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교황의 최고권과 쇠퇴>
중세 시칠리아 전쟁 :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 저녁 기도>
이는 1282년 이른바 ‘시칠리아 만종(晩鐘) Sicilian Vespers’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베르디 작곡이며, 유젠 스크리브 Eugène Scribe와 샤를 뒤베이리에 Charles Duveyrier가 대본을 썼다. 1855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곧 다시 이태리어 대본으로 이탈리아 파르마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시칠리아인들은 부활절 저녁 종소리를 기점으로 일제히 봉기하여 프랑스인들을 학살하고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는 단지 프랑스와 시칠리아의 전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황권 등 중세 주요 권력들이 개입된 사건이었다. 이후 교황권의 쇠퇴로 이어진다.
1. 역사적 배경
당시 시칠리아라고 하면 현재 시칠리아 섬만이 아니라 나폴리 이하의 이탈리아 남부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아래 지도 참조). 시칠리아 왕국은 원래 노르만 세력이 이슬람을 물리치고 확보한 것이지만, 이후 신성로마제국(독일) 황제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교황은 시칠리아 왕국을 교황권에 배속시키고 싶어하였으며 이후 시칠리아를 둘러싸고 교황과 황제의 치열한 다툼이 전개된다.
영어 위키 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Norman_conquest_of_southern_Italy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하면서 사실상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끝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인 만프레드가 시칠리아의 권력을 계승하고자 하였으나, 교황이 개입에 나섰다. 교황은 프랑스 왕가를 움직였다.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Anjou)의 샤를(Charles)에게 시칠리아 왕위계승권을 부여하였다. 샤를은 군대를 동원하며 만프레드를 제압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 콘라딘 Conradin이 반격해 보았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했다(브라이언 타이어니/시드니 페인터, 서양중세사, 이연규 역, 집문당, 2002, 389쪽). 이렇게 하여 시칠리아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지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는 아라공(현 스페인 바르셀로나 지역)의 페드로 3세 Pedro III de Aragón를 분노케 하였다. 그는 만프레드의 딸, 즉 프리드리히 2세의 손녀와 결혼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샤를은 시칠리아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지중해 정복이라는 또 다른 황제의 꿈을 꾸었다. 그리하여 비잔틴 제국을 점령하기 위하여 베네치아와 동맹을 체결하였다(브라이언 타이어니, 서양중세사, 469쪽). 이는 당연히 비잔틴 제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비잔틴 제국은 프랑스의 지배에 저항하는 시칠리아인들을 후원하고, 아라공 페드로 3세의 군비증강을 도왔다(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한정숙/김경연 역, 까치, 1999, 380쪽)
한편 샤를은 지중해 패권 전쟁 준비를 위하여 시칠리아인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물렸다. 그리고 프랑스 지배자들은 시칠리아인들을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모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칠리아인들의 반란의 기운은 무르익어갔다. 1282년 부활절 저녁기도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봉기가 시작되었다.
그 봉기의 주모자는 프로치다 Procida로 알려져 있다. 오페라 극중 인물과 같은 이름이다. 프로치다는 원래 의사출신이나 외교적 역량이 뛰어났으며 비잔틴 황제 그리고 아라공 페드로 3세의 지원을 받으며 반란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오스트로고르스키, 비잔티움 제국사, 381쪽).
2. 오페라의 내용과 음악
오페라의 내용은 위와 같은 ‘시칠리아 만종’ 역사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작가의 상상력에 의하여 가족이야기 및 사랑이야기가 가미되었다. 프랑스 군인들은 고압적이고 무례한 태도를 보이고 시칠리아인들의 불만은 고조되어 간다. 독립운동가 프로치다가 해외 망명에서 돌아와 투쟁을 조직화한다. 엘레나와 그 연인 아리고도 저항에 동참한다. 시칠리아 총독 주재의 무도회가 예정되고 프랑스 인들은 시칠리아 여성들을 강제로 납치하여 무도회로 향한다. 엘레나, 아리고, 프로치다는 무도회에서 시칠리아 총독 살해를 기획한다. 그러나 아리고는 총독의 잃어버린 아들이었음이 밝혀진다. 아리고는 번민 끝에 총독 살해를 저지하게 된다. 총독은 반란자들을 체포하고 처형을 지시한다. 그러나 아들 아리고의 호소에 모두 사면하고 아리고와 엘레나의 결혼식 준비를 명한다. 총독은 엘레나와 아리고의 결혼으로 시칠리아의 평화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프로치다 등 저항세력은 결혼식의 종소리를 신호로 총 봉기를 기획한다. 엘레나는 끔찍한 운명의 갈림길에서 결혼식장에 들어가길 주저하나, 총독은 예식을 강행한다. 결국 종소리가 울리고, 시칠리아인들의 무자비한 학살이 시작된다.
