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국 운동
청(淸)나라 말기 홍수전(洪秀全)과 농민반란군이 세워 14년간 존속한 국가(1851∼1864)와 그 운동을 말한다. 청나라에서는 이들은 변발을 자르고 머리를 길렀으므로 장발적(長髮賊) ·월비(豆匪) ·발역(髮逆) 등으로 불렀다.
일반적인 배경으로는 왕조 말기적인 현상, 즉 중앙과 지방의 행정이완, 관료와 군대의 부패, 지주제 등 경제적 모순의 심화, 자연재해의 빈발 등과 이로 말미암은 보편적인 사회적 무질서현상을 들 수 있다. 특히 청 말기에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경작 면적이 거의 늘어나지 않았고 아편유입의 격증에 따른 은의 해외유출로 은가(銀價)가 등귀함으로써, 농민의 가계가 더욱 악화되어 향촌사회 내부의 불안과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태평천국운동의 진원지인 광시 성[廣西省]은 이런 일반적 현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더욱이 지리적 특성 때문에 종족적·사회적·경제적으로 더욱 복잡했고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충격여파가 크게 미치고 있었다. 산악지역의 광산노동자와 숯장이 등은 독자적인 무력집단을 형성했고, 광저우[廣州] 삼각지의 해적들은 내륙지방의 비밀결사 천지회(天地會)와 연결되어 있어 치안유지상 문제점이 많은 지역이었다.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전통적으로 대외무역의 독점을 누리던 광저우와 연결된 교역로가 갑자기 불황에 빠지면서 실업자가 된 운송업자와 전쟁 후 해산된 지방군으로 인해 사회불안의 요소가 배가되었다. 게다가 1840년대에 영국 해군에게 쫓겨 광둥[廣東]과 광시의 내륙으로 들어온 해적들은 천지회의 지도하에 광시 성 내의 수로에서 노략질을 함으로써 사회불안을 가중시켰다. 광시 성의 불안한 상황은 청조를 타도하고 명조(明朝)를 회복한다는 목표를 가진 정치적 비밀결사 천지회의 반란으로 더욱 심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 독특한 방언과 관습을 보유하면서 장기간에 걸쳐 광둥 성으로부터 유입되어온 커자[客家]와 먼저 이주해온 한족(漢族)의 자손인 본지인 사이에 1840년대 중반 이후 집단적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커자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부업이나 전업으로 숯장이·탄광노동·고용노동의 일을 하고 있었다. 향촌공동체에 기반을 둔 본지인들은 신사(紳士)를 중심으로 단련을 조직하여 무장하고 있었지만, 커자는 한족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박한 땅에서 분산되어 살고 있었으므로 응집력도 없었다. 태평천국운동은 바로 이 커자를 배상제회라는 종교결사로 조직하여 출발했다.
1843년 홍수전이 광둥성[廣東省] 화현[花縣]에서 창시한 배상제회(拜上帝會)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하늘의 주재자인 상제(上帝)를 그리스도교의 여호와와 같은 위치에 놓고, 모세 ·그리스도가 여호와로부터 구세의 사명을 받았듯이 온갖 악마의 유혹으로 타락의 극에 달한 중국을 구제하라는 명령을 상제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모세의 10계를 본떠서 제정한 금욕적인 계율을 지키고 유일신인 상제만을 신앙하면 질병이나 재해에서 벗어나고 나날의 의식(衣食)이 보장된다고 역설하였다.
정통적인 요소를 짙게 풍기면서도 엄격한 우상부정(偶像否定), 유교와 공자에 대한 비판, 유일신 신앙 등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것이었다. 상제회(上帝會)는 주로 계속된 기근과 비적의 약탈, 지주 ·고리대금업자 등의 압박에 시달리던 광시성[廣西省]의 산촌 농민과 일부 소지주 ·광부 ·실업자층으로 그 조직을 넓혀나갔다. 즉, 배상제회의 확산 과정에서 광시 성 출신의 지도자로서 숯 굽는 일을 하던 양수청(楊秀淸), 빈농 출신의 소조귀(蕭朝貴), 지주 출신의 위창휘(韋昌輝), 부농 출신의 석달개(石達開) 등이 등장했다. 이들의 등장으로 운동은 정치성을 띠면서 급속히 성장했다
상제회의 우상파괴운동과 신도의 단결로 인하여 전통적인 촌락의 질서가 파괴될 위험성이 있다고 본 향신(鄕紳)과 관헌의 박해가 이들에게 가해지고 이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이 빈발하자 홍수전은 광시성 구이핑현[桂平縣] 진톈[金田]에 신도들을 결집시켜 1851년 초 남녀노소 약 1만 명을 거느리고 봉기하여 ‘태평천국’이라고 내세웠다. 이 ‘태평천국’이라는 호(號)는 상제의 명령과 가호를 받아 평화롭고 평등한 지상천국을 수립한다는 기원(祈願)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약 1년 이상 광시 각지를 전전하고 후난[湖南]에 진출한 이후, 태평군은 각지의 빈농 ·유민 ·수공업노동자와 천지회원(天地會員)을 흡수하여 급속히 확대되었다. 그리고 1582년 12월에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 풍운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翼王)에 봉하여 군사·정치적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1853년 1월에는 후베이 성[湖北省] 우창[武昌]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동안 풍운산·소조귀가 전사하고 병력은 50만 명으로 급증했다. 1853년 3월에는 수십 만의 병력을 이끌고 난징[南京]에 입성하여 수도(首都:天京)로 정하고 신국가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이 당시 200만명의 세력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청왕조와 그 군대의 부패와 무능에도 연유하지만 또한 태평군의 엄격한 군기와 도시의 관료 ·지주 ·부상(富商)에 공격을 집중하여 민중에게 그 전리품을 분배하고, 조세나 지대를 면제한다는 구호를 내건 점, 그리고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강력한 주장 등에 대하여 민중이 지지와 협력을 아끼지 않았던 점에도 있었다. 또한 태평천국 내에서의 생활은 엄격한 종교적 금욕주의의 규제를 받았다. 술·담배·아편은 물론 남녀의 접촉 또한 엄격히 금지되었다.
