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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글은 2014년 8월, 6년 만의 신작 동화 <그 꿈들>을 발표한 박기범 작가님이 모매체와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2003년 이라크로 들어가 그곳 아이들과 함께 전쟁을 겪으셨고 이를 바탕으로 두 권의 책을 펴내셨습니다. <어린이와 평화 – 박기범 이라크 통신>(2005 출간)과 <그 꿈들>(2014 출간), 두 책에 담은 이야기와 형식의 차이는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씌어진 시기와도 상관 관계가 있을까요?
<어린이와 평화>는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목전에 두고 그리로 떠날 때부터, 전쟁 속 그 안에서 지내면서 일기로 적어놓은 글들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일방적인 종전 선언이 있는 뒤에도 계속 그곳에 머물면서 그곳 사람들과 지내던 시간들, 한국으로 돌아와 단식과 평화순례를 하면서 써온 일기이자 일지들. 그러니 말하자면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한 현장 기록인 셈인데, 그 당시 쓴 기록들을 추리고 묶어 책이 되었습니다. 그 전쟁이 있고 십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쓰게 된 <그 꿈들>은 동화입니다.
그 당시 제가 전쟁 속으로 들어간 것은 동화를 쓰고자 하거나 어떤 기록 같은 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순진함이었는지, 어리석음이었는지, 그저 전쟁을 막아낼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었고, 그 전쟁으로 죽거나 다칠 그곳의 아이를 하나라도 더 보듬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곳에서의 시간을 겪고 돌아오게 되었고, 저는 동화작가였습니다. 그곳의 일들을 아이들에게 전하는 글로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일들에 감히 저는 엄두를 내지 못했고, 말문이 트이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어린이들에게 전하는 이야기로 쓴다는 건 감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십 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그 땅의 사람들은 더 아픈 수렁으로 들고 있었고, 그곳의 일들은 끝내 삼키지도 못하고 지우지도 못한 채 가슴에 걸려 있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이 더 힘겨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십 년이 되던 지난 해, 더는 피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고, 간신히 그곳의 이야기들을 써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 꿈들>에서 그때 당시 만났던 아이들을,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내신 점이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작가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까?
지금도 아이들은 바로 어제 본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있어요. 그러나 이미 십 년 하고도 일 년이 더 지났고, 내 기억 속의 아이들은 스물이 넘은 청년이 되었거나 아니면 청년이 되어보지 못한 채 어딘가에서 눈을 감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이는 그 아이의 아버지처럼 자전거에 기름을 싣고 배달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 중에 또 어떤 아이는 제가 목수 일을 배운 것처럼 목수가 되어 그 무너진 자리들에서 집을 짓느라 망치질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아이는 총을 들고 어디론가 떠났는지도 모릅니다.
당시, 우리는 헤어질 때마다 눈물이었습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그곳의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언제라도 돌아갈 곳이 있는 이였고, 끝내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아이들과 헤어지는 일은, 마치 그 아이들 앞에서 커다란 죄를 짓는 기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아있는 한 아이의 이름만큼은 이 작품에서 쓰지 못했습니다. 뉴바그다드 거리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세이프라는 이름의 아이.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했고,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하던 아이입니다. 제가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그 아이가 손을 놓지 않으며 하던 말이 있어요. 나도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나도 데려가 달라고. 나는 아이에게 대답을 하지 못했고, 다시 돌아올 거라고, 곧 다시 올 거라는 기약 없는 말을 하기만 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끝내 이 작품에서 쓰지 못한 것은, 언젠가 오롯이 그 아이만을 그려낼 어떤 이야기를 가슴에 남겨두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들의 기록을 보다 보니 작가님의 어린 시절도 자연스럽게 궁금해지는데요. 본인의 유년 시절을 떠올려보신다면요? 크게 영향을 준 사람이나 사건 같은 것들이요.
저는 유년의 기억을 자세하게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아니, 그 때뿐 아니라 그 어느 시절의 것도 좀처럼 잊지를 못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누군가는 부럽다고도 말을 하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기억이 많아 그리움이 많지만, 너무 많은 기억으로 너무도 쉽게 그것에 젖어 들곤 하는 것 같아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것들까지도 말이지요.
저의 어린 시절은 서울의 변두리 골목을 뛰놀던 그저 그런 아이의 모습이었습니다. 가난하지만 행복하였고, 남들이 보기에는 화목하지 못한 가정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즐거웠던 시절입니다. 저는 말썽도 많았고, 아마 어른들 시선으로는 아주 밉상 짓도 많이 하였을 텐데, 저를 지켜준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저를 믿어주셨어요.
전쟁 포화 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셨고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셨나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겁에 질린 눈동자를 보았고, 나를 더 걱정해주며 눈물짓는 그곳의 친구를 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눈동자로 몸을 비트는 어린 아이를 보았습니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서 여전히 해맑은 얼굴로 뛰노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폭격이 한참이던 때, 간신히 비자를 얻어 이라크 국경을 넘어 들어가던 때, 아마 그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가장 자유롭고 가벼웠습니다.
