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24 / 고린도전서 9:1-14/ 2015.11.18 / http://lamp.kr/lamp-sermon/?p=10168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앞의 얘기는 지식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8장은 우상제물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를 다루었고 그 앞에 서두에서는 분파를 다루었습니다. 분파, 시집 장가가는 것, 우상제물 그리고 오늘 9장에 오면 이제 나만 아무 보상없이 희생과 사명만 촉구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넘어옵니다. 이것은 앞에 있었던 지식의 문제에서 우상제물은 원래 제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없는 거니까, 먹어도 된다와 우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네가 우상제물이 실제로 우상제물일 수가 없다고 먹는 그 지식과 어떤 수준 높은 이해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여러 신 중의 하나를 섬기는 것이구나` 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 그 자유를 삼가라에서, 앞에 8장 9절부터 보시면,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에서 이어지는 겁니다. 나는 그래서 내 마땅한 권리들을 여러개 양보하고 있다 ,그 얘기입니다. 내가 사도이고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당연히 내가 하는 일에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실아니냐? 그리고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내가 내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러나 내가 이 모든 일을 삼가하는 것은 혹시라도 어떤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오해를 일으킬까봐 그런 일들은 나 전부 안한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다보면 무슨 문제가 되냐하면,
신앙의 고급한 경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를 권리로만 이해하지 않고, 책임으로 이해해야되는 자리로 가야되는 것과 진정한 내용이 없는 것은 마지막의 가치가 다만 지극함과 치열함으로 확인되는 것과 혼돈을 하게 됩니다! 이 서두를 알아먹는 사람이 없어서 그 다음부턴 헤매곤 합니다. 그죠. 자유를 유보하는 스스로 절제하는 것과 우리 무속신앙에서 지성이면 감천, 정한수 떠놓고 밤새워 기도하기,, 라는 이런 지극함과 치열함이 다이고,
실제내용, 그 신앙의 대상이 요구하는 진정한 내용과 방향 목적지와 무관한, 우리끼리 정한 최고의 가치, 희생,,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 됩니다. 희생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래서 희생의 끝은 거의 자학의 자리까지 갑니다. 우리 많이 오해하는 철야기도, 금식기도가 그렇습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항복시킬려고 드는 것은 하나님이 항복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확인이 될 뿐이죠. 뭐 한 것 같죠,, 옛날에는 이런 표현 자주 썼는데, 그 시대에는 그걸 그런 표현이 그 시대에서는 최고의 표현이었고, 지금은 거기를 넘어와야 됩니다. `마음이 컬컬해서 성전에 나왔노라고,,` 굉장히 막걸리 표현같지 않습니까?
`속이 컬컬해서,, ` 그런 표현들이 옛날에는 그걸 해소하는 것이 뭐였냐하면, 눈물과 회개였다고요. 제가 자주 회개를 예를 드는 이유가 회개가 더이상 씻을 것이 없도록 껍질을 벗긴 것으로 만족하는 자기확인이어서는 회개가 아니라 그랬죠. 회개란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은 여기를 가자 그러고 거기를 이렇게 가자 그러는데, 나는 거기말고 다른데를 가자고 그랬고 내 식으로 가자고 그런 거가 하나님의 목적지와 하나님의 길에 자기를 항복시키는 것을 회개라 그러지 자기 시원한 것을 회개라 그러지 않습니다!! 오해하시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거, 제발 교회나와서 공기도하실 때 회개 좀 하지 마십시요. 지난 일주일동안 말씀대로 못 살았는데,, 그 말 좀,, 그 말을 삼십년간이나 듣고 있는데 아직도 그 기도를,, 그런 하면 어떡해요?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여러분 다 그렇잖아요? 마지막 축도하고 송영할 때 쏼라쏼라쏼라하고 일 주일 것 얼른하고 가지마시고, 그때는 여운을 가지셔야죠. 예배를 본 여운,, 그런 데서 틀리면 그 다음을 갈 수가 없어서 하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쉽게, `나라고 왜 아내를 대리고 다닐 자유가 없겠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의미를 알아야 돼요.
