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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섭 시집 『꽃배추를 아시나요』 평설∣
창조적 파괴 또는 은퇴와 복귀의 시학
김봉군
(가톨릭대학교 명예교수 · 문학평론가)
1. 여는 말
노유섭 시인의 제11시집 『꽃배추를 아시나요』는 20세기적 주류 시학과의 결별 선언에 갈음된다. 21세기 한국 시의 주류는 20세기 주지시의 관성을 가속화하여 극난해시의 오골성傲骨城에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시공時空과 사건 · 인간 · 사물들이 착종錯綜된 하이퍼시는 독자의 감수성과 사유思惟에 노동을 강요하는 난맥상을 보인다. 독서를 거부하는 소통 불능의 상황이다.
시는 읽혀야 살아남는다. ‘시인−텍스트−독자’간의 역동적 소통 현상이 활성화하는 순간에, 텍스트는 ‘작품’의 자질을 획득하며 독서 현상의 지평에 떠오른다. 문학 현상론적 진단이다.
노유섭 시인은 20세기 주지주의 시학, 이를테면 C. 브룩스와 R. P. 워런이 『시의 이해』에서 제시한 시 비평의 규준들에 무심해 보인다. C. 콜웰이 말한 보여주기showing기법은 물론, 브룩스와 워런 시학의 극적 상황, 이미지, 메타포와 상징, T.S. 엘리엇의 아이러니와 패러독스의 노작勞作에도 빚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노유섭 시인의 시편들은 화법이 독자적이다. 개성이 현저하다는 뜻이다. 슘페터식 ‘창조적 파괴’와 함께 A. 토인비의 ‘은퇴와 복귀’의 문명사적 담론에 맞닿아 있어 보인다.
2. 노유섭 시의 특성
(1) 낯설게 하기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1915년 시클롭스키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내세운 이론이었으나 1917년에 발발한 볼셰비키 혁명가들에게 타도되었다.
시집의 표제 『꽃배추를 아시나요』가 우선 낯설다. 낯선 것은 참신하므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환기한다. 낯선 화법인데도 친근하고 유정하다.
그대는/샛바람으로 왔다가 어느새/머리가 희어지고 흩어져/마파람으로 그 골목길을 돌 아서 가시나요/하늬바람으로 왔다가 어느새/주름지고 허리는 꼬부라져/되바람으로 그 신호등을 건너가시나요
-「바람」에서
바람 시리즈다. 왔다가 가는 인생길의 곡절을 바람 메타포로 낯설게 보여준다. ‘간다’는 지정형이 아닌 ‘가시나요’의 설의법設疑法을 동원하여 호기심을 환기하는 화법이 참신하다.
차린 밥상을 보며/아따 우리가 소냐 어짠다냐/이건 뭐 순 그린필드란 말이시/그라고 처 남도 스칼라쉽으로 유학이나 갔다 와서/한 자리 떡 차지해야 할 것인디
-「달동네, 그리고」에서
전라 방언을 써서 분위기를 살린 시다. 시인들도 가끔 사투리를 활용하여 표현의 효과를 높이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멀리 떠나온 바닷가/그 거리에서, 모래밭 근처에서/소나무가, 원근법으로 다가와/나이가 들어도 나는 이렇게/다만 푸르게 살아 있다고/이렇게 기품 있고 푸르게 살아가야 한다 고/바람 속에서 속삭이며 어루만져 주었다
-「소나무가」에서
소나무의 말을 시의 화자가 듣는 화법으로 씌었다. 소나무가 원근법으로 다가오다니, 낯선 의사진술擬似陳述 pseudo-statement이다.
노유섭 시인은 이같이 대상을 보는 시점을 다각도로 전환하거나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어조tone를 자유자재로 조절해 가며 시의 표출 효과를 극대화한다. 언어 유창성이 놀랍다.
(2) 안정감 있는 시행 배열과 리듬
노유섭 시인의 시편들은 하나같이 읽기에 순탄하다. 시행들이 생체의 리듬에 해조 諧調되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까닭이다. 또한 의미의 단위와 구절 · 문장의 단위가 합일을 이루며 완급률緩急律이 자연스럽게 조절된다.
