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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계11:3)에 대한 해석
1. 서론
요한계시록의 중심부에 위치1) 하고 있는 11:3~13은 요한계시록 가운데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2) 예를 들면 두 증인은 예언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11:3, 6)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11:4), 그리고 두 선지자(11:10)로 지칭된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관계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기에 R. H. Charles는 두 증인의 기원과 정체성은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한다.3) R. Leivestad는 계시록 11장의 해석의 어려움에 대하여 “가장 신비스러운 단락 가운데 하나인데, 현대적 사건을 가지고서 시도하는 설명의 모든 시도를 저항한다”고 묘사한다.4) ‘두 증인의 정체성과 역할이 무엇인가?’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이슈이다. 두 증인의 묘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종말론적 성취로 이어지는 시기 동안에 지상에서 세간의 이목을 끄는 선교를 실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권세를 부여 받은 두 개인의 예언적 사명을 얘기하는 예언인가? 아니면 구약과 신약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증언하는 교회인가?
2. 본론
학자들은 두 증인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하여 끊임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 시도들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문자적 해석
이 해석은 두 증인을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존재했거나 존재할 인물로 여기는 입장이다.5) 어떤 학자들은 1세기에 순교를 당한 역사적 인물로 본다.6) 제시된 의견 가운데 몇 개의 예를 들면 모세와 엘리야7), 에녹과 엘리야8), 베드로와 바울9),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의인 야고보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또는 A.D. 68년에 죽임 당한 두 유대 대제사장으로 해석을 한다.10) 어떤 학자들은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라거나,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 또는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또는 대제사장 Ananus and Joshua(Aune, Rev 6-16, 601-602)로 보기도 한다.
Daniel Wong은 이 제안들 가운데 두 증인을 현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래 대환란 시기(future tribulation period)에 모세와 엘리야의 정신과 권능을 가지고서 사역할 두 인물로 본다. 그는 근거 여덟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증인’(11:3)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제시한다. μαρτυρἰα은 신약성서 다른 곳에서도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11)
둘째, 11:3에서 두 증인은 1,260일 동안에 선지자로서 “예언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예언의 활동은 개인적이며 사람이 하는 활동을 포함한다.
셋째, 두 증인의 활동의 전체적인 본문(11:3~12)은 이 입장을 지지한다.
넷째, 유대 법에 의하면 증거로 채택하는 데에 필요한 두 증인(민 35:30, 신 17:6, 19:15 참조. 마 18:16, 요 8:17, 히 10:28)과 두 증인의 배경이 되는 스가랴 4:2~14의 두 감람나무가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구약적 배경을 고려할 때 두 명의 인물이다.
다섯째, 두 증인이 행하는 기적으로 볼 때 엘리야와 모세이다.12)
여섯째, 계시록에 기록된 대부분의 사건은 요한의 시대에서 볼 때 미래이기 때문에 두 증인 은 아마도 미래 인물일 것이다.
일곱째, 두 증인의 미래 등장은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두 증인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볼 때 더욱 지지를 받는다.
여덟째, 또 다른 증인 안디바는 문자적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하기 때문에(계 2:12), 두 인물이 문자적으로 미래에 순교할 것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13)
2) 상징적 해석
주류를 이루는 주석가들이 두 증인을 ‘상징’으로 설명한다. 상징은 지칭하는 것 그 자체보다는 무언가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두 증인이 상징이라는 주장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이 부여된 문자적 역사적 인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입장의 핵심은 상징도 여러 가지로 제안된다. 이 상징적 해석은 크게 둘로 분류할 수 있다.
① 구약과 신약, 또는 율법과 복음
비록 소수이지만 어떤 학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상징으로, 어떤 학자들은 율법과 예언, 또는 율법과 복음으로 본다.14)
Ekkehardt Muller는 이 해석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먼저 계시록 9~11장의 문맥을 속에서 두 증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이어서 특히 계시록에서 어근 ‘μαρτ-’의 단어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계시록에서의 자주 사용되는 단어인 μαρτυρἰα의 용례(계 1:2, 9, 6:9, 11:7, 12:11, 17, 19:10, 20:4, 22:16에 주목한다.15) 계시록 12:11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 형제들이 어 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 하는 말씀으로써” 사단을 정복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요소를 만난다. 둘의 또 다른 세트는 ‘예수의 명령과 예수의 증언’을 12:17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19:10에 서 예언의 영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용례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증언”의 결합이 다(1:2, 6:9, 20:4). 11:7에서 두 증인은 그들의 증거/증언을 마친다.
