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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방에서 이제하
노방(路傍)에서
한밤 거칠 것 없는
들녘에서 다시 눈을 뜨노니
동(東)에서 서(西)으로
강(江)은 흐르고
흘러간 하늘은
뒷곁으로, 뒷곁으로
돌아와 닿고
내 믿는 것은 오직
이뿐, 눈으로 들어오면 눈물이 되는―
너는 저 어둠 속 등(燈)빛들을 느끼이듯이
모든 것을 오래오래
보아 두어라
―눈으로 들어오면 눈물이 되는
바람은 소리, 소리쳐
샘[泉]같이 서늘한
눈물 흐른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62
눈 내리는 강가에서 이제하
눈 내리는 강(江)가에서
이스라엘국(國)에 비 내리듯이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어
내 어머니 배 안에 새로 잠기이듯이
내려서는 녹아서는 구두 속의 뻘물로 괴어오르며
머나먼 소경 땅의 흙 내음으로
뼈다귀 구녕마다 타고 올라오시라
눈이여, 눈이여, 눈먼 눈이여
이 빈 눈구멍도 잠거 주시라, 목울대도 채워 주시라
느릿 느릿이 두 줄 설움 끝나는
어딘가 어디 저 가난한 이들의 꿈속의 생일(生日)
곡괭이질로 울며 파놓은
그 무덤 구멍들도 메워 주시라
눈이여, 마지막 눈 먼 눈이여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다시 바다 이제하
다시 바다
갈 수 없구나, 청산가리(靑酸加里)의 극약(劇藥)
품에 품지 않고서는
푸로펠라 달린 최루탄(催淚彈)을
왼쪽 눈에 박지 않고서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김주열(金朱烈)이 헤엄치는
저기 저
바다
부르짖던 사람들 산(山)비탈로
쫓겨 올라가고
텅 빈 햇볕 드는 텅 빈 하꼬방
솥뚜껑만한 화경(火鏡) 한 손에 쥐고
멍하니 바라보는
저기 저
바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단풍 이제하
단풍(丹楓)&
가을이로다 가을이로다
생선(生鮮)처럼 뒤채며 살려던 목숨이
어째 볼 수도 없는 허공(虛空)에서 아으으
쓰러지는 목숨이
나무마다 나붙어 잎잎이 토하는 핏줄기로다
그래도 못다한 숨결
바작바작 긁어대는 손톱 상채기로다
무엇을 바래 달음질했던 땅에서 하늘 끝에서
되돌아 아뜩아뜩 달려오는 세상에
아! 단풍이로다, 어느 한군데 머리 숙이고
눈물마저 못뿌린 못난 마음이
쑥대밭으로 엉클리어 마구잽이
타오르는 불길이로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데쌩 이제하
데쌩
□ 1
죽음은 나그네 같이
제가 태어난 전장(戰場)에는
머물지 않는다
얘기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前)에
죽음은 내장을 뚫고 총알처럼
도망가 버린다
넘어진 만(萬)의
일등병(一等兵) 앞에
한 놈의
사열관(査閱官)
사열관(査閱官) 뒤에 흰 옷 입은
꿈 같은
간호장교(看護將校)
간호장교(看護將校) 가방 속의
몇 알의
독약(毒藥)
□ 2
죽음은 살이 찌지 않는다
묘지(墓地)에선 사체(死體)로 다만
관(棺)의 길이를 재고
하수구(下水溝) 파이프를 타고
시가지(市街地)로 들어간다
하지만 죽음은 결국
저녁녘의 시장기와 무에 다른가
몇은 바로 앉고
몇은
뒤집혀 앉은 채
