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요약 남송의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가지며,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질서를 갖는 것이다.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주희(朱熹)
성리학은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訓詁學)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 : 1472~1528)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대 성리학의 성립에는 불교 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성리학의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랐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현실의 자연과 사회는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거경궁리).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한국 성리학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고려 말기 원나라를 통해서였다. 이미 고려 중기부터 유교를 심성 수양의 도리로까지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무인란 이후 유불일치의 사상 경향이 대두하면서 유학자들 역시 심성 수양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학문·사상계의 이러한 동향은 이 시기의 정치적사회적 변동에 대응하여 새로운 방향에서 주체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후 원나라를 통해 도입된 성리학은 이러한 노력에 부응하는 것으로서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새로운 개혁이념으로, 국가 교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자들은 유불일치(儒佛一致)의 사상경향 속에서 불교적 심성 수양과 유교적 심성 수양의 차별성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양자의 차별성이 명확하게 된 것은 왕조 교체를 전후한 시기에 불교 비판이 본격화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비로소 유교적 심성 수양은 윤리도덕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며, 불교적 심성 수양은 현세를 초월한 정신적 해방을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차별이 인식되었다. 정도전(鄭道傳 : 1337~98)권근(權近 : 1352~1409)은 성리학의 이기론인성론에 바탕을 두고 불교의 초세속적 성격과 그 철학사상을 비판했으며, 초학자를 위한 성리학의 입문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특히 권근에 의해 그 방향이 결정된 성균관 중심의 관학 교육도 유교교육의 기본 교재로 〈소학〉을 채택했고, 경학의 내용도 육경(六經) 이전에 사서(四書)의 학습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유교적인 도덕규범의 실천을 이끌어내기 위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고려 말기 이래의 정치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성리학의 교육과 보급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당시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념적 대응을 모색하기보다는 이미 확립된 예제법제의 준수를 강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상경향이었다.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사림계 학자관료들은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다시 이해하고, 재지사족까지 포함한 지배층 일반의 도덕적 실천을 통해 당면한 사회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함을 강조했다. 나아가 국가의 예제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질서, 가족제도까지도 성리학의 이념에 따라 재편할 것을 주장하여 향약 등을 실시했다. 조광조(趙光祖 : 1482~1519)를 대표로 하는 사림계 학자관료들의 개혁이념은 도학정치사상으로 집약되었다. 도학정치의 이념은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 유교의 전통적인 왕도사상을 재해석한 것으로, 삼강오상의 윤리도덕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 내용으로 파악했다. 이러한 정치는 군주를 비롯한 지배층의 도덕적 실천과 함께 인민에 대한 도덕적 교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도학정치사상은 지배층의 도덕적 책임의식을 더욱 심화하고, 나아가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명분론적 질서에 따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15세기 말엽부터 사림계 학자관료들은 이러한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사회적 노력을 계속했으나, 당시 집권세력의 탄압에 의해 그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정치적사회적 실천의 이념적 근거인 성리학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추구되었으며, 그결과 16세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학문의 중심 내용으로 자리잡았다. 이언적(李彦迪 : 1491~1553)과 서경덕(徐敬德 : 1489~1546)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에 대한 이론적 탐구는 이황(李滉 : 1501~70)의 단계에 와서 특히 심성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이(李珥 : 1536~84)의 〈성학집요 聖學輯要〉에서 보이듯 성리학에 바탕을 둔 경세론도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성리학의 이론적 특징을 보여주는 사단칠정논쟁(四端七情論爭)인심도심논쟁(人心道心論爭)이 시작되어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과 이이의 이기겸발설(理氣兼發說)로 체계화된 것도 그무렵이었다.

퇴계 이황(李滉) 영산서원(英山書院)은 퇴계 이황(李滉)의 위패를 모셨던 곳이다.
