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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여행1 - 우에노공원에서 왕인박사 비에 참배하고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을 보다!
여행 9일째인 2019년 4월 12일 시즈오카현 미시마(三島 삼도)에서 09시 05분 신칸센 고다마
こだま 를 타고 10시에 도쿄역 에 도착해 코인로까에 배낭을 넣고는... 벚꽃 을 보기 위해
JR 패스 로 야마노테선 山手線(산수선) 을 타고 우에노역에 내려 우에노공원 으로 들어갑니다.
우에노 공원은 북동쪽 으로 부터 에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칸에이지 의 자리에
1924년 다이쇼 일왕(천황)이 천황가 영지를 도쿄시에 하사 하여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공원의 공식 명칭은 우에노 온시코엔 (上野恩賜公園)
상야은사공원 으로 "일왕(천황) 이 선물한 우에노의 공원"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공원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걸어서 왕인 박사의 비 (博士王仁碑) 를 보는데 왕인 은
5세기 초인 서기 405년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진(応神 응신) 왕의 태자 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본에 한문 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왕인(王仁) 은 태자의 스승으로 일본 유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닦아 ‘서수(書首)
의 시조’ 로 추앙 받았다는데..... 오사카부(大阪府) 의 히라카타 (枚方 매방) 에는
왕인 박사의 묘 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으니 오사카부는 1938년에 사적 13호로 지정
하여 중요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으며 여러 곳에 왕인을 신으로 모시는 신사 가 있습니다.
천자문(千字文) 은 天地玄黃 宇宙洪荒 (천지현황 우주홍황) 으로 시작되니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며
우주는 넓고도 크다” 는 뜻인데 조선에서는 “하늘천 땅지 검을현 누를황 집우 집주 넓을홍 클황”
으로 읽으며 한문을 배우던 기본 교재 로 중국 남조 양 (502~549) 나라의 주흥사 가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책으로 다른 한자 1000자를 사용하여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 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왕인은 이보다 백년전에 일본에 가져갔으니 오늘날의 천자문은 아니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삼국시대에 종요(鍾繇)가 지었다는 천자문 인가 보는데,,,, 왕인은 일본에서 죽었으니
일본 학문 발전에 이바지 하고 유학의 기틀을 다진 사람 으로 인정되어 곳곳의 신사에서 주신
으로 모셔져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한국에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 가 있다면 일본에는
712년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라는 역사서가 있으니... 왕인 박사 얘기 가 나옵니다.
“ 백제 왕이 (일본에) 아직기 를 보내 좋은 말 2필 을 바치니 아직기에게 말을 돌보게 하였다.
아직기가 경전 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의 스승 으로 삼았다. 왕이 아직기에게 ‘그대
보다 더 나은 박사가 또 있는가?’ 하고 물으니”, " ‘왕인이 뛰어납니다.’ 라고 대답했다.
왕은 곧바로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초빙 했다. 왕인은 태자의 스승 이 되어
여러 경전들을 가르쳤는데... 태자가 배우는데 막힘이 없었다. 왕인은 서수의 시조 이다.”
왕인은 삼국사기를 비롯해 우리나라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 으로 일본 "고사기" 와
“일본서기” 에, 왕인은 오경박사 로서 “논어” “천자문” 을 가지고 405년에 일본으로
건너왔다는데 백제 에서는 전문가를 ‘박사’ 라 불렀으니 유교 경전에 능한 사람을 오경박사,
기와 굽는 전문가를 와박사, 천문과 점술 전문가를 역박사, 의사를 의박사 라고 했는데...
광개토대왕 이 백제를 압박해 한강을 고구려의 영토로 삼았던 때라 백제는 위축된 시대 입니다.
백제 임금 아신왕 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남진에 대항 하기 위해 일본과 친밀한 관계 를 맺으려
했으니 태자 전지를 일본에 볼모로 보내 일본의 환심 을 샀으며... 아직기와 왕인 같은 전문가
들을 파견 해 일본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려고 애를 썼는데, 일본에 살면서 태자의 스승으로
일본 유학이 발전할 수 있는 기틀 을 닦아 주어 ‘서수(書首)의 시조’ 로 추앙 받았다고 전합니다.
오사카부(大阪府) 의 히라카타(枚方 매방) 에는 왕인 박사의 묘 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으니....
