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13,44-52, 요한 14,7-14): 이미 우리 곁에 머무는 영원, 그 얼굴을 보다
Homily -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필립보 사도가 던진 이 질문은 인류가 존재 이래 끊임없이 던져온 근원적인 목마름을 대변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이 문장에는 철학적 비장함과 신앙적 절박함이 동시에 묻어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다'는 고백은, 하느님을 보는 것만이 우리 영혼의 기나긴 방랑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종착지임을 시인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시선을 '먼 하늘'이 아닌 '지금 여기'로 돌려놓으십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이어지는 9절에서 하신 주님 말씀은 서정적 슬픔과 깊은 신학적 진리를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적과 초자연적인 현상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 하지만, 하느님은 이미 우리 곁에 '예수'라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가장 낮은 눈높이로 머물고 계셨으니까요.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아타나시오는 이 신비를 수호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시다는(Homoousios) 진리는 단순한 교리적 논쟁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뵐 수 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은 유배와 고독 속에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철학적 통찰은 오늘 복음의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는 선언과 맞닿아 있습니다. 진정 '참된 인간' 안에서 '참된 하느님'을 보았던 성인이셨지요. 그리스도의 눈빛 속에서, 그분의 손길 속에서 우리는 가닿을 수 없던 영원을 만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시기하는 이들과, 반대로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찬미하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이지요. 무엇보다 사도들은 쫓겨나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기록됩니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외부의 조건이 평화로워서 기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성부의 얼굴)를 보았기에 누리는 기쁨입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해도 하느님을 뵙지 못한 이는 갈증을 느끼지만, 매를 맞고 쫓겨나면서도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는 이는 '그것으로 충분한' 평화를 누립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이제 하느님은 멀리 계신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 곁에 아파하는 이웃의 눈물 속에, 서로를 용서하는 고백 속에, 그리고 성체 성사의 신비 안에 당신의 얼굴을 숨겨두셨습니다. 오늘 하루, 거창한 기적이 아니라 내 곁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의 흔적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성 아타나시오의 굳건한 믿음을 본받아, 우리도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고백합시다.
"주님, 당신을 보는 것만으로 저희는 충분합니다. 당신 안에 이미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
아버지께서 함께 동행하시는 충만된 삶..
어두운길도 두려움이 없을터이니 그 손길 놓치 않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절대 그 손을 놓지 않으신답니다.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