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
글. 박철수(분당두레교회 원로목사)
세계 문학사에 우뚝 선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러시아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받으신 세 가지 시험에 대하여 누구보다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결혼 생활은 엉망진창이었고 도박 중독의 상태였다. 일단 도박을 하면 빈털터리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거기다 그는 평생을 간질병으로 고생했으며 음주와 마약에 취해 있었다. 또 그는 아들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가 소설에서 다른 주제들은 돈, 치정, 죽음, 그리고 살인을 정점으로 하는 폭력이다. 그의 위대한 소설들은 그의 불행하고 파란만장 생애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들이었다.
1849년 그의 나이 28세 때, 4월 7일 빼뜨라셰프스끼 집에서 열린 정기 문학 모임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절대 왕정의 입장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은 벨린스끼의 편지를 읽었다. 4월 23일 고발에 의해 새벽 5시에 문학 모임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보요원에게 체포 당한다. 그후 9월 30일 재판이 시작하여 11월 13일 벨린스끼의 사악한 편지내용을 퍼뜨린 죄목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때는 러시아 황제 니꼴라이 1세가 집권 (1825-1855)하는 시대였다. 그는 페트로 파블로브스키 수용소에 수용되어 8개월 만에 사형집행을 언도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갈 절박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 28세의 나이로 사형장에 끌려갔다. 병사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 뒤로 수많은 구경꾼들이 있었다. 죄수들은 검은 천에 싸인 교수대가 놓인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갔고 그곳에는 관도 놓여 있었다. 남은 시간은 5분, 그는 28년의 삶에 대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바로 그때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급히 달려온 장교 한 명이 판결문을 낭독했다. 옛날 한국영화에서 금부도사 앞에서 사약을 받아들고 마시려는 순간 말을 탄 관리가 말발굽 소리도 요란하게 나타나 “어명이요!”라고 외치며 집행을 중지시키는 장면과 비슷하다. 황제의 특사로 형 집행이 중단되고 강제 노동형으로 시베리아 벌판, 또볼스로 끌려 간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그 곳에서 삶의 놀라운 전환점을 맞이한다.
1849년 12월 25일 시베리아의 유배지로 길을 떠난 도스토예프스끼는 시베리아 옴스끄에서 4년 동안 징역을 살았고, 이후 4년간 유형수 부대의 사병으로 복무했다. 그가 시베리아로 가는 도중 또볼스에서 그와 함께한 문학 정치 당원 나딸리야 폰비진의 아내가 10루블 지폐에 복음서를 숨겨 몰래 건네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감방에서 형을 치루는 동안 복음서를 늘 베개 밑에 두고 시시때때로 꺼내 읽었다. 그는 드디어 예수님을 만났고, 회심한 뒤부터 감방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분노를 무기삼아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식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쪽으로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런 후에 그는 여러 작품을 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과 감명을 준 세계사적 대문호가 되었다. 그날 이후 미쳐버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완전히 변화된 새 사람이 되었다. 죽음을 뼛속까지 느낀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더라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되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고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의 시베리아 강제 노동과 군대 복무가 지겹고 힘든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었다. 4년 동안 5킬로그램에 가까운 쇠고랑을 팔과 다리에 매단 채 나락 같은 감옥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소설을 쓰고 또 썼다. 그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집필했다. 복음이 그의 마음에 떨어지니 그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큰 나무로 자라 그 책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오늘까지도 감동을 주고 있다.
후일 그는 폰비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설령 누가 내게 그리스도는 진리 밖에 있다고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일지라도 나는 그런 진리보다는 그리스도와 함께 남는 쪽을 택할 것”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그리스도에 깊이 매료되었다. 선물로 받은 복음서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성물처럼 평생토록 간직하고 유품으로 남겼다. 시베리아 감옥에서의 생활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관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전환시켰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렸을 때 정교회를 다녔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아, 그런데 한 여인으로부터 우연치 않게 받은 신약성경을 통해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된 계기가 되다니! 이때 그의 나이 29세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신적 우발성을 통해서 일하신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예수님을 만난 도스토예프스키
천재 과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 과학자보다 위대했던 가우스 보다 더 많은 것을 내게 주었다"고 말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 그는 내 생애에서 가장 아름다운 행운 중 하나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심리학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는 셰익스피어의 버금가는 자리를 차지한다.”라고 했고, 우리 시대의 영성 신학자인 유진 피터슨도 "그는 나의 멘토요, 도스토예프스키 덕분에 다시는 하나님을 향해 흔들리는 위기를 겪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도스토예프스키 연구가이기도 한 니꼴라이 베르쟈예프는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절정'이라고 말했고, 작품 평론자인 몬스딴찐 모줄스키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세계 문학사의 위대한 기독교 작가들인 단테, 세르반테스, 밀턴, 파스칼의 옆 자리를 차지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만약 누군가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성경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람의 참 말보다 예수님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 불후의 책들,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런 배경에서 쓰여졌다. 누군가는 목사 1,000명의 설교를 합쳐도 죄와 벌이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설교를 결코 감당할 수가 없다고 했다. 1859년 12월, 마침내 만 십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미래의 대문호는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생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을 체포, 수감, 유형으로 소진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야말로 이 후 그가 위대한 작가로 성장하는 데 가장 비옥한 토양이었다. 그가 받은 참담한 고통이 그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런 세월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도스토예프스키는 없었을 것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의 마지막 생애 말년 59세에서 60세까지 쓴 책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소설을 완성한지 석 달 후에, 그의 비범하고 기이한 인생을 마쳤다. 1821년에 태어나 1881년 1월 28일 폐동맥 파열로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60세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수고 하셨습니다
귀한자료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