앞에선 뭐라고 그랬었냐하면 시집가지 마라까지 나왔었잖아요. 혼자 살아라!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집중하여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만 섬기는데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예요. 혼자 살면 전력을 기울여서 하나님만 위하면 된다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살아서 묶이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신앙적인 경우를 구성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혼자사는 게 훨씬 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께 더 집중한다 그렇게만 얘기하지 마시고, 얼마나 더 마음이 녹아내리느냐는 결혼한 측이 열배는 더 녹아내립니다! 그렇죠! 혼자사는 것은 쏠로를 하는 것입니다. 저가 하다 말아도 되고 끝났다해도 되고 옥타브내려서 해도 되지만, 화음을 하는 이중창이 되면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 각각의 경우가 사도바울은 자기가 간 길이 충분히 충분히 하나님을 위하여 또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일로써 충분히 항복하고 있는 고백이고, 동일한 고백이 묶인 곳에도 충만합니다. 저의 인생에서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으면 더 깊은 자리에 못오는 것이 많습니다! 자식 때문에 참는 것, 자식 때문에 비굴해지는 자리까지 비로소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거기까지 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없으면 거기까지는 비난과 배신과 누명과 그 모욕까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기독교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느냐? 그렇게 묻는 건 바보같은 질문입니다. 그건 천국가서 물어보기로 하고, 이미 있으니까, 있는 우리의 존재와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의 상상보다 상상할 수 없이 크고 깊게 대접하고 요구하고 일하고 계시다! 에 대해서 항복해야 됩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모든 제한되고 그 마음껏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모든 조건이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바울의 이 `내가 모든 것을 양보하여 가장 크게 하나님과 복음을 섬길 수 있다` 는 말이 동일하게 들어갈 수 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죠.
세속성이란, 하나님이 없어도 의미와 가치가 생길 수 있다, 라고 얘기하는 게 세속성입니다! 행복이 하나님이 주는 것 아닌 곳에도 행복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게 세속성입니다! 예를들면 겅강, 무슨 사랑, 무슨 도덕, 명예, 지위 같은 것으로 행복이 만들어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게 세속성입니다. 그건 세상이 말하는 거짓말입니다. 그건 뭐 당해보시면 압니다. 안심, 평화, 정의,,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만드시고 가치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채우시고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만드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 말고, 창조주가 의도하고 만드는 것과의 차이 입니다! 하나님 없이 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이 세속성입니다!
그러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싶어서 여기 끌고들어왔냐하면, 금욕이라는 것은 방탕한 것을 사양하는 게 금욕이 아닙니다! 이 오해들을 하는거죠. 금욕주의가 되면서 먹을 것 안먹고, 지금 바울 식으로 얘기하면, 자기의 권리를 안쓰는 것들이 금욕적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그냥 보편타당한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적이라는 건 하나님 없이, 하나님 없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금욕입니다!! 하나님 없이 즐거움을 거부하는 것이 금욕적인 겁니다!
우리는 금욕이 이렇게 자신의 권리를 사양하고 욕심을 거부해서 어디로 갈 수 있느냐하면, 현실과 컨텍스트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산기도를 가거나 수도원을 가는 행위들이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한 방법이 됩니다! 내가 집중해야될 기도제목과 집중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하는 것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도망가는 겁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 말대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도망을 가는데, 도망을 가면 현장이 없으면 그릇없이 내용에 담길 수 없는 것과 똑같은 형상이 생깁니다.