어쩔 수 없는 불빛 속을
전차(電車)가 굴러 간다
식당(食堂)이다. 거지가 된 죽음이
문(門)을 열고 들어 온다
밥이 나오기
바로 전(前)인데
사람들은 도미에의 그림처럼
웅성거린다
효자동(孝子洞)
촘촘한 한 사각(四角) 방(房) 속에
목잘린
스커트
핸드백과 우산
혼령 따위
를 못에 건 그대는
자면서 하염없이
이를 갈지 않으려고
꿀럭, 꿀럭, 꿀럭,
양치질을 한다
□ 3
밤이 와도 죽음은
쉴 데가 없다
예배당 종각(鐘閣)에 올라갔다
기겁을 하고 내려 와서
철야(徹夜)하는 노파의
기도(祈禱)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노파가 이마를
청 바닥에 부딪는다
도둑고양이가 된 죽음이
굴뚝으로 들어간다
북(北)쪽의 송장이
뒤집혀 일어선다
효자(孝子)여 효자(孝子)여 효자(孝子)여 효자(孝子)여
아버지와 어머니는
있는 힘을 다하여
할아버지를
자빠뜨린다
□ 4
해가 나오면 죽음은
그림자가 되어
발바닥에 오그라 붙는다
나오지 않는다, 오랑쥬
껍질을 아무리 벗긴들
그리운 그대 배가
아무리 오르내린들
그대의 콧구멍에 젖통 밑에
컴컴하게 들붙어
입체감(立體感)만 한껏
북돋을 뿐이다
□ 5
관잣노리 밑에서
그것이 숨을 쉰다
네 에미는
네 에미는 돌 밑에 있어
나는 뛰어나가 미친듯이
국밥을 먹었다
그리고 창자로 내려가는
국물소리를 들었다
다리 밑
수채 굼ㄱ에서 나자로!
나자로! 하고 끊임없이 우는
구데기들 소리를
나는 들었다
□ 6
어디다 놓을지 알 수가 없는
팔 끝에 매달린 손을 쳐드니
살 난 자리엔 슬픔만이
살얼음 지누나
아침에 세수를 하려고 하니
대야 속의 물이 나를 보면서
태아(胎兒)를 담거두는 후레스코의
에칠 알콜처럼 느껴 우누나
푸줏간 천정의 하늘짱 우에
렌트겐 사진의 갈비짝 같은
아, 내 사랑, 내 어리석음
그래, 그래, 나는 찬찬히
구두끈을 매리
월급을 타리
자지라 들며 두들기는
그대의
소나타를 들으리
혈관주사 바늘의
쇳내음같이
목구멍의 이마까지
치받혀 오르는
이
내 세상
내 즐거움.
저 어둠 속 등빛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바다 이제하
바다&
일렁거리는 저 물두렁은
빠져나간 혼령들의 잔치 탓이다
남빛 댕기단 누님의 상사춤이다
할아버지의 장고소리다 장고소리다
오늘은 손매디를 모두 모아 안경쓰듯이
그리운 가슴으로 바라다 보면
학(鶴) 날개 같은 돛이야 높이
노래를 부르다가 돌아보고 우리를 손짓하다가
이제는 한아름
허우적 허우적 물로 출렁거리는
우리 선생님, 우리 선생님
시락국 먹고서 키가 큰 우리
시락국 먹은 후엔 바다로 가자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밤의 추억초 이제하
밤의 추억초(追憶抄)
□ 1 실내(室內)
죽은 애기들은 알지
밤은 마지막 그 샅 한복판에서
희디흰 한 줌의 뼈를 게운다
거울 속에서 뼈는 자란다
죽은 장님들은 다 알고 있어
세계(世界)는 밤이 보는 한 장의 거울
칠색(七色)의 넥타이를 자꾸만 고쳐매는
나는 가외로 삐어진 허망(虛妄)한 사나이
(왜 이런 생각만 하는 것일까?)
헛청, 헛청, 헛청, 헛청, 찾아서 간다
뼈는 화장(化粧)을 하고 주름살을 지우고
정(情)든 창부(娼婦) 마냥 나를 맞는다
돌아보지 말아요, 뒤의 뒷창(窓)의 유릿장 밖의
뼈도 국물도 없는 저 놈의 신경통(神經痛)!
찢어질 듯이 너풀개치는
흑청색(黑靑色) 살[肉]뿐인 세계(世界)의 신경통(神經痛)!
보지 말아요, 자세히 보지를 말아!
