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 달 두번째 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정기답사는 추석명절을 고려하여 조상님 먼저 찾아뵙고
맘 편하게 명절 지나고 가기로 했습니다.
조상님의 은덕이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도 없고 미래의 후손도 없겠지요.
풍성하고 행복한 추석 명절 가족과 함께 잘 보내시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을 맞으러 강릉시로 가면 좋겠습니다.
1. 답사일 : 2024년 9월 22일 (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8시 정각 출발
3. 답사지
1) 신명화 선생 묘소 (강릉시 대전동)
자는 계흠(季欽), 호는 송정(松亭). 고려 때의 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이다. 증조는 문희공(文僖公) 신개(申槩), 할아버지는 신자승(申自繩), 아버지는 신숙권(申叔權), 어머니는 남양홍씨이다. 부인은 이사온(李思溫)의 딸 용인이씨이다. 아들이 없고 딸만 다섯을 두었는데 첫째는 장인우(張仁友)의 부인, 둘째는 이원수(李元秀)의 부인인 신사임당(申師任堂), 셋째는 좌찬성 홍호(洪浩)의 부인, 넷째는 습곡 권화(權和)의 부인, 다섯째는 이주남(李冑男)의 부인이다.
1476년(성종 7)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즐겨하고 선악(善惡)을 권계(勸戒)하였다. 1516년(중종 11)에 진사에 입격하였다. 중종 대의 신진사류(新進士類)인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이었으며, 연산군 때 부친상을 당하자 단상법에 반대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극진히 상례를 마쳤다. 현량과로 천거되었으나 거절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22년(중종 17)에 세상을 떠났다.
외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오죽헌(烏竹軒) 권처균(權處均)이 강릉부 북쪽 두왕동(豆旺洞)[지금의 강릉시 대전동 조산리]으로 이장하였다. 후손이 없어 외손인 안동권씨들이 봉사(奉祀)한다. 1885년(고종 22)에 세워진 묘비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명화 [申命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 최수성 선생 묘소 (강릉시 대전동)
본관은 강릉.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호산인(鏡湖散人). 강릉 12향현 중의 한 사람이다. 최필달(崔必達)의 후손으로 증조는 최치운(崔致雲), 조부는 최응현(崔應賢), 아버지는 생원 최세효(崔世孝)이고, 어머니는 철원최씨 승지 최철관(崔哲寬)의 딸이다.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金宏弼)에게서 수학(受學)하였다. 조광조는 최수성을 현량과(賢良科)에 천거하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519년 조광조 일파에 대한 훈구파의 견제로 기묘사화가 일어났는데, 최수성은 이미 기묘사화로 사림에게 화가 미칠 것을 예상하였다고 한다.
기묘사화로 세도를 잡은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 훈구세력에 대해 안처겸(安處謙)·안처근 부자 등이 역모를 시도하였는데, 이 사실이 훈구세력들에게 알려지면서 다수의 사림파들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은 ‘신사무옥(辛巳誣獄)’이 일어났다. 평소 남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최수성 역시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았다.
학문 뿐 아니라 시서화에도 뛰어났다. 10세에 이미 문장이 대성하여 시를 지으면 음률이 이백(李白)·두보(杜甫)에 못지않았고, 글을 지으면 문체가 유종원(柳宗元)·한유(韓愈)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필법에 있어서는 왕희지의 글씨에 견줄 만 했고, 화법에 있어서도 고개지(顧愷之)의 묘수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시문(詩文)·서화(書畵)·음률·수학 등에 모두 능하였기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사절(四絶)’이라 불렀다. 기묘사림 가운데 한 사람인 김정(金淨)은 일찍이 최수성의 시를 사랑하여 영원히 이름을 남길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학문적, 정치적으로도 최수성과 대립하였던 남곤도 최수성의 그림의 품격을 흠모하여 “천금의 보물은 얻을 수 있지만, 8첩의 그림은 얻기 어렵다.”고 하였다.
특히 기묘사화가 발발하여 동지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보고 난 이후에는 술과 시·서화, 음악 등을 일삼으며 명산을 유람하였다. 가는 곳마다 소나무로 거문고를 만들어 타다가 끝나면 버리고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고 한다.
1540년(중종 35)에 최수성은 신원(伸寃)되어 문정공(文正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1545년(인종 1)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강릉 향현사에 배향되었다. 또 1737년(영조 13)에는 최수성이 살았던 충청도 보은 병산서원에 기묘명현인 병암(屛菴) 구수복(具壽福)과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와 함께 향사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수성 [崔壽峸]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3) 강릉향교 (강릉시 교동)
*대성전*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단층집이다. 건물의 앞면은 기둥 사이를 개방하여 툇간으로 하고 제2주열(第二柱列)에 고주(高柱)를 배열하여 벽을 쳤는데, 그 가운데 3칸에 각각 빗살문짝의 출입문이 있다. 대들보는 이 고주에서 둘로 이어졌으며, 내부에 걸쳐 있는 긴 대들보 위에 세운 접시받침을 가진 대공(臺工)이 고주와 함께 종량(宗樑)을 받들고 있다. 공포(栱包)는 기둥머리에 첨차(檐遮)를 하나 꽂아 두공(頭工) 살미를 받도록 한 위에 행공(行工) 첨차를 가로 끼워 외목도리(外目道里)와 봇머리를 받치고 있다. 내부에는 판석(板石)을 깔고 주위 기단 위에는 벽돌[塼]을 깔았다. 좌우 옆면의 박공(牔栱) 머리에는 방풍판(防風板)이 있으나 원래의 것은 아닌 것 같으며, 처마는 홑처마로 부연(附椽)이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릉향교 대성전 [Daeseongjeon Shrine of Gangn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江陵鄕校 大成殿]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명륜당*
2020년 12월 2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강릉향교는 고려시대에 처음 건립된 향교로 1411년(태종 11) 불타버린 것을 1413년에 중건하였다. 그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 모습에 이르렀다. 전학후묘(前學後墓)의 형태로 제묘공간인 대성전을 뒤쪽에, 제학공간인 명륜당을 앞쪽에 배치하였으며, 대성전을 중심으로 동무와 서무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동재와 서재 뒤쪽에 명륜당이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강릉향교의 명륜당은 동재와 서재 앞쪽에 배치되어 있다.