우리가 미워해야 할 대상은 멀리 있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가까이 있으니
저 산이, 어머니의 품이 너를 품어주듯이
너 또한 그리 해야 한다고
안개 속에서 비로소 은은히 자신을 드러낸 저 산이
나직이 미소 지으며 타이르고 있다
-「산마을」에서
리듬이 순탄하게 이어지는 시행들이 균형미를 드러내며 배열되었다. 가능한 한 서정과 의미의 표상이 일정한 완결성을 유지하도록 배열된 시행들이어서 독자를 편안케 한다. 오랫동안 결별해 있었던 시와 노래가 만나, 노유섭 시인에 이르러 현대적 시가詩歌로 재탄생했다.
수국도 능소화도 속절없이 이우는데
끓는 아스팔트 열기 속에서
바로 저기 나의 끝자락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니 저토록 완숙한 햇빛에
소환한 네 젊은 과일은 익어 가야지
그래도 서러움은 남지 않게
너의 벼이삭도 익어 가야지
-「여름이 내게로」에서
각 시행이 의미상으로 1행 내지 2행 완결성의 형식으로 배열되었다. 흔히 스타카토식으로 서정과 의미가 토막나는 현대 주지시들의 폐풍이 노유섭 시인에 와서 일신되었다. 노유섭 시인은 사유思惟의 어조 안에 서정을 녹여 표출하고 있다.
노유섭 시인은 왜 이렇게 노래하는가?
다시금 맥없이 추락하고 말지라도
그래도 부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항변하는 나의 노래는
어디서 다시 힘을 얻어
햇빛과 바람, 들녘과 무지개, 산맥과 바다를
다시금 노래할 것인가
-「나의 노래」에서
노유섭 시인이 ‘노래하는 자아’를 일깨우는 데는 시인의 본연성과 사회 · 역사의 파란에 연유가 있다. 그의 시가 160여 곡의 노래로 작곡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3) 어조
시에서 어조tone란 소재와 독자에 대한 시인의 태도를 지칭한다. 서정시는 본디 어조가 낮다. 앞에서 예거한 박두진의 「청산도」는 어조가 도도하여 독자를 분기시킨다.
노유섭 시인은 사회적 자아와 서정적 자아의 어조를 조율하기에 성공했다.
그래 그때 봄밤과 봄꿈은/다만 수평선인 양 지평선인 양/우리의 울분과 한탄마저/수 평으로만 이어지는 것이었었는데/ 마냥 수직으로만 내려 꽂히는 하늘은/언제 다시 수 평의 들판과 하나되어/포근하고 따스한 사립문 안 봄꿈 속에/수평으로 누우려나
-「봄밤과 봄꿈」에서
강렬할 법한 어조와 순탄한 어조가 균형감 있게 교직交織되어 해조諧調를 이룬다. 시의 유장悠長해 보이는 서정의 의미와 표상의 텐션을 다잡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 노유섭 시의 어조다.
따닥따닥 팔분음표가 걷는다/오른쪽 엉덩이에 핸드폰 찌르고/치렁치렁 머리 늘어뜨리 고/가을로 간다/ (중략) /베를린에서도 사할린에서도 평양에서도/모국어로 고향을 그 리며/한복 자락 휘날리며/낙엽 몇 잎 떨군/아리랑 고개를 넘는다/다시 가을이다/빗방울 하나 떨어진다
-「팔분음표 가을」에서
디지털 시대 젊은 여인의 가을 보행을 본다. 뒤에서 본 생김새가 팔분음표다. 팔분음표 보폭이니 잰걸음이다. 가을이니 어조는 눅어 가을 서정과 표상에 감싸인다. 역동적 어조dynamic tone와 정적 균형static equilibrium의 미학을 두고 노유섭 시인은 줄기차게 고심해 온 것으로 보인다.
(4) 심미적 윤리
시 쓰기란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내적 싸움이다. 이 싸움의 팽팽한 에너지를 품은 것이 시의 텐션이다. 텐션이 풀린 사회시와 정치시는 드러내기 일변도로 질주하다가 자멸하고, 상징시 · 초현실주의시 · 극난해시는 감추기의 심층 오골성에서 고립을 자초하기 쉽다. 정통 서정시에서 심미적 윤리는 적절한 텐션이 유지된 시적 진술의 내면에 감추인 것일 때 서정시를 서정시답게 한다.