뼈는 없는 내 귀를 후비어 대고
기절(氣絶)도 못한 채 거꾸로 나는 눕는다
거울이 쪼개진다, 열 두 토막으로
뼈가 깨어진다, 삼천육백(三阡六百) 구멍으로
구멍마다에는 우리들의 이름이
미지(未知)의 수풀처럼 까물거리나……
□ 2 램프
기억하나, 이 어둠은 밤이 아니고
밤이 동댕이치는 그림자가 아니고, 그림자의
주검이 아니고
귀신(鬼神)이 업고 가는 관(棺)이 아니고
기억하나, 이 어둠은
무너나는 황토(黃土)가 아니고, 우는 그 빛깔의
모태(母胎)가 아니고, 쑤셔찢는
그 아픔이 아니고, 번쩍이는
포탄(砲彈)이 아니고,
전장(戰場)이 아니고
내 딸이 아니고
기억하나, 이 어둠은
재[灰]가 아니고, 미쳐난 계집의 마음이 덮는
재보다 높이 오른 구름보다도
더 높이, 높이 뜬 자락에서 떨어져 나온
니그로! 니그로! 세계(世界)의 사생아(死生兒)가
웃는 입이 아니고……
□ 3 숫자놀이
우리들이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을 때
포탄(砲彈)이 터졌다, 이름 없는 공동(空洞), 소리 없는 섬광(閃光)
하나는 피, 하나는 피의 그림자
우리들이 같이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두 폭(幅)의 정원(庭園)이 찢어져 내렸다, 꽃밭 속에서
하나는 사랑, 하나는 사랑의 그림자
(전력을 다하여 너는 속삭이지만
세 무더기의
재[灰]가 흩어지고 있다.
저것은 공허(空虛), 나머지는 공허(空虛)의 그림자)
풋뽈처럼 멀리서 뛰어와도
보라, 희랍 아테네의 순수(純粹) 대리석(大理石)의
석주(石柱) 같은 것이
무너진다, 무너진다, 대양(大洋)을 향(向)해
그것은 절규(絶叫), 나머지는 절규(絶叫)의 그림자
사지(四肢)가 절단(切斷)난 너의 울음은
갈 데 없는 앉은뱅이……
일곱의 철문(鐵門)이 닫히고 있다
하나는 저주(詛呪), 여섯은 저주(詛呪)의 그림자
목 없는 내 웃음은, 이젠 벌써 미친 바람[風]이다.
아홉개의 보자기가 덮여간다
하나는 벌판, 나머지는 벌판의 그림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공중(空中)에서도 물 속에서도
우리들은 쉴 수가 없다
너는 예수가 아니고 나는 광야(曠野)가 아니므로
열 세 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하나는 까마귀, 열 둘은 까마귀의 그림자
그리하여 기도(祈禱)밖엔 남는 것이 없을 때
하늘에는 가량할 수도 없는 무덤들이 돋아난다
하나는 신(神), 나머지는 신(神)의 그림자
□ 4 모자(帽子)
낮에 졸지 않으려고
나는 밤에 눈을 뜬다
낮엔 당당히 꿋꿋이 서 있으려고
나는 밤에만 꿈을 팔며 뛰어다닌다
웃는 그대의 눈을 보려고
밤에야 나는 안대(眼帶)를 푼다
(빛나는 날빛 속에 내 모두를 그대에게 바치리라)
나는 온밤 내 서랍들을 다 뒤엎는다
그래 아침에 허둥지둥 내가 출근을 하면
그때까지 내 책상엔 누군지가 쿨쿨 자고만 있고
그대는 가없이 허(虛)한 눈으로
지난 밤 구멍을 들여다 보고만 있다
□ 5 전차(電車)
마른 나무가 타는 듯한 텅 빈
전차(電車) 한 대를 곁에 세우고, 크낙한 밤이 깃들어 쉬도록
빨강과 노랑과 자줏빛 도는
푸른 꽃을 여기저기 들고
우리들은 비가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으나)
우리들은 차라리 끊임없이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개자식!'하고 누군지
어디론지 개처럼 침을 뱉고 있었다
(꺼져버려라, 꺼져버려) 소근대는 시외(市外)의 밤 하늘
공처럼 통통대며 뛸 수는 없고
외등(外燈)은 켜이고 비는 내리고
월말(月末)이라 어느 구녕에선지
어둠은 거미처럼 망서리면서