1938년에 사적 13호 로 중요 문화재로 관리 하고 있으며 또 쇼소인 (正倉院 정창원) 에는
"백제국 왕인이 응신천왕을 만나다." 제목으로 왕인이 일본 왕을 만나는 그림 이 있으니
죽은지 1,500여 년이지났지만 아직도 왕인을 받들어 모시는 분위기 가 유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805년에 씌어진 일본 문헌에 “왕인이 어대에 와카(和歌) ‘나니와쓰노우타 (難波津歌)’
를 지어 닌토쿠 천황을 왕위에 천거 하였다.” (紀貫之 ‘古今集’) 오사카의
고대 나루터 이름인 ‘나니와쓰’ 는 왕인이 지은 와카에서 유래 했으니...... 지명은
현재 오사카 중심의 번화가인 ‘나니와(難波 난바)’ 로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고는 우에노역 쪽으로 걸어서 모퉁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西鄕降盛像 (서향강성상) 의
동상 을 발견하는데, 그는 사쓰마번 출신 하급 무사 로 메이지 유신 을 이루는 무진전쟁
의 1등 공신 이며... 대표적인 정한론자 이니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회상해 봅니다.
일본인들이 존경하는 역사 인물 순서를 보니 1위 사카모토 료마, 2위 오다 노부나가
3위 사이고 다카모리, 4위 미나모토 요시쯔네 그리고 5위 도요토미 히데요시 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외국인 을 포함하면 2위가 나폴레옹 이니 사이고는 4위 가 되나 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 는 규슈 사쓰마번 (薩摩藩 가고시마) 무사로 도쿠가와 에도막부(江戸幕府)
를 타도하고 메이지유신 (明治維新) 을 성공으로 이끈 유신삼걸 (維新三傑) 중에
한사람으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 을 주장하였으나... 이토 히로부미 등이
시기상조 라며 거절 하자 가고시마로 귀향해서 세이난전쟁(西南戰爭) 내란 을 일으켰습니다.
사쓰마번 하급 무사 의 집안에 태어난 사이고 다카모리 는 열여섯살 때 번의 직책을 맡아
번주(藩主) 시마즈 나리아키라 (島津錦) 에게 능력을 인정받았으니, 에도막부 14대
쇼군(將軍) 을 옹립할 때 번주와 함께 미토번의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를 지지
하였으나.... 기슈번 도쿠가와 이에모치 (德川家茂) 가 쇼군이 되자 유배형 에 처해집니다.
유배에서 돌아온후 번주 나리아키라 및 오쿠보 도시미치와 뜻을 같이 하여 토막(討幕)
운동의 중심 인물 로 성장하였으니.... 1866년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의
중재로 원수지간 이었던 조슈번(長州藩 야마구치) 의 카츠라 코고로 와
비밀리에 연합하여 사쓰마 - 조슈 동맹, 이른바 삿초동맹 (薩長同盟) 을 맺게 됩니다.
사쓰마번 은 1866년 에도막부가 전국의 각 번에서 10만 대군을 동원한 두번째 조슈정벌
(長州征伐) 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조슈번은 5천 으로 사카모토 료마의 해군 지원과
사쓰마번의 비밀 지원에 힘입어 20배에 달하는 막부군 10만을 물리침으로써 에도막부
타도를 본격화하니.... 일왕(천황) 에게 정치 권력을 돌려 주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웁니다.
그러던중 사쓰마번 다카모리 는 토막파(討幕派) 리더였던 이와쿠라 도모미 와 함께
1867년 10월 14일 에도 막부를 토벌하는 군사를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같은 날
이들에 앞서 에도 도쿠가와 막부가 도사번 사카모토 료마의 아이디어 인 대정봉환
(大政奉還) 의 상주문(上奏文) 을 올렸고...... 메이지 일왕(明治天皇) 은 받아 들입니다.
도쿠가와 에도막부가 정치 권력을 일왕(천황)에게 돌려주자... 그 정도로는 안된다고 여긴
사이고 다카모리 는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토막파 및 급진파 공경(公卿) 과 모의해
에도 막부 토벌을 감행 하였으니.... 1867년 12월 9일 각 번(藩) 에서 모인 군사들을
이끌고 교토 궁정을 장악해 왕정복고(王政復古) 를 선언하니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입니다.
