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y Martin의 골프카트
Casey Martin은 다리가 좋지 않은 프로골프 선수이다.
순환기장애로 인하여 골프코스를 걷는 것은 마틴에게 심각한 통증을 유발하고 과다출혈과 골절을 일으킨다.
그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마틴은 운동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대학시절에 마틴은 스탠포드 우승팀에서 뛰었고 이후 프로로 전향하였다.
마틴은 PGA 측에 경기 중 골프카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PGA측은 그의 요청을 기각하며 최상위 프로 경기에서 카트 사용 금지 규정을 제시하였다.
마틴은 이를 법정에 제소하였다.
그는 장애인법(1990년)이 경기의 “본질적 요소에 근본적으로 변화”를 주지 않는 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합리적인 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부 유명 골프 선수들이 사건에 대하여 증언을 하였다.
아놀트 파머,
잭 니클라우스,
캔 벤츄리 등 모두 카드 사용 금지를 옹호하였다.
그들은 골프 경기에서 피로가 중요한 요소이며 걷는 것이 아닌 카트를 타는 것은 마틴에게 공정하지 못한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미 연방 대법원으로 갔으며 판사들은 한 가지 바보스러워 보이며 동시에 자신들의 품위와 자신들의 전문 분야를 넘어서는 질문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골프 장에서 매 번 카트를 타고 돌아 다니는 사람이 정말 골퍼인가?”
실제 이 사건은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정의에 관한 질문을 드러낸다.
마틴의 골프 카드에 대한 권리를 결정하기 위해서 법정은 문제가 되는 운동의 본질을 결정하여야 한다.
골프 코스를 걷는 것이 골프에서 핵심적인 가 아니면 부수적인 것인가?
만일
PGA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걷는 것이 골프에 있어 핵심적인 측면이라면 마틴이 골프카트를 타는 것은 골프라는 경기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권리에 대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정은 골프라는 경기의 목적(telos),
또는 근본적인 본질을 결정하여야만 하였다.
법원은7대2로 마틴이 골프 카트를 사용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판결하였다.
Paul Stevens 판사는 다수 의견에서 골프의 역사를 분석하여 카트의 사용은 골프 경기의 근본적인 성격과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하였다.
“초창기부터 골프 경기의 본질은 샷을 하는 것 – 골프채를 이용하여 티에서 일정 거리 떨어진 홀에 최소한의 타로 공을 넣는 것 – 이다.”
걷는 것이 골프 선수의 체력을 측정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스티븐스 판사는 18홀을 걷는데 약500
칼로리 정도가 소비 된다는 생리학 교수의 증언을 인용하여 “영양학 적으로 빅맥 한게 보다 적다”
고 인정하였다.
“골프가 활동의 강도가 낮기 때문에 경기에서의 피로도는 긴장과 자극이 주요한 요소인 심리적 현상이다.
법원은 마틴이 카트를 탈 수 있도록 장애에 대한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경기를 본질적으로 바꾸거나 마틴에게 불공정한 혜택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Antonin Scalia 판사는 이에 동의 하지 않았다.
강경한 반론에서 스칼리아 판사는 법정이 골프의 핵심적인 본질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을 거부하였다.
판사의 논점은 판사들이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위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다.
판사는 법정의 견해에 근본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제 – 어떤 경기의 목적 또는 본질적 요소를 추론할 수 있다 – 에 반박하고 있다.
어떤 것이 “핵심적”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목적의 성취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운동경기와 생산적 활동을 구분하는 것)을 제외한 아무런 목적도 없는 것이 어떤 경기의 단 하나의 본질이기 때문에 어떤 경기의 임의적 규칙은 어떤 것이나 “핵심적”
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골프의 규정은
(모든 경기와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임의적”이므로
PGA에 의하여 설정된 규정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Salica는 기술하였다.
만일 팬들이 이 규정들을 싫어한다면 “팬들은 자신들의 후원을 철회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 또는 저 규정이 골프가 시험하려 하는 능력들과 관련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Scalia의 주장은 몇 가지 근거에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첫째,
이 주장은 스포츠를 가벼이 여긴다.
