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한 질문들
- 김지수·이어령,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2021.10.28.
류인혜
생각이 점점 자랄 때부터 읽기 시작한 이어령 선생의 저서들이다. 책뿐이 아니라 여러 경로로 선생은 오랫동안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라고 우기고 싶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계셨다. 선생의 글을 기회 닿을 때마다 복사하거나 직접 작업하여 파일로 저장해 두었다. 특히 어머니에 관한 몇 편의 수필은 내 수필 쓰기의 모범으로 삼아 틈이 나는 대로 읽었다. 선생의 글쓰기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도록 독보적인 수준이다.
선생이 가신 후 세간(世間)에 크게 화제가 된 책,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사 왔다. 서가에 꽂아두고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가끔 여러 이유로 읽기를 밀어두는 책이 있는데 선 듯 펼치기가 아깝다.
그런데 얼마 전, 하드보드 표지로 만든 <선생의 1주기 추모 특별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문우가 보내두었다. 내가 가진 책과 일삼아 비교하였는데 편집이 새로워졌다. 이제 보관용이 마련되었으니 집에 있는 책에 무엇을 쓰거나, 줄을 긋거나를 할 수 있어 편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전에 몇 개의 단어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도록 준비했다. 먼저 공동 집필자로 이름을 먼저 올린 「김지수의 인터스텔라」에서 ‘인터스텔라’의 뜻을 찾아보았다. 또 그가 조선비즈 문화담당 기자라고 해서 ‘조선비즈’를 알아보았다. 그 신문은 조선일보 계열의 경제신문이라고 소개한다.
김지수 씨는 인터뷰를 전문으로 2015년부터 세계 석학과 예술인 등 우리가 개인적으로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이어령 선생의 라스트 인터뷰(책의 뒤편에 그 내용 전문이 실려 있다.)에는 7천여 개의 댓글이 달릴 만큼 반응이 커서 본격적인 인터뷰를 기획했다고 한다.
책을 펼치자 프롤로그와 22쪽에서 언급된 ‘화요일’이라는 특정된 요일과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와서 마음에 걸린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2008년에 발간된 『아름다운 책 -류인혜의 책읽기』에 <화요일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진 책이다. 말하기도 어렵게 몸이 굳어져 가던 모리 교수는 아들처럼 여기는 제자와 만나게 된다. 제자는 대학교 때 모리 교수의 강의가 화요일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화요일마다 만나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눠주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열네 번째 화요일에 그들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그 책의 <에필로그>에는 모리 교수의 생각으로 만들어질 책(마지막 논문)이 선인세를 받아서 스승의 엄청난 치료비에 충당되어 두 사람이 고마워했다는 내용이 무척 반가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어령’이라는 이름만으로 충분히 주목을 받는데, 오래전에 특별한 책으로 많은 화제를 남긴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분위기를 모방한 의도는 무엇일까? 지나치게 똑똑한 정신을 대하는 난감함이다. 다행히 그 난감한 무거움은 책을 읽으며 해소되었다.
영성과 지성이 뛰어난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말을 충분히 듣기 전에 이렇게 서두가 길어지는 이유를 찾았다. 책을 읽어야겠는데 이상하게도 꼭, 반드시, 읽고 싶은 정서가 모이지 않는 것이다. 이미 많은 경험치가 쌓여 단순해지고 싶고, 가끔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에 궁금한 책을 읽으며 개인의 생각이 앞서지 않길 기대했다. 만약에… 를 무시하고 무거운 생각을 가볍게 쓰는 습관대로 이 책도 쉽게 읽어가고 싶다. 마음을 결정하니 비로소 걸림돌이 사라진 듯 편안하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열여섯 번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그 인터뷰의 열세 번째 글에서 저자 이지수는 고백한다. “생각하는 자로서 그는 항상 용기백배했고, 듣고 정리하는 자로서 나는 가끔 허둥거렸다. 어떤 피드백도 없는 상황에서, 나는 매주 화요일 그가 가장 귀한 것을 줄 거라 믿었고,” 제자의 허둥거림을 응원하는 스승의 배려도 있다. “그는 내가 가장 ‘촉촉한’ 이어령을 써낼 것이라 믿었다.(243쪽)”
무슨 일이든 그 일이 성숙 되기에는 시간과 결심이 필요하다. 마지막을 대하는 스승과 제자, 두 사람의 진심을 믿어보자. 사람의 마음에 진입하여 진심을 헤집어 가는 인터뷰에 능한 사람이 어떤 마력으로 죽음을 앞둔 스승의 지혜를 뽑아낼 수 있는지 흥미롭다. 어느 지점에서 두 사람의 영혼과 마음이 합일되어 말하는 사람과 그 말을 받아서 글로 표현하는 사람의 심정이 같아지는 아무도 모른다.
“스승은 이 책을 읽을 제자들에게 자신의 지혜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여러 번에 걸친 첨삭과 수정을 거치며 자신의 ‘유언’처럼 남을 이 책을 완성” 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이 돌아가신 후 그분의 책들이 소용돌이에 휩싸인 일이 갑자기 생각난다. 왜들 그랬을까? 책을 읽는 사람들은 신중하다. 남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고 감동한다. 책이 독자들에게 주목을 받아 인기를 얻게끔 노력을 한 것에 스승에 대한 경의가 포함된 것이라 여기고 싶다.