이러한 이론적 탐구를 통해 우리나라의 성리학은 다양한 사상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주자성리학의 이기이원론적 세계관과는 달리 기일원론의 세계관을 확립한 서경덕의 사상체계, 이기이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면서 심성 문제에 보다 깊은 이해를 보인 이황의 사상체계, 이기일원론적인 세계관에서 심성 문제를 설명한 이이의 사상체계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또 조식(曺植 : 1501~72)은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황이이와 차이를 보이지만, 도덕 실천의 문제를 강조하는 점에서는 그들보다 적극적이었다. 그는 주희에 의해 성리학의 문제들은 이론적 탐구의 여지 없이 해명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도덕 실천에 더욱 힘쓸 것을 강조하는 학풍을 수립했다. 이와 같이 성리학 내부에서 다양한 학문과 사상적 흐름이 형성되고, 그것이 학문이나 도덕적 실천에서 사우(師友)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결합하면서 16세기 말엽에는 이황조식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학파에 의해 각 서원에서의 연구와 교육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성리학은 17세기 학문·사상의 지배적 조류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예학의 발전을 이 시기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성리학에서 강조되는 명분론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윤리도덕이 제대로 실천되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윤리도덕의 객관적 실천 규정인 예를 바로 세우기 위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따라서 성리학의 발달은 예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16세기의 성리학자들도 이미 예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 17세기에는 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예의 구체적 시행 문제에 대한 탐구로까지 이어지면서 다양한 예론으로 정립되었다는 점이 이 시기 예학의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주자가례〉를 근간으로, 사대부 중심의 예학을 발달시키면서 이념적으로는 '천하동례'(天下同禮), 즉 예의 보편적 적용을 주장하는 서인의 예론과, 〈주자가례〉와는 다른 체제의 예서를 편찬하면서 이념적으로 '왕자례부동사서'(王者禮不同士庶), 즉 군주의 경우에는 예의 적용이 달라야 함을 주장하는 남인의 예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예론의 차이가 정치적 대립과 결부하여 예송(禮訟)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는 이기심성론에서도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퇴계학파 가운데 주로 영남남인을 중심으로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계승하여 이이의 이기겸발설을 비판하는 사상체계를 확립해갔다. 이현일(李玄逸 : 1627~1704)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러한 학문·사상 경향은 이발(理發)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는 점에서 주리파(主理派)로 불린다. 이에 대해 이기겸발설을 계승한 학문·사상 경향은 기발(氣發)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주기파(主氣派)로 불린다. 18세기 초반에는 주기파 내에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성동이논쟁(人物性同異論爭)이 벌어졌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임성주(任聖周 : 1711~88)에 의해 기일원론의 철학사상이 정립되기도 했다. 그후 19세기에는 철학적으로 주리론의 경향이 강화되면서 기정진(奇正鎭 : 1798~1879)이나 이진상(李震相 : 1818~86)이 이일원론적인 사상체계를 정립했다. 그러나 이미 17세기 후반부터 성리학은 변화하는 사회현실에 전진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학문·사상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기 시작했으며, 그대신 실학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학문·사상 조류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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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儒學)의 한 형태로서, 중국 송대(宋代)에 발생한 성리학이 조선에 들어와 전개된 학문.
조선 성리학이라 할 때는 이것이 조선 유학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는 측면에서 조선 유학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리학은 선진(先秦)의 근원 유교나 경서(經書) 주석을 주로 한 한(漢)ㆍ당(唐)의 훈고학(경학)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성리학이라고 한 것은 '성'(性)이나 '이'(理)를 논하는, 일종의 철학적 이론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경서(특히 『주역』 『사서』를 중심으로)의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이기론'(理氣論 : 本體論)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 등이 전개되었다.성리학의 다른 명칭으로는 송대에 이루어졌다 하여 송학(宋學)이라고도 하며, 정호(程顥)ㆍ정이(程) 형제와 주희(朱喜 : 주자)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하여 정주학(程朱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또한 새로운 유학이라는 의미로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고도 한다.