명륜당은 강학공간의 중심으로 유생을 교육하던 장소였다. 강릉향교의 명륜당은 조선 초까지만 해도 누각으로 사용되었으나, 17세기 이후 여러번의 중수를 거치면서 명륜당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대다수의 향교들은 교육의 기능을 상실했는데, 강릉향교는 개화기 이후에도 화산학교와 수선강습소를 설립하는 등 지역민들에게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강릉향교 명륜당의 크기는 정면 11칸에 측면 2칸으로 현존하는 향교 명륜당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2층 누대 형식으로 아래층은 기둥만 세우고 벽을 쌓지 않아 통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강릉향교 명륜당은 누각으로 사용되던 건물을 명륜당으로 전용(轉用)한 흔치 않은 사례에 속하며, 현존하는 명륜당 중 가장 규모가 크고 건축 격식이 뛰어나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또한 갑오개혁 이후에도 계속하여 근대교육의 장으로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0년 12월 28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강릉향교 명륜당 [Myeongryundang Lecture Hall of Gangneunghyanggyo Local Confucian School, 江陵鄕校 明倫堂]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 명주군왕릉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1971년 12월 16일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명주군왕 김주원(金周元)은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으로 785년 선덕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군신들은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때마침 경주에서 200리나 떨어진 곳에 있다가 홍수로 알천(閼川)이 범람하여 건너올 수 없게 된 김주원 대신 상대등(上大等) 김경신(金敬信)을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그가 38대 원성왕이다.
이 일로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김주원은 명주(暝州:강릉)로 도피하였다. 그러나 원성왕은 786년(원성왕 2)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동해안 일대의 강릉·통천·양양·삼척·울진·평해 등을 식읍(食邑)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후 김주원은 이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는데 강릉김씨의 효시이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원래의 묘는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전해지는 것은 조선 명종때 강릉 부사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낸 후손 김첨경에 의해 다시 복원된 것이다.
계단식으로 구성된 묘역에는 2기의 봉분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봉분에는 사각형으로 대리석 호석(護石)을 둘렀는데 모서리를 석조 건물의 기둥처럼 처리한 것이 특이하다. 그 앞에는 '冥州郡王 金周元之墓(명주군왕 김주원지묘)'라고 세겨져 비석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그의 공적과 생애를 기록한 팔작지붕 모양의 옥개석을 올린 신도비(神道碑)가 따로 서 있다.
비석 앞에는 받침돌이 없는 상석(床石)과 향로석을 놓고 그 아래로 좌우 한쌍인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 등이 각각 세워져 있다. 매년 음력 4월 20일 강릉김씨 종중에서 이곳에 모여 명주군왕제를 올린다.
[네이버 지식백과] 명주군왕릉 [溟州郡王陵]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5) 최입지 선생 묘소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자는 양필(良弼). 호는 성묵당(誠默堂). 시조 최흔봉(崔欣奉)의 12대손으로 할아버지는 최군보(崔君甫), 아버지는 최릉(崔陵)이다. 강릉최씨 평장공파(平章公派)의 시조이다. 장남인 최안소(崔安沼)는 평장사(平章事) 강릉군, 차남인 최안빈(崔安瀕)은 전리판서(典理判書) 예성군(芮城君), 삼남(三男) 최안언(崔安彦)은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올랐다.
1275년(충렬왕 1)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선조는 원래 완산[전주]에 거주하였으나 최입지가 강릉군(江陵君)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강릉으로 바뀌었다.
벼슬은 광정대부문하평리상호군(匡靖大夫門下平理上護軍)을 거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올랐다. 후에 충익사공신(忠翊社功臣)으로 검교태보문하시랑(檢校太保門下侍郞)과 성찬화안사공신(成贊化安社功臣) 태사개부의동삼사상서우정승상주국(太師開府儀同三司尙書右政丞上柱國)에 증직되었다.
말년에 혼란한 정국을 뒤로 하고 멀리 강릉 모산(母山)에 은거하였다. 최입지의 후손이 여러 대에 걸쳐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하여 최입지가 살던 곳인 현재의 강릉시 장현동 모산의 지명을 평장동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개국 후 수태사태상(守太師太常)으로 증직되었고, 세종 때에는 영의정(領議政)에 가증(加贈)되었다. 시호는 충숙(忠淑)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입지 [崔立之]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희 (010 - 3228 - 6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