일왕(천황) 을 받드는 존왕양이론자 들의 신정부군은 일본의 260개 번 중에서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히젠 번등 4개 번으로 5천의 군사 를 일으키자.... 1868년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에도 막부와 아이즈번, 미토번 및 구와노번
등에서 1만 5천 을 동원해 교토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도바- 후시미 전투 라고 합니다.
병력 수에서는 막부군이 우세 했지만.... 소총과 대포 는 나가사키 영국인에게서 신무기를
구입한 반란군인 신정부군의 화력 이 훨씬 앞섰으며 일왕(천황)이 (錦の御旗 금기)
니시키노미하타 를 내려줌으로써 반란군인 신정부군은 관군 이 되어버렸고.....
관군이던 막부군은 일왕(천황)의 반대편에 선 역적 이 되는지라 사기가 크게 떨어 집니다.
신정부군 은 사쓰마번의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번의 야지로가 조정의 이와쿠라 도모미
에게 받은 니시키노미하타 錦旗(금기, 천황기) 를 요도강변에 걸자..... 졸지에
반란군 신세가 된 도쿠가와 막부군은 사기가 떨어져 탈주자가 속출하는데,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전투 의욕을 잃고는 오사카성을 탈출해 에도로 돌아가 근신합니다
그러자 도쿠가와 에도 막부의 해군 사령관으로 개화파인 가쓰 가이슈 는 사이고 다카모리
와 만나 쇼군은 에도(도쿄) 를 신 정부군에게 내어주고 본향인 미토번으로
돌아가는 선에서 협상을 하니 막부군은 해산 했지만...... 신센구미등 일부 세력
2천여명이 여기 우에노 산에서 농성 하는지라 신정부군은 공격을 개시해 몰살 시킵니다.
이에 일본의 다른 지역 번 들은 모두 대세에 따라 일왕을 받든 신정부군에 서게 되는데,
교토 수호직 마쓰다이라 카타모리 는 아이즈번 으로 돌아가 신정부군에 반기 를
드니 쇼나이번과 나가오카번등 동북 31개 번이 奧羽列藩同盟 (오우열번동맹) 을 맺습니다.
막부파가 동북 지방에 아이즈번 을 중심으로 오우에쓰 열번 동맹 을 맺어 저항하니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5만명의 대군을 동원해 공격해 함락하자
일부는 북해도 하코다테 로 도망쳐 에조 공화국 을 세우고 저항하나....... 결국 함락 됩니다.
1868년 무진전쟁 내전에서 승리한 반막부 세력은 외국인들을 추방시키고 과거에
막부가 외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협상 하려고 했으나.... 사이고 다카모리
등은 장기적인 근대화 정책 을 채택하면서 포기하고는, 도쿠가와 막부 충신들
에게 관용을 배풀어 옛 막부의 지도자들에게 신정부의 책임있는 직책 을 수여합니다.
메이지유신에 최고 공신 사이고 다카모리 는 1871년 정부군의 사령관 이 되니 그가
이끌었던 만명의 군사들은 정부군이 되었고 이후 산키(參議, 참의) 에 임명되어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 와 함께 새 정부의 정책을 만드는 책임을 맡아 폐번치현
(廢藩置縣), 금록공채(金祿公債), 폐도령(廢刀令) 과 징병제(徵兵制) 를 실시 합니다.
일본이 유럽과 같은 근대국가 로 나아가는 정책이었지만.... 토사구팽 이라고 오랜 세월
에도 막부와 목숨을 걸고 싸웠고 1868년에는 무진전쟁에 피를 흘려 새 정부를
수립한 공신들인 사족(士族), 즉 무사들의 신분이 폐지되는 결과 를 초래하자....
사족(무사)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니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게 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토사구팽을 당한 무사들의 불만이 반란 으로 표출되기 전에 전쟁을
일으켜 이를 해소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조선을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 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나, 오쿠보와 이토 히로부미 는 조선의 종주국 청나라와 전쟁 을
해야 하는데 아직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 직책을 사퇴 합니다.
