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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서예가
 
 
 
카페 게시글
★ 서 예 ★ 스크랩 비오는 소리
소전 추천 0 조회 18 07.12.16 19: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정과 원칙이 조화된 사회

 

-노란세상 블로그에서 정과 원칙에 관한 글을 읽고-

 

인정으로 가득찬 우음 이 두 글씨가 생각이 났습니다.  

 

 글씨만으로만 보면 살아 움직이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아이의 순수한 모습이 보이는 획

때문일 것입이다.

 

정이 많아서 탈이라는 말

그 탈은 바로 원칙을 지키지 않고 정만 따른 잘못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한국인에게는 정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인간미가 없다고 합니다

한국은 원칙보다 인정이 더 공감을 받는 사회 같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예술품이고,

이것들이 바로 그 민족의 미학을 대신합니다

 

정과 원칙, 어떻게 잘 조화시켜야 할까요?

법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 생긴겁니다.

 

한국사람들이 중국에 여행와서 중국사람들은

융통성이 없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여겼습니다.

이들을 알게 되고 이해와 관용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원리, 원칙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제는 융통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으려한다.

라고 이해합니다.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일까요?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회

그것은 이상향이겠죠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요

누구나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돌아서서는 서로 비교하고 더 욕심을 부립니다.

 욕심은 버려야 하지만,

욕심을 버리는 것이 희망, 꿈을 버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절제와 중용이 중요합니다.

 

어떤 중국친구는 저에게

 "소유욕 때문에 한국은 함께 행복을 누릴 수 없다. "

라고 합니다. 이에 저는

"소유욕이 없이는 발전이 없다. 희망과 꿈이 없어진다. 이것이 개인적인

행복이라과 한다면 중국인은 행복하지 않다. " 라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사회체재의 모순을 이야기 합니다.

 

어느것이 옳다는 정답은 없습니다.

하지만 최근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정과 원칙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루어 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꿈을 이루어 내려는 과정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작품을 소개합니다.

 

산동성 제2회 전각대회 수상작

 

하지만 이  작품의 장법은  법칙으로 지켜졌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의 비소리는

그 힘을 잃고 있는 것 같습니다.

비소리가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려

그 자연미를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삶도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정과 원칙의 자연스런 조화를 찾아야 합니다.

  

인정과 원칙의 조화

 

아이의 순수함으로 돌아가다.

말을 잃고 복을 얻다.

뜻한 바를 얻고 할 말을 잃다.

주는 기쁨

축복

비소리

 

 

이번 전시의 주제로 사용한 문장과 말입니다.  

 

아래의 글을 읽고 생각난 작품을 올려봅니다.

서진혁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래의 글 : 노란세상 서진혁 님

 

장면1> 대구에서 아홉 시 오십 분에 탄 시외버스가 울산 신복로터리 신호에 정차한 것은 열한 시 경이었다. 태풍 크로사가 북상중이어서 제주를 비롯한 남쪽 지방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되었다는 뉴스를 들었지만, 울산의 비는 소강상태였다. 육십 대 쯤 되어 보이는, 등산을 다녀오는 폼의 가벼운 배낭을 짊어진 아저씨가 운전석 옆 계단에 서서 기사에게, 차문을 열고 내려줄 것을 부탁했다. 원래 시외버스도 승하차장이 따로 있어서 그곳에서 타고 내려야 하지만 신복로터리를 지나서 있는 시외버스 하차장보다 신복로터리에 진입하기 전인 그 위치에서 내려야 집까지 걸어가기가 훨씬 수월하다는 것이다. 비도 오고, 이 밤에, 이런 날 기사가 편의를 좀 봐 주면 안 되느냐는 요지의 말. 기사가 뭐라 대꾸했는지 버스 뒷자리에 앉은 내가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버스는 그대로 로터리를 지나 하차장에서 문을 열었다. 초록 신호를 받아 출발할 때부터 반백의 남자는 상스러운 욕을 섞어가면서 큰 소리로 떠들었다. 다른 기사들은 다 세워주는데, 젊은 사람이……. 기사는 힐끗 남자를 째려보았다. 조금만 격해지면 제대로 시비가 붙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상황이었는데, 기사는 마쳐야 하는 일이 있으므로 하차장에 승객을 내리고 종착인 터미널을 향해 출발하고, 반백의 남자는 내리면서까지 궁시렁 거리더니 내리자마자 담배를 하나 꺼내어 문다. 하산길에 술을 한 잔 했는지 걸음이 조금 풀렸다.

 갈등이 그렇게 봉합될 때까지,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나, 무어라 한 마디를 할까 말까 계속해서 망설였다. 기사님 잘못한 거 없으니 어르신 다른 승객 생각해서 좀 조용히 가시자고……. 속마음은 그랬으면 좋겠다고 몇 번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 혹시나 더 큰 시비 거리로 발전할 수도 있겠다 싶어 잠자코 보고만 있었다. 어쨌든 버스를 내리면서 기사에게 ‘아까 잘 했다’, ‘잘 참았다’라고 말할까 하다가 그것도 좀 우습다 싶어 또 그냥 내렸다.


