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풍경의 구현과는 달리 한편으로 데이비드 린은 이 경험이 곧 파괴되고 얼룩지는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제시한다. 아랍의 관습법을 따라 로렌스는 범죄를 저지른 인물을 판결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는데, 그가 바로 사막에서 구해낸 자신의 하인이었다. 영국의 규칙과 관습을 따르자면, 그를 용서할 수 있겠지만 로렌스를 둘러싼 아랍인들은 그에게 자신들의 법을 요구한다. 로렌스는 아랍인 하인에게 총구를 겨눈다. 그것은 로렌스가 아랍인들에게 편입되는 순간이자 영국 제국주의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로렌스 자신의 일그러진 초상을 직면하는 순간이 된다.
이처럼 복잡 미묘한 순간을 거대한 화면에 담아내던 시기는 영국 출신의 감독인 데이비드 린이 할리우드에서 전성기를 꽃피우는 시절이었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데이비드 린은 1957년에 <콰이강의 다리>를 시작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라이언의 딸>, <인도로 가는 길>로 이어졌다. 이러한 영화들 덕분에 영국에서 작위를 수여 받기도 하고, 오스카의 명예를 얻기도 했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전성기가 영국 시절에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평가야 엇갈릴 수 있는 것이겠지만 이 시절에 보인 그의 영화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활용과 평소 데이비드 린이 지니고 있는 고전주의적인 드라마와의 조화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풍부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데이비드 린의 인물들이다. 로렌스 역을 맡았던 피터 오툴, 지바고 역을 맡았던 오마 샤리프, <콰이강의 다리>에서 니콜슨 대령 역을 맡았던 알렉 기네스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된 인물인 동시에 그들이 지닌 감성을 캐릭터에 풍부하게 쏟아 넣은 연기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