이후 메이지유신을 성사시킨 주역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및 이토 히로부미가 반목
하게되는 것이니.... 조선일보 ‘남정욱의 영화 & 역사 (라스트 사무라이)’ 라는 칼럼에
남정욱씨는 “'유신삼걸' 두 절친...... 결국 서로에게 칼끝을 겨눴다” 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 배는 검었다. 콜타르로 도장한 덕분에 구로후네(黑船) 라고 부른 배 네 척은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쇄국 200년 일본의 긴 잠을 깨웠다. 166년 전 딱 이맘때인
1853년 7월 8일 일이다. 숫자만 보고 '겨우 네 척' 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지휘관인 미국 페리 제독이 타고 있던 기함은 2,500t, 그 옆의 순양함은 1,700t 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제일 큰 배가 100t 규모였으니 2,500톤 미국 배 에 일본인들이 느낀
시각적 충격은 외계 문명과 조우하는 수준 이었을 것이다. 페리 제독의 내항은
메이지 유신을 촉발 했고 이후 20년 동안 일본은 격렬한 정권 투쟁과 내전에
말려들어 간다. 신(神) 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인재를 쏟아붓는 경향 이 있다."
"그 시기 약속이나 한 듯 수많은 인재 가 쏟아져 나왔고 이들은 마치 짠 것 처럼
제 할 일을 마치고는 역사에 조용히 자기 이름을 묻었다. 그 마지막
주자가 사무라이의 본향,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와 오쿠보 도시미치 다."
"한동네에서 살았고 막상막하로 가난했고 말 그대로 콩 한 쪽을 쪼개 먹던 둘은
나중에 반란군과 진압군 으로 만나 그 인연을 정리한다. 2004년 개봉한
'라스트 사무라이' 는 이 둘이 격돌한 세이난(西南) 전쟁을 배경 으로 한 영화다."
"내용은 단순하다. 정부군의 훈련 교관이었던 미군 중위(톰 크루즈) 가 반란군에게
생포되어 사무라이 문화에 빠진 끝에 아예 사무라이 갑옷 을 걸치고
반란군의 선봉 에 선다는 얘기인데...... 평가는 극단이다. 최고의 전쟁영화
라는 사람도 있고 일본 귀족 문화에 반한 미국 '쌍놈' 이야기 라는 악평도 있다."
"영화에서 영상은 아름답다. 총과 대포로 무장한 정부군을 향해 말을 타고 돌진하는
반란군의 장려한 낙일(落日) 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벚꽃 엔딩 처럼
애잔하다.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게 정부군의 절도 있는 행군 모습 이다."
"메이지 유신 전 까지 일본인들은 현대인 처럼 걷지 않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시대물을 보면 사람들이 발로 땅을 스치듯 흐느적거리며 걷는 모습이 나온다.
소위 '난바' 라고 하는 이 걸음걸이는 진흙탕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의 동작이 일상화한 것"
"오른발이 나갈때 오른쪽 상반신이 앞으로 나가고 왼발이 나갈때는 왼쪽 상반신이 나가는
식이다. 이 걸음걸이로는 군대의 행진이 절대 불가능 하다. 새로운 걸음걸이 를 만드는
것이 메이지 정부의 절실한 과제였다. 여기에 답을 준 게 1871년의 이와쿠라 시찰단 이다"
"새 정부를 세웠지만 메이지 정부에 구체적인 국가 발전 계획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세계
최고만을 보고 오겠다는 신념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시찰단 을 꾸렸고..... 22개월
동안 미국과 유럽 12국을 돌며 서구 문명의 정수를 체험한다. 시찰 결과로 얻은게
두 가지다. 하나는 최대 위협 이라고 생각했던 러시아가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유럽 최강국이었던 프랑스 대신 독일 제국을 일본의 발전 모델로 염두에
두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 1871년이 독일 제국 탄생 원년이라 시끌벅적 화려했고
프랑스는 파리 코뮌으로 뒤숭숭해 그런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일본인
들의 지력을 너무 낮춰 보는 동시에 독일을 통일한 프로이센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발음이 세서 전통 강국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통일 전 프로이센은 약체 중 약체 였다.
