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에 화제의 데뷔를 했던 블랙 새버스의 두 번째 앨범이자 최고의 앨범으로 꼽히는 걸작이다.
8비트의 힘찬 배킹으로 시작하는 타이틀곡은 지금 들어봐도 역시 충격적이다.
밴드의 최소 단위인 기타, 베이스, 드럼만 가지고 이렇게 공격적인 사운드를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블랙 새버스가 온전한 헤비 메탈 그룹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하드 록과 헤비 메탈을 기계적으로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하드 록 중에서 훨씬 공격적이면서 빠른 템포로 정형화된 것을 헤비 메탈로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국의 다른 그룹들이 상당히 다양한 형태의 록 음악을 연주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거의 최초의 브리티시 헤비 메탈 그룹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지 오스본의 음산한 목소리와 기괴한 쇼맨쉽, 그리고 종말, 죽음, 파괴 등을 주제로 다룬 가사로 인해서 보수적인 평론가들과 라디오 프로그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플래티넘을 기록했던 것을 보면 당시 이들의 음악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던지 알 수 있다.
당연한 결과로 이들의 싱글 히트곡은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인 〈Paranoid〉 하나 밖에 없지만, 〈Iron Man〉 같은 대곡은 기념비적인 헤비 메탈 넘버이다.
정상적인 템포로 노래가 이어지다가 토니 아이오미의 기타 솔로가 시작되면서 더블타임으로 빨라지는 구성은 이후에 등장하는 헤비 메탈 곡들의 전형처럼 되어버렸다.
〈War Pig〉 역시 마찬가지.(김우석)
NO.42『Dookie』(94)--Green day
'펑크로부터 플래티넘으로'였던가... 롤링 스톤지는 이 앨범을 이렇게 평했던 듯하다.
'파티 펑크'(Party Punk)였던가... A.P지는 이들을 이렇게 비아냥거렸던 듯하다.
어떤 통신 문구에서는 '정박아 펑크'라는 말도 나왔다.
어쨌든 1,000만장 이상이 팔려 나갔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팔린 펑크 레코드'라는 영예는 버클리 출신의 펑크 트리오 그린 데이의 차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앨범은 '시대를 빛낸 명반' 축에는 못 낄 듯하다.
'펑크 록'이라는 비교적 영예스러운 칭호도 못받고 겨우 '펑크 팝'이라고 불렸으니까.
게다가 이 앨범은 그런지 폭발이 '스멀스멀 사라지기 보다는 불타 없어지는 것을 선택한' 뒤(실제로는 그 반대 아니었을까) 무주공산 같이 되어버린 자리에 무혈입성한 상황의 산물이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펑크라는 무정형의 운동을 팝 음악의 한 장르로 정착시켰다.
"내 푸념소리를 들어줄 시간이 있겠어"라는 빌리 조 암스트롱(Billi Joe Amstrong)의 하소연이 던진 「Basket Case」에 열광한 건 개러지 펑크족들만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이었다.
그런데 '시대를 빛낸 명반'이 아닐지라도 그 시대가 어수선하고 하수상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빛이 나지는' 못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 앨범이야말로 비판가들에게 '그럼 니가 한 번 해봐'를 외칠 수 있는 흔치 않은 경우에 속한다.
'90년대 중반, 그리고 그 시대는 미국이 요즘처럼 다시 '쿨'해지기 전의 과도기였고 이들은 과도기의 적나라한 초상이었다.
그 점에서 이들은 망나니이기는 해도 얼간이는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레코드는 '60년대 이후 수많은 개러지 펑크 밴드들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하다.(신현준)
NO.43『Marquee Moon』(77)--Television
뉴욕의 펑크 록계에는 라몬스와 같은 전형적인 3 코드 펑크와 함께 아트 스쿨(Art-School)이라 불리는 좀 더 실험적인 스타일의 밴드들이 공존했다.
이중 대표적인 그룹으로 토킹 헤즈와 텔레비전을 들 수 있다.
텔레비전은 전설적 펑크 록 클럽 CBGB가 배출한 최초의 스타 그룹으로서 록 역사상에서도 드물게 보이는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였던 팀으로, 단명했던 것이 무척 아쉬운 밴드다.
