “가만히는 못 있것는디” 확 타불고 싶당게. “너를 생각하는 내 맘은 시방 짧은 가을빛에 바짝 마른 장작개비 같당게 / 나는 시방 바짝 마른 장작이여! 장작”. 절창도 이쯤 되면, 거시기 있잔헌가? 거 뭐시냐, 전라도 말로 ‘허따, 시가 기똥차부러!’. 그렇다. 김용택의「마른 장작」은, 전라도 사투리가 갖는 종결형의 맛이 겁나게 빵빵허다. ‘―랑가’, ‘―턴디’, ‘―랑게’ 그리고 ‘거시기, 거 뭐시냐?’ 등에 나타난 말의 종결형 어미와 추임새, 리듬감은 허벌나게 좋당께로. 방언의 멋과 맛이 한결 돋보이는 사랑의 절창이다.
다음은 계간『시와문화』여름호(2007)에 실려, 전라도 사투리의 새장을 연 서안나(1965~, 제주 출생)의「동백 아가씨」를 감상해 보자. 이 시는 여인의 흉중에 애증이 교차할 때, 어떤 방식으로 터져 나오는지를 질펀하게 그리고 있다. 특히, 우울한 여자에게 노래가 주는 위안이 얼마나 큰지를 잘 증거 한다.
야야 장사이기 노래 쪼까 틀어 봐라이
그이가 목청하나는 타고난 넘이지라
동백 아가씨 틀어불면
농협 빚도 니 애비 오입질도 암 것도 아니여
뻘건 동백꽃 후두둑 떨어지듯
참지름 맹키로 용서가 되불지이
백 여시 같은 그 가시내도
행님 행님 하믄서 앵겨붙으면
가끔은 이뻐보여 야
남정네 맘 한쪽은 내삘 줄 알게 되면
세상 읽을 줄 알게 되는 거시구만
평생 농사지어 봐야
남는 건 주름허고 빚이제
비 오면 장땡이고
햇빛 나믄 감사해부러
곡식 알맹이서 땀 냄새가 나불지
우리사 땅 파먹고 사는 무지랭이들잉께
땅은 절대 사람 버리고 떠나질 않제
암만 서방보다 낫제
장사이기 그놈 쪼까 틀어보소
사는 거시 벨 것이간디
저기 떨어지는 동백 좀 보소
내 가심이 다 붉어져야
시방 애비도 몰라보는 낮술 한잔 하고 있소
서방도 부처도 다 잊어불라요
야야 장사이기 크게 틀어봐라이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서안나,「동백 아가씨」전문
어떤 시 낭송 무대에서 서안나의「동백 아가씨」를 듣는 순간, 나는 홀딱 반해 버렸다. 그곳에 온 관객 중에 반하지 아니한 얼굴이 없었다. 아름다운 영상과 배경음악,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의 그 고저장단과 음색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사투리 시야말로 말의 가장 원초적인 이름들을 불러내는 주술이었다.
“야야 장사이기 노래 쪼까 틀어 봐라이 / 그이가 목청하나는 타고난 넘이지라 / 동백 아가씨 틀어불면 / 농협 빚도 니 애비 오입질도 암 것도 아니여 / 뻘건 동백꽃 후두둑 떨어지듯 / 참지름 맹키로 용서가 되불지이”
남도 사투리 특유의 감아치는 맛과 어조는, 장사익의 구성진 노래〈동백 아가씨〉와 오버랩되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 편의 시가 이렇게도 감동과 여운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좋은 낭송은 관객의 심장을 떨림과 울림으로 휩싸고 돈다. 아무리 어려운 시일지라도 낭송가를 거치면, 거짓말처럼 말이 말랑말랑해진다.「동백 아가씨」의 시맛은, ‘인생이 뭐 별거냐’라는 희롱(戲弄)과 해학이 멋지다. 이 시에는 오늘날 여전히 땅에 의지해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는 체념과 한(恨)의 정서가 가득 차 있다. 남편 “오입질”은 오입질대로 수긍해가면서, 조강지처의 어처구니없는 삶의 그늘을 울기(鬱氣)로 채색하고 있다. “행님 행님 하믄서 앵겨붙”는, “백 여시 같은 그 가시내”가 뭐가 이쁠 것이냐만, 한 여자로서 그 ‘백 여시’의 팔자를 생각하면, 불쌍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6·70년대 농사꾼 여자의 팔자는 다 엇비슷했다. “남는 건 주름허고 빛”뿐이었다. 허구헌날 농사꾼 남편은 술판에, 노름판에, 기집질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전근대의 여성들은 오직 “서방보다” 더 나은 “땅”과 자식만 믿고 버텼다. 그녀들에게 “땅은 절대 사람 버리고 떠나질 않”는 철석같은 믿음이 있었다. 그런 그녀들에게 핏빛같은 동백은, 노래는, 흉중에 고인 (恨)을 풀어주는 카타르시스가 있었다.