금욕적이라는 말을 이런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 현장에서 도망가는 것에다가 쓰지마시고, 그런 현장 속에서 어떻게 내용을 담아내는 싸움인가로 끌고오셔야 된다는 것!! 그러기 위하여 나 스스로 채우고 나에게 채워지는 것을 나누기 위하여 (어떻게 나누죠?) 그 전단계에 있는 자들이 격려를 받고 보호를 받게하기 위하여 짐을 더 지는 자리까지 가는,, 그래서 더 분명하게 현장에 있어야되는, 그런 것으로써 너희 자유가 믿음이 어린 자들에게 올무가 되지 않도록 양보해라! 절제해라!가 성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사람들의 유교유산 속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비난이 뭐냐하면, `교만해` 이것입니다. 교만해,, 그 말에는 모두가 꼼짝을 못하죠. 교만하다는 것은 반대말로 겸손과 이렇게 대조시켜 보시면 `아니야, 다 주께서 하신 일이지` 이렇게 말함으로써 완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리가 자기만을 위하여 있지않고, 이웃과 연결되어 있는데, 내가 누구의 도움을 받고 여기에 왔듯이, 내가 도움을 주고 그들을 붙들고 있어야되는 자리라는 것을 이해하여 자기의 짐을 것만으로가 아니라, 옆사람을 위하여 더 짊어질 수 있는게 겸손입니다!! 그 자리를 도망가지 않는 것! 내 옆에를 비난하고 비교해서 자기를 확인하지 않는 것! 이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은 분리되어 절대적 비교를 하자고 덤비는 겁니다!! 누가복음 22장에 가시면,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이스라엘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시몬아, 보라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앞에 있는 시험 얘기를 지난 설교에서도 인용을 했었습니다. 이런 나의 모든 시험은 뭐였죠? 세상이 여전히 권력을 가진 조건 속에 들어오심이었습니다! 그가 창조주이신데 피조물들이 오히려 권력을 갖고 있어, 저들이 예수를 협박하고 힘으로 도전하는 거스러는 자리에 예수께서 들어와 그 세상의 거스럼과 고난과 피해를 입는 자리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게 섬기는 겁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다만 고난을 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깊이를 못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 우리가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생을 맺거나 생명을 만들거나 진리를 만들거나 은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제거할 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갖다 쓰시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어디로 끌고가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거다` 까지 끌고 갑니다! `시몬아,시몬아, 보라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러니 베드로가 해야할 일은 뭐였죠? 배신의 자리까지 가보는 거였죠! 왜 배신을 했죠? 진심은 있으나 실력이 없었죠! 진심은 있으나 실력이 없는 것,, 그 자리에 안가보면 진심도 없고 실력이 없는 자를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실력이 없는 자를 진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몰고가는 자는 자기도 실제로는 이를 겪어보지 못한 자입니다! 말로 할 때는 다 할 수 있습니다 당하면 못합니다! 그게 중요하죠! 진심과 명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게 사람을 키워야죠! 사람을 거기까지 가게 만들어야죠! 누가 붙들고 누가 기다리고 누가 편을 들어줘야 올 것 아닙니까!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우리가 늘 후회하는 것은 과거를 만회하려고 그런다! 고 그랬죠! `그때 철이 있었으면 다시 중학교로 돌아가면 전교에서 1등하고 대한민국에서 1등힐 갓깉지 않습니까? 그러나 일등이 해결이 아니라, 그 못한 것이 지금 나에게 일을 하고 있어야죠! 사람은 철이 늦게든다,, 그때는 모른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소리 하는가? 그때는 모른다! 그걸 여러분이 지금 넘어와 줘야죠! 그건 안하고 명분을 살리기 위하여 모든 새싹을, 자라나는 새싹을 뽑아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무서움은 앞선 자들이 뒤따라오는 자들을 위하여 보호막이 되거나 도움이 되거나 보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분만 시퍼렇게 살고, 앞선 자들이 비난 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식의 시대를 겪어오느라고 교회사 내내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 건 빨리 배우는데, 뭐가 정답인지 빨리는 배우는데, 그렇게 하는 건 평생이 거리는 겁니다! 여러분 나이들면 제일 달라지는 게 뭐죠? 나이들면 무슨 책임이 생기느냐하면 결별하지 않게, 나뉘이지 않고 붙들어 매는게 나이들어서 가지는 책임입니다! 자식들이 싸워도 갈라서지는 않게 만드는게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쪽 편도 들고 이쪽 편도 들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둘이 갈라서지 않게, 부모 죽으면 둘이 갈라설 겁니다. 