이들은 펑크 록이 갖고 있는 특유의 스피드감이나 파괴 충동을 표출하기 보다는 그것보다 한 차원 놓은 수준의 예술적 감흥을 던져준다.
지적인(Intelligent) 테러리스트라고나 할까?
이들 음악의 핵심은 톰 벌레인과 리처드 로이드, 2명의 기타리스트에 의한 도취적인 듀얼 기타 사운드에 있다.
마치 서서히 약물에 의해 취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기타 사운드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다.
그 위를 흐르는 초현실적 가사의 보컬은 그만큼 히스테리컬하다.
요약하자면 텔레비전의 음악은 에로틱하고 퇴폐적이며 동시에 폭력적이다.
이들은 '60년대의 사이키델릭·드럭 컬쳐의 계승자이며 음악적으로 도어스와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직접적 영향하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그들의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표출된 작품이 바로 이 앨범이다.
「Marquee Moon」은 결코 상업적으로 성공한 앨범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벨벳 언더그라운드가 그랬던 것처럼 이후의 수많은 모던 록 밴드들(특히 기타 위주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뉴욕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면 벨벳 언더그라운드-텔레비전-소닉 유스의 흐름을 떠올리게 된다.
텔레비전은 이후 한 장의 앨범을 더 발표하고 해산한다.
그리고 각자의 길을 걷다가 '90년대 초 잠깐 재결성 됐으나 역시 앨범 한 장으로 끝나게 된다.
톰 벌레인과 리처드 로이드(매튜 스위트의 기타리스트로 활약했었다)는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텔레비전 시대만큼의 작품을 발표하기는 힘들 것 같다.(정원석)
NO.44『Metallica』(91)--Metallica
일명 블랙 앨범으로 불리는 이 동명 타이틀 이전의 메탈리카 앨범은 전부 뛰어난 음악적 완성도를 지닌 훌륭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앨범들은 고수 메탈 팬 이외의 일반 대중이 즐기기에는 너무 헤비하고 격하다.
이 앨범에 와서야 드디어 메탈리카는 본격적으로 라디오 전파를 타기 시작했고 제도권의 오버그라운드 매체를 장식하게 된다.
메탈리카의 이런 변화에 대해 골수 헤드 뱅어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예상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보다 많은 멜로디가 부여되고 발라드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 앨범은 역시 스래쉬 메탈임에 틀림없다.
'90년대에 들어 많은 헤비 메탈 밴드들이 몰락해버린 상황에서 메탈리카 마저 구태 의연하게 '80년대식 죽여라(?) 사운드를 구사했다면 메탈계는 아예 씨가 말라 버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답습을 계속 한다는 것 자체가 창조적 뮤지션 집단인 이들에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 쏟아진 비난의 대부분은 스래쉬 메탈 순수주의자들의 폐쇄성을 드러낸 이기심의 발로로서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이 앨범의 사운드 프로덕션은 헤비 메탈이 갖고 있는 미학을 최대한도로 극대화시켰다.
드럼 소리가 이처럼 웅장하고 강력한 음반은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각각의 곡들도 드라마틱함의 진수를 들려준다.
앨범 전체를 듣고 나면 마치 격한 운동 후의 기분 놓은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80년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인 그들의 위치는 이 작품으로 보다 견고해졌다.
이 앨범은 현재까지 미국에서 천만장 가까이 판매되었다.
이런 종류의 헤비 사운드로서 가능한 최고의 판매고가 아닌가 싶다.
메탈리카는 영리하다.(정원석)
NO.45『Dire straits』(78)--Dire straits
때는 디스코의 열풍이 거세게 몰아치던 1978년이었다.
'7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록 넘버들이 펑크와 뉴 웨이브에게 조차 밀리며 설 자리를 잃어갈 무렵,
마크 노플러는 일렉트릭 기타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낮은 음의 스토리 송을 읊어댔다.
그의 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Sultans Of Swing〉은 빌보드 싱글 차트 4위까지 올라 갔다.
이제 F.M. 록을 지킬 사람들은 롤링 스톤즈나 로드 스튜어트가 아니었다.
모든 노장 가수들도 디스코 풍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상황에서 다이어 스트레이츠 같은 그룹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들은 블루스와 컨트리의 영향을 받은 은근한 맛의 음악을 연주했고, 노랫말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인 밥 딜런풍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온통 춤곡 일색인 차트에 깔끔한 연주와 희망적인 노랫말이 등장한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결국 이들의 데뷔 앨범은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다.