이런 용례를 통하여 Muller는 μαρτυρἰα는 압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해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μαρτυρἰα는 예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19:10의 “예수의 증언”과 병행되는 본문인 22:9은 “선지자들”로 대체한다(22:9). Muller는 상세한 설명 없이 ‘동사’(μαρτυρἐω)는 성서, 즉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언을 가리키는데 사용된다고 하면서 후자는 계시록에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μαρτ- 단어 어근은 성서와 강한 관련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16)
② 증언하는 교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두 증인을 교회로 여긴다. Beale은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 같은 두 선지자도 유대 그리스도인이나 기독교 선지자나 순교자를 가리키지 않고 예언적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그는 ‘증언 하는 교회’로서의 두 증인에 대한 집합적 정체성에 대하여 여섯 가지 근거를 제시 한다.
첫째, 11:4에서 ‘두 촛대’인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킨다.
둘째, 11:7에서 짐승이 두 증인과 전쟁을 하여 이기는 내용은 다니엘 7:21에 기조를 둔다. 다니엘이 예언한 마지막 악의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박해한다.
셋째, 11:9~13에서 불신자의 전 세계는 두 증인의 패배와 부활을 볼 것이라는 언급은 온 세상에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넷째, 두 증인은 삼년 반 동안에 예언을 한다. 그 기간 은 ‘거룩한 성’, ‘여자’, 그리고 ‘하늘 장막에 거하는 사람들’이 핍박받는 기간(11:2, 12:6, 14, 13:6)과 동일한 기간이다.
다섯째, 신자의 다른 공동체는 계시록의 다른 곳 에서 예수에 대한 ‘증거’의 원전으로 드러난다(6:9, 12:11, 17, 19:10, 20:4).
여섯째,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의 권능을 행하는 두 개인이 아니라 두 증인은 동등하게 권능을 행하면서 분리되지 않는 두 증인이다.17)
3) 절충 해석
두 증인에 대한 상징적이며 문자적인 입장의 양자를 절충하는 입장을 취한다. Ladd는 두 증인의 비유는 “상징적이며 특정한 의미의 융합”을 포함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상징적 해석을 선호하는 자료의 보편성은 일차적으로 전체적인 크리스천 공동체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명확한 사람을 묘사하는 세부사항은 이 공동체가 하나님의 계획을 인간 역사에서 성취하고자 돕는 개인적 인물을 구성한다고 볼 수도 있다는 절충 입장’을 드러낸다.18) Ladd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Osborne은 Beale의 두 증인의 상징적 역할에 대한 6가지의 근거 제시는 강력하지만 개인적인 인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Osborne은 두 촛대가 집합적 의미가 있지만, 두 감람나무는 개인적 측면을 가리킨다고 설명한다.19)
위의 세 입장 모두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을 계시록 전체와 증인의 어원의 의미에 근거하여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편다. 어떤 해석이 타당성이 있는 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두 증인과 동의어로 언급되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와 두 증인의 사역과 11장 전후 문맥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4) 두 감람나무
4절에서 두 증인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20) 와 두 촛대”로 드러난다. 이 표현은 스가랴 4:1~14에 의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특히 스가랴 4:2~3과 11~14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순금 등잔과 그 옆에서 등잔에 기름을 공급하는 두 감람나무를 발견한다. 순금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다(4:2~3). 이 상징적 묘사의 중요성은 두 감람나무가 등잔대 양 옆에 서 있는 스가랴 4장의 환상과의 유사성이며, 특히 제2성전의 완성과 연관이 있다.
