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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화(文人畵)/사군자(四君子)
1. 사군자 매난국죽... 눈 속에서 꽃부터 피어나 청아한 향기로 봄을 알린다는 매화, 척박한 틈에서 고고한 향기를 내품으며 푸르름을 잃지 않는 난초, 서리 내린 늦가을, 모든 꽃들이 지고서야 만개하는 국화, 그리고 속은 비었으나 수직으로 자라며 사시사철 맑은 바람을 품은 대나무...
2. 사군자화는 언제부터, 왜 그렸을까? 사군자는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왜 그렸을까? 금란지교처럼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와 맹자는 난초의 향기를 매개로 우정과 신의를 노래했지만, 이것이 유학자들의 시서화중 주요한 주제로 부각된 것은 송나라때(소식, 미불 등의 문인화론, 1100년대), 요나라와 금나라, 소위 중국인들 입장에서보면 변방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한 이후부터 유행이 된듯 싶다.
그 유행이 고려에 전파되면서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1100년대)과 정지상 등 유학자에 의해 그려지고, 주자학을 국시로 천명하여 유학자가 사회주도층으로 부상한 조선시대에 필수교양으로 부상된 거 같다. (이미 조선 초기부터 산수나 인물보다 대나무 잘 그린 사람을 화원으로 뽑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남북방 오랑캐에 불과한 왜국과 청나라의 침탈로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받은 조선중기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다, 다시 1700년대 중반 진경산수의 득세로 잠시 주춤해지지만 조선 유학이 관념의 극치로 내달은 세도정치시기에 크게 확산되고, 일제강점기로 맥을 이어간다.
이런 시각에서 요약하면, 사군자화는 성리학자들이 외세의 침입이나 부패한 권력과 사회에 탄식하며, 한편으론 저항정신의 표출이기도 했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도피와 회피, 그리고 망국에 대한 슬픔 등 어두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고, 이와 비슷하게 임진왜란과 양자호란 등 조선 유학자 입장에서는 오랑캐의 침입을 받으면서 오히려 강해지는 중화사상까지 접목시켜 유행한 문인화의 주제였다. 그러면 군자의 표상이자, 문사의 아취, 시인의 풍류, 망국의 자화상이기도 했던 사군자화를 서사적이며 외적인 이유만으로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 선비들이 즐겨 그렸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문인화의 내적 변화의 계기를 인문적 사상사의 흐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3. 조선 사대부, 선비들의 사군자 문인화론 우리에겐 자연을 도의 구현체나 담지자로 인식한 도교적인 소우주관이 오랜 세월 천착하면서 자연의 의인화와 인간의 자연화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인간과 자연을 일치시키려는 관점이 있었고, 사군자는 인의예지(仁義禮智) 효제충신(孝悌忠信)과 학문을 두루 갖춘 군자의 8덕목과 일치하는 소재였다. 여기에 사물을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 아니라 이(理)로 본다는 성리학적 사물인식과 이를 토대로 한 미의식은 사군자를 완상(玩賞)하고 상찬(賞讚)하고 창작하면서 상징성을 부여하는데 그것은 사군자를 탐리(探理)한 옛 성인과 문인들에 감응하고 정신을 계승하는 동질화 체험이기도 했다.
또한 작가의 주관적 심의와 흥취에 인격과 교양 및 이상과 염원까지 포괄하려는 문인화의 등장은, 대상물에 내재된 철학적, 문화적 함의를 작가의 품성과 교양을 통해 재창조하는 그림을 요구하였고, 심안(心眼)으로 대상을 궁구하여 군자의 이상과 자연의 도를 발흥시키는 것이 창작의 궁극적 목표가 되었다. 더군다나 사군자의 단순한 조형성은 붓글씨의 형상성과 일치하여 시서화(詩書畵)일치가 강조될 수 있었다. 그래서 소식은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지시(畵中之詩))”했고, 추사는 “난을 치는 법은 반드시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연후에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4. 조선 사군자화의 미술사적 전개 1) 그러면 조선에서의 사군자화는 어떤 미술사적 흐름을 가지고 전개되었을까? 앞서 이야기하였지만, 이미 고려시대 김부식과 정지상 등이 대나무와 매화를 잘 그렸다는 말이나, 조선초 화원선발에서 대나무 그림을 1등으로 삼았고, 세종대왕이나 성종 등이 난을 잘 쳤다는 말이 있듯이 많은 문헌에 기록되고 1400년대 강희안이 대표적 인물이었다고 하지만, 실제 작품은 남아있는 것이 드물고, 원대 사군자풍이 남아있는 조선초기 사군자화는 문헌자료와 청화백자 등을 통해 경향성만 유추할 수 있다.
2) 사림의 태두 조광조의 몰락부터 1600년대 중반까지의 조선중기 ; 조선적인 성리학 체계와 문화가 기반을 잡아가면서 새로운 시도들이 일어나면서 수묵문인화가 유행하고 임진왜란과 양자호란을 통해 정립된 조선의 정체성과 사대성이 사군자화를 통해 표출된 시기였다. 율곡 이이에 의해 정립된 조선성리학을 바탕으로, 초창기 이념미가 강하게 표출된 조선 문인화가 탄생한다. 문인화 삼절로 조선 묵죽(墨竹)의 최고봉이라는 이정과 묵매(墨梅)의 최고라는 어몽룡, 황집중이 그들이다. 소재의 특징이 명료하게 부각되는 화면구성, 극명한 대비를 중시한 조형감각, 서예성과 회화성의 조화, 절제되고 응축된 기세의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하는 이정의 묵죽화는 조선 묵죽화의 전범이 되었다 한다.
3) 명의 몰락과 청나라가 등장하는 전환기의 1600년대 후반에서부터 1700년대 시기 ; 종화풍 영향과, 관념적 사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사실성과 현장감이 전제된 진경산수풍속화가 유행하고 사생적 회화미가 강조되면서 사군자화는 부진해지다가 1700년대 중반 남종화풍의 문인화가 본격 등장한다. 유덕장, 윤득신 등에 의해 조선고유색이 계승되다가 심사정, 강세황에 의해 남종화풍이 수용되어 유행하고, 김홍도의 서정적 사생화와 강세황의 남조화풍은 추사 김정희 주도의 청조 문인화풍으로 변하게 된다.
4) 1700년대 후반부터 1800년대를 전후한 조선후기 ; 단원 김홍도, 임희지 등에 의해 계승된 사군자화는 지조나 절개의 상징의미와 법식이 완전 퇴색하고, 파격적 자유로움으로 화자의 희노애락과 감흥을 풀어내는 매개체로서 표현자체에 탐닉하는 다양한 소재에 대한 그림 중 하나로 바뀐다.
<간송 미술관... 전시회가 열리는 이 건물은 보화각이란 이름으로 1936년 지어졌고, 1966년 전형필 사후 한국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이 발족하게 된다... 사가와 함께 있어 조심스럽지만, 오솔길 사이사이로 석조불상, 석탑, 부도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간송 전형필 선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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