그 주류는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 불리우는 주자학과, 심학(心學)이라 불리우는 육왕학(陸王學 : 陸九淵ㆍ王守仁 계통의 학파)과 양명학(陽明學)의 양대 학파이다. 그러나 흔히 성리학이라 할 때는 좁은 의미로 주자학 계통만을 일컫는 것이 상례이다. 조선 성리학은 특히 이학계통의 주자학이 정통으로서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조선성리학을 흔히 주자학이라고 일컫는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은 우리나라에 고려 말 충렬왕(忠烈王) 때 원나라로부터 안향(安珦)에 의해 전래되었다. 안향은 1289년(충렬왕 15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베끼고, 공자ㆍ주자의 상(像)을 그려 가지고 왔다. 고려 말의 사회풍조는 노불사상(老佛思想)의 지나친 신비주의에 빠져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 국가의 차원에서 새로운 학풍 진작이 요구되었다.
원나라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주적 독립성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도 주자학은 윤리적이며 합리적인 차원과 함께 사회 국가적으로 적극적이고 문화적인 활력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영을 받았다. 고려 말의 성리학은 성균관을 중심으로 안향ㆍ백이정(白正)ㆍ권부(權溥)ㆍ이색(李穡)ㆍ정몽주(鄭夢周)ㆍ길재(吉再)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사상적 전환의 계기가 된 '배불숭유'(排佛崇儒) 운동으로 성리학은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성리학은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크게 2대 계열로 나누어졌다.
하나는 정몽주에서 시작된 의리학파이다. 이 계열의 학풍은 인간의 내면적 본성을 강조하고 만고불변의 도덕의식을 개발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정도전(鄭道傳)ㆍ권근(權近) 계열로서 조선의 훈구파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기서는 불변의 인간성 개발보다는 상황에 대응하는 창조적 변혁을 강조하며, 관념적 의리나 도덕보다는 인간의 의지적 연마와 지식의 개발, 그리고 문화의식을 고취하는데 그 중점을 두었다. 조선 유학사상사의 정통을 말할 때 정도전 계열보다는 정몽주 계열의 학맥을 연원으로 삼는데, 이점이 조선성리학의 특색이다.
정몽주에서 시작된 이러한 성리학은 그 후 길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등으로 이어졌다. 조선 성리학은 4대 사화(四大士禍) 이후 선비들이 실천유학으로서의 지치주의(至治主義)보다 산림에서 학문에 전념하는 풍조가 일어나 이론적이며 사변적인 학품 조성으로 그 전성기를 맞았다.
15~16세기가 절정기로서 이황(李滉)과 이이(李珥)가 그 대표로 조선 성리학의 쌍벽을 이루었다. 이황은 기대승(奇大升)과 더불어, 이이는 성혼>(成渾)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 -.사단(四端) - 측은(惻隱)지심, 수오(羞惡)지심, 사양(辭讓)지심, 시비(是非)지심 -.칠정(七情) - 기쁨(喜), 성냄(怒), 슬픔(哀), 두려움(懼), 사랑(愛), 미움(惡), 욕심(慾) 에 관한 논변을 통하여 이기성정론(理氣性情論)과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등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한편, 내면적 도덕 원리인 인성론(人性論)은 송익필(宋翼弼),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등에 의해 유학의 행동 규범인 예설(禮設)로 전개되었다. 특히 사단칠정론의 인성(仁性)에 대한 분석과 변론은 보편적 이념인 성품이 인간과 동물에 있어서 같은가 다른가를 물었던 호락론(湖洛論)의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 문제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한편 이기론(理氣論)은 조선 전기에서 는 이ㆍ기의 조화를 추구하는 입장이 우세했던 반면, 중기 이후에는 그 중 어느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곧 주리론>(主理論)과 주기론(主氣論)을 주장하는 양파로 갈라졌다. 이 주리ㆍ주기의 논쟁은 조선 성리학의 양대 분파로 발전하였다. 조선 성리학의 특징으로는 자연이나 우주의 문제보다 인간의 내면적 성정(性情)과 도덕적 가치의 문제를 추구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또한 사단칠정론, 인심도심설, 그리고 주리ㆍ주기의 쟁점에서는 중국 성리학보다 진일보한 일면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이 근본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한 이유
중국 송나라 이후 성리학은 명나라를 통해 급속히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이 성리학은 고려 말 안향(安珦, 1243~1306.9.12)에 의해 소개 되었는데, 본시 성리학이란 불교의 초세간적 의식을 극복하고 중국 민족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만들어진 사상이었기 때문에, 고려 말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 자존심 회복을 위해 고심하던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본시 고려 시대 때는 불교가 국교(國敎)였으며 유교는 정치철학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교는 수신(修身)의 길을 제시하였으며, 유교는 치국(治國)의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수입된 성리학은 불교를 배척하는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으므로 유교(성리학적 유교)가 불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고려의 문신 이색(李穡)은 이른바 유불동도론(儒佛同道論)을 제시하면서 성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불교에서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색의 문하에 있었던 정몽주(鄭夢周)는 그의 스승과 달리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승려들의 무위도식하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정몽주 역시 배불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았고. 개인적으로 승려와 교류를 하는 등 온건한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고려말 문신 중 가장 극단적인 배불론자(排佛論者)는 정도전( 鄭道傳)이었다.