위치도 최악 이었다. 위로는 스웨덴,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러시아,
서쪽으로는 프랑스, 그리고 밑으로는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프로이센은 그야말로 살기 위해 외교와 군사력 증강에 발버둥쳐야만 했다."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게 개혁 군주 프리드리히 1세 다. 돈이 없었던 프로이센은 포병과
기병 대신 보병에 집중 했다. 보병 훈련의 달인인 안할트 공국의 영주 레오폴드 를
모셔왔고 그는 무지막지한 제식훈련을 통해 프로이센 보병을 유럽 최강 으로 올려놓는다"
"사정이 별반 다를 게 없던 일본이 롤모델로 프로이센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 염원대로 일본은 얼마 후 아시아의 프로이센 이 되었고, 힘이 생긴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 했던 것 처럼 조선과 청나라를 기웃거리기 시작한다."
"정한론(征韓論) 을 부르짖던 일본의 칼끝이 150년 만에 또다시 한반도를 겨누고 있다.
같은 칼에 두 번 찔리면 그때 부터는 찔린 사람 책임 이다. 감정적 대응은 잠시
미뤄놓고 제대로 일본 공부를 할 때다. 나를 잘 아는 상대보다 무서운 적은 없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은 일본에 대해 공부하는 자체를 싫어합니다? 역사는 되풀이 되지요!)
이와쿠라 사절단 은 이토 히로부미 가 주관해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등 사신 46명
과 수행원에 유학생 60명이 3년간에 태평양을 건너고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대서양을
건너 유럽 12나라를 시찰해 조약을 개정하고 서양의 문물을 도입했으며 유학생 들은 5년
후 귀국해서는 철도, 조선, 전기, 은행, 대학 등을 설립하니 "적을 제대로 배우고 온" 것입니다!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총리대신 이 되어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메이지유신 에 성공함으로써
세계 열강의 반열에 오르는데,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와 전쟁하지 않고 수교한후 프랑스
신부와 만여명 천주교도 학살을 사과하고 청년 백명을 뽑아 프랑스 유학시킨후 유학을 국교에서 끌어
내리고 천주교를 수용하며 과거제도를 폐지 하고 반상의 신분제도를 철폐하며 노비를 해방하고 천민제도
를 폐지하며 5백년 이어진 과부재혼 금지 제도를 폐하고 유학생들을 활용 했더라면 독립을 유지했을 수도?
"사이고 다카모리 는 1873년 정한파 (征韓派) 산키(참의) 들과 함께 사퇴하고 새 정부
내에 있었던 백여명에 이르는 세력을 이끌고 고향인 가고시마현(사쓰마번) 으로
돌아가서 사학교(私學校) 를 설립하고 사족들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일에 전념
하자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1877년 즈음에는 재학생이 무려 2만명에 이르렀습니다"
" 나라를 위해 전쟁터에서 몸을 바쳤는데도 무사의 신분이 폐지되어 실업자가 된데 분노한
사무라이들 까지 가고시마로 집결하자, 새 정부의 오쿠보 도시미치 는 가고시마를
공격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1877년 1월 ‘가고시마현이 보유하고 있는 병기와
탄약을 오사카(大阪) 로 운반할 것’ 을 명하여 사이고 다카모리를 도발 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私)학교 학생들 이 앞장서서 가고시마의 군수 공장과 해군기지를 공격하였고
1877년 2월 사이고 다카모리를 옹립 하여 군사를 일으키니..... 군대를 이끌고 도쿄
(東京)로 향하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구마모토(熊本) 에서 조슈번 오무라 마스지로 가
서구식 군사훈련을 시킨 정부군과 맞닥뜨려 6개월 동안 치열한 전투 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로써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서남전쟁) 이 시작되었고.... 이후 규슈(九州) 전 지역에서
공방전이 벌어지는데,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잡아온 조선인 포로 노예
들을 동원해 축성한 구마모토성 이 워낙 견고한지라 쉽게 함락시키지 못하고 시일을
너무 끄는 바람에 신정부군의 병력이 전국에서 계속 보충되니 중과부적으로 패배 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 는 구마모토성이 함락되지 않는 등 상황이 뜻대로 되지 않자
1877년 9월 낙담해서 가고시마 로 돌아왔는데, 그리고 뒤쫓아 온 정부군
이 최후의 공격을 단행했던 1877년 9월 24일 자결하여 4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 했습니다." 이런 파란만장한 일생으로 일본의 역사인물 3위 입니다.
첫댓글 왕인박사는 백제에서 건너가서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가르친 유명하신 우리 선조이십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기록이 없고
712년 일본 고사기와
720년 일본서기에만 자세히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