내민 우리들의 축축한 손바닥을 핥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우리들은 무리를 쓴 듯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왜 그랬어? 왜 그래? 왜 그랬담? 하고
끊임없이 후회(後悔)를 하는 듯이 보였다
지친 나머지 빈 손을 너무 꼭 쥐어
어둠은 한 다발의 지폐로도 보였다
외등(外燈)은 켜이고
비는 내리고
꽃을 잔뜩 실은 듯 새벽으로 전차(電車)가 떠나기 전에
우리들은 비가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으나)
왜 그랬어? 왜 그래? 왜 그랬담? 하고
한 마리의 비둘기를 부르는 듯이
그 어디론지 자꾸 침을 뱉으며……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방 2 이제하
방(房) 2
네모 입방(立方) 닫힌 그 방(房) 속에는
천연색(天然色) 거울이 한 장 붙어 있더라
주름투성이 옷 한 벌이 걸려 있더라
꽉 막힌 휴지통 하나가 앉아 있더라
뱃속까지, 뱃속까지 흙으로 차서
보살처럼, 보살처럼 앉아 있더라
흙 속에서 또 누군지 울고 있더라
바닥의 바깥의 그 바닥까지
바깥의 바닥의 그 바닥까지
믿지 말고 아무것도, 믿지를 말고
내가 가는 내 바닥이 보일 때까지!
여기는 하늘이니, 어쩌라는 것인가?
어차피 모두가 텅빈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방 3 이제하
방(房) 3
늙어서 그네는 넋이 빠져 죽었다
동무 창녀(娼女)들이 그네를 업어내곤 문(門)짝에다가
욕지꺼리 같은 대못들을 꽝꽝 박아 두었다
진분홍 상채기도 상채기에 타 내리던 피도 고름도
지새며 울던 꿈도, 꿈속에 뿌리 뻗던 계수나무도
계명(鷄鳴)의 넋두리도, 그 쌍 넋두리도, 더 이상은
번지지 마라 번지지 마라
욕지꺼리 같은 대못들을 꽝꽝 박아두었다
화장(火葬)터 자연(紫煙)도 젖어서 떨어지는
충충한 밤중비 석달 열흘의
새 포주(抱主)와 창녀(娼女)는 와서
사투리로 사투리로 못을 뺐더니
그녜 아스라한 양복(洋服)입은 옛 낭군(郞君)
사진(寫眞)틀 아래
방(房) 속은 그녜 내음이 등천(登天)을 하고.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비 이제하
비&
있는 것들을 있게라도 하고 싶은
침침한 기다림
위에 펜으로 갈기듯이
비가 온다
`비가 온다, 비가 온다'고 나는 쓰고,
`비가 내리누나!'라고도 나는 써 보지만,
흰 도화지 위에
비는 오지 않는다
하늘 네 귀엔 울금향(鬱金香)
채일을 치고
비는
무덤 속으로만
스민다
삼십인(三十人) 나자로의 삼(三)천 날
뼈마디가 밀어올리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저
박쥐의
환영(幻影)……
플루시안 불루우
그리인 코발트
갈 길 없는 길
의 화안한
막막함
우산(雨傘)도 못 가지고, 이 세상(世上)에선
나의 누이가
서럽게 웃으며 뛰어서 오고……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사랑에 대하여 이제하
사랑에 대하여
구멍가게집 아들이 갑자기 죽고
서리가 내린 날 아침
나는 사랑의 현시(顯示)를 확실히 보았다
아내가 흰 이를 반짝이고 웃으면서
황금(黃金)의 된장을 푸는 것을 보았고
며칠 내 녹슬었던 수도 꼭지에서
샴펭처럼 물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관(棺) 주위에서
가마귀의 피를 삼키듯이, 조금씩
울었다
누가 예측했으랴, 바로 엊저녁에
사과 몇 알을 건넨 청년(靑年)이 빈 병같이
갑자기 쓰러지고, 구름처럼 떠나가버릴 줄을
(아내는 받은 거스름돈을 불에 태우고
나도 씹던 사과씨를 멀찍이 뱉아버렸다.