우리 전통시는 자연 서정 편향성을 보인 것이 한계점이었다. 반면에 20세기 『창작과 비평』파의 사회시 · 정치시는 서정 장르에 사회성을 수용한 공적과 함께 서정시에서 서정성을 말살한 폐풍을 남겼다.
햇빛을 주세요/남향 12시 햇빛을 주세요/걸음마 배우듯 창가로 다가가/고개 젖히고 이마를 맞대면/따뜻한 남쪽나라 눈에 어리고/날개 달고 푸른 하늘로 푸드득 날아가는/ 희망 한 줌도 보여요/남향 12시 창문에 기대면/움쩍않는 저 산도 다가오네요
-「남향 12시 햇빛」 에서
심미적 윤리가 시 전편에 스며 편재遍在한다. 낮고 다사로운 어조에 빛과 소망의 심미적 윤리를 실었다. 노유섭 시인의 서정적 자아는 따뜻하고 안온한 표상으로 독자들을 빛의 창가에로 초대한다.
순결한 학생으로만 살았던 그 하숙집에서/5개월 동안 그에게 스쳐간 별과/자랑스런 언 덕과 또 다른 고향,/여기서 20여 년을 살았다는/박제된 천재의 꿈을 그린다/요절이란, 순절이란 무엇인가/아니 그보다 오래 살아/내가 끼친 선한 영향은 무엇이며/그보다 이렇게 오래 살아/ 지은 죄와 욕된 일은 얼마나 많을까
-「서촌에서」에서
윤동주와 이상 시인의 하숙집과 집터를 돌아보고 쓴 시다. 순절의 의미를 묵상하며 시인의 윤리적 자아가 깊은 상념에 잠기는 장면이다. 어조가 사뭇 숙연하다.
지금도 어디선가 사연 깊은 생명은 시들고/아무도 그 사연을 기억조차 하려 않는데/아 직 살아있는 것들은 저리도/살아있음 편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중략) /풀꽃처럼 하늘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조심조심 땅만 보며/다만 저리도 걷고 있는 것이더냐
-「살아있음을 위한 변명」에서
어느 단편의 발단이 “그가 죽었다. 그로 인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로 시작되었다. 인간 실존에 대한 심각한 질문이 담긴 시다. 사실, 세속적 개인사나 세속사의 의미는 수평적 행진 속에서는 허망할 수밖에 없다. 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 걷는 생명들. 허무한 생존이 아닌가. 여기서 시인의 자아는 심미적 윤리의 경지를 넘어 초월의 형이상학을 암시한다.
(5) 취재의 다변화와 표상화의 의미
우리 전통시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자연관으로 ‘공존의 환경 윤리’를 섬겨온 공적이 있다. 반면에 자연 서정 편향성에 과도히 몰입된 한계성이 있었다. 반면에 20세기의 사회시는 자연 서정을 배제함으로써 서정시에서 서정을 고갈시키는 폐풍을 낳았다. 『창작과 비평』파의 행적을 보라.
노유섭 시인은 비교적 취재를 다변화한 서정시를 썼다. 사회 · 역사 문제에서 취재한 것이 다수이고, 자연인 경우가 버금간다. 자아 의식에서 취재한 것이 이들과 어금지금하고, 고향 · 순수 서정 · 초월의 세계를 다룬 것은 소수다.
① 자연
최근에 지구 온난화 문제가 절박한 거대 담론으로 대두되고, 신종 코로나 감염병 COVID19 팬데믹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면서 자연 보호의 중요도가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생명 윤리와 사회 윤리의 관점에서, 21세기 인류는 자체 절멸의 비극을 잉태한 ‘번영의 문명사’를 펼치고 있다. 화성으로의 이주 등 우주 문명사 개척의 꿈에는 이러한 잠재적 비극에 대한 응전의 의지가 잠재해 있다.
아무튼 현대 인류의 비극은 인간과 자연, 인간 상호간, 인간과 절대 진리(절대 가치, 절대자)와의 분리detachment로 인해 빚어진다. 자연 돌보기와 인류의 자연성 회복이 갈급한 상황이다.