그 당시에 포로기 이후의 제2성전 재건은 지역 반대와 좌절에 직면하여서 이 환상은 두 감람나무의 각각에 하나 씩 있는 두 감람나무 가지로 표현되는 두 ‘기름의 아들들’의 리더십을 통하여 완성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확신을 제 공한다.21) 두 감람나무로서 온 세상 주 앞에 서 있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은 순금 등잔 왼쪽과 오른 쪽에 위치하고 있다. 등잔이 파괴된 솔로몬 성전을 가리킨 다면(참조. 속 1:16) 두 감람나무는 포로기 이후의 성전 재건과 더 나아가 묵시적 회복을 이끌 제사장(여호수아)과 다윗 같은 메시야 인물(스룹바벨)에 대한 기대(참조. 슥 3:8)를 가리 킨다.22)
그런데 Strand는 이 구절의 흔히 두 감람나무를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유대 포로들의 회복 가운데 두 지도자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을 가리킨다는 해석의 결점을 지적한다. 그는 “스가랴 4장의 상징주의의 해석에서 일반적으로 간과하는 것은 3장에서 여호수아 한 지도자를 언급하는 것처럼 그 장은 문맥적으로 단지 한 지도자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23) 그러나 스가랴 4:14은 분명히 ‘이 땅의 주 앞에서 서 있는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은 그 당시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적 지도자 스룹바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4) 또한 스가랴 4:12에서 ‘등잔대 옆의 두 감람나무’가 언급되고 있다.
감람열매는 등잔에 필요한 기름을 공급하기 때문에 감람나무는 등잔과 관련을 맺는다. 등대와 등잔이 성전 재건을 상징하므로 감람나무는 성전 재건을 주도하는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두 사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25) 그러기에 ‘두 감람나무’는 ‘제사장’과 ‘왕’의 이미지를 딴 증인인 교회로 잘 그려진다.26) 계시록 1:6, 5:10과 20:6에서 교회는 “나라와 제사장”으로 묘사된다.27)
5) 두 촛대
촛대는 계시록에서 일곱 번 언급된다. 여섯 번은 계시록의 편지 형태인 계시록 1장과 2장에서 발견된다(1:12, 20, 2:1). 그들은 일곱 금 촛대로 묘사되는데 스가랴 4장의 일곱 촛대를 연상하게 한다.
계시록에서 촛대가 등장하는 유일한 다른 곳은 11:4에서 ‘두 촛대’로 나타난다. 학자들은 계시록 11장의 두 증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계시록 1장에서 일곱 촛대가 교회로 분명히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계시록에서 일곱 촛대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킨다면 두 촛대도 교회 공동체를 가리킬 수 있다고 여겨진다. 계시록 1, 2장에서 숫자 ‘일곱’이 완전함을 의미하므로 일곱 촛대에 의한 모든 교회를 나타낸다면 11장의 ‘둘’이라는 숫자는 ‘증거’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촛대가 두 증인이 교회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말 할 수 있다.28)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에 대한 묘사는 두 감람나무와 성령의 사역을 연결한다. 등잔은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계시록의 등잔의 수는 하나에서 둘로 증가하는 반면에 스가랴와 계시록에는 두 감람나무가 있다. Strand는 두 감람나무의 이 연속성 때문에 그들의 의미는 “성령의 사역”, 즉 구약과 신약 각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하는 성령의 역할을 가리키는 지속성을 유지한다.29)
스가랴에서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이 전사를 임명하여 성전을 측량하도록 하시면서 회복을 주도권을 가지고서 적대적이며 사단의 의도(슥 2~3)에서 예루살렘을 보호하신다. 이 점은 계시록 11:1~2에서 요한이 성전을 측량하여 보호하는 것과 비슷하다. 요한은 스가랴의 은유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목적에 맞게 창의적으로 활용한다.30) 첫째, 성전을 촛대로서 드러낼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계 21:22). 둘째, 요한은 기름 부음 받은 두 사람을 두 감람나무 또는 두 촛대로 그린다. 그들은 스가랴서에서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가져 오는 메시야적 인물은 더 이상 아니다. 계시록에서는 어린양이 그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신에 요한처럼 모범적 증인으로서 요한이 필사적으로 교회를 격려하는 예언 역할의 모델이다.
6) 두 증인 사역의 특성
① 두 증인이라고 불림
두 사람은 첫째로 “증인”이라고 언급된다. 계시록에서 ‘μαρτ-’ 어근을 지닌 단어는 중요하다. 이 어근을 가진 두 단어가 등장한다. 명사로서 사람을 가리키는 “증인”과 증인이 선포하는 메시지인 “증언” 또는 “증거”이며, 동사는 “증언하다”이다. 두 증인 명사가 증언을 마친(11:7) 동사와 함께 사용된다. 증인이라는 개념이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의 7절에서 재확인된다.