정도전 역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와 수학했던 인물인데 고려 말 시대 상황을 인식하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였다.(정확하게 이 두 학자는 공양왕 이후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게 된다)
정도전은 고려 말 상황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면서 새로운 질서 수립에 필요한 사상과 이념을 창출해야 한다는 진보적 입장을 취했는데, 그런 그에게 성리학은 고려의 오랜 사상이었던 불교를 정리하고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공할 매우 유용한 논리적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은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의 새로운 정치 질서 수립을 위한 움직임과 그 방향을 같이하였다. 그 후 이성계가 이색의 정치적 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예를 들어 이색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한 이후 우왕을 유배 보내자 이를 정치적으로 제제하기 위해 창왕을 즉위 시켰다) 세력을 얻는데 성공하자 새로운 나라, 즉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서 핵심 브레인 역할을 하게 되었고, 그의 머리 속에서 나온 이데올로기에 따라 조선이란 나라의 이념이 기초를 잡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조선은 고려 말 복잡했던 시대 상황 속에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성리학을 수용하여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는데, 여기에는 조선 건국의 실질적 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들이 현실 개혁 정치에 성리학이 유용하다고 판단하여 수용한 점과, 이색 문하의 세력들과 뜻을 달리 하면서 성리학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와 질서를 창출하고자 했던 정도전에 의해 조선의 건국 이념이 정해졌다는 점, 이상의 두 가지 점이 조선이 성리학의 나라가 된 매우 기초적인 이유라는 것이다.
1. 조선왕조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이유?
성리학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상 고려부터였지요. 그런데 구귀족세력이 불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고 원의 세력과 결탁하여 국가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답니다. 하지만 과거를 통해 어렵게 관직에 오른 신흥 사대부들은 녹봉을 제대로 받지 못하자 그 이유를 토지의 대부분을 소유한 구귀족 세력 때문이라 생각하여 불교에 사상적 기반을 둔 구귀족 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을 만들게 됩니다.
그것이 성리학이며 14세기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공민왕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흥 사대부들과 힘을 합쳐 원의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 구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관학과 과거제도를 통해 신진 세력을 양성 등용합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장악에 성공한 신흥사대부들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매진, 숭유억불정책을 표방하면서 국가의 모든 문물제도를 성리학이념에 따라 정비 백성의 생활의 원리로까지 성리학이 심화되도록 애썼고 이후 성리학은 기본이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2. 이황이 왜 건의를 했나요.
이황이 왕에게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명칭이 바뀐 것도 성리학의 보급과 크게 무관하지 않습니다. 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받아들여야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은 절터가 서원으로 바뀌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주세붕이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유학자인 안향을 모시는 문성공묘(文成公廟)를 세워 배향해오다가 1543년에는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건립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기초로 유생을 교육하여 여러 명의 급제자를 내게 하는 등 서원체제를 갖추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백운동서원은 어디까지나 사묘가 위주였고, 서원은 다만 유생이 공부하는 건물만을 지칭하여 사묘에 부속된 존재에 그쳤지요.
이러한 서원이 독자성을 가지고 정착, 보급된 것은 이황에 의해서인데 이황은 교화의 대상과 주체를 일반백성과 사림으로 나누고, 교화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를 담당할 주체인 사림의 습속을 바로잡고 학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오로지 도학을 천명하고 밝히는 길밖에는 없으므로,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도장으로서 중국에서 발달되어온 서원제도가 우리 나라에도 필요한 것이라고 하여 서원의 존재이유를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 위에서 그는 마침 풍기군수에 임명됨을 기회로, 우선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 안에서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3. 사림이 향약을 보급하는데 힘쓴 이유는?