작가님의 이라크행은 필연적인 것이었는지요? 작가님이 속해 있던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에는 어떤 분들이이 어떻게 모여 이라크에서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단체들의 ‘전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활동’은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이어졌다고 알고 있어요.
‘이라크평화팀(Iraq peace team)’은 한국에서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먼저 시작한 움직임이었습니다. 911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에 이어 이라크 전쟁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을 때 ‘광야의 목소리’라는 비폭력평화운동 단체를 비롯해 국제평화운동가들이 공습이 예고되는 현장으로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서 ‘인간방패(Human Shields)’라는 이름도 함께 등장했고요. 여기에 한국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Korea Iraq peace team)’을 준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비자를 받을 수 없어 국내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이에 뜻을 함께 하는 여러 개인들이 현지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종교인도 있었고, 진보정당의 당원, 사회주의자, 여성주의자, 학생, 현장미술가, 언론인, 노동자, 의료인 등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한 만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행동으로 함께 한 것입니다. 이 대열에 얼띤 동화작가 하나도 함께 했던 것이구요.
저는 당시 한국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있는지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저 전운이 감도는 그곳 뉴스를 보며 가슴을 졸이고 있을 뿐이었는데, 가까운 후배 하나가 벌써 그곳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나도 조그만 힘을 보탤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쟁이 예고되는 땅이라면 그곳을 빠져나오려는 궁리가 먼저일 텐데, 자진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하였고, 그렇게 세계 곳곳에서 맨몸으로 그 땅에 들어가 스스로 폭격의 우산이 되고 방패가 되는 행렬이 줄을 잇는다면, 어떻게든 막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시간들을 살아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섣불리 짐작하기 어렵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날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괴롭기만 한 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어떻게 이겨내셨나요? 뜻을 같이 하고 지지해주었던 사람들이 큰 힘이 되어주셨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이라크전이 일어났을 때 국내에서 벌인 반전평화운동은 한국사회에서 대중적으로 일어난 국제주의 운동으로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고 알고 있어요. 꽤 오랜 기간 동안, 매우 많은 사람들이 헌신적인 활동을 벌여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동화작가이기에, 많은 어린이들과 어린이 관련 단체의 사람들이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어린이문학과 교육, 문화를 함께 가꾸고 고민하던 이들이 어린이들의 손을 잡고 평화의 광장을 이루곤 하였고, 이라크 현지에서 수많은 이곳 아이들의 사진과 엽서를 전해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자기 얼굴이 담긴 사진을 보내며, 자기도 인간방패가 되어 이라크의 친구들을 지켜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함께 손잡아주고 있다고 말이지요. 저는 그 아이들의 사진들을 이라크 아이들의 교실에 붙여주었습니다.
목수학교에 들어가 한옥 짓는 일을 배우시고 현재 문화재보수기술자로 일하고 계시죠. 숭례문 복원공사와 석가탑 해체보수공사 현장에도 참여하셨고요. 목수 일을 시작하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문제아> 서문을 쓴 손글씨의 주인이 작가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만 봐도 손재주가 많으실 것 같아요.
책에 쓴 것처럼 저는 소질도 변변찮고 일머리도 그닥 마땅치가 않아요. 제가 한옥학교에 들어가 목수 일을 배우게 된 계기는 제 삶을 이끌어준 한 형님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전쟁터에서 돌아와 평화와 관련한 활동들을 하며 지내고 있었지만, 그 활동들에 대한 무력감이나 자괴감에 힘들어하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을 수 있는 삶으로 내 삶부터 바꾸어내는 것, 무엇보다도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비로소 느껴가던 때였을 거예요. 완전한 자립까지는 아니어도 자본의 그물을 최소한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삶. 그런 것을 고민할 때 그 분이 제게 목수 일을 함께 할 것을 권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고민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그 분은 제가 어떤 것으로 힘겨워하고 있는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형님이 자신과 함께 둘이서 집을 지으면서 살자고 이끌어주었습니다. 교사였으며 농사꾼으로 살았고, 목수이던 그 형님의 이름은 황시백입니다.
첫 동화집 <문제아>로 박기범 작가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요, 처음 발표한 1999년과 현재, 동화 쓰는 사람으로서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을 꼽으시겠어요?
15년이 지났으니 아주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게다가 저는 의도치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변화의 진폭이 적지 않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사는 곳만 해도 <문제아>를 쓸 때만 해도 서울 바깥을 한 번도 벗어나보지 못한 서울내기이던 제가, 그 뒤로 남양주 수동의 골짜기 마을에서 살았고, 울진 바닷가 마을에서도 살았고, 양양의 설악산 자락에서도, 그리고 동강이 흐르는 영월에서도 지내다가 지금은 제주도로 내려와 지내고 있으니 말이지요. 그 사이에 전쟁터에서 죽음을 건너온 시간이 있었고, 글을 쓰던 손으로 망치질과 끌질을 배우며 집 짓는 일터로 떠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 각시를 얻었고, 이제 두 달 뒤면 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동화를 쓰는 사람으로 변화라면, 이건 변화라기보다는 더욱 심해지고 깊어진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텐데, 저는 동화를 쓴다는 일이 더욱 무겁게만 느껴집니다.