계시록의 다른 부분에서 요한(1:2, 9), 예수 그리스도(1:5, 3:14), 안디바(2:13)가 ‘두 증인’으로 언급된다. 일곱 교회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기라’고 격려하는 계시록 2~3장에서 순교를 당한 사람의 이름을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충성된 증인’이라는 표현은 1:5에서 예수님 자신을 묘사할 때 사용 된 동일한 표현이다. 이 동일한 표현을 통하여 안디바가 ‘예수님의 증언의 길을 충실하게 따라갔던 자’로 제시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러한 삶을 따라서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 모델로 제시된다.31)
또한 17:6에서 음녀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고 말한다. 12:17의 여자의 남은 자손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계시록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가진 자라고 말한다. 하늘 제단 아래에 등장하는 죽임 당한 영혼들은 또한 증인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기”때문이다.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이 개념은 계시록 자체를 예언으로 언급하는 구절(1:2)과 순교자들을 언급하는 구절들(6:9, 20:4)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증거를 지난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32)
증언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요한(1:2), 예수가 보낸 천사(22:16), 그리고 예수님 자신(22:18, 20)이다. 그들의 증언은 무엇에 관한 것인가? 천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의 계시를 받은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1:2). 동일한 개념이 계시록 마지막에서 발견된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22:16).
② 굵은 베옷을 입음
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을 예언한다. ‘굵은 베옷’을 입은 두 증인의 외형은 예언적 의도가 있음을 암시한다. 요한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위하여 베옷을 6장에서 사용하였다(참조 계 6:12). 11장에서도 심판은 중요한 주제이다. 두 증인이 행한 이적들(11:5~6)과 두 증인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11:13)은 심판의 행위이다. 그래서 일곱 번째 나팔에 따르는 '화'의 행위가 이어진다(11:15~19).
David Aune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베옷을 입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개인적 슬픔이나 국가적 재난의 표시 △사람들에게 간청하거나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복종의 표시 △회개의 행위 △선지자의 의복33)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베옷이 고대 시대에서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죄에 대한 뉘우침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증인이 베옷을 입고 행하는 예언은 심판의 말씀이다. 그러나 그 말씀은 심판이면서 회개의 주제를 지니고 있다.34)
종말의 예언자들은 거친 옷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다(참조. 슥 13:4). 엘리야도 굵은 베옷을 입었고(왕하 1:8), 세례자 요한도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막 1:6). 마태복음 11:21과 누가복음 10:13에서 베옷은 직접 회개의 슬픔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점은 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두 증인이 굵은 베옷을 입은 것은 종말의 예언자로서 불의한 자들의 죄와 심판을 탄식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을 상징한다.35)
③ 두 증인의 권능
계시록 11:5~6에서 두 증인은 그들의 사역을 방해하고 해하려 하는 자들을 ‘입에서 나오는 불’로 멸하며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엘리야와 같은 권능과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는” 모세의 권능을 행사한다.
두 증인이 행하는 이적들을 볼 때 그 들의 구약성서 모델은 엘리야와 모세임이 분명하다. 두 증인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문자적 해석이나 상징적 해석을 취하는 모든 학자들은 두 증인이 행하는 이적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이적들을 반향한다’고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계시록의 두 증인이 행하는 이적과 엘리야와 모세의 이적을 표로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11:5 /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룰 삼켜 버림 / 엘리야(왕하 1:1~14)
11:6a / 하늘을 닫는 권능 / 엘리야(왕상 17:1)
11:6b / 물을 피로 변하게 하는 권능 / 모세(출 7:14~21)
11:6c /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침 / 모세(출 9:13~14)
엘리야와 모세의 권능은 징벌을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엘리야와 모세의 권능을 반영하는 계시록의 두 증인의 사역이 심판의 역할과 관련됨을 시사한다. 모세와 엘리야의 두 경우 모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우상숭배를 행했던 왕들에 대한 반응이다.36) 모세는 애굽 왕 바로와 바로의 술객들과 적대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는 아합 왕과 그의 부인 이세벨과 그녀의 바알 선지자들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이러한 적대 관계는 요한 이 계시록 전체를 통하여 교회와 대치 상태에 있는 사단의 세력인 짐승과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해 주고 있다.37) 두 증인 이미지를 통하여 교회를 모세와 엘리야와 연결함으로써, 요한은 교회가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종말적 통치 속으로 들어가도록 촉구한다.38)
동시에 이 두 증인을 모세와 엘리야와 구별시키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분리된 능력이 모세와 엘리야에게 부여했지만 두 증인 속에는 결합되어 있어서, 권능과 역할에 있어서 동등하다 두 증인이 이처럼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으로 표현된다고 해서 그들 자신이 모세와 엘리야라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두 증인이 각각 엘리야와 모세의 권능을 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두 증인 모두에게 엘리야와 모세의 권능이 함께 임할 것이라는 점이다.