이름을 알 수 없었던 꽃,
맨 처음 취직한 울산의 중공업 회사 앞마당에서 너를 보았다
검사 마치고 병원 모퉁이를 돌아나오다 너를 보았다
한 해가 저무는 지하철역 언저리에서 눈 쌓인 너를 보았다
화가인 듯, 음악가인 듯, 시인인 듯
식사 한 번 대접하지 못했지만
쓸쓸한 바람, 눈 속에서만 꽃이 되어
눈에 띄는 꽃
그대 이름에도
꽃이란 말을 붙여주고 싶은 이름,
꽃배추를 아시나요
-「꽃배추를 아시나요」 전편
꽃배추라는 다소 낯선 식물에 관한 직관적 인식 상황을 표출했다. 취직 초년생이었을 때에 처음 마주했던 이 식물이 은퇴한 지금까지 함께하다니,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만남’이 아닌가.
대상 하나를 두고두고 투시하듯 응시하고 관조하는 마음 눈心眼이야말로 범상치 않다. 관입실재觀入實在하려는 부단한 정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 현대시사에서 관입실재의 전범典範이 되는 문인으로 구상具常시인이 있다. 거의 평생에 걸쳐 강의 실재를 두고 관조, 묵상하여 연작 시집 『그리스도폴의 강』을 내었다.
태평양에서 이곳 남대천까지 2만km를
바위와 돌, 거센 물살에 찢겨 온 몸은 벌건 상처로 멍들었어도
도중에 날짐승에게, 곰에게 잡혀 먹히지 않고
(중략)
단 몇 분이라도 크고 매력적인 신랑과의
자연스런 사랑행위가 천운으로 주어졌으니
(중략)
저 영원한 자연으로 회귀할 수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행복한 연어」에서
연어의 회귀와 산란 행위를, 암연어를 화자로 하여 ‘들려주기telling’ 화법으로 표출했다. ‘영원한 자연 회귀’에 자족해 하는 어조다. 자연의 섭리를 말한 시다.
자연에서 취재한 노유섭 시인의 시편들은 자연 자체의 심미적 특성 표출보다 그 존재로서의 의미 포착에 초점을 둔 것이 특징이다.
② 사회 · 역사
노유섭 시인의 시적 화자는 사회 · 역사의식 쪽에서 활기를 띤다.
문학작품의 의식 지향성은 4갈래다. ①개인 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성, ②사회 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성, ③사회 의식의 형이하학적 지향성, ④개인 의식의 형이하학적 지향 의식이 그것이다. 자유 사회에서 사회 · 역사 의식은 ②와 ③의 문제다.
전쟁터에서도/황태국밥을 먹는다/ (중략) /이렇게 온화한 미소로 함께 둘러앉아/말없 이 서로 다독이며 밥을 먹는 것이/어쩌면 기적 같은 일인 것을/입에 넣는 그 뜨거운 국물이/기적 같은 감사인 것을
-「황태국밥」에서
전쟁터에서도 국밥을 먹는 행위, 아무 일도 없는 듯한 묵계하에 밥을 먹는 행위는 단순한 일상인 듯하면서도 숙연하다. 세상살이 하루하루가 ‘전쟁 아닌 전쟁’인데도, 우리의 삶은, 생존의 조건은 이같이 ‘기적 같은 감사’로 엮여 간다. 가위 느꺼운 삶의 실상이다. 어떤 형이상학적 전제도 이 엄숙한 생존 현상을 능멸할 수는 없다.
·인간의 이름으로 피었던 꽃들이/길가에 떨어진 벚꽃잎보다도/아름다운 흔적 하나 남기 지 않고/바이러스 하나에/마구마구 폐기처분된다//누군가는 이또한 지나가리라 위로하 고/누군가는 도시여 회개하라고/요한처럼 부르짖어도/좀처럼 풀리지 않는 이 땅의 열 쇠는/어디서 주어질 것인가
-「인간 붕괴」에서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 우주복 입성으로 플라스틱에 갇힌 창 안에 눈만 내놓은 듯 바닥 에 쭈그려 앉아 조는 의사, 가마니 대신 밀폐된 플라스틱으로 환자를 둘둘 감고 이송하는 구급대원과 마지막을 가족도 지켜보게 할 수 없는 장례사···
-「전쟁터 속 영웅들」에서
신종 코로나 감염병이 창궐한 이 땅의 절박한 사회 상황이 예각적으로 제시되었다. 세포 형태도 갖추지 못한 한갓 바이러스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폐기되는 종말론적, 묵시록적 상황이다. 카뮈가 절규하듯 써 내려 갔던 『페스트』의 상황을 소환한다.