태평천국 정부는 그들의 이상향을 ‘천조전묘제도(天朝田畝制度)’로서 구체화하여 발표하였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적이고 특수한 평등사상으로서의 ‘대동(大同)’의 이념에 입각하여 토지를 공유로 하고 남녀 균등히 할당하며 전체 잉여물자를 공유로 하여 노유고과(老幼孤寡)를 부양하는 등 차별과 대립이 없는 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며, 거병 이후 군대 내에서 실행해 왔던 것을 사회 일반에게 적용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실행에 옮긴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일반에게 종래의 토지사유제도가 그대로 시행되었다.
지주나 부상에 대한 가혹한 공격, 그것을 계기로 한 농민의 모반이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의식적으로 토지혁명으로까지 몰고가는 노력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지방정권(鄕官)도 대개는 기존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태평천국에 ‘귀순’한 지주적 세력에게 점거되었다. 난징의 중앙정부도 점차 왕조적인 체제에 의하여 스스로 권위를 세우는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하였고 동시에 개인적 권력을 둘러싼 내부 대립이 시작되었다.
1856년 동왕(東王) 양수청(楊秀淸)과 천왕(天王)이라 칭한 홍수전과의 대립, 동왕에 대한 북왕 위창휘(韋昌輝)의 쿠데타[楊韋內訌], 익왕(翼王) 석달개(石達開)의 독립행동 등은 그 비극적 조짐이며 태평천국의 치명상이 되었다. 즉, 난징에 도읍을 둔 이래 천왕은 명목상의 군주로 전락하고 실질적인 통치는 동왕 양수청이 장악했다. 양수청의 전횡에 대한 반발로 1856년 9월 북왕 위창휘가 양수청을 급습하여 그의 친족과 부하 2만여 명을 살해했다. 이는 태평천국군 정예군의 상실을 의미했다. 대학살을 중지하도록 권한 익왕 석달개는 위창휘의 의심과 암살위협을 받고 난징을 탈출했으나 그의 가족과 휘하 관원들이 학살당했다. 석달개는 북왕 토벌군을 모집했고 천왕도 북왕의 핍박 속에 위기를 느껴 잔존한 동왕세력과 천왕의 군대로 북왕세력을 처단했다. 살육전이 끝난 후 난징에 돌아온 석달개는 천왕과 형제들의 의심과 위협 속에 다시 난징을 떠나 운동의 주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하던 끝에 청군에게 섬멸당했다. 이러한 내분을 분수령으로 하여 태평천국운동은 몰락으로 향하는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이 분열에 의한 약체화를 틈타서 증국번(曾國藩) 등이 조직한 반혁명 의용군[湘軍] 등은 점차 반격으로 나와서, 특히 1860년 베이징조약 체결 후 중립정책으로부터 반(反)태평 무력간섭정책으로 바뀐 영국 등 열강의 군사원조, 특히 골든 등의 상승군과 협력함으로써 태평천국을 압살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시작되었다.
한편 이 운동의 말기에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洪仁)이 개혁을 시도하여 〈자정신편 資政新篇〉을 간행했다. 이는 중앙집권의 강화, 서양기술과 문물의 도입, 서구열강과의 우호적 외교와 교역관계 증진에 의한 부(富)의 축적 등 개량적인 근대화를 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홍인간의 개혁을 실현시킬 만한 경제적 근거지의 확보 내지는 정권의 안정성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태평천국운동이 1864년 7월 19일 천경의 함락과 더불어 몰락함으로써 운동의 말기에 등장한 근대적 개혁안도 좌절되었다.
태평천국이 일으킨 농민의 광범위한 투쟁은 근대 중국에 있어서 농민혁명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 그 한(漢)민족주의는 쑨원[孫文] 등 동맹회의 혁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태평천국이 수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특히 그 말기에 보여준 대외저항은 영국 등 열강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중국의 완전 식민지화를 저지하는 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