더욱이 그들이 원할 때마다 각종 재앙이 내리는 능력 속에(11:6) 두 증인의 권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명령 하에서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고대 예언자의 권능을 능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이점은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의 환생이라는 주장을 반박한다. 이것은 두 증인이 개인이라기보다는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증인의 선교가 모세와 엘리야의 전승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④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옴
두 증인은 그들의 사역을 방해하고 해하려 하는 자들을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를 삼켜 버리면서(11:5) 선포와 심판의 예언적 사역을 시작한다. 계시록에서 불은 하나님이 심판의 무기로서 사용하는 일부로 종종 묘사된다(1:14, 2:18, 3:18, 8:5~8, 9:17~18, 14:10, 18:16, 8, 18:8, 19:12, 20, 20:9~10, 14~15, 21:8).39) 계시록 20:9의 절정의 순간에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하나님의 백성을 전복시키려 시도하는 사단의 세력을 패배시킨다. 마찬가지로 여기 11장에서도 불은 두 증인의 입에서 나와 원수들의 의도를 물리친다. 이 불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의 선포를 가리킨다. 또한 이 불은 계시록 20:11-14에서 다가오는 불 심판을 미리 예상하는 것일 수도 있다.40)
11장의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은 아마도 1:16에서 예수의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오는 “날카롭고 예리한 검”과 병행을 이룬다. ‘입에서 나오는 불’은 엘리야와 모세를 연상시키지만, 그들은 입에서 나오는 불로 징벌하지는 않았다. 또한 예레미야 5:14에는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여 백성을 사를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1) 계시록 전체에서 나타나는 ‘입’과 관련된 용례는 심판의 묵시적 상징으로서 심판에 대한 예수의 심판에 대한 선포이다(1:16, 2:12, 16, 9:17~19, 12:15~16, 16:13, 19:15, 21).42) 계시록 2:16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입의 검으로 니골라당에 대하여 싸우겠다고 강한 경고를 하며, 19:15에서는 만국을 치겠다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그 입의 검은 곧 그리스도의 참된 증거의 말씀이다. 이런 방식으로 두 증인은 그리스도처럼 입에서 나오는 불인 말씀의 증언을 통하여 역할을 감당한다.43) 그러므로 두 증인의 예수의 증거로서의 예언의 역할은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전파하는 것으로 예수의 증거와 병행을 이룬다.44)
⑤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
계시록 11:7~13에 보면 두 증인은 탁월한 능력을 소유하였지만, 그들이 증언을 마쳤을 때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과 전쟁이 일어나 죽임을 당한다. 죽임 당한 후에 그들의 시체는 큰 성 길 옆에 영적으로 하면 소돔과 애굽이라고 하는 주께서 못 박히신 곳에 놓여진다. 이후에 삼일 반이 지나서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서 그들이 살아나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것은 두 증인이 모세와 엘리야 같은 구약성서 역사의 선례를 따를 뿐만 아니라 예수의 역사를 더 밀접하게 닮는 점을 보여준다.45) 이런 점에서 학자들은 두 증인의 죽음, 부활,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동의한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이 사건의 문자적 세부사항이 부인되거나 간과되기 때문에 온전한 중요성이 거의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11:8)은 가장 명백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대한 이 문자적 언급은 쉽게 놓치거나 무시될 수 없다. 특히 이것은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의 특징답지 않게 사실상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진술이기” 때문임을 강조한다.46) 두 증인의 이야기가 예수의 처형의 구체적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예루살렘을 ‘거룩한 성’(11:2, 21:2, 10, 14~14, 18~19, 21, 23, 22:14, 19) 또는 ‘사랑하시는 성’(20:9)으로 묘사되는 점과 11:8절에서 같이 언급되고 있는 ‘큰 성’도 고려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큰 성’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 역시 큰 성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렘 22:8)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을 제외한 일곱 군데(16:19, 17:18, 18:10, 16, 18, 19, 21)에서 바벨론(로마)를 뜻하는데 요한은 이 둘의 이미지를 결합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Bauckham은 풍유로 이해하기 보다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제안한다.47) 또한 요한은 ‘큰 성’을 영적으로 ‘소돔과 애굽’이라는 언급도 도움을 제공한다. 소돔은 하나님에 대항하는 타락과 반항의 이미지로서 죄악의 상징으로, 애굽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의 장소의 이미지로서 우상숭배와 예속의 상징을 나타낸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와 죄의 속박을 가리킨다. 그러기에 이 성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예루살렘, 애굽과 소돔은 공통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곳이다.48)
두 증인이 승천하는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다”(l1:13a). 성의 남은 자들은 “두려워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l1:13b). 요한은 구경하는 자들의 행동과 감정에 관심을 기울인다. 요한은 왜 이런 사실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충성된 증인’이신 부활과 승천을 통해 사역의 진실성을 입증한 것처럼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이 그들의 증거가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한다.49)