노유섭 시인이 응축하여 보여 주는 시대적 증언으로서의 <신페스트>다. 요한의, 광야의 외침이 메아리치는 상황이 다를 뿐이다.
거리는 거리두기로 아프다 별은 가까이 있는데 가까운 그대와는 멀어져야 한다 겹겹의 벽을 쌓고 다가서지 못하는 눈매들이 아프다 태양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그 빛은 온 몸 에 퍼지지만 어디서 왔는지 그 무엇인가에 그대와 나는 영어囹圄의 몸으로 묶여있다
-「거리 두기」에서
이 시의 ‘거리 두기’는 일견 특수 체험으로서의 ‘분리’에서 일반적 체험으로서의 ‘만남’의 불능 상황으로 확대될 수 있다. 신종 코로나 감염병으로 인한 ‘거리 두기’의 특수 체험이 창작의 모티브일 것으로 유추되어, 사회 의식의 형이상학적 지향성 쪽의 독법讀法으로 읽기로 한다.
아, 이를 어쩌나요 어디서 왔는지 알 수도 없는 미물에 포획되어 바뀌어버린 클릭티비 즘clicktivism 세상 속, 이제는 이전으로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돌아가서도 안 되 겠지만요 그리운 날들은, 온갖 꽃들 피어나듯, 오방색 무지개 피어나듯 세포마다 온 감각 이미지 살아나 함께 어울려 춤출 그 날은 언제쯤 다시 올까요
-「함께 어울려 춤출 그 날은」에서
역시 산문시다. 벅차오르는 격정을 표출하려는 시정詩情의 원심력을 절제하려는 안간힘이 짚인다. 코로나 감염병으로 일상이 뒤틀리고 질식당한 상황을 벗어나, 함께 모여 수무족도手舞足蹈하며 얼싸안을 날을 고대하는 어조가 역연하다.
현상학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의 집단 무의식은 샤머니즘을 텃밭으로 하는 신바람 의식이며, 이는 풀려는 의식과 미치려는 의식으로 작용한다. 이 두 의식의 긍정적 측면은 창조적 응집력이고, 부정적 측면은 광기狂氣와 극한 대결이다. 박두진 · 노유섭 시인의 의식 지향은 광기가 아닌 환희에 찬 전 국민적 응집력의 분출이다.
금이 있는 것에, 금이 있는 곳으로/금을 좇아 너나없이 가는 길,/있는 자도 화천대유와 천화동인으로/없고 막바지인 자도 승자독식 오징어게임으로 몰려가는 길/나의 노래는 그 좌표 어디쯤에 서 있는가
-「나의 노래」에서
2022년 봄을 달군 성남시가 설계한 대장동 개발 비리를 지배소dominant로 하여 소유 만능주의의 세태를 비판했다. 여기서 비평가들은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와 자크 라캉의 『욕망 이론』을 거론할 것이다. 존재가 소유에 억압당하는 것은 부조리다. “욕망의 주체는 나그네, 길은 사막, 대상은 신기루다.” 라캉의 담론은 이 허무 선언에서 끝나지 않는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③ 고향 · 기억 · 그리움
농경 시대와 산업화 시대가 교차하던 시기에 생장한 노유섭 시인은 고향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살아 있는 세대다.
·깊은 내 마음 속/내 마음 속 고향집에선/그림책 이야기처럼 환하고/가슴 따뜻한 날들 이/고마운 오색 물무늬 되어/밀려오누나
-「내 마음 속 고향집」에서
수구초심首丘初心의 향수를 노래했다. 그 향수는 밝고 따뜻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어느 볕 좋은 날/추수할 곡식 기다림이나/그리운 이 호젓하게 기다림은/가슴 설레는 은빛 종소리였다
-「기다림, 그 에움길」에서
이들 시편을 읽으면, 난초의 향기같이 그윽한 사랑으로, 그리움에 젖어 호젓하게 기다리는 마음, 은빛 종소리의 색청色聽 이미지가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그리움은 서정시의 광맥이다.
④ 자아와 초월
서정시의 종착점은 자아 표상이다. 진실을 향한 개안開眼의 지점인 까닭이다.