그게 가족에서만의 얘기가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렇고 시대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나라에서도 그런 겁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가 어디에나 있고, 자기가 어떤 고급한 경지까지 오기 위하여 올라오는 길이 서로 다릅니다. 백운데 올라가는 길이 제가 알기로도 세 길이 있습니다. 우이동에서 올라가는 길, 정릉에서 올라가는 길, 세금정에서 올라가는 길, 유명한 세가지 등반로인데, 각각 길이 다르죠. 동해란 백운대에서 만납니다. 그게 한군데로 가고 있다는 걸 누군가 알아야죠! 그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기회를 줘야 됩니다. 어떤 기회? 시행착오의 기회를 줘야 됩니다! 거기서 어느 게 더 낫냐라고 하는 것은 아까 얘기한 것같이, 바울같이, 솔로로 하는게 나은지, 이중창으로 하는 게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중창 팬입니다. 왜요? 거기엔 화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했던 테너 가수이름이 뭐죠? 빠빠로티, 그가 암만 잘해도 화음을 혼자 넣을 수는 없습니다! 빠빠로티는 알고 바울은 모른다는 얼굴이죠! 성경이 뭘 증언하고 그 증언이 어떻게 생생하게 우리의 현실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름 너머의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하는 일, 우리에게 요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걷는 현실이라 말이죠! 보편적인 현실, 각각의 경우, 그래서 여러분이 추구하는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뭘 추구하는가 보십시요! 뭘 답을 얻는가? 바울마저도 이게 최선의 길이라고 할 때는 바울이 배타적 유일한 길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간 길에 대한 백 퍼센터의 만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각각이 그렇습니다! 내가 상대적으로 더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러니 금욕, 희생, 헌신, 이런 단어들을 살리지 마시고, 그런 것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실제적인 각각의 인생에서 보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자기가 묶이며, `나는 이게 최고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 라는 말이 나와야 맞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만 못했어, 나는 어거스틴만 못했어,,` 그딴 소리 하는 거 아닙니다. 우리 각각을 위하여 그들이 있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유명한 선언을 하는데 모두가 외면하고 간과하는 표현입니다.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육의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아볼로는 무엇이며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무것도,, 어느 자리에서 제가 목사들 모임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자리에서,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서 자신을 입장을 변명하고 또 고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답을 했죠. `그 유명한 사람들 다 개새끼다!` 그래서 다 뒤집어졌죠. ^^ `너 잘되라고 그 개고기 잡아서 먹인게다. 너 먹어라. 그 개 지킬려고 너 죽지마라!` 아,,개,,^^ `나와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너를 목적해서 너를 기르고,,` 뒤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가 목적이란다,,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을 언급하여 그 사람이름으로 `네가 걸어야하고 네가 되어야하는 그 책임`을 그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나는 베토벤을 존경해`라는 이름으로 꼬리내리고 숨지말고 회피하지 말고, `네 인생 살아서 너! 하나님이 너한테 만드는 것 되라!` 베토벤은 개새끼고,, ` 그렇게 얘기한 셈이죠! `너 행복하라고 이렇게 개 준거야! 개,, 개,, 야이, 개를 준거야!`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런 추상적인 명사를 대고 명분을 대서 자기의 인생을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처럼 굴지말고, 살아내라니까요!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목적과 대상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믿음의 대상이고 요구하시고 여러분을 위하여 바울을 보내고, 아니 예수를 보낸 사람들 이예요. 여러분이 커고 하나님 앞에 항복을 받고, `난 내 인생이 최고다! 다 나 같기를 바란다!` 라는 감격과 선언을 하지 않고, 누구를 불러 앞세워 숨는 길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 새끼는 개새끼가 되는 거예요. 그럼 누가,,? ^^) 그게 기독교예요!! 알아 들어세요!! 