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조선》 독자 박석현(1908~1984)의 직업은 유별나다.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담양경찰서 순사였다. 1908년 중농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년 시절 가산이 기울어 빈농으로 전락했다. 박석현의 공식 학력은 1926년 3월(만 18살) 보통학교 졸업이 전부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 후 1년간 가사를 돌보다가 1927년 4월(만 19살)에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순사 시험에 합격해 경찰에 취직했다. 가난한 농촌 청년 박석현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성공의 길이었을 것이다.
.
박석현은 《성서조선》을 1938년 1월호(제108호)부터 받아보기 시작했다. 1938년이면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요, 비상시국이었다. 이 황량한 시대에 김교신은 독자 박석현의 직업이 ‘순사’라는 데서 각별한 느낌을 받는다. ‘순사’란 일본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닌가.
.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행동반경을 누린 교사 김교신에 비해 경찰관 박석현은 운신의 폭이 훨씬 좁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찰관이니 으레 그랬겠지’ 하면서 박석현의 행보를 상황 논리로 일반화하면 곤란하다.
.
박석현의 행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국면이 보인다. 현직 경찰관 신분이면서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이진구는 박석현을 ‘특이한 분’이라고 회고한다. 창씨개명을 총칼로 강요해야 할 최일선 경찰관이면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경찰관은 식민지 조선에서 박석현이 유일했을 것이라고 했다. 창씨개명의 집행자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으니 정말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다.
.
이것만이 아니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경찰관 박석현은 당시 일제의 집중 탄압 대상인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전남 경찰 당국 윗선에서 그를 주목하는 게 당연했다. 상부에서 그를 호출했다. 경찰서장과 고등계 주임은 박석현에게 기독교 신앙과 순사직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
박석현은 순사직은 버려도 기독교 신앙은 버릴 수 없다는 입장을 직속상관 앞에서 당당하게 밝혔다. 경찰관으로서 출세나 자리보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절대 취할 수 없는 태도다.
.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라는 상관의 명령도 거부했던 박석현은 신사참배를 했을까. 박석현은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담양경찰서 소속 순사였다. 경찰 조직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신사참배를 했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하지만 예상을 깨는 정반대의 증언이 있으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
"박석현 선생이 고향에서 경찰관으로 있을 때 교회 장로 한 분이 신사참배 거부로 잡혀, 선생 소속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가족이 찾아오고 교회에서 찾아와서, 가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당국에 굴복하고 풀려나오라고 유혹했다. 그 장로도 망설였다고 한다. 그 무렵 해질 때면 한산한 유치장 앞 복도를 지나가는 소리가 유치장 안으로 들려왔다고 한다. “죽도록 충성하시오, 죽도록 충성하시오.” 장로는 그 목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인 줄 믿고 끝까지 지조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소리의 주인공은 그 경찰서의 순사 박석현 선생이었다."
.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장로에게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라고 격려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경찰관이었다.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특별한 장면이다. 그러면 박석현 순사 본인은 과연 신사참배를 했을까? 본인은 죽도록 충성할 생각이 없으면서, 유치장에 갇힌 장로에게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고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하시오”라고 격려할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