마음의 고요는 어디서 오는가/고요하라 너의 마음을 맑게 하라고/뿌연 외등 하나 밝히 고/먼 옛날 그랬던 것처럼/다시금 눈이 내린다/ (중략) /차별 없는 고요 속의 고요 속 으로/침잠하라 침잠하라 하느니/비워서 비로소 햇살처럼 피어나는/비밀스런 눈꽃의 언어를 듣는다
-「눈꽃의 언어」에서
비우고 침잠하여 숫되디숫된 눈꽃의 언어에 귀를 여는 순수한 자아의 모습을 그렸다. 노유섭 시의 상념은 이같이 늘 맑고 밝고 다사롭다.
돌아가는 길의 아픔과 괴로움,/다시 사는 길의 놀라운 반전이/이리도 부드런 주름치마 자락에 감싸여 있으니/아가야 아가야 다시 일어나라//아버지여,/지금도 죽어가는 영 혼들을/불쌍히 여기시고/자비를 베푸소서
-「피에타 상」에서
미켈란젤로의 명작 <피에타>에서 취재한 시다. 아픈 죽음과 부활의 뜻을 되삭이며, 인류의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어조가 독자의 가슴을 때린다.
3. 맺는 말
이 글은 노유섭 시인의 시가 소통 불능 현상을 보이는 극난해시 등 20세기적 주류 시학과의 결별 선언에 갈음된다는 말로 시작되었다.
우선 노유섭 시의 표제와 화법은 낯설어 보이면서도 친근감을 주며 독자들을 모은다. 문학 현상론적 강점이다. 2중 주어를 써서 호기심을 환기하거나, 한용운식 설의적設疑的 화법으로 호소력을 배가하는 등의 기법은 독자들의 감성을 흔들기에 효과적이다. 남도 방언을 활용하여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도 주목할 점이다.
노유섭 시의 현저한 특성은 20세기 모더니즘 시가 지워버린 리듬을 되살린 데 있다. 완급률緩急律을 실은 우리 전통 시가의 유장悠長한 리듬에, 서정 · 정서 · 사유思惟의 표상을 해조諧調시킨 공로는 현저하다.
노유섭의 경우에, 개인적 감수성과 형이상학적 지향성을 보이는 서정시의 어조는 낮고 안온安穩하나, 사회 · 역사의 배리背理와 조우하는 경우에는 팽팽히 켕긴다. 이는 시인의 심미적 윤리가 외적으로 분출되기 쉬운 시의 위기와 관련된다. 시의 ‘텐션 조절’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부상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감지되는 초월과 구원 시학의 잠재성은 심층적 독자들에게는 작지 않은 위안이다.
시의 소재에 착목할 때, 현대시는 인간과 자연, 인간 상호간, 인간과 절대 진리(절대자)와의 분리현상을 보인다. 현대 정신사 · 예술사의 비극이다. 인간과 자연의 분리는 서양의 분리적 · 분석적 · 대립적 사고에 그 연원이 있고, 통합적 사고를 섬기는 동양 사상은 자연과의 화해와 합일을 지향한다. 자연과의 만남이 인간 상호 간의 만남으로 전이轉移하는 노유섭 시학의 ‘정신화한 자연’에 기대를 보낸다. 자연에 ‘관입실재觀入實在’하는 형이상학적 자연시 창작을 위한 찬사다.
농경 시대와 산업화 시대가 교차하는 시기에 성장한 노유섭 시인은 본향에 대한 향수鄕愁와, 서정시의 광맥인 그리움과 기다림의 서정을 떨치지 못한다. 그것은 ‘은빛 종소리’의 색청色聽 이미지로 선명히 표상화한다.
노유섭 시에서 초월 지향적 자아의 어조는 심층을 향하여 묻히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 단서를 보인 초월과 구원 의식에 대한 기대는 크다. 평설자는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와 함께 토인비의 ‘은퇴와 복귀’의 문명사 전개에 신뢰를 보낸다. 신앙시 절멸 현상은 인류 정신사의 파탄을 증거한다.
요컨대, 노유섭 시가 우리에게 주는 크나큰 위안은 맑고 밝은 시상과 낙관적 비전이다. 이것이 창조적 파괴와 은퇴와 복귀의 문명사적 의의에 답하는 노유섭 시학의 비의秘義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