어떤 스포츠 팬도 이러한 식으로 – 전적으로 임의적인 규정으로 지배 받고 어떠한 실질적인 목적이나 관점도 없다 – 말하지 않는다.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스포츠의 규정이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정한 능력이나 재능을 요구하고 이를 칭송하기 위하여 설계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임의적인 것이라고 믿는 다면 이들은 경기의 결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불가능 하다.
스포츠는 평가(감상)의 대상이 아닌 즐거움의 대상인 볼거리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둘째, 서로 다른 규정들의 장점을 주장하는 것 과 이들 규정들이 경기를 좋게 만들지 망쳐버릴지 묻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주장들은 언제든지–
라디오 시청자 참여 프로에서 그리고 경기를 운영하는 사람들 사이에 – 일어난다.
야구에서 지명 대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들은 지명대타 제도가 최고의 타자에게 타격을 하게하고 타격이 약한 투수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하여 경기를 재미있게 만든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타격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전략이 지닌 복잡한 요소를 제거하여 경기에 위해를 가한다고 말한다. 각각의 주장은 야구가 그 자체로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한 개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야구가 어떤 기술을 측정하려는지 어떤 기술과 능력을 칭송하고 보상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점들이 그것이다.
지명대타 제도에 대한 논쟁은 궁극적으로 야구의 목적론 – 마치 소수자 우대 정책에 관한 논쟁이 대학의 목적에 관한 논쟁이 된 것처럼 – 에 관한 논쟁이 된다.
마지막으로, 스칼리아는 골프라는 운동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논쟁에 있어 명예와 관련된 부분을 함께 놓쳐버렸다.
골프 카트에 관한
4년간의 논쟁은 결국 무엇에 관한 것이었는가?
표면적으로는 공정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PGA와 최고의 골프선수들은 카트를 타도록 허용하는 것이 마틴에게 불공정한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마틴은 자신의 장애를 고려한다면 카트는 경기장의 장애를 없애 공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러나,
공정성만이 논점이었다면 쉽고 명백한 해결책이 있다.
모든 골프 선수들이 카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모든 선수들이 카트를 사용할 수 있다면 공정성 시비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결책은 프로 골프계에서 이단시되고,
심지어 마틴을 위한 예외를 만들어 주는 것 보다 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다.
왜냐하면 논쟁은 공정성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명예와 외부의 인정 – 자신들의 골프가 운동 경기로서 대중에게 인정받고 존경 받아야 한다는 특별히
PGA와 최고 골퍼들의 욕망 – 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좀 더 우아하게 생각해 보자.
골퍼들은 경기에서 자신들의 상태에 상당히 민감하다.
달리거나 뛰어 올라서는 안되고 공은 항상 정지해 있어야 한다.
골프가 기술을 요하는 경기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훌륭한 골프 선수들에게 부여된 명예와 세간의 인정이 자신들의 경기가 상당히 체력을 요구하는 운동 경기로 보여 져야 하는 사실에 달려 있다.
그들이 매우 잘하는 경기를 카트를 타고 한다면 운동 선수라는 자신들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회의적이게 되고 그러한 인식이 사라 질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이 일부 프로 골퍼들이 케이시 마틴이 카트를 얻고자 하는 시도에 대하여 격렬한 반대를 하는지 설명해 준다.
여기
PGA 투어
25년차 선수
Tom Kite의New
York Times지 논평이 있다.
내가 보기에 케이시 마틴이 카트를 사용할 권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경쟁이 있는 운동 경기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우리는 운동경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 골프가 운동 경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 경기에 가보지도 참여해 보지도 않았다.
골프의 본질에 관하여 옳은 사람이 누구이든지 상관 없이 케이시 마틴의 골프 카트에 관한 재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에 관한 명백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쟁은 자주 필연적으로 사회 기구의 목적,
그들이 설정한 이상 그리고 자신들이 예우하고 보상하는 능력에 관한 논쟁으로 변한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법률을 중립적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선한 삶의 본질에 대한 주장 없이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첫댓글 제가 번역한 부분에서 밑줄 친 곳과 영어로 병기한 부분들을 정확하게 나눠서 번역부탁드립니다.
그 외 다른 부분도 오역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양이 많아 오늘에야 다 올립니다.
제가 내일은 푸른생협 행사로 빠집니다. 댓글이나 답글로 꼭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