<장면2> 저녁 아홉 시 이십 분 쯤. 시장통의 떡볶이 집도 이제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다. 가게 앞에 내 놓은 튀김, 순대, 떡볶이, 오뎅……. 전부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그 집에 갔을 때, 아가씨 두 명이 여러 가지를 주문하고 있었고, 가게를 보는 젊은 남자는 혼자서 부지런히 아가씨가 불러대는 메뉴를 찾아서 담고 있었다.

 김밥도 두 줄 주세요. 아, 김밥 지금 새로 싸야 하나요? 떡볶이 이천 원어치 하고, 그 국물에다 튀김도 좀 같이 담아 주세요. 오징어 튀김은 남은 거 다 주시구요, 고추 튀김은 두 개만 넣어 주세요. 순대도 이천 원어치 주세요. 이천 원어치가 얼마나 돼요? 그럼 삼천 원어치 주세요. 된장 말고 소금으로 주시구요. 아, 닭꼬지도 두 개 넣어 주세요. 그건 좀 데워 주셔야 되는데요. 아뇨, 허파는 말고 간만 같이 주세요. 

 복잡하다. 다 합쳐도 칠팔천 원어치밖에 안 되는데, 옆에 서서 듣고만 있어도 복잡하고 까다롭다 싶다. 젊은 남자 그다지 친절한 표정은 아니라도 주문을 충실히 수행하느라 서두는 폼이 성실하다는 느낌은 든다. 그러느라, 아까부터 내가 그 앞에 서 있어도 흔히 하듯, ‘어서 오세요’라는 건성의 인사도 없다.

 오 분 쯤 기다리고 섰는데, 종종걸음으로 귀가를 하던 한 아주머니 분식집에 놓인 오뎅을 보고는 이거 두 개만 좀 담아줄 수 없냐고, 가게 안의 남자에게 대뜸 말을 던져 넣는다. 목소리만 들어도 급하다는 의사 전달을 충분히 하고 있다. 젊은 남자, 예 담아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도 계속 앞선 아가씨의 주문을 담고 있다.

 일 이 분쯤? 아가씨와의 계산을 끝낸 남자가 내게 묻는다. 뭘 드릴까요?

 내심, 이 아저씨, 내가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다고 뒤에 온 아주머니 먼저 해 주는 거 아닌가 의심했는데, 인사는 없었어도 온 순서는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뒤에 온 아주머니, 제 거 얼마 안 되는데, 제 거부터 좀 해주면 안돼요? 바쁜데……, 한다. 짜증이 담긴 목소리다. 젊은 남자, 순서대로 해 드릴게요, 한다. 손님의 요구를 다 들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표시를 담은 웃음기 같은 건 빠진 무미건조한 대답이다. 결국, 아주머니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과 짜증 섞인 혼잣말을 남기고 오던 대로의 종종걸음으로 가버렸다.


 원리원칙(原理原則), 운영의 묘(妙), 곧이곧대로, 융통성(融通性), 유도리(유두리?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대체 어느 나라 말인지…….), 강직(剛直)함, 인정(人情)……. 이런 말들의 중간쯤은 어디인가? 똑같은 상황과 똑같은 일을 두고도 누구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른 누구는 저렇게 생각한다.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면서도 각자는 서로를 배려했다고 믿어버리는 수도 있다. 내가 옳다고 판단하고 마는 것이다.

 어차피 신호 걸렸는데, 문 잠시 열어서 나 하나 내려주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어서 그런 정도의 배려는 사회적으로 받을 만한데, 나보다 어린 사람이, 버스 핸들 쥐고 있는 게 뭐 그리 벼슬이라고 그거 하나 못해주겠다는 거냐……. 말을 할 만하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말이다.