소개할 아리아는 오페라 마지막 결혼식 장면에서 엘레나가 하객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시칠리아의 평화를 기원하는 노래이다.
https://youtu.be/Zdp-nV-0RHI
Mercé, dilette amiche(고맙습니다. 친애하는 벗들이여) : 번역 정태욱
아래 가사는 http://www.aria-database.com/search.php?individualAria=527 의 영어 버전에 의존하였습니다. 위의 영상 자막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렇게 아름다운 꽃들을 선물해 주다니. 이 선물은 친구들의 순정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사랑의 결합이란 얼마나 행운인가요. 신부 들러리들이 되어 주신다면 행복한 서약이 제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 예, 예. 소중한 꿈, 달콤한 황홀! 내 심장은 지금 새로운 사랑에 뛰고 있습니다. 나는 부드러운 공기를 호흡하고 감각은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오 나의 시칠리아 고국, 조용한 햇살이 밝게 빛나는, 너무 많은 끔찍한 복수가 너의 가슴에 눈물을 새겼구나. 희망을 품자, 시칠리아여 그 동안 겪어 온 고통을 잊어버리자. 내 오늘 기쁨의 날이 시칠리아 너의 영광의 날이 되길.
꽃들의 선물, 감사합니다. 아, 예, 예. 소중한 꿈, 달콤한 황홀! 내 심장은 미지의 사랑에 뛰고 있습니다. 나는 부드러운 공기를 호흡하고 감각은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나의 감각은 소용돌이 치고 있습니다. 내 심장은 미지의 사랑에 뛰고 있습니다. 내 심장은 기쁨으로 뛰고 있습니다. 내 감각은 황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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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후의 전개과정
봉기가 성공한 후 시칠리아 인들은 시칠리아 섬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으나, 교황은 승인하지 않았다. 한편 샤를 왕은 이탈리아 본토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재침을 기도하였다. 이에 시칠리아인들은 아라공의 페드로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페드로는 군대를 이끌고 왔으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교황은 그에 격분하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프랑스 국왕 필립 3세에게 아라공을 정벌할 것으로 명하였다. 프랑스 필립 3세는 그 명을 수행하고자 아라공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시칠리아는 아라공 페드로 3세의 지배가 공고해졌고, 프랑스 앙주의 샤를은 이탈리라 본토 남쪽 지역만(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4. 교황권의 쇠퇴
시칠리아 만종 사건 교권과 속권의 관계에서도 하나의 분수령과 같은 사건이었다. 중세 전성기를 구가하던 교황은 시칠리아 지배에 실패하였고, 이후 급격한 쇠퇴의 시기로 접어든다.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권에 대한 교황의 간섭 그리고 아라공의 페드로 3세를 징벌하기 위한 전쟁 동원 등 교황의 야욕은 오히려 그 자신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었다. 페드로 3세에 대한 전쟁은 소위 ‘마르티누스 십자군’이라고 불린다. 즉 교황 마르티네스가 성전의 이름으로 선포한 전쟁이었다. 중세 십자군은 교황의 전략적 동원으로 악용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교황의 세속적 이해관계와 세속 군주들과의 이전투구 속에서 교황은 더 이상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존중받을 수 없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끊기면서 교황과 황제의 대결을 주춤했으나 이제 각 나라의 군주들이 교황에 봉사하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프랑스 필립 4세는 교황을 제압하기에 이른다. 앞서 보았듯이 프랑스 필립 3세는 아라공 페드로 3세를 정벌하라는 교황의 십자군 명령에 출정하였다가 목숨을 잃은 바 있다. 아들 필립 4세는 그 전쟁에 종군하면서 부친의 허망한 죽음과 프랑스인들의 고역을 실감하였을 것이다. 필립 4세는 프랑스 내 교회와 수도원 재산 그리고 성직자들에 대하여 교황에게 양보할 의사가 없었다. 필립 4세는 교황과 정면대결을 벌였으며,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수치 속에서 사망하였다. 필립 4세는 그에 그치지 않고 교황청을 아예 프랑스 영향권의 아비뇽으로 가져온다. 이로부터 소위 교황의 ‘아비뇽 유수(幽囚)(Avignon Papacy:1309-1376)가 시작된다. 아비뇽 유수 동안 교황은 사실상 프랑스 군주의 하수인에 불과하였으며 교황청의 부패는 더욱 심해졌으며, 각 나라마다 종교개혁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