성의 10분의 1을 제외한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보통 이 구절을 회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는데 Beale은 13절의 남은 자들이 회심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Beale은 회심으로 보는 입장이 간과하는 것이 ‘두려워하여’를 긍정적 의미로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두려움’이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패턴은 다니엘 4:34을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비슷한 언어 사용과 계시록과 다니엘 두 구절 ‘큰 성’ 바벨론의 거주자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참조. 단 4:30, 계 11:8). 거기에서 바벨론은 큰 성(단 4:30)으로 나오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단 4:37)라고 표현하지만, 느부갓네살이 진정으로 회개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곳 말고도 구약성서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가 항상 진정한 이스라엘의 신앙적 반응이라기보다는 불신자들이 어쩔 수 없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수 7:19, 삼상 6:5, 잠 1:24~32). 느부갓네살은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Beale은 또 하나의 가능한 예인 계시록 l1:l1b, 13에 반영되어 있는 요나서 1:9~10, 16는 이런 결론을 더 확실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50) 큰 폭풍을 만나 “크게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한 선원들이 우상을 버리고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왔다고 보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욘 1:5, 16).
Beale은 더 나아가 신약성서에서 계시록 11:13에 사용된 이 ‘두려워하여’라는 단어는 “놀란, 불안해하는, 무서워하는, 겁먹은, 두려워하는, 겁내는”으로 번역된다.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다 사용되지만 신앙으로 귀결되는 긍정적인 증거를 보여 주지 않는다(눅 24:5, 37, 행 10:4, 24:25).51) ‘두려움/경외’를 의미하는 명사는 ‘하나님의 경외’라는 표현에 사용되지만, ‘두려워하여’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표현에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요한계시록에서는 항상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고 있다고 언급한다(11:11, 13, 18:10, 15).52)
그러나 7인,7나팔,7대접 시리즈의 주제 중의 하나는 만국에게 하나님의 최종 회개를 제공하는 의미에서의 심판이다. 11:13에서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는 의심할 여지없이 진실한 회심을 언급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표현은 14:7에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천사에 의해 요청된 적극적인 반응과 밀접하게 일치한다. 또한 15:4에서 요한은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라고 하면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16:9에서 사람들은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한다.53) 이 정황에서 “주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명확히 회개를 의미 한다. Aune은 이것을 “회개의 구두적 암시”(a verbal indication of conversion)라고 부른다.54)
그러므로 11:13에서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서운 인과 나팔 심판의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는’ 9:20~21의 말씀과 의도적인 대조를 이룬다.55) 이필찬은 9:20~11:13이 A-B-A’의 구조를 가지고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언급한다. A는 남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은 사실(9:20~21), B는 요한과 두 증인에게 주어진 예언 사역의 부르심(10:1~11:12), A’는 남은 자들이 회개하였다(11:13)의 구조이다. 여기에서 A와 A’는 단순한 병행적 관계가 아니라 대조적 병행관계이다. 이러한 구조를 통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요한의 의도는 교회 공동체의 예언 혹은 증거 사역을 통해서 세상이 회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사실이다.56)
이 두 경우에 ‘남은 자들’이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사용되지만 그 결과는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7인, 7나팔, 7대접 심판의 어느 경우에도 땅에 거하는 자들이 회개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지만(참조. 9:20~21, 16:9, 11), 11장에서 교회 공동체를 상징하는 두 증인의 증거 사역을 통해 두 증인을 핍박하므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자들이 회개하게 되는 유일한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두 증인의 구약 모델을 능가하는 결과이다.57)
7) 계시록 11장과 전후문맥 그리고 계시록 전체와의 연관성
계시록 11:1~13은 세 개의 일곱 심판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나팔 심판의 부분이다. 이 환상에서 소개하는 성전 장면(8:2~6)에 이어서 여섯 개의 나팔이 울린다(8:7~9:21). 마지막 나팔이 불기 전에 10:1~11:14로 구성된 일종의 삽입이 등장한다. 그 삽입은 두 증인의 활동의 묘사로 끝난다. 우리는 이 부분을 여섯 번째 나팔의 확대로 또한 두 번째 화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상 11:14은 두 번째 화의 끝이며 세 번째 화인 일곱 번째 나팔의 시작을 가리키는 요약적인 진술이다.