사림은 15세기의 집권세력이던 훈구세력과 더불어 고려후기의 사대부에서 분파되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사대부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건설되었으므로 이성계를 추대한 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이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사대부라 하여도 조선왕조의 개창을 둘러싸고 성리학에 충실한 일부 사대부들은 왕조교체가 의리도덕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이성혁명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향촌에 내려가 교육과 향촌건설에 주력하였습니다. 이들의 후예를 흔히 사림 또는 사림파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부터인데 훈구세력의 팽창을 막기 위해 성종의 발탁으로 김종직(金宗直)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이어서 그의 제자들이 다수 관직에 등용됨에 이르러서는 훈구세력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세력을 이루게 됩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과 대립은 연산군 4년 (1408)에서 명종 즉위년 (1545)에 이르는 47년간 4차례에 걸쳐 일어난 사화로 표면화 됩니다. 이때에 희생된 선비가 180여명에 달하였으며 그들 대부분은 명유였습니다. 초창기 서원의 향사자들의 대부분이 이때에 피화된 명현들이었지요.
사화로 인한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좌절된 사림들은 그들의 활로를 개척해주고 성장의 터전을 마련하고자 하였고 그들은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사림의 결집을 도모하고 향촌활동을 합리화 해줄 수 있는 구심체로서 서원을 만들어가기 시작합니다. 항약을 보급하는데 힘쓴 이유가 바로 향촌에서 사림을 결집하기 위한 구심체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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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 대해
사실 조선 성리학은 물론이고 국사에 대해서도 쥐뿔도 모르는 놈입니다만....밑에 임진왜란 관련글이 올라오니 아는만큼 한번 써봅니다;
성리학은 송나라 주희가 만들었습니다. 뭐,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모든 현상엔 이유가 있죠. 그럼 성리학은 왜 만들어졌는가?
그건 바로 무서운 속도로 민중을 잠식한 불교와 도교신앙에 대한 유학의 대반격이자 당시 급증하는 외세-북방민족이죠-에 대한 대응논리로서 만들어졌습니다. 원래 중국인들은 굉장히 현실세적인 민족입니다. 이건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제대로 된 내세신앙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공자는 귀신의 존재에 대해 극히 회의적이었고 노자나 기타 도가도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는 그렇게 심도있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또 중국인은 굉장히 정치적이라, 엘리트 지식인=관료, 혹은 관료 지망생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됩니다. 아마도 초기부터 다른 문명에 비해 많은 인구를 다루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어 인문 철학이 발전한 그리스(소규모 도시공동체죠)나 사후신상이 발전한 이집트(사막이란 환경은 추상적인 사고를 발전시킵니다)에 비해 일치감치 현세적인 사회철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바글거리는 인간과 그 문제를 다루는 학문, 즉 유가와 법가가 등장하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문화 엘리트가 결국 관료사회와 관련되는 사회니 살아남은 제자백가는 유가와 법가, 그리고 도가뿐이었습니다. 이중 도가야 나중에 종교의 형태를 취하며 민중의 종교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유가와 법가는 정치 엘리트의 통치 이념으로서 지배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게 됩니다. 백성을 덕과 예, 그리고 법으로서 다스리는 것이 동아시아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고, 그 중심 역할이 법가와 유가입니다.
장황하게 말했지만 결국 유교는 시작부터 정치적인 학문이었습니다. 또 도교는 민중에게 사후세계에 대한 설명을 못하고요. 결국 사후신앙에 대한 수요는 윤회신앙이 발전한 인도의 불교가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사회가 안정적이었던 통일왕조기에는 불교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오호 십육국 시기라는 대전란기를 통해 사람들은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을 품게 되었고 결국 불교는 굉장한 충격을 주게 됩니다. 불교의 윤회사상은 사람들이 가진 근본적인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을 해주게 되었고 지배계층 역시 현실의 불평등을 이론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이건 중국, 아니 동아시아 역사에서 하나의 혁명이었습니다. 결국 중국 민중의 신앙세계는 불교와 도교가 지배하게 됩니다.(서로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 말이죠)
이러한 추세는 당나라때까지 계속됩니다. 당시의 유학은 지배계층의 이데올로기이지 일반 민중 개개인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지 못하는 형편이었죠. 이렇게 유교는 불교와 도교에게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만.....