쉬운 얘기, 무슨 물킁한 얘기 갖고 서로 울고,, 그렇게 헤어지는 것을 은혜 받았다, 그러지 않아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최선의 조건으로 내 인생을 준비하셨고! 내가 그 길을 걷는다!` 그렇게 아셔야 되는 거예요! `멋있게 굴어라! 너희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네희에게서 일하는 이가 네 옆에서도 선한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봐라! 얼마나 굉장한가 봐라! 부요한가 봐라! 놀라운가 봐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알아들어시지 않으면 오늘은 유명한 `그 개` 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건 우리 겁니다. 인생과 구원과 믿음은 우리 겁니다. 하나님 다른 데다 핑계대지 말고 우리가 그 승리와 그 영광을 알고 누리고 자랑하고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다시 보는 고린도전서 24 / 고린도전서 9:1-14/ 2015.11.18 / http://lamp.kr/lamp-sermon/?p=10168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앞의 얘기는 지식에 관한 얘기였습니다. 8장은 우상제물 먹는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문제를 다루었고 그 앞에 서두에서는 분파를 다루었습니다. 분파, 시집 장가가는 것, 우상제물 그리고 오늘 9장에 오면 이제 나만 아무 보상없이 희생과 사명만 촉구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넘어옵니다. 이것은 앞에 있었던 지식의 문제에서 우상제물은 원래 제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없는 거니까, 먹어도 된다와 우상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믿음이 약한 형제들이 `네가 우상제물이 실제로 우상제물일 수가 없다고 먹는 그 지식과 어떤 수준 높은 이해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여러 신 중의 하나를 섬기는 것이구나` 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 그 자유를 삼가라에서, 앞에 8장 9절부터 보시면,
9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에서 이어지는 겁니다. 나는 그래서 내 마땅한 권리들을 여러개 양보하고 있다 ,그 얘기입니다. 내가 사도이고 내가 이 일을 하는데 있어서 당연히 내가 하는 일에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실아니냐? 그리고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내가 내 아내를 데리고 다닐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러나 내가 이 모든 일을 삼가하는 것은 혹시라도 어떤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고 오해를 일으킬까봐 그런 일들은 나 전부 안한다,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다보면 무슨 문제가 되냐하면,
신앙의 고급한 경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를 권리로만 이해하지 않고, 책임으로 이해해야되는 자리로 가야되는 것과 진정한 내용이 없는 것은 마지막의 가치가 다만 지극함과 치열함으로 확인되는 것과 혼돈을 하게 됩니다! 이 서두를 알아먹는 사람이 없어서 그 다음부턴 헤매곤 합니다. 그죠. 자유를 유보하는 스스로 절제하는 것과 우리 무속신앙에서 지성이면 감천, 정한수 떠놓고 밤새워 기도하기,, 라는 이런 지극함과 치열함이 다이고,
실제내용, 그 신앙의 대상이 요구하는 진정한 내용과 방향 목적지와 무관한, 우리끼리 정한 최고의 가치, 희생,,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것이 됩니다. 희생하고는 다른 겁니다! 그래서 희생의 끝은 거의 자학의 자리까지 갑니다. 우리 많이 오해하는 철야기도, 금식기도가 그렇습니다. 지극정성으로 하나님을 항복시킬려고 드는 것은 하나님이 항복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확인이 될 뿐이죠. 뭐 한 것 같죠,, 옛날에는 이런 표현 자주 썼는데, 그 시대에는 그걸 그런 표현이 그 시대에서는 최고의 표현이었고, 지금은 거기를 넘어와야 됩니다. `마음이 컬컬해서 성전에 나왔노라고,,` 굉장히 막걸리 표현같지 않습니까?
`속이 컬컬해서,, ` 그런 표현들이 옛날에는 그걸 해소하는 것이 뭐였냐하면, 눈물과 회개였다고요. 제가 자주 회개를 예를 드는 이유가 회개가 더이상 씻을 것이 없도록 껍질을 벗긴 것으로 만족하는 자기확인이어서는 회개가 아니라 그랬죠. 회개란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하나님은 여기를 가자 그러고 거기를 이렇게 가자 그러는데, 나는 거기말고 다른데를 가자고 그랬고 내 식으로 가자고 그런 거가 하나님의 목적지와 하나님의 길에 자기를 항복시키는 것을 회개라 그러지 자기 시원한 것을 회개라 그러지 않습니다!! 오해하시지 않아야 되겠습니다. 거, 제발 교회나와서 공기도하실 때 회개 좀 하지 마십시요. 지난 일주일동안 말씀대로 못 살았는데,, 그 말 좀,, 그 말을 삼십년간이나 듣고 있는데 아직도 그 기도를,, 그런 하면 어떡해요? 정신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여러분 다 그렇잖아요? 마지막 축도하고 송영할 때 쏼라쏼라쏼라하고 일 주일 것 얼른하고 가지마시고, 그때는 여운을 가지셔야죠. 예배를 본 여운,, 그런 데서 틀리면 그 다음을 갈 수가 없어서 하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쉽게, `나라고 왜 아내를 대리고 다닐 자유가 없겠느냐?` 이렇게 얘기하는 의미를 알아야 돼요.