요한은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0:11)에 이어서 성전측량을 명령 받고(11:1~2), 두 증인의 선교의 상세한 묘사가 이어진다(11:3~13). 다른 두 본문에 대조하여 이 부분은 ‘환상이나 환상의 해석으로 제시되 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 예언’으로 제시되고 있다.58)
두 증인의 공적 사역이 모세와 엘리야의 사역을 회상시키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이 어서 그들의 죽음에 둘러싸인 사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을 회상시키는 묘사들로 더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11:7~11). 그 다음에 세상에 대한 마지막 심판 시리즈의 간단한 보고가 이어지며(11:14), 마지막 일곱 번째 나팔 심판과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의 온전한 성취의 선언이 이어진다(11:15~19).
계시록 10장과 11장은 예언이라는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다. 계시록 10장에서 요한은 ‘예언을 다시 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1장에서 두 증인은 예언자로 역할을 수행 한다. Roloff는 “이 단락의 전체 주체의 핵심의 열쇠는 예언자와 예언에 대한 암시가 주홍 실(scarlet thread)처럼 계시록에 흐르고 있는 관찰에서 볼 수 있다”고 주장한 다.59) Strand도 삽입은 이중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예언적 선포의 주제는 다른 이미지로 11장에서 지속된다. 즉, 성전 상황의 이미지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전 측량의 장면과 두 감람나무이며 두 촛대의 성전 이미지를 통하여 소개되는 이어지는 두 예언적 증인에 관한 페리코프(3~13절)를 볼 수 있다.60)
계시록 11:1~14은 10장과 연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9장과도 연결되어 있다. 긴밀하게 연결된 고리들을 살펴보자.
첫째, 11:5은 9:17의 “그 입에서는 불이 나오더라”는 표현을 비록 역순으로, 그리고 9:17은 ‘입’이 복수이지만 단수로 사용하지만 동일한 표현을 드러낸다. 두 증인은 최소한 9:17의 이상한 말들이 가지고 있는 동일한 능력 가운데 하나를 가지고 있다. 부정적이며 긍정적인 능력이 대조를 이룬다.61)
둘째, 여섯 번째 나팔의 결과(9:20~21)는 부정적이다. 생존자들은 그들의 일을 심지어 회개하지도 않고 더 악해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10~11:13은 긍정적인 결과가 나타난다. 거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두 증인이다. 두 증인은 비록 죽임을 당하지만, 그들은 일어나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나머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심판만으로는 회개를 가져올 수 없다(9:20~21). 증인들의 증거가 회개를 가져온다.62)
셋째, 계시록 11:1~14의 핵심 인물은 요한, 두 증인, 짐승, 땅에 거하는 자들, 하늘에서의 음성이다. 계시록 11장의 시작에서 환상과 ‘들었다’는 요소의 결여는 계시록 11장이 계시록 10장에서 분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환상, 오디션, 그리고 행위는 새로운 장면이 등장할 때에도 지속되고 있다.63) 계시록 10장은 직접 요한에게 예언하라는 명령으로 끝난다. 계시록 11장은 요한과 더불어 시작한다. 그것은 작은 두루마리를 먹은 후에 그가 행하는 것은 두 번째 상징적 행위이다. 그는 측량하는 지팡이를 받고서 간접적으로 말로 성전을 측랑하라는 직임을 받는다.64)
또한 11:3~13은 12~13장과도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 계시록을 교차 대칭구조로 볼 때 계시록의 중심은 11~12장이라고 볼 수 있다. 11장은 땅에서는 성도들을 향한 전쟁을 보여주고 12장은 하늘에서는 용들을 향한 전쟁을 보여준다.65) 둘째, 지나친 구조적 단순화에도 불구하고 이분법적 구조로 볼 때 1~11장과 12~22장 두 분할로 나눌 수 있다.66) 이것은 요한계시록의 특징인 이원론으로서 성전(holy war) 모티브를 강화해준다. 셋째, 11:1~13(두 증인)과 13:1~18(두 짐승)은 서로 대조적인 연계적 특성을 드러낸다. 김상훈은 ‘두 증인’과 ‘두 짐승’ 사이에 ‘두 증인-두 짐승’ ‘마흔 두 달과 천이백육십일-마흔 두 달’을 포함한 대조적인 연계적 특성 11가지를 지적한다.67)
더욱 중요한 점은 두 증인 주제는 계시록에서 기독교 메시지 선포의 이중적 표현으로 반영되어 있다.