앞장부터 차례로 읽어가는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책이 열리는 대로 읽는다. 매듭이 생겨 답답할 때, 펼쳐지는 곳의 성경 구절이 답이 되었던 버릇이다. 그날에 펼쳐지는 곳을 읽으며 내 생각이나 행동을 비교할 수 있는 대목에서는 연필로 줄을 긋고 소감을 간단히 적었다. 며칠 동안 다른 책을 읽지 않고 오직 이 책만 집중했다. 그래서 정신이 한곳으로 모이자 다시 처음부터 차례대로 찬찬히 읽어간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의 프롤로그 제목은 <스승이 필요한 당신에게>이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스승’은 간절한 대상이다. 열여섯 번 인터뷰의 큰 제목을 가져왔다.
“다시, 라스트 인터뷰/큰 질문을 경계하라/진실의 반대말은 망각/그래서 외로웠네/고아의 감각이 우리를 나아가게 한다/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파뿌리의 지옥, 파뿌리의 천국/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닌 고향/바보의 쓸모/고통에 대해서 듣고 싶나?/스승의 눈물 한 방울/눈부신 하루/지혜를 가진 죽는 자/또 한 번의 봄/또 한 번의 여름-생육하고 번성하라/작별인사” 등등 각 편 속에는 소제목이 여러 개씩 달렸다. 에필로그 마지막 문장은 “나 절대로 안 죽어”이다.
다시 앞으로 가서 책을 읽어가며 그어진 밑줄의 내용을 살폈다. 이미 돌아가신 선생이 지금 나에게 주고 있는 깨달음은 무엇인가. 마음에 진중한 울림을 주는 내용은 어떤 것인가. 선생의 마지막 수업은 무지한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절실하게 위로를 주는 몇 개의 문장을 가져온다.
내가 계속 쓰는 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야. 정말 마음에 드는 기막힌 작품을 썼다면, 머리 싸매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을까 싶어(29쪽). 글을 통해 또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선물을 나는 받았네 (…) 그래서 글쓰기를 해야겠다고 이부자리를 털고 일어나 거야(62쪽).
이 부분은 내가 글을 쓰고 있는 명확한 심사를 지적하고 있다. 나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쓰기를 거부할 때가 있었다. 그 세월을 지나왔다. 더 완벽한 글을 쓰기 위해서 쓰고 또 쓰고 있는 내가 대견해진다. 무거운 정신을 가볍게 다스리는 방법으로 쓴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은 타인의 죽음이었어.(…) 바깥에 있던 죽음이 내 살갗을 뚫고 오지. 전혀 다른 거야(32쪽). 내가 살던 친숙한 공간에서 눈을 감았으면 해. 최고의 사치지(211쪽). 공백의 시간이 확장되고, 정적이 완전히 점령한 세계가 죽음일세(247쪽).
아직은 내 죽음에 직면하지 않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의 죽음에 직접 관여해서 평안한 마무리를 도와주었다는 의미는 크다. 집에서 그분들의 임종을 지켜낸 후 나는 죽음의 길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아. 인간은 어쩌면 지우개 달린 연필이야.(…)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을 한 몸뚱이에 달아놓은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203쪽). 기뻐하는 내가 애처로워서 통곡하는 나보다 불쌍해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지는 거야(208쪽).
선생의 눈물 한 방울은 울음을 참고 있는 내가 가끔 흘리는 서러움의 증표이다. 눈물이 그저 또르르 떨어져 내리며 내면의 온갖 것을 단숨에 제압한다. 인생의 많은 양면성 대하며 중요한 일은 슬픔의 감정보다 기쁨에서 오는 격정이 더 큰 안타까움을 준다는 것에 적응하는 일이다.
성경처럼 우리의 상식을 통째로 뒤집는 책은 없어(166쪽).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네(168쪽). 길 위에서 계속 새로운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175쪽).
길잃은 양은 길을 찾기 위해 헤매며 온갖 현상을 대한다. 의도함 없이 펼쳐지는 새로운 삶의 화려한 무늬를 짜게 되는데, 목자는 자유를 만끽하려는 양을 찾고 있다. 사람들이 길을 잃었을 때, 찾아주는 목자를 기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혼자 개척해 나가는 창조적인 삶에 지쳐서 안정된 삶이 그리워는 것일까.
별빛 뒤에 숨어서 울던 개구리들이 돌을 던지면 일제히 딱 멈추면서 귀가 멍멍할 정도의 침묵이 생겨났어.(…) 돌을 던지면 면도칼로 자르듯 생기는 그 침묵은 참으로 신비로웠다네(245쪽).
우리는 88올림픽의 굴렁쇠를 기억한다. 넓은 잔디 광장에서 홀로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의 움직임이 주는 긴장의 정적을 안다. 선생은 개구리의 울음이 주었던 그 ‘면도칼로 자르듯 생기는 침묵…’의 기억에 신이 나서 기획했고, 결국에는 성공했다. 살아오면서 그런 침묵에 휩싸이던 몇 번의 충격은 죽음이었다.
하나님의 존재는 절대 고독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피조 세계 위에 홀로 서 계시잖나.(…) 내가 듣고 보고 느끼고 소유하는 저 바깥의 존재. 그분은 얼마나 정직하고 얼마나 크고 얼마나 외로울까(255쪽). 신과 생물의 중간자로 인간이 있기에, 인간은 슬픈 존재고 교만한 존재지. 양극을 갖고 있기에 모순을 안고 살아가 수밖에 없어(256쪽).
나는 내가 경외(敬畏)하는 하나님의 외로움을 모른다.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져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래도 하나님은 크신 사랑으로 언제나 내 곁에 계신다.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앞으로도 때때로 읽히며 필자에게 많은 위로를 줄 것이다. 책의 쇄(刷)가 계속되는 한 그분의 ‘마지막 수업’은 생생한 기운으로 우리의 미망(迷妄)을 깨우리라 믿는다. “나 절대로 안 죽어”…… 이어령 선생께서는 오래 우리 곁에 계시면서 많은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문학시대》 2024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