앞에선 뭐라고 그랬었냐하면 시집가지 마라까지 나왔었잖아요. 혼자 살아라!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집중하여 전력을 다하여 하나님만 섬기는데 더 좋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바울의 개인적인 견해예요. 혼자 살면 전력을 기울여서 하나님만 위하면 된다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살아서 묶이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신앙적인 경우를 구성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혼자사는 게 훨씬 쉽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하나님께 더 집중한다 그렇게만 얘기하지 마시고, 얼마나 더 마음이 녹아내리느냐는 결혼한 측이 열배는 더 녹아내립니다! 그렇죠! 혼자사는 것은 쏠로를 하는 것입니다. 저가 하다 말아도 되고 끝났다해도 되고 옥타브내려서 해도 되지만, 화음을 하는 이중창이 되면 그렇게는 못합니다. 그 각각의 경우가 사도바울은 자기가 간 길이 충분히 충분히 하나님을 위하여 또 하나님이 그에게 맡긴 일로써 충분히 항복하고 있는 고백이고, 동일한 고백이 묶인 곳에도 충만합니다. 저의 인생에서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자식이 없으면 더 깊은 자리에 못오는 것이 많습니다! 자식 때문에 참는 것, 자식 때문에 비굴해지는 자리까지 비로소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거기까지 오시는 겁니다! 우리가 없으면 거기까지는 비난과 배신과 누명과 그 모욕까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에 기독교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왜 우리에게 우리를 그렇게 대접하느냐? 그렇게 묻는 건 바보같은 질문입니다. 그건 천국가서 물어보기로 하고, 이미 있으니까, 있는 우리의 존재와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의 상상보다 상상할 수 없이 크고 깊게 대접하고 요구하고 일하고 계시다! 에 대해서 항복해야 됩니다!! 당신이 겪고 있는 모든 제한되고 그 마음껏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모든 조건이 더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바울의 이 `내가 모든 것을 양보하여 가장 크게 하나님과 복음을 섬길 수 있다` 는 말이 동일하게 들어갈 수 있다! 이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죠.
세속성이란, 하나님이 없어도 의미와 가치가 생길 수 있다, 라고 얘기하는 게 세속성입니다! 행복이 하나님이 주는 것 아닌 곳에도 행복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게 세속성입니다! 예를들면 겅강, 무슨 사랑, 무슨 도덕, 명예, 지위 같은 것으로 행복이 만들어질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게 세속성입니다. 그건 세상이 말하는 거짓말입니다. 그건 뭐 당해보시면 압니다. 안심, 평화, 정의,,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만드시고 가치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채우시고 완성하실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만드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 말고, 창조주가 의도하고 만드는 것과의 차이 입니다! 하나님 없이 할 수 있다고 하는 모든 것이 세속성입니다!
그러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싶어서 여기 끌고들어왔냐하면, 금욕이라는 것은 방탕한 것을 사양하는 게 금욕이 아닙니다! 이 오해들을 하는거죠. 금욕주의가 되면서 먹을 것 안먹고, 지금 바울 식으로 얘기하면, 자기의 권리를 안쓰는 것들이 금욕적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그냥 보편타당한 가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금욕적이라는 건 하나님 없이, 하나님 없이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금욕입니다!! 하나님 없이 즐거움을 거부하는 것이 금욕적인 겁니다!
우리는 금욕이 이렇게 자신의 권리를 사양하고 욕심을 거부해서 어디로 갈 수 있느냐하면, 현실과 컨텍스트를 외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산기도를 가거나 수도원을 가는 행위들이 그것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한 방법이 됩니다! 내가 집중해야될 기도제목과 집중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하는 것을 충분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도망가는 겁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 말대로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도망을 가는데, 도망을 가면 현장이 없으면 그릇없이 내용에 담길 수 없는 것과 똑같은 형상이 생깁니다.