송에 이르러 정이와 정호 형제, 주돈이, 장재등의 걸출한 유학자들이 나오게 되었고 이러한 사상체계를 집대성한게 바로 그레이트 킹왕짱 주희님이십니다. 사실 성리학에서 주희 개인의 독창적인 사상을 얼마 들어가지 않지만 이러한 신유학(한, 당유학에 비교하여)들을 모두 집대성하여 통일적이고 아름다운 이론체계로 만든 것이 바로 주자이죠. 그래서 조선왕조500년동안 우린 크고 아름다운 주희만 믿고 간다, 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사상체계를 만들게 됩니다. (물론 육상산의 철학과 그에 이어지는 왕양명의 양명학을 통틀어 심학, 이라 하여 성리학, 즉 이학과 구별되는 흐름이 있지만 조선에선 약간 듣보잡이 되버리고 후기에 부상하게 되죠. 명나라는 일치감치 심학쪽으로 갔지만....그래서 성리학에선 오히려 본고장 중국보다 조선이 한몫하게 되는 거죠. 소중화 사상은 그래서 나왔습니다.)
이 성리학의 특징은 일단 유교와 도교를 반대하는 입장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정치, 도덕철학인 유교 입장에선 불교와 도교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 뚜렷한 가치 기준도 주지 못해 사회의 지배철학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철학이었습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긴 하죠. 불교의 경우 도덕적인 가치 기준을 주지 못합니다. 왜, 모든건 공이니까. 업보란게 있지만 그게 유교처럼 뚜렷하지 못하죠. 도교도 마찮가지고요. 결국 종교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주희의 성리학은 바로 실학實學이라 불렸습니다. 왜? 실제적인 현실에 관심을 두는 학문이라서. 후대의 실학이 근거도 없이 실학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이미 실학이란 단어는 불교를 극복하는 유교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성리학은 불교와 도교를 반대하지만, 결국 시작부터 큰 영향을 받은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왜냐. 당시 지배적인 이념은 도교와 불교였으니. 도교의 좌망과 심제와 같은 명상버과 불교에서 말하는 수양론이 성리학의 개인심성수양으로 발전합니다. 이것은 성리학이 도학이라 불리는 이유죠.
이것은 종래 정치적인 성격만 지녔던 한, 당 유교에 비해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영역으로까지 유교가 적용된다는 겁니다. 이건 불교와 도교가 개인의 심성에서 차지하는 부분을 대신 차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유교의 대중화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리학이 중세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위치입니다. (원래 불교는 이理의 극단이고 도교는 기氣의 극단이니 어쩌구 하는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건 쉽게 쓰는 글이니 패스....)
결국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동아시아=한나라부터 청까지, 유교가 무조건 킹왕짱이었다, 는 아니었던 거지요. 오히려 송시기부터 유교의 대반격이 시작된 것이고요. 아무튼 이 불교와 도교의 영향은 기존 유교에 미약했던 개인의 심성수양이란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유교가 일반 민중에게 파급력을 가지게 한 혁신적인 동력원이죠. 모든 사람이 내면의 본성이자 천지만물의 이치, 즉 이異를 갈고 닦으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가지는 혁신적인 점은 바로 모든 이가 평등하다는 점이죠.(물론 성리학에서도 이점에서 많은 갈래가 있지만)
불교? 평등하지 않습니다. 업보에 따라 왕후장상과 민중이 갈립니다. 원래 부처의 뜻이 그렇지 않다 한들. 도교는 애초에 현실의 정치적 불평등에 신경쓰지 않습니다. 물론 성리학에서도 지배계층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있지만(바로 수양을 잘한 사람들->사대부가 정치해야 한다, 라는 논리죠) 그 출발점이 평등하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겁니다. 당나라까진 귀족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신유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은 송때부터는 과거를 통해 능력에 의해 중앙관료를 뽑았습니다. (당때부터 과거했지만 본격적용은 송, 이건 고려와 조선의 관계와도 흡사)
결국 성리학의 예라는 것은 뜬구름잡은 헛소리가 아닌, 실학이었던 겁니다. 비록 서양철학의 사생아인 현대인이 보기엔 이 역시 현실과 거리가 먼 뜬구름잡는 이야기지만, 이 이와 기를 다루는 성리학이란 그 자체로 동양의 사상체계인 것입니다. 이건 독자적인 세계관, 독자적인 사상입니다. 애초에 서양의 눈으로 판단한다는 것이 무리가 있습니다. 그렇담 이 성리학은 조선에서 어떻게 받아들여 졌는가.....