단 하나의 싱글 히트곡으로 이 정도의 성공을 거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이 앨범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좋은 곡들을 많이 담고 있다.
우리 나라의 팬들은 〈Sultans Of Swing〉만을 기억하겠지만, 다이어 스트레이츠는 전형적인 앨범 아티스트이다.
이건 정말인데... 그들의 모든 앨범에는 버릴 곡이 단 한 곡도 없다.(김우석)
NO.46『Surrealistic pillow』(67)--Jefferson Airplane
'67년 6월,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의 시작을 알리게 된 계기를 이룬 대규모 록 공연인 몬트레이 팝 페스티발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어 폭발적인 지지를 얻었던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두 번째 앨범 「Surrealistic Pillow」가 록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의는 일반적인 평가 이상이다.
반전과 평화, 사랑과 자유가 최상의 가치일 수 있었던 시대,
젊음의 모든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 부을 수 있었던 그 때에 개인 또는 집단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 방식으로서
록 음악이 지닌 가능성을 알아 본 선각자들은 하나의 커다란 음악적 조류를 형성하게 되는데,
미국 샌프랜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움직임의 선두에 선 인물들에 마티 볼린, 폴 캔트너, 그리고 그레이스 슬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크 록 성향의 평범한 데뷔작 이후 그레이트 소사이어티(Great Society) 출신의 여성 보컬리스트 그레이스 슬릭의 가입이 제퍼슨 에어플레인에게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닥치게 될 싸이키델릭 시대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본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곡은 역시
몬트레이 페스티발에서 가장 큰 환호를 받았던 샌 프랜시스코 사운드의 걸작 〈Somebody To Love〉와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환각 상태에 관한 〈White Rabbit〉-영화 〈플래툰〉에서도 들을 수 있는-등 그레이스의 그레이트 소사이어티 시절의 두 곡이지만,
그 외에 마티 몰린의 나른한 보컬로 펼쳐지는 몽롱한 〈Comin' Back To Me〉와 포크적인 바탕 위에서 꿈결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짧은 기타 연주곡 〈Embryonic Journey〉등도 빼놓을 수 없는 곡들이다.(김경진)
NO.47『Golden records Vol. 1』(58)--Elvis presley
'56년부터 '58년까지 엘비스가 광풍을 일으키던 시절의 주요 히트곡을 망라한 앨범.
그의 '로큰롤 황제'로의 등극을 만방에 고한 앨범인 동시에 '로큰롤의 위대한 승전보'이기도 하다.
엘비스의 로큰롤은 결코 안전 운행이 아닌, 엄청난 기존 제도권의 공세를 딛고 일어선 전리품이다.
또한 당시의 대중음악인 프랭크 시나트라의 스탠다드 팝과 샅바 싸움에서도 이겼다.
스탠다스 팝과의 타이틀 매치를 승리로 이끈 첫 번째 요인은 격정적인 음악을 열망하는 젊은층의 욕구였다.
아버지와 함께 스탠다드를 들어야 했던 '몰개성'의 청춘들은 (Heartbread Hotel), (Hound Dog),(Jailhouse Rock)으로 마침내 자신들만의 음악을 소유하게 되었다.
두 번째 요인은 무엇인가? 전적으로 엘비스의 자질이었다.
스탠다드 진영에선 로큰롤 가수들이 노래를 못한다고 힐난했지만 전혀 그게 아니었다.
엘비스는 스탠다드의 '음정'보다 더 가치있는 '음색'을 타고났다.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 탤런트 스카우트 담당자들은 고유의 음색을 지닌 가수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Hound Dog), (Don't Be Cruel)을 듣고 눈을 흘기던 기성 세대들은
(Love Me) , (Love Me Tender) , (I Want You I Need You I Love you)에서 발휘된 음색에 감탄했다.
그리고 백인이 흑인의 감정을 소화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것이 록큰롤이었다.
시로 엘비스는 목소리로 흑인 블루스와 백인 컨트리의 융합인 로큰롤의 정체를 밝혔다.
'50년대의 사운드 트랙. 이 앨범이 없으면 로큰롤의 진화 과정을 알도리가 없다.(임진모)
NO.48『The Michael Schenker Group--M. S. G.