금욕적이라는 말을 이런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 현장에서 도망가는 것에다가 쓰지마시고, 그런 현장 속에서 어떻게 내용을 담아내는 싸움인가로 끌고오셔야 된다는 것!! 그러기 위하여 나 스스로 채우고 나에게 채워지는 것을 나누기 위하여 (어떻게 나누죠?) 그 전단계에 있는 자들이 격려를 받고 보호를 받게하기 위하여 짐을 더 지는 자리까지 가는,, 그래서 더 분명하게 현장에 있어야되는, 그런 것으로써 너희 자유가 믿음이 어린 자들에게 올무가 되지 않도록 양보해라! 절제해라!가 성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사람들의 유교유산 속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비난이 뭐냐하면, `교만해` 이것입니다. 교만해,, 그 말에는 모두가 꼼짝을 못하죠. 교만하다는 것은 반대말로 겸손과 이렇게 대조시켜 보시면 `아니야, 다 주께서 하신 일이지` 이렇게 말함으로써 완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자리가 자기만을 위하여 있지않고, 이웃과 연결되어 있는데, 내가 누구의 도움을 받고 여기에 왔듯이, 내가 도움을 주고 그들을 붙들고 있어야되는 자리라는 것을 이해하여 자기의 짐을 것만으로가 아니라, 옆사람을 위하여 더 짊어질 수 있는게 겸손입니다!! 그 자리를 도망가지 않는 것! 내 옆에를 비난하고 비교해서 자기를 확인하지 않는 것! 이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은 분리되어 절대적 비교를 하자고 덤비는 겁니다!! 누가복음 22장에 가시면,
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이스라엘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 시몬아,시몬아, 보라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앞에 있는 시험 얘기를 지난 설교에서도 인용을 했었습니다. 이런 나의 모든 시험은 뭐였죠? 세상이 여전히 권력을 가진 조건 속에 들어오심이었습니다! 그가 창조주이신데 피조물들이 오히려 권력을 갖고 있어, 저들이 예수를 협박하고 힘으로 도전하는 거스러는 자리에 예수께서 들어와 그 세상의 거스럼과 고난과 피해를 입는 자리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게 섬기는 겁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것이 다만 고난을 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문제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정한 깊이를 못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 우리가 해결하기를 원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영생을 맺거나 생명을 만들거나 진리를 만들거나 은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제거할 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갖다 쓰시면 안되는 거죠! 그래서 어디로 끌고가죠? `베드로야,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거다` 까지 끌고 갑니다! `시몬아,시몬아, 보라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러니 베드로가 해야할 일은 뭐였죠? 배신의 자리까지 가보는 거였죠! 왜 배신을 했죠? 진심은 있으나 실력이 없었죠! 진심은 있으나 실력이 없는 것,, 그 자리에 안가보면 진심도 없고 실력이 없는 자를 도울 방법이 없습니다!! 실력이 없는 자를 진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몰고가는 자는 자기도 실제로는 이를 겪어보지 못한 자입니다! 말로 할 때는 다 할 수 있습니다 당하면 못합니다! 그게 중요하죠! 진심과 명분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게 사람을 키워야죠! 사람을 거기까지 가게 만들어야죠! 누가 붙들고 누가 기다리고 누가 편을 들어줘야 올 것 아닙니까!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우리가 늘 후회하는 것은 과거를 만회하려고 그런다! 고 그랬죠! `그때 철이 있었으면 다시 중학교로 돌아가면 전교에서 1등하고 대한민국에서 1등힐 갓깉지 않습니까? 그러나 일등이 해결이 아니라, 그 못한 것이 지금 나에게 일을 하고 있어야죠! 사람은 철이 늦게든다,, 그때는 모른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소리 하는가? 그때는 모른다! 그걸 여러분이 지금 넘어와 줘야죠! 그건 안하고 명분을 살리기 위하여 모든 새싹을, 자라나는 새싹을 뽑아버립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무서움은 앞선 자들이 뒤따라오는 자들을 위하여 보호막이 되거나 도움이 되거나 보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분만 시퍼렇게 살고, 앞선 자들이 비난 밖에 할 줄 모르는 그런 식의 시대를 겪어오느라고 교회사 내내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 건 빨리 배우는데, 뭐가 정답인지 빨리는 배우는데, 그렇게 하는 건 평생이 거리는 겁니다! 여러분 나이들면 제일 달라지는 게 뭐죠? 나이들면 무슨 책임이 생기느냐하면 결별하지 않게, 나뉘이지 않고 붙들어 매는게 나이들어서 가지는 책임입니다! 자식들이 싸워도 갈라서지는 않게 만드는게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쪽 편도 들고 이쪽 편도 들어서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둘이 갈라서지 않게, 부모 죽으면 둘이 갈라설 겁니다. 그게 가족에서만의 얘기가 아니라, 교회에서도 그렇고 시대에서도 그렇고 사회에서도 그렇고 나라에서도 그런 겁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가 어디에나 있고, 자기가 어떤 고급한 경지까지 오기 위하여 올라오는 길이 서로 다릅니다. 백운데 올라가는 길이 제가 알기로도 세 길이 있습니다. 