그렇다. “사는 거시 벨 것이간디 / 저기 떨어지는 동백 좀 보소 / 내 가심이 다 붉어져야 // 시방 애비도 몰라보는 낮술 한잔 하고 있소 / 서방도 부처도 다 잊어불라요 / 야야 장사이기 크게 틀어봐라이 /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알고 보면〈춘향가〉,〈심청전〉,〈흥부전〉도 장편 서사시를 판소리의 창법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소리 예술이다. 서안나의「동백 아가씨」의 낭송을 통해 재발견한 것은, 시 낭송가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시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시 낭송가들은 대개, 작품성, 발음의 수월성, 내적 사연이 담긴 이야기가 있는 서정시를 선호한다. 대체로 시행 길이는 15행에서 25행 사이가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그런 측면에서 서안나의「동백 아가씨」는 낭송시의 장점을 두루 갖춘 듯하다. 시속 여자의 심리적 굴곡이 있는가 하면, 남자를 사이에 두고 얽힌 치정이 있고, 장사익의 구성진 그 목소리가 배경으로 깔려으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만약 서안나의「동백 아가씨」가 낭송 무대로 펼쳐진다면, 동백꽃이 핀 섬이면 좋겠다. 섬과 섬 사이 곱게 잠기는 노을 무렵이면 더욱 좋겠다. “남정네 맘 한쪽은 내삘 줄”도 아는 여성 시 낭송가가, 동백꽃 수 놓인 무대복을 입고 낭송하면 된다. 배경 음악은 시크릿 가든의 곡「Nocturne」으로 한다. 음악은 어스름을 타고 3분 가량 은은하게 울려 퍼진다. 노을은 어둠을 타고, 어둠은 시의 선율을 타고, 섬은 아득히 흘러넘치는 시정(詩情)이 펼쳐진다.
중부 방언: 이정록, 「참 빨랐지 그 양반」
충청도 사투리 시의 재발견은, 이정록(1964~, 충남 홍성 출생)의 시집『어머니 학교』(열림원, 2012)에서 시풀시풀(푸릇푸릇의 충청도 방언) 살아난다. 농사꾼 어머니의 체화된 말, 질박한 말의 무늬는, 그의 시재(詩才)와 뒤섞여 놀라운 서정의 세계를 열었다. 그의 시는 마치, 문지방 안이나 동네 논두렁에서 시를 줍는 것처럼 보인다. 시그랑주머니 같은 늙은 어머니를 “큰 하늘로 모”시고 독보적인 서정시의 일가를 이룬 그의 시는 관념을 뭉개고 지혜의 은유를 행간에 풀어놓는다. 호박이랑 가지, 들꽃과 달빛, 동네 둘레를 끼고 도는 개울과 산을, 시의 밭에 뿌린다. 배추와 풋고추가 섞이고, 어머니의 논두렁은 시가 되고, 뒷산 뻐꾸기는 동네 주민이 된다. 시「짐」은, 평범한 말의 이면(裏面)이, 얼마나 인간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지를 놀라운 시안(詩眼)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기사 양반,
이걸 어쩐댜?
정거장에 짐 보따릴 놓고 탔네.
걱정 마유. 보기엔 노각 같아도
이 버스가 후진 전문이유.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
그러니께 나부터 타는 겨.
나만 한 짐짝이
어디 또 있간디?
그나저나,
의자를 몽땅
경로석으로 바꿔야겄슈.
영구차 끌 듯이
고분고분하게 몰아.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고분이니께.