물물교환(物物交換)의 시대(時代)였다면 우리는 아마
기절이라도 했었으리라, 그러나)
그러나 시간(時間)의 초침(秒針)조차
사랑이 황금(黃金)으로 녹아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아내와의 입맞춤, 느낌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금(金)빛에서 보라
보라에서 핑크
핑크에서 남빛, 남에서 다시 짙은 회색(灰色)으로
통근버스가 오고
5원짜리 하나로 온통
뒤범벅이 돼버린 그 빛깔의 중심(中心)에서
무엇 때문인지
사장(社長)을 만났길래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면서
혹독하게 깨달아버리고 말았던 거다
(세상에서 황금(黃金)빛 사랑을 모르는 놈은 바로
자신(自身)뿐만이 아닌가 하고)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새 이제하
새&
한 마리의 새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아직도
생각해야 하나. 제 그림자에 놀란 순수파(純粹派)처럼
날은다, 날지 않는다, 다 날아가 버리면
나는[飛] 것도 없어지므로
사십(四十)마리의 비둘기를 일년(一年) 동안 길렀다. 집새라고
개처럼 여길 수가 없었다
배고픈 새는 끝내 배고프고,
말없는 새는 끝내
말이 없다 옥상(屋上)에서 뛰어내릴 수가 없어서
새는 난[飛]다
새의 일상(日常)도 사람만큼이나 지저분하다. 여기저기
똥을 깔기고
보금자리 싸움으로 중놈처럼 꾸룩거리고, 짝 때문에
앙앙불락(怏怏不樂), 때론 제 새끼를 버려
얼어죽게도 만든다(무지막지하다), 하지만 보라!
구름 비낀 저녁답에도 어느 폭우(暴雨) 쏟아지는
아침에도, 그 모든 것을 박차고
새는 날아오른다
일만개(一萬個) 깃의 예비경련(豫備痙攣)
저 탁 트인 의지(意志)
도도해서 차라리 활짝 핀 꽃 같은
저 비상(飛翔)을 보고 있으면
이것 없이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고
차마 거짓을 말할 수가 없다
그리운 사람이여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 좋은
그대의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까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62
샤갈 앞에서 이제하
샤갈 앞에서
□ 1
마을의 동(東)쪽과 서(西)쪽을
입이 찢어지게 웃고 오던 천사(天使)의
수염을 썩둑
잘라버리는 가위
의 임자는 같은 천사(天使)다
다리[脚]가 있어요? 일전(一錢)짜리 동전(銅錢)
사람들은 누운 채
막 뛰어가고
혼자 남은 물고기
얼굴 복판에
보일 듯 말 듯한
열쇠의 구멍
□ 2
팔 없이도 그대를
들 수만 있다면야
꿈깰 무렵 내 대신
그댄 잠들고
그대 무덤 속에서
나는 눈을 뜨련만
외투(外套) 속의 이빨은 너무 무겁고
그 슬픔은 또한 너무 슬프고……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설경 이제하
설경(雪景)&
□ 1
지금 우리들이 보는 것은, 머리처럼 뜯겨서
피도 없이 겹쌓이는 백의(白衣)
쥐죽은 듯한 저
종(鍾)소리뿐이다
그대 몫에서 그만큼만
떼내라, 그리고
배고픈 귀는 내 쪽으로
돌려다오
그 한치 높이의
천상(天上)에서는
귀신 같은 여뀌풀도
뻗고 있다, 그것도
잘라내라, 그리고
쓸쓸한 귀만은 내 쪽으로
돌려다오
□ 2
내 세상(世上)은 여섯 모로
엎어져 있고
공중(空中)으로는 찌르는 듯이
깔깔대며 달려가는
수소(水素)의 신(神)들
옛 친구들 다
어디 숨어 있는지
철사 같은,
철사 같은 전봇대 하나
하수구(下水溝) 바닥에 가
꽂히어
있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설야 이제하