 그 아저씨는 나 하나 편하자고 사람들이 공공적으로 해 둔 약속을 어기라는 강요를 했다. 처음에는 부탁이었겠지. 부탁을 했다는 것은 약간의 비굴함을 맘속에 담고 말을 꺼냈다는 말이고, 그 말은 처음에는 그게 그리 떳떳한 일이 아니었음을, 그래서 좀 부끄러움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기사에게 거절을 당하고 나서는 늦은 시간 장거리 교통편에 피곤할 승객들에 대한 배려는 없이 자기의 감정을 쏟아놓고 만다. 그때부터는 이 아저씨 부끄러움을 잊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살아온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분식집의 젊은 남자는 내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뒤에 온 아주머니에게 오뎅 두 개를 먼저 싸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게 양해를 구했는데, 내가 수락하든지 거절하든지는 온전히 내 마음이지만, 인정상 쉽게 그러지 마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남자가 내게 공을 넘기지 않은 것은 아마도 그 아주머니의 짜증까지 섞은 당당함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 양해를 구하는 것은 그 크기가 크든 작든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나에게 이익을 제공해 달라는 것인데, 그 아주머니는 그것을 아주 당당히 요구했으니까,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없이 자신에 대한 배려만 주장하는 사람 역시 염치없는 사람인 탓에, 젊은 남자는 그런 정도의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들이다. 뭐 그런 것들까지 생각에 담아두고 살아가느냐고 핀잔을 받을 만도 하지만, 결국 이런 작은 일들의 판단이 흐트러지면서 큰일을 그르치는 사회풍조가 조장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되고, 작은 잘못에서부터 염치나 반성이 없으면 나랏돈을 차떼기로 먹고, 대통령 후보 경선을 조직적으로 조작해도 내가 시키지 않았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말면 그만이라 생각할 수 있는, 더 무서운 것은 늘 그러했으니 이번에도 그러겠지, 또 뭐 다 그런 거 아니냐는 사회 저변의 판단이 용인된다는 것이다. 다른 기사들도 다 세워주니 당신도 나를 하차장이 아닌 곳에 세워줘야 한다는 생각이나, 나는 아주 잠깐만 걸리면 되니까 이런 정도의 새치기는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나, 함께 살아가기 위한 기본 약속을 잊고 염치를 잃어버린 생각이다. 그러고 나서는 반성 없이, 원칙을 지킨 사람들을 인정머리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헌데……, 이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원리원칙만 강조한다고 일이 다 해결되느냐면 그렇지 않다. 이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내가 명심해야 할 사안이다.) TV에서 짤막하게 소개되는 걸 본 바로는, 장진-정재영의 영화 [바르게 살자]는 지독스레 곧이곧대로, 원칙대로인 주인공 경찰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풍자하고 있었는데, 평소 무어 그리 사소한 것까지 따지냐는 말을 잘 듣게 되는 내게 주인공의 답답함이 안타까웠다. (감독이 보여주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늘 그렇듯 단순한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의 비빔밥인 삶 자체였겠지만…….)

 ‘원칙대로 하자’는 말의 최고봉은 역시 ‘법대로 해’라는 말일 터인데, 그 만큼 삭막하고 막 가자는 말도 또한 없다. 원칙대로의 고지식의 동의어가 ‘인간(人間)적이지 않다’, ‘인정(人情)적이지 않다’는 말인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사람의 살이라는 것이 원래 따뜻해야 하는 것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자로 잰 듯 딱 부러지게, 톱니바퀴 맞물려 돌듯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식의,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냐는 식의 변명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계 부속품에나 어울릴 만한 것이니까. 원칙(또는 법)이라는 것이 모든 구체적 상황에 대한 처리를 적시해 놓은 것이 아니므로, 경우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원칙(또는 법)은 충돌과 갈등을 피하기 위한 최대한이 아닌 최소한의 공감대일 뿐이다. 나의 원칙과 상대의 원칙이 똑같지 않겠지만, 벤다이어그램을 그려 교집합 부분을 칠해보면 가장자리 들쑥날쑥 남는 여백은 있을지언정 크게 보아 많은 차이가 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인간’으로서의 교육을 받았고, ‘인성’을 타고났을 테니까. 하지만 공통부분이 아닌 가장자리의 제각각 남는 부분이 갈등을 야기하고 충돌을 유발함도 분명하다. 그럼 원칙이 채우지 못하는 개인과 개인의 간극은 무엇이 채워야 할까?


 원칙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은 ‘감동’이 아닐까 한다. 원칙만을 내세워 남을 가르쳐 바꾸려 들면 역시 자신의 원칙을 지키려는 상대로부터 반발심을 유발하게 되겠지만, 나의 원칙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벌어져 있던 원칙간의 거리가 단박에 좁혀져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장면2>를 예로 들어 보면, 순서를 지키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뉘앙스를 담은 ‘순서대로 해 드릴게요.’가 50점이라면, 종종걸음 치던 아주머니의 마음에 조금의 여유를 보태줄 수 있도록 ‘잠깐이면 됩니다. 금방 해 드릴게요!’라는 정도가 100점이 아닐까? 절대 내 원칙을 내세워 강조하거나, 강요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고도 내 원칙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 상대의 작은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도 상대가 잘못한 부분을 고칠 수 있게 하는 방법. 그런게 100점인 것 같다. 그 코드가 바로 ‘감동’이 아닐까 싶다. (물론, 원칙을 지키지 않고 급하다는 아주머니의 주문부터 처리하는 것이 0점인 것은 당연하고…….) 그렇게 하고도 짜증을 내고 가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뿐이고.


 자, 말이 길었지만 결론은 이것이다. 원칙 없는 부화뇌동이나 몰염치한 배려 없음보다는 당연히, 곧이곧대로 원칙을 지키는 것이 바른 길이고, 곧이곧대로의 원칙준수나 강요보다는 인간적인 감동을 이끌어 내어 모두 함께 원칙에 공감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것. 그렇게 살아 볼란다. 

출처 :노란세상(YeloWold) 원문보기 글쓴이 : 지원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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