첫째, 요한은 자신이 감당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로 인하여 감옥에 갇혀 있다고(1:2, 9) 고백하고 있다.
둘째, 다섯 번째 인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 아래에 보이는 순교자들이 동일한 이중적 말씀과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진술한다(6:9).
셋째, 여자와 용의 전투를 묘사하는 12장에서 핍박 받는 여자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서”(12:17) 용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14장에서 짐승과의 싸움에 성도들의 인내의 강조를 하 면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14:12)로 정의한다.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20장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20:4) 순교자들이라고 밝힌다(20:4). 성도들과 관련된 이 긴밀한 이중적 증언의 동일시는 두 증인은 성도들의 모임인 증거 하는 교회로 이해하게 이끈다.
3. 결론
요한계시록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11:3~13의 ‘두 증인’이 누구인가를 묻는 정체성의 질문은 해결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지금까지 문자적으로 상징적으로 절충적으로 해결을 시도하였다. 어떤 접근이 좀 더 적절한지를 찾기 위하여 11:3~13의 핵심 용어인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와 더불어, 두 증인의 사역의 특성을 살펴보았다.
더불어서 계시록 전체에서 증인 모티브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탐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가 ‘충성된 증인’으로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만드신(1:5) 길을 따라서, 두 증인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신실하게 감당해야 될 ‘증언하는 교회’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요한계시록은 분명하게 선지자들과 성도들을 구분하여 언급한다(11:18, 16:6, 18:20, 24, 22:9). 이것은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촛대가 아니다. 오직 교회만이 두 감람나무요 두 촛대로서의 두 증인이다. 그러므로 11:3~13에서 묘사되고 있는 선포자로서의 두 증인의 증언은 개별적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거 이다.68)
<미주>
11) 예를 들면 마 18:16, 눅 24;48, 행 1:8, 딤전 5:19, 히 10:28, 계 1:5. 16) Ekkehardt Muller, “The Two Witnesses of Revelation 11," JATS 13/2(2002); 33-34. 26) J. M. Court, Myth and History in the Book of Revelation, 92. 31) Brian K. Blount, Revelation (Louisville, KY: Kohn Knox Press, 2009), 57-58; 이필찬, <내가 속히 오 리라> (서울: 이레서원, 2006), 143; 이달, <요한계시록>,, 신학전문 도서시리즈 14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87. 36) Beale, Revelation, 583. 41) Osborne, Revelation, 422. 51) 참조. Osborne은 E. Schnabel도 “John and the Future of the Nations," Paper presented at the fifty first annual meeting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8-9에서 네 가지 근거를 가지고서 부정적 의미를 제시한다고 지적한다. Osborne, Revelation, 434. 56) 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501-502. 61) Ekkehardt MUller, “The Two Witnesses of Revelation 11" 31 66) Beale, Revelation, 141-144; 이동수,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연구", <진리논단>, vol. 10(2005): 95-96; 홍창표, <요한계시록해설>, (서울: 크리스천북, 1999), 109. |
본 글은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 최갑종)가 2012년 4월 28일 서울 사당동 총신대학교에서 개최한 제59차 정기논문발표회에서 발제된 논문입니다. ‘한국교회와 예배’를 주제로 열린 이날 논문발표회에서는 분과별로로 9개의 주제논문과 9개의 자유논문 총 18개의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이중, 이단들에 의해 수시로 오용되는 계시록의 ‘두 증인’을 신학적으로 깊이 다루는 본 논문이 독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리라 사료됩니다. <편집자주>
심상길 / 그리스도대학교 신약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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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입니다 이달에도 후원하시는 분이 계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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