―이정록,「짐」전문
시,「짐」을 읽으면, 놋그릇에 노을빛 부딪치는 충청도 특유의 느린 말투가 들린다. “이걸 어쩐댜?”에서 보이듯, ‘~댜?’의 말맛은 토종 된장 맛이다. “담부턴 지발, 짐부터 실으셔유.”라고 툭 던진 “기사 양반,”의 중의적 어투는, 해학의 극치다. “그러니께 나부터 타는 겨.” 그 말 속에 담긴 능청도 백미이지만, 스스로 “짐짝”으로 취급한 노각(표면의 색깔이 누런 늙은 오이) 같은 노인네의 말대답 역시 묘오한 데가 있다. “그나저나, / 의자를 몽땅 / 경로석으로 바꿔야겄슈.” 이 시구에 이르면, 농촌 노인 문제의 절박함이 엿보인다. 이정록의「짐」에서 가장 시적 내공을 가늠할 수 있는 시구는, “영구차 끌 듯이 / 고분고분하게 몰”고 가는 시골 버스의 풍경이다. 이 역설적 풍자는, 인생무상을 통절하게 비유한 묘경이자, 충청도 느림의 미학이며 알레고리다. 한평생 자식에게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주고, 남은 건 병든 몸과 허연 백발 뿐인 짐이다. 그 늙은 짐짝들은“한 사람 한 사람이 / 다 고분이”다. 시어‘고분(古墳)’이야말로 뼛속까지 공감하게 되는 시구이자, 무덤의 또 다른 메타포다. 물론 표면적으론‘고분이’의미하는 뜻은, 심성이 착하고‘고운 이’를 함의하는 충청도의 미덕이다, 또한‘고운-곱다’란 말은‘있는 그대로 온전하다’, 나아가‘흔적도 없게 감쪽같다’는 뜻을 내포한다. 노인의 삶이 더 이상의 짐이 아니라, 연륜에서 오는 크고 높은 지혜에 해당하는 하나의 역설적 표현인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충청도 사투리 시「참 빨랐지 그 양반」(시집『정말』, 창비, 2010)은, 웃음의 이면에 짙은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듯, 언어의 고랑에 깊이 배인, 박복한 과부의 웃지 못할 사연이 산문시로 빠르게 전개된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한데 처녓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밑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홀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먹겠어 정말 낼랜 양반이었지
―이정록,「참 빨랐지 그 양반」전문
「참 빨랐지 그 양반」은 허구적 개연성을 통해 남녀 야합의 기막힌 언롱(言弄)과 해학을 다루고 있다. “시인은 유사 이래 언어를 갖고 논 말놀이꾼이었고, 언어로 사물을 찍어낸 언어의 연금술사였으며, 마침내 언어를 부숴버리려 하는 이상한 족속이다.(이승하) 이정록은 툭툭 던지는 어투로 묘사적 진술의 방식을 택한다. 타자의 은밀한 성(性) 이야기에 착목하여 기발한 상상력으로 확장한다. 이런 엉뚱하고도 능청스런 발상은 독자에게 웃음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사건의 나열과 점층적 전개로 인한 이 시의 산문율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에서 비롯된다.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불한당 같은 불곰” 사내에게 당한 아낙의 넋두리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대략 난감이다. 70년대 이전에서나 볼 수 있는 농촌 처녀총각의 이런 무지막지한 사랑법은, 그 당시엔 무용담이었다. “박복한 팔자”의 과부 아낙은, 곧 죽어도 빨리 죽은 “신랑”의 역성을 든다. 흉보기는커녕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 “밑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고, “훌러덩” 치마 위를 덮치던 옛날을 못내 그리워한다. 이 시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또다른 시선은, 산문시가 갖는 유장한 리듬과 치밀한 묘사일 것이다. 충청도 사투리 종결형인, ‘~아녀’, ‘~겨(거여)’, ‘~겄어’, ‘~유’에서 오는 그 토박이말의 감칠 맛이 또한 일품이다. 물론 마지막 3연의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간 “가정용도”, “상업적으로”도 못 “써 먹”는, 그 사내의 “참 빠(르고)” 부실한 양물(陽物)의 비유는, 웃음을 유발하는 하나의 기제다. 하여, 이 시의 행과 행은 헤벌씸하고, 연과 연 사이는 시적지근하다. 이 시를 읽고 이제 누가 충청도를 느림의 고장-본거지라 말할 것인가. 그리고 이정록의 시가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우리 민족의 심성에 내재한 여유와 지혜를, 미학과 해학의 차원으로 가일층 끌어올렸기에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