모친께서 '서울 어머니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학생이셨고 작가님은 그곳에 자원 교사로 어머니들을 가르치던 시절의 일기가 <엄마와 나>(2004년 출간)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었는데요. 그 이후의 한 시절 또는 앞으로 쓸 일기를 묶어 책으로 펴낼 계획은 없으신지 기다리는 독자분들이 계실 것 같아요.
그럴 계획은 없습니다. 그건 그 당시에 어머니와 함께 일기를 쓰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책으로 펴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건 없었어요. 어머니와 함께 밤마다 일기를 쓰고, 살아온 이야기로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 감동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 해 ‘전태일문학상’ 모집 광고를 보게 되었는데, 조그만 상이라도 받게 된다면 어머니에게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니의 일기장과 제 일기장을 함께 냈던 것인데, 그것이 큰 상을 받으면서 책이 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그 뒤로도 저는 때마다 일기를 써오고 있습니다. 이라크에 들어가서도 그러했고, 단식을 하던 중에는 단식일기를, 목수학교에 다닐 때는 목수학교일기를, 그리고 목수 일을 하던 때에는 목수일기를 쓰면서 그 시간들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만약 제가 어떤 출판을 마음에 두고 일기를 쓰거나 했다면, 그처럼 솔직하게 쓰거나 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일기를 쓰면서도 무언가를 자꾸 기획하거나 생각하고, 어떤 시선이나 독자를 의식해야 했을 테니, 그 자체로 그리 즐겁지 않은 글쓰기가 되었을 겁니다.
작가님 자신의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염치입니다.
본 받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가 혹시 있으신지요?
권정생 할아버지. 그러나 감히 본 받고 싶어 한다거나 본 받으려 노력한다는 말 같은 건 어울리지 않아요. 그저 할아버지를 늘 그리워할 뿐입니다. 글 쓰는 일로가 아니라 살아가는 모든 것으로.
작가님이 속해 있는 ‘글과 그림’ 동인에 대해서 소개 부탁 드립니다. <그 꿈들>, <미친 개>를 담고 계신 김종숙 화가님도 같은 ‘글과 그림’ 동인이시더라고요.
‘글과그림’은 이오덕 선생님, 권정생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해온 이들 가운데 오래도록 그 뜻을 함께 해온 동무들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모임의 이름처럼 글과 그림을 모아 달마다 한 번씩 동인지를 펴내온 것이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이는 것은 아닙니다. 글도, 그림도 모두 그리움인 것을, 아마도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종숙 선생님과 인연이 닿은 것도 이 모임에서였습니다.
<그 꿈들>에서 김종숙 화가님과의 협업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라크에서 만난 실제 인물을 찍은 사진을 토대로 그린 원화 작업을 하셨다고 보도자료에서 읽었습니다.
전쟁이 시작하고 십 년이 되던 지난 해 여름, 저는 간신히 그 글을 썼습니다. 스케치북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겨 넣듯 손으로 썼어요. 그렇게 두 권을 써서 한 권을 편집자 형에게, 또 한 권을 김종숙 선생님에게 보냈습니다. 김종숙 선생님은 그것을 받아 읽고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다 하였습니다. 저는 이라크 현지에서 찍어온 사진이며 동영상 같은 자료들과 제가 그 동안 수집해온 그곳 관련 자료들을 모아 김종숙 선생님께 보내었고, 김종숙 선생님은 그것들을 바탕으로 하여 한 점 한 점 유화로 그려내었습니다. 일 년 만에 서른일곱 점의 유화 작품을 그려낸 김종숙 선생님의 에너지는 실로 불덩이 같았습니다. 작업을 하던 중간에 몇 차례 김종숙 선생님을 찾아뵐 때마다 지난 십 년의 시간들은 캔버스 안에서 그대로 되살아나고 있었고, 캔버스가 늘어갈수록 그 조그만 방에서는 모래바람이 일고 포탄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때부터 김종숙 선생님의 그림들은 원화전시회를 꼭 가져서 독자들이 직접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8월 11일부터 23일까지 서울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고, 8월 29일부터 9월 3일까지는 속초에서, 9월 22일부터 25일까지는 상주에서, 그리고 계속 준비가 되는대로 다른 고장들에서도 전시회를 이어갈 예정입니다.
작가님은 어떤 것에 가장 엄격하다고 생각하세요? 반대로 너그러워지는 대상이 있다면요?
내가 가장 엄격한 건 나 자신일 겁니다. 반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내가 과연 누구에게든 한 번이라도 너그러웠던 적이 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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