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머리/조현순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삼 년 되었을까 큰언니가 오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 유방암으로 암 투병을 하였다. 암 세포들이 커갈수록 언니는 먹을 것도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자꾸만 몸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암 투병은 너무도 힘이 들었다. 암세포를 죽이는 일은 쉽지가 않았다. 몇 번의 투약으로 인해 갈수록 살이 빠지고 뼈만 남는 모습이 눈에 띄게 마른 나뭇가지처럼 보여졌다. 먹을 것도 못 먹고 수혈을 하는 도중에도 까무러치기가 일쑤였다.
까맣게 쪼그라든 유방을 보여주며 건강해져서 수술하면 낫을 거라고 눈물을 감추며 말했다. 언니의 까맣고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자 하는 수 없이 머리카락을 밀게 되었다. 파르스름한 머리를 보며 빨리 낫기를 기다리고 또한 예쁜 머리카락을 기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으나 언니는 가을 하늘의 붉은 노을을 가슴에 안고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그랬다. 이불을 가슴에 끌어 앉고 아픔을 보여주지 않던 강한 모습을 남겨놓고 아픈데도 내색하지 않고 내가 살기 힘들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면 언니는 말없이 다 들어 주었다. 언니 먹을 것을 해가면 언니는 “너도 일하랴 시어머니 모시고 살림살이하랴 힘들고 바쁜데 죽을 어떻게 쒀왔냐”며 미안 해 한다. 언니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흐르는 눈물을 몰래 닦으면 언니는 내게 웃어 보이며 “당당하게 살아라. 염색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예쁘게 하고 다녀라” 하며 내게 힘을 주던 언니에겐 나는 철없는 동생이었다. 언니가 내 곁을 떠났어도 나는 한동안 울음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언니 둘과 나 세 자매는 항상 단발머리 아니 뒤에를 면도하는 상고머리로 자랐다. 어렸을 적 우리 마을에는 미장원이 없었다. 우리 세 자매는 못난이 삼 형제 인형 같은 모습을 하고 자랐다. 그러나 우리 동네를 주기적으로 골목을 누비며 "이발이요 이발" 하며 외치고 다니던 분이 있었다. 그 아저씨가 오시면 우리 세 자매는 영락없이 붙들려서 머리카락이 잘림과 동시에 쓱쓱 가죽에 면도칼을 갈아서 뒤통수 가까이 까지 머리를 밀고 비누거품을 내어 면도를 당해야했다. 차가운 비눗물이 몸서리치게 싫기도 했지만 짧아지는 머리카락이 싫어서 울기도 하곤 했다. 머리카락이 조금만 길어지려고 하면 어김없이 “이발이요 이발”하며 사냥감을 찾으러 다니는 승냥이 같은 아저씨의 목소리가 동네에 퍼졌다. 그럴 때면 우리 세 자매는 꼭 꼭 숨었다. 그러다 힘없는 내가 먼저 엄마 손에 붙들려 버둥거리다가 아저씨에게 손에 넘겨지면 목에 보자기를 두르고, 머리 깎기 싫다고 징징거리며 울고 나면, 작은 언니는 심술이 가득 찬 얼굴을 하곤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았다. 큰언니는 조금이라도 덜 잘라 달라고 아저씨께 활짝 웃어 보이기도 했다. 찌르륵 찌르륵 거리는 아저씨의 기계 소리가 몸 소리치게 싫었던 어린 시절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때는 머리를 기르면 머리카락사이로 하얗게 서캐가 끼어 참빗으로 빗질하고 이를 손톱으로 잡아내던 시절이 있었다. 졸망졸망한 아들 둘에 세 명의 딸들의 머리카락을 엄마는 그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는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지금은 수도꼭지에 물이 가득하지만 물도 귀하고 연탄불도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제대로 씻지도 못했고, 머리카락도 일주일에 한번 감았다. 동네 어귀에 있는 목욕탕에 한 달에 한 번 목욕을 하러 가면 우리 세 자매는 물속에서 물놀이에 온 종일 손가락 발가락이 물에 퉁퉁 불었던 생각이 난다.
큰언니는 늘 나를 손 잡고 다니며 나를 예뻐했던 기억이 난다. 북가좌동에서 수색초등학교 까지 십리가 될까하는 길을 걸어 다녔던 때도 추운 겨울날 눈길에 내가 넘어질까 봐 큰언니는 나를 업고 작은 언니는 우리들의 책가방을 들고 먼 길을 다녔다. 세 자매는 늘 함께 다녔다. 여름에는 남의 무밭에 가서 무를 뽑아서 먹기도 하고, 인형놀이와 땅바닥에 퍼지고 앉아 공기놀이하면서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가서 숙제도 제대로 못하고 잠을 잤다. 봉숭아꽃이 피는 날을 기다려 꽃잎에 소금 넣고 조약돌로 찧어 손톱에 물들이고 누가 더 예쁘게 물들었을까 궁금해서 잠을 설치던 더운 여름날이 생각난다. 야트막한 동산에 올라가 연을 날리면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세 자매는 논에서 누렇게 익은 벼를 따다가 연탄불에 올려놓고 톡 톡 터지는 소리를 내며 고소한 맛이 나기를 기다렸다가 서로 다투어 먹곤 하였다. 메뚜기를 잡아서 프라이팬에 볶아 먹고 개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기절 하면 재미있다고 깔깔거리며 놀던 논은 사라지고 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가 놓였다.
마을이 조금씩 변화되고 있었다. 논둑길 사이에 구름을 걸고 서 있던 미루나무가 잘려나갔다. 언제나 가고 싶은 야트막한 동산 그곳은 사람들이 욕심으로 아파트로 변하였다. 신작로 가 놓이고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시절이 지나고 이발하던 아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내 머리를 싹 뚝 자르는 재미로 살던 이발사 아저씨는 “칼 갈아요” 하며 동네를 떠돌고 다녔다. 언니들과 나는 머리를 길게 길러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만큼 언니와 우리는 자유롭게 머리카락을 기를 수가 있었다. 우리 세 자매는 서로의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자주 만나는 것이 힘들긴 했어도 우리 세 자매는 만나면 늘 유년시절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하얀 머리카락이 삐죽거리며 염색할 때가 되었다고 말을 건다. 염색약으로 눈이 나빠지고 머리카락이 거칠어지기에 염색할 시기를 조금 더 늦추면 이내 하얀 머리카락이 온 머리를 뒤덮는다. 그나마도 염색약이 있어 까맣게 물을 들이니 잡다한 생각을 감추게 되었지만, 언니들과 함께 머리핀을 예쁘게 꼽고 내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주기도 했던 큰언니가 그립다. 작은 언니와 내가 서로 예쁜 핀을 가지려면 큰언니는 늘 내 편을 들어주곤 했다. 그러면 작은언니는 늘 삐쳤다. 언니들 보고 싶어지면 작은 언니와 전화로 수다를 떤다. 어렸을 적 이야기로 시작해서 큰언니 이야기로 끝나면 그리워지고 마음이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낡은 앨범을 펼친다.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니 언니들과 같이 상고머리를 한 모습이 흑백사진에 담겨 있었다. 활짝 웃고 있는 큰언니와 작은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져 사진 위에서 번져 갔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언니가 활짝 웃고 있었다. 언니들과의 시절은 늘 가슴 한구석에는 늘 언니들과 함께였던 유년시절이 남아있다. -끝-
첫댓글 엣날이 떠오르네요 저도 언니한테 전화나 해야 겠어요. 감상이 아니라 참 가슴이 뭉클하네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축하드려요 조회장님
많이 늦었지만 거나하게 한턱 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