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가는 안성의 공예 3 - 한지와 방각본
한지(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이은영 제작)
안성시 보개면 기좌리는 예로부터 한지로 유명한 마을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하더라도 이 마을 주민의 대다수가 한지를 만들었으나 지금은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곳에서 한지를 만든 것은 약 400년 정도 된다고 한다. 기좌리에서 만든 한지로 달력을 만들어 관상감에 공급하였다고 전해지나 문헌적 근거는 없다. 일제강점기에는 100여 가구 이상이 모여 ‘한지조합’을 만들어 마분지를 만들었다.
안성의 한지에 대한 언급은 『조선왕조실록』에 몇 차례 등장한다.
1792년 3월 “안성의 종이 만드는 지장(紙匠)으로써, 자원하여 수원 신읍으로 이사하려는 자에게 4천냥을 대출하여 주라”는 비변사의 내용이 나온다. 이는 수원 인구를 늘리기 위하여 시장을 활성화 시키려는 의도였다.
“수원에 한 달에 시장을 여섯 번 세우고 한 푼이라도 절대 세를 거두지 말고 단지 서로 장사하는 것만을 허락한다면, 사방의 장사치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모여들어서 전주나 안성 못지않은 큰 시장이 형성될 것”이라는 체재공의 상소로 알 수 있다. 도시를 만들어 화성을 지키고 보수하는데 필요한 인력을 조달하기 위함이었다.
한지건조기(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이은영 기증)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안성의 지장으로 한정하였는가에 대하여는 의문이 남는다. 그로부터 약 두 달 후 정조는 수원의 신읍으로 이사하기를 원하는 안성의 공인들에게 2만 냥을 대여하라고 하는 전교를 내린다.
처음에는 안성의 지장만 4천 냥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으나 후에 안성의 모든 장인들을 대상으로 확대하였고 2만 냥으로 금액도 늘었다. 왜 수원의 신읍을 활성화 시킬 장인들을 안성출신으로 한정하였는지 명확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수원과 가까운 안성에 당시 전국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여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할 수 있다.
1835년 서유구의 『임원십육지』에 따르면 당시 안성장 특산물 중에 종이가 들어있으며 1861∼1866년 사이 고산자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에도 안성 특산물로 종이가 나와 있다. 그리고 1893년 오행묵이 쓴 『여재촬요』에도 한지가 특산물로 나와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안성 한지가 특산물임이 명확하다.
안성에서 만든 종이가 유명하다는 것은 다음 속요에서도 알 수 있다.
안성유지(安城油紙)는 시집가는 새아씨의 빗집(梳入)감에 맛침이다.
『안성기략』에 나오는 이 속요는 안성에서 생산되는 종이 중에서도 특히 기름종이(油紙)가 유명하였고, 이 기름종이로는 여자들이 빗을 보관하는 빗통을 만들었는데 시집가는 새아씨가 혼수로 가져갈 정도로 유명했다는 뜻이다.
유망한 안성지 :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 기좌리에서 생산하는 안성백지는 그 제조의 유래가 오래되고 지질이 양호하여 일반의 수요가 많은바 금번 그곳 제지동업 제씨는 그를 개량발달하기 위하여 제지조합을 조직하고 보개면장 유진복씨가 조합장이 되어
- 중략-
그곳의 제지업자는 전업으로 하는 자가 12호, 부업으로 하는 자가 23호, 계35호인데 연산액은 16,000원에 달하는 실로 장래 유망한 사업이라 하겠으며
<동아일보> 1923. 2. 12일
지금으로부터 270년전 효종 4년에 종래의 역서(曆書)를 폐지하고 비로소 구라파 사람 탕약망의 시헌력을 나라에서 만들기 시작하여 지금부터 20여년 전 광무융희 시대에 이르기 까지 매년 역서용지를 거액으로 산출하고 겸하여 과거에 쓰는 감시명지(鑑試明紙)와 옛서적을 인쇄하는 종이와 창호지, 시장지, 유물지(油物紙) 등을 만들어서 전국에 널리 판로를 두고 대량으로 생산 판매하였음으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광무(光武)시대까지만 보더라도 기좌리 130여호와 불현리 20호에서 100호 내외가 종이를 만들었다 한다.
<동아일보> 1929. 7. 4일
한 집에 평균 만드는 종이는 100괘(1괘는 200장)로 총계 10,000괘(2,000만장) 내외를 생산하여 당시 시가로 10여 만 원에 달하였음으로 안성읍내에서 십리쯤 밖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이나 기좌리는 어제든지 풍성풍성한 기운이 가득하게 되고 매년 역서(曆書)를 인쇄할 시기기 되면 역관이 수만의 돈을 가지고 이 동리에 이르러 종이를 사 모으게 되어 동리사람들은 돈더미위에 올라앉은 것 같이 되고 따라서 여러 가지 장사꾼들이 모여들게 되어 마치 시장처럼 되었다 한다.
<동아일보> 1929. 7. 4일
이상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안성에서 한지가 얼마나 중요한 산업인지 알 수 있다.
기좌리에서 생산되는 한지만 연 2,000만장이었다는 부분에서 생산량을 알 수 있고, 동네 사람들이 돈더미 위에 올라앉은 것 같다는 표현에서 생산액을 짐작할 수 있다.
닥솥(안성맞춤박물관소장, 이은영 기증)
당시 한지의 생산은 고부가가치 산업이지만, 기좌리에서는 이를 넘어 2차 산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조선 후기에 오면 안성에서는 방각본을 출간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민간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간행한 인쇄본을 ‘방각본’이라고 하는데 안성은 방각본의 판각지로 유명하다. 서울(경판), 전주(완판) 그리고 안성이 방각본의 3대 판각지로 꼽히는데 안성판 방각본은 대부분이 기좌리에서 만들었다.