마이클 셴커의 앨범이 이 리스트에 올라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유력한 단서 중 하나이다.
신의 경지로까지 추앙되고 있는 이웃 일본에서의 분위기가 우리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마이클 셴커의 연주가 정중동의 미학에 길들여진 우리의 취향에 정확히 합치된다는 점에 있다.
특히, 경쾌한 리프 패턴과 서정적인 멜로디의 드라마틱한 배치에 있어서 마이클 셴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심미안을 타고 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와 를 보라!) 크라이베이비를 사용한 독특한 사운드 메이킹과 메트로놈처럼 정확한 리듬감 역시 마이클 셴커의 장점이다.
사실, 이 앨범은 록 역사에 가시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보기에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앨범은 -'겸손한 마이스터의 힘있는 작품'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매니어들에게는 여전히 존경받을 만한 작픔으로 유효하다.(박은석)
NO.49『Remain in light』(80)--Talking heads
토킹 헤즈의 네 번째 앨범 「Remain In Light」의 위대함은 항상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리더 데이빗 번의 호기심과 창의력에 있다.
항상 지적인 밴드로 불리우는데 싫증난 번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이 앨범은 아프리카의 토속 리듬과 여러 부족들의 전설에 바탕을 둔 아프리카적 정서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다.
이처럼 독창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내는데 기여한 또 하나의 인물은 이 앨범의 프로듀서이며 토킹 헤즈의 초창기부터 번과 호흡을 맞춰 온 브라이언 이노이다.
그는 작곡과 편곡, 기타를 제외한 대부분의 악기 연주에서 특유의 음악적 역량을 과시하고 있다.
「Remain In Light」의 전체적 사운드는 아프리카 전통 음악에 근거해 멜로디에 의한 코드 체인지에 의존치 않고 대담한 반복 리듬을 고집하고 있다.
이렇게 탄생된 사운드는 대단히 펑키(Funky)하고 댄스적이다.
대부분의 실험적 음반이 상업적 성공과 연결되지 않는데 반해 이 앨범은 빌보드 팝 앨범 차트 19위까지 진입하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히트곡 을 비롯, 수록곡 대부분의 가사는 상당히 철학적이다.
한 마디로 「Remain In Light」은 '제3세계 음악'의 중요성을 크게 일깨워준 기념비적 앨범이다.
폴 사이먼의 「Graceland」나 스팅의 「The Dream Of The Blue Turtles」등이 모두 이 앨범에 큰빚을 지고 있다.(이무영)
NO.50『Led Zeppelin Ⅱ』(69)--Led Zeppelin
'헤비 메탈의 형식미를 완성시켰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레드 제플린의 2번째 앨범.
'예술지상주의'가 레드 제플린의 음악 행로를 초지일관 관통하고 있는 예술적 모토-동시에 록 음악이 중요한 문화적 실천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이긴 했지만, 그 지칠 줄 모르는 탐미주의는 사실상, 이 음반으로부터 출발한다.
블루스에 기반을 두었던 데뷔 앨범과는 달리, 이 앨범을 분기점으로 레드 제플린의 하드 사운드, 헤비 블루스가 본격화 되었다.
특히 이 앨범이 구현하고 있는 각 포지션의 연주 기법과 구성, 그리고 그 기재들은 헤비 메탈 사운드를 만들어 내는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남게 된다.
때문에 '70년대의 하드 록 역사의 정중앙을 관통한 가장 중요한 앨범 가운데 한 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 록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50만장의 판매고를 올린 이 앨범은 그러나 펑크 진영으로부터 '부르조아, 엘리트 록'으로 비판을 받으며, 이른바 그 '처단대상'에 오르는 명암이 교차하기도 했다.
로큰롤의 가장 전형적 리프와 구성미를 보여주고 있는 와 어쿠스틱 분위기 물씬한 , , 지미 페이지의 파워코드의 리프가 멋진 , 존 보냄의 파워 드러밍이 일품인 은 이 앨범의 빛나는 트랙들이다.
로큰롤과 블루스, 어쿠스틱 사운드가 뒤섞인 하드 록의 역동적 감각이 가득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 앨범의 견고함은 많은 부분, 천재적인 편곡자로서 밴드의 숨은 구심점 역할을 했던 베이시스트 존 폴 존스의 몫이다.(박신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