설야(雪夜)&
시집 가서 늙어버린 계집애가 오거든
아주 처음 만난 듯이 오래오래
입을 맞추리
설운 그늘 짙게 짙게 떨어지는 여윈 어깨의
그 조그만 머리를 꼭 껴안고
희푸른 창(窓) 곁으로 웃으며 가리
비뚤어져 내리는 우리 검은 입술은
보리차나 끓이어 바로 적시고
골목마다 바알간 불을 올려달면서
`그립다' 소근대는 처녀애들은
구둘목에 불그레 살찌게 두고
눈 온다! 눈 온다! 소리 질러라
늙은 사랑아
시집 가서 쬐그매진 계집애가 오거든
그 주름살 자리마다 모두 입을 맞추고
눈 그쳐 뜨는 새벽별 같이
눈 그치고 떠오르는 새벽별 같이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역풍경 이제하
역풍경(驛風景)
기다리는 사람의 천(阡)의
끔찍한 얼굴을
보아버린 나머지
가장 중후(重厚)하고 성실(誠實)한 차림으로 덜덜 떨며
가장 중요(重要)한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는 없다고
믿게 되어 버린다
지붕 위에 명목(暝目)하는 불길한 새같이
꼴사납게도 창자 속에서
한 번밖에 없는 사랑을 까욱, 까욱
짖어대기나 하면서
누가 뭐래도 일편단심(一片丹心), 그렇다고
빨갱이는 아냐
나는 검어, 칠면조 같은
사람의 일곱 가지 기분의 유장(悠長)한
유장(悠長)한 총화(總和)
지상(地上)에서 가장 근사한 제복(制服)의 역장(驛長)나으리가
뚜벅, 뚜벅
오지 않는 기차(汽車)
헌 팔목시계처럼 길바닥에
동댕이치더라도
승강구에는 절대로
보이지 않을 얼굴
악어가죽 혁대(革帶), 수석판사(首席判事)의 수염
낙제생 가방, 노(老)배우 마스크, 대통령(大統領)의 안경(眼鏡)
절박한 강도(强盜)의 칼에 찔려서,
설백(雪白)의 빙원(氷原), 설설 기는 곰의 나라, 죽은
모자(帽子) 속의
유인원(類人猿)의 하얀 사령(死靈)을 훔쳐다 바치는
개찰구 저쪽의
피가 마르는 듯한 환시(幻視)
시그날― 번번이 헛짚는 노다지, 하염없는 칸데라의
불빛
원뢰(遠雷)― 얼어 붙은 균열(龜裂)
도오낫츠같이 따수한 연기를 지평선(地平線)
너머에서 퐁퐁 밀어올리던
소년(少年) 같은 마음이 식어간다, 호주머니 속에서 싸늘하게
우주(宇宙)의 평형(平衡)과 뻥뻥 뚫린 구멍의 신(神)이
끈에 꿰어 겨울 땅바닥에 다만 태질이나 하고 있는
슬프고 검은
우리들의 기다림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연기 1 이제하
연기(煙氣) 1
투지(鬪志)도 열정(熱情)도 깨고 나면
하늘 저편으로 깨끗이
벗겨져 가버린다, 대머리처럼
간밤에도 신혼(新婚)에서 돌아오는 미지(未知)의 아내와
피가 나도록 나는 싸웠다
밤이 밤[栗] 껍질처럼 까질 때까지
설사 밤이 밤 그 자체의 칠흑(漆黑)빛으로
반창고처럼 납작하게,
옹고집으로 굳어서, 절대로 안 쪽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양으로 울부짖었더라도
나는 싸웠으리라
고백(告白)하지만 내 바닥에는 아직도 저 시원(始原)의
방화(放火)의 본능(本能)이 건재(健在)하고 있단 말씀야……
토질(土質)처럼 뻑뻑한 아침
시디신 오랑쥬 같은 해가 한 개
빛나고 있기에
어리석게도 무엇이든 더 좀 태워보고 싶어서
점퍼를 벗어들고 다리 밑으로 내려간 것이다
성냥을 그어 대자 점퍼의
대공(大空)을 향(向)해 V 자(字)로 쳐든 일상(日常)의 소매 구녕에서는
미련(未練)처럼 한꺼번에 연기(煙氣)가 쏟아져 나왔다
연기(煙氣)는 구경거리가 못된다, 의상(衣裳)도
불알도 없으니까, 다리 밑은
한 무더기의 빈민굴(貧民窟)
귀신 같은 할멈 하나가 우정 다리 위로 올라가
굽어보더니 말했다
ꡒ저 양반 누가 죽었나뵈ꡓ
아이들은 떠들었다
ꡒ죽었다! 죽었다!ꡓ
물론 터무니없는 소리다
아무도 멋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저 파뿌리의
늙은이도 영양실조(營養失調) 그 자체의 환각(幻覺)같이