기좌리에서는 한지를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히 방각본도 만들었으며, 이곳에서 만든 방각본은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 등 학습 교재에서부터 『춘향전』, 『홍길동전』 같은 한글 소설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안성판 방각본 천자문(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이곳에서 언제부터 방각본을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1929년 <동아일보> 기사에서 “이밖에 그 동리에서는 옛날부터 사서, 삼경, 통감, 동몽선습, 천자문 등 구서적을 목판(木板)으로 인쇄하여 전국에 팔았다 한다.” 라고 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19세기부터는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안성장에서는 『춘향전』 등 안성판 방각본이 자연스럽게 판매되었으나 지금은 기좌리에서도 전혀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 되었다.
『안성기략』의 저자인 김태영 선생이 1956년 쓴 『안성문화금석관』에 나와 있는 보개면의 한지 출판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안성읍에서 동북으로 약 4키로 되는 보개면 기좌리 및 불현리 촌락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제지업이 성행하여 백지, 창호지, 환지(파고지를 원료로 한 재생지) 등을 많이 생산하여 안성유기와 아울러 안성종이의 이름이 높은 바인데 기좌리에서는 조선시대에 역서(력서 ; 시헌력)를 인쇄하였으며 각종 고서적을 목각판으로 발간하였다. 역서는 민간에서 임의로 출간하지 못하는 것으로 정부(관상감)에서 관원을 파견하여 전국에서 쓰이는 역서를 이곳에서 출판하였고 기타서적은 민간인의 손으로 출판되었는데 어느 때부터 여기서 제지업이 생기고 출판업이 시작되었는지 역사적 문헌이 없어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수 백 년 전부터 기원한 것 일지오 어째서 기좌리에서 역서를 출판하게 되었느냐 하는 것도 알 길이 없으나 짐작컨대 서울서 가장 가까운 곳인 이곳에서 제지업이 성행한 까닭 일지오, 언제부터 이곳에서 출판업이 계속되었느냐는 것도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부터 삼십 여 년 전까지 안성시장에서 기좌리판의 고본 춘향전 등 소설책이 판매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신문화가 수입되어 활판인쇄가 성행하게 되자 목각판의 서적이 수요 되지 않게 되어 자연히 폐업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위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좌리에서는 조선시대에 한지로 역서를 만들어 관상감에 공급하였다고 하는데 이 같은 내용을 뒷받침하는 문헌은 없다.
다만 추고하여 볼 부분은 1871년 발간된 군읍지인 『안성군읍지급읍사례책(安城郡邑誌及邑事例冊)』에 안성관아에는 관상감 생도 7명이 있었다는 것이다.
군(郡)이라는 작은 위계의 안성관아에 관상감의 생도가 7명씩 된다는 것은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비슷한 인구를 가진 다른 지역과 비교해 봐도 관상감의 생도가 7인이라고 하는 것은 과하다. 관상감이 하는 일은 천문, 기상, 지질 현상의 측후와 같은 일이므로 안성과 같은 작은 군에서는 7인씩이나 필요치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안성에서 이들 생도들은 비교적 쉬운 일인 한지의 생산 및 역서의 제작을 지휘하여 관상감에 납품했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 짐작되나 이에 대하여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안성판 방각본 통감(안성맞춤박물관 소장)
이렇게 수 백 년 간 융성하던 보개면 기좌리의 한지생산업이 사라지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의병운동과 관련이 있다.
1907년 8월 1일 군대 해산이 있은 며칠 후인 8월 24일에 의병대장 정주원이 인솔한 의병 1,200명이 기좌리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8월 25일 아침에 일본군 20명, 일진회원 10명과 접전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의병은 도망가고 주민들도 난을 피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일본군이 와서 150호 중 63호에 불을 질러 제지공장 대부분이 불타버려 파멸되었다고 한다.
그 후 바로 복구를 하였으나 현대식 서양종이가 등장하며 이곳에서 만드는 종이는 수요처를 점점 잃게 되었다.
1929년도 당시 제지업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은 기좌리와 불현리 108호 중 30호, 부업으로 품팔이를 하는 사람은 63호였다. 1928년 연간 제조한 종이는 백지, 기름종이, 투전용지, 포장지 등 대략 2,000괴이며 가격은 10,000원 내외이지만 전보다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시대적 조류인 서양종이로의 전환에 대응하여 안성에서는 1929년 3월부터 마분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마분지는 벽지로도 쓰고 장판지로도 사용을 하는데 주로 중국에서 만드는 종이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마분지 만드는 기술이 없었으나 경기도청 산업과에서 여러 차례 시험 결과 마침내 성공하여 기좌리에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기좌리 사람들은 원래 종이 만드는 기술이 있었기에 이곳에서 만드는 마분지는 금새 품질을 높여 중국에서 만든 것 보다 품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하여 잘 팔렸으며, 이에 따라 기좌리는 마분지로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시 현대식 종이와 활판인쇄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었는데 1965년부터 김태○이 기좌리 제지업을 소규모로 운영하다가 1971년 완전히 생산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마지막으로 안성한지의 전통을 잇고 있던 사람은 대대로 기좌리에서 한지를 만들던 최영은이다. 그는 한때 원주 등 외지에서 한지를 만든 적도 있었으나 십여 년 전쯤 고향인 기좌리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안성의 마지막 한지 장인인 그도 경제적인 이유로 약 3년 전쯤 완전히 한지 생산을 접어 이제는 맥이 끊긴 상태가 되었다.
홍원의(안성맞춤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