우이동에서 올라가는 길, 정릉에서 올라가는 길, 세금정에서 올라가는 길, 유명한 세가지 등반로인데, 각각 길이 다르죠. 동해란 백운대에서 만납니다. 그게 한군데로 가고 있다는 걸 누군가 알아야죠! 그게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과 기회를 줘야 됩니다. 어떤 기회? 시행착오의 기회를 줘야 됩니다! 거기서 어느 게 더 낫냐라고 하는 것은 아까 얘기한 것같이, 바울같이, 솔로로 하는게 나은지, 이중창으로 하는 게 나은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중창 팬입니다. 왜요? 거기엔 화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했던 테너 가수이름이 뭐죠? 빠빠로티, 그가 암만 잘해도 화음을 혼자 넣을 수는 없습니다! 빠빠로티는 알고 바울은 모른다는 얼굴이죠! 성경이 뭘 증언하고 그 증언이 어떻게 생생하게 우리의 현실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름 너머의 얘기를 하는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하는 일, 우리에게 요구하고 우리가 실제로 걷는 현실이라 말이죠! 보편적인 현실, 각각의 경우, 그래서 여러분이 추구하는게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뭘 추구하는가 보십시요! 뭘 답을 얻는가? 바울마저도 이게 최선의 길이라고 할 때는 바울이 배타적 유일한 길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간 길에 대한 백 퍼센터의 만족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각각이 그렇습니다! 내가 상대적으로 더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러니 금욕, 희생, 헌신, 이런 단어들을 살리지 마시고, 그런 것들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실제적인 각각의 인생에서 보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자기가 묶이며, `나는 이게 최고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걷겠다!` 라는 말이 나와야 맞는 것입니다! `나는 바울만 못했어, 나는 어거스틴만 못했어,,` 그딴 소리 하는 거 아닙니다. 우리 각각을 위하여 그들이 있는 겁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 유명한 선언을 하는데 모두가 외면하고 간과하는 표현입니다.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육의사람이 아니리요 5 그런즉아볼로는 무엇이며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사역자들이니라
6 나는 심었고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무것도,, 어느 자리에서 제가 목사들 모임의 질문을 받고 대답을 하는 자리에서,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들어서 자신을 입장을 변명하고 또 고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렇게 답을 했죠. `그 유명한 사람들 다 개새끼다!` 그래서 다 뒤집어졌죠. ^^ `너 잘되라고 그 개고기 잡아서 먹인게다. 너 먹어라. 그 개 지킬려고 너 죽지마라!` 아,,개,,^^ `나와 아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너를 목적해서 너를 기르고,,` 뒤에 이렇게 되어있어요.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너희가 목적이란다,, 유명하고 위대한 사람을 언급하여 그 사람이름으로 `네가 걸어야하고 네가 되어야하는 그 책임`을 그 사람의 이름을 넣어서 `나는 베토벤을 존경해`라는 이름으로 꼬리내리고 숨지말고 회피하지 말고, `네 인생 살아서 너! 하나님이 너한테 만드는 것 되라!` 베토벤은 개새끼고,, ` 그렇게 얘기한 셈이죠! `너 행복하라고 이렇게 개 준거야! 개,, 개,, 야이, 개를 준거야!`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런 추상적인 명사를 대고 명분을 대서 자기의 인생을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책임을 다한 것처럼 굴지말고, 살아내라니까요! 여러분 스스로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목적과 대상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고 믿음의 대상이고 요구하시고 여러분을 위하여 바울을 보내고, 아니 예수를 보낸 사람들 이예요. 여러분이 커고 하나님 앞에 항복을 받고, `난 내 인생이 최고다! 다 나 같기를 바란다!` 라는 감격과 선언을 하지 않고, 누구를 불러 앞세워 숨는 길로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 새끼는 개새끼가 되는 거예요. 그럼 누가,,? ^^) 그게 기독교예요!! 알아 들어세요!! 쉬운 얘기, 무슨 물킁한 얘기 갖고 서로 울고,, 그렇게 헤어지는 것을 은혜 받았다, 그러지 않아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 최선의 조건으로 내 인생을 준비하셨고! 내가 그 길을 걷는다!` 그렇게 아셔야 되는 거예요! `멋있게 굴어라! 너희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네희에게서 일하는 이가 네 옆에서도 선한 사람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봐라! 얼마나 굉장한가 봐라! 부요한가 봐라! 놀라운가 봐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알아들어시지 않으면 오늘은 유명한 `그 개` 됩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건 우리 겁니다. 인생과 구원과 믿음은 우리 겁니다. 하나님 다른 데다 핑계대지 말고 우리가 그 승리와 그 영광을 알고 누리고 자랑하고 감사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