키가 작은 아이들도
태어나면 도시(都市)는 벌써 그물이다, 스스로
찢어지기 전(前)에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전신(全身)을 꿰뚫고 울며 사라지는
습(濕)한 전선(電線)의
이 진저리 나는 실감(實感)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럼에도 그물의 저편에서 지금
무언가가 간단(間斷)없이 죽어넘어지고 있다
내 피 속에 마르는 그대의 피
내 절벽(絶壁) 위에
칼을 맞고 무너지는
그대의 절벽(絶壁)……
돌아보니 한 줄기 시궁창이 추억(追憶)처럼
바다로 내려가고
점퍼는 벌써 타서 벌레 마냥 움츠러 들어서
먼 화장터처럼 거기
놓이어 있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정경 이제하
정경(情景)
내 달리다 우뚝
서 보는
다우쳐 오는 아름차는
하늘만 같은
가슴에 와 부딪쳐
푸른 물로, 푸른 물로 번지는
신록(新綠)과도 같은
날아간 한 마리
새의
붉게 붉게 침몰하는
해의
팽팽해진 가슴에
있을 곳이 없어 차라리
넘쳐 흐르는 눈물의
두렁마다 하나씩
흔드는 손의……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청솔 그늘에 앉아 이제하
청(靑)솔 그늘에 앉아
청(靑)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라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다
혹은
하아얀 햇빛이 깔린
어느 도서관(圖書館) 정원(庭園)이라 해도 좋다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노곤한 그리움이여
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
다정한 얘기가 하고 싶다
아니 그냥
당신의 그 성그런 눈 속을 들여다 보며
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다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靑)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
풍경 A 이제하
풍경(風景) A
길 건너 화장품점(化粧品店)
채양 밑 대낮
의 캄캄한 어스럼
구멍가게 주인(主人) 얼굴
한복판에 꽉 잠긴
내 얼굴
길을 질질 끌며(한 마리의)
개는 지나가고, 그 뒤엔
(그렇게 생각되는) 순결(純潔)한
여섯 명의 여학생(女學生)
이 구두에 치는 못[釘]
을 보고 있다
세 명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십리 저쪽의
전차(電車) 속에서
한 명이
사과를 깨물며, 오고
있다
교실(敎室) 밖에 치미는
두 가닥의 레일
그 침울한
월경(月經)의
길이
피를 뒤집어 쓰고도
웃으시는 어머니
대한제국(大韓帝國)
나의 출생(出生)
만(萬)번의 만세(萬歲)
만권(萬卷)의
신간(新刊)
의 표지(表紙)를
일제히 잦혀도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노래가
작은 귀가 점점점
작아져 가는
오후 두 시(時)
다 파헤쳐진
창부(娼婦)의 시간(時間)
운명(運命)의 팔방(八方), 월급의 전후좌우(前後左右),
소경이거든 소경, 먹[墨]이거든 먹
흑암(黑暗)으로 스미는 길이거든
(흑암(黑暗)으로 스며들어, 아주아주
돌아오지 말아라)
나는 가지 않는다
길 건너 화장품점(化粧品店) 채양 밑 대낮의 캄캄한 어스럼.
구멍가게 주인(主人) 얼굴 한복판에 꽉 잠긴 내 얼굴.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청하,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