일단 고려 후기 원나라에서 성리학이 수입된다는건 다들 아실겁니다만, 아직도 조선초까진 관학의 측면, 즉 통치질서의 측면에서 받아들였지 개인적 심성수양의 깊은 철학적 단계까진 가지 못했습니다. 본고장이 아닌데다 원나라는 성리학은 그닥.....이란 입장이었습니다.
아무튼 성리학은 불교중심의 고려사회를 물리치고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기 위해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귀족적인 고려에 대비되는, 사대부 중심의 조선사회가 만들어진 것이죠. 불교는 철저히 배격당하고요. 하지만 세조때도 절을 창건하고 불사를 드리는등 성리학은 아직 확고한 지배를 하지 못했습니다. 민중에게도 아직 덜 파급되었고요.
이것은 관학파, 즉 훈구 집단과 사림의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성리학이 민간으로 파급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사림이 나타납니다. 중앙의 권신들은 성리학을 현실 중심으로 받아들였고 사림은 좀더 엄격한 성리학적 심성수양을 통한 인격을 완성해야 이상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죠. 결국 공부 많이한 사림이 이깁니다(이것도 복잡한 이야기지만 패스;;; 전 아직 이런 이야기를 쉽게 쓸 정도로 내공이 없어서 ㅜㅜ)
결국 훈구는 자연스럽게 사림세력으로 녹아들고(그들의 자제부터가 이미 사림에게서 배우니까;) 사림이 지배세력으로 떠 오르며 우리나라 성리학의 황금기가 시작됩니다. 이황은 성리학을 마스터하여 결국 '완벽이해' 한 사람입니다. 킹왕짱입니다.
하지만 이이는 완벽이해를 넘어서 '더' 발전시킵니다. 그레이트 킹왕짱입니다. 즉 오소독스한 이황의 주리론과 현실적인 이이의 주기론이 부딪히는데, 이것이 동인과 서인이란 붕당의 시작입니다.
결국, 임진왜란 시기는 성리학의 황금기였지 이것이 썩어들어가는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느낍니다. 아, 당시 조선의 정치가 왜 대단한지. 조선과 같은 이상적 왕도정치를 구현한 국가는 당시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론의 중요성을 알았고, 진정한 선비들이 있었습니다. 비록 현실적인 힘에선 약했지만(약할 수 밖에요. 일본은 조선 인구의 2~3배입니다. 여진족? 그 거대한 명나라가 개발살 납니다.) 그러한 외세의 침입이 완전히 성리학의 문제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긍정적으로 볼 부분이 '더' 많습니다. 도둑이 침입을 했으면 도둑을 탓해야 하지 총기소유를 하지 않은 주인을 탓해야 합니까... 거기다 임진왜란은 격퇴를 성공한 전쟁이었습니다. (청은....솔찍히 진짜 초깡패라 어쩔수가;) 아직 우리에게 성리학의 이미지는 고리타분한 예학, 현실과 무관한 이상적인 담론, 심하게는 망국의 병을 준 질병으로까지 받아들여지지만, 이는 다분히 깊은 상처를 남긴 식민사학의 영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선 성리학은 역동적이었고, 오늘날에 와선 실학 역시 성리학과의 단절성이 아닌, 연속성을 중요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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