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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근원으로 돌아가다(返本還源)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귀머거리나 장님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참된 집에 살게 되면 그 무엇도 꺼릴 것이 없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 있다.
주해 : 처음부터 진리는 맑디맑다. 고요한 평정 속에서 나는 완성되고 붕괴되는 형상들을 지켜본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성형도 필요가 없다. 물은 녹색, 산은 남색. 나는 창조되고 있는 것과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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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세상에서(入○垂牛)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 옷은 누더기,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도 나는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흐른다. 나는 마술같은 것을 부려 삶을 연장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주해 : 내 문중(門中)에 속하는 천 명의 현자들도 나를 몰라본다. 내 정원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다. 왜 스승들의 발자취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술병을 차고 시장 바닥으로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집과 시장으로 가니,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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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트 프렘이 어제 저녁 나를 찾아왔다. 비파사나(여기에 나오는 비파사나는 쉬리 라즈니쉬에 의해 그의 제자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 출신의 이 여자는 쉬리 라즈니쉬의 강의가 끝난 이틀 후에 숨을 거두었다. 실제로 이 여자의 죽음은 수리 라즈니쉬의 아쉬람에 비데오 테이프로 기록되어 남아 있다. 이 여자 산야신은 죽음에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였다.)가 죽음에 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한없는 괴로움 속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게 되면 그 순가, 마음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죽음이 강하게 떠오르게 된다. 죽음의 순간에는 위대한 계시가 내려온다. 그것은 그대를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그대에게 마치 그대 자신이 없어진 듯한 느낌을 준다. 실재라는 환영이 사라진다.
새트 프렘은 울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쉽사리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쉽사리 무기력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같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에게라도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은 찾아올 것이다. 갑자기 그대는 발밑의 땅이 꺼져 버린 듯한 기분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면 그대는 그대의 목숨이라도 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죽음 앞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대는 그저 무력감에 깊이 젖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 순간 그대는 슬퍼질 것이다. 혹은 그 순간 그대는 진리를 찾아 심오한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소를 찾아 떠나는 심오한 여행을 말이다. 이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찾아와 앗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이 삶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죽음 앞에서 그렇게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면 삶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기억하라! 죽음은 비파사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다. 태어난 순간 이미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침대는 죽음의 자리이다. 왜냐하면 탄생이 있은 다음,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기 때문이다. 비파사나뿐만 아니라 그대 또한 죽어갈 것이다. 그대는 그 행렬 조금 뒤에 서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 죽는다. 어떤 사람은 내일, 또 어떤 사람은 모레 죽는다.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무엇인가? 시간의 차이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은 단지 삶이라는 환영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끝나는 삶은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꿈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대들이 이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때야말로 그대는 소를 찾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소를 찾는 것은 죽음을 모르는 참된 삶을 찾는 것이다. 삶은 그것이 영원할 때라야 참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꿈과 그대들이 말하는 삶 사이에 다를 것이 뭐 있겠는가?
깊이 잠든 밤, 꿈은 다른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다. 그대가 눈을 뜨고 보는 것보다 더욱 현실적이다. 그러나 아침이 오면 그것은 어디론가 가 버린다.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비로소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삶이라는 이 꿈도 몇 년 동안 계속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거기에서 깨어나게 된다. 그때는 삶 전체가 하나의 꿈이었음을 알게 된다.
죽음은 하나의 위대한 계시이다. 만약 죽음이 없었더라면 결코 종교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죽음으로 인해 종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죽음으로 인해 붓다가 탄생했다. 모든 붓다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탄생한다.
붓다가 길을 지나가다가 장례 행렬을 보게 되었다. 그는 하인에게 장의차의 마부를 데려오도록 명령했다. 붓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마부는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거짓말이란 때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부는 이런 마음에서 이 젊은 왕자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쓸데없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 필요가 뭐 있는가? 그는 지금 너무나 젊다. 어째서 그가 죽음에 대해 번민해야 하는가?” 이 이야기는 아름답게 전개된다. 마부는 이런저런 거짓말로 적당히 꾸며대려고 했으나, 천국에서 신들이 내려다보고 있다가 곧 마부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서 마부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artha)는 진리를 놓치게 될 것이다.” 신들이 억지로 마부에게 진실을 토하게 했다. “이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이렇게 죽게 됩니다. 심지어 왕자님까지도 말입니다.” “나까지도?” 붓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집으로 데려다 다오. 그렇다면 아무데도 갈 곳이 없구나. 이 삶 전체가 한낱 속절없는 것이로구나. 시간을 함부로 낭비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영원한 것을 찾아가야 하니까.” 이렇게 하여 붓다는 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가서 비파사나의 옆에 앉아 보라. 죽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그녀를 불쌍히 여긴다면 그대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대는 큰 기회를, 커다란 문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그럴 필요가 없다.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답다. 그녀는 무엇인가 알맹이를 얻어 이 세상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녀가 나를 찾아왔던 날, 나는 그녀의 호흡이 정상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파사나라는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다. 비파사나란 호흡의 각성이란 뜻이다. 나는 그녀에게 될 수 있는 한, 호흡을 깊이 주시하도록 당부했다. 그녀는 죽을 것이었다. 언제 죽을 것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찌 되었든 그녀는 심한 호흡 장애로 인해 죽을 것이었다. 그녀의 호흡은 규칙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시력은 잠들지 않고 언제나 깨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어떤 완성을 이루고 죽어가는 것이 기쁘다. 그녀는 무의미하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 오히려 그녀의 그러함을 기뻐하라. 그녀는 열심히 호흡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녀가 성취한 것이 무엇이든 그녀는 그것을 다음 번 생으로 가져갈 것이다. 그녀는 이번 삶의 기회를 잘 이용했다. 이제 그녀가 살아남든 죽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을 때 그대 자신을 보다 더 불쌍히 여기라. 그대 또한 그녀와 같은 운명의 배를 타고 있다. 어느 날 죽음이 그대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깨어 있으라!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소를 찾아라. 죽음이 문을 두드리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라. 길에서 한눈 팔지 말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이 모든 삶은 꿈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오갈 데 없는 불모지에 남겨지게 될 것이다.
소를 찾는 것은 영원한 에너지를, 영원을 통하여 활활 타고 있는 삶의 에너지를 찾는 것이다. 에너지는 죽음을 모른다. 그것은 수많은 죽음들을 통과하며 지나왔다. 하나하나 지나오면서 당했던 죽음은 새로운 형태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하나하나의 죽음은 삶과 삶 사이를 깨끗이 씻어주는 정화 과정이었다. 하나하나의 죽음은 삶과 삶 사이에서 만들어진 무거운 짐들을 덜어주는 과정이었다. 하나하나의 죽음은 그대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것들로부터 그대를 해방시켜 주었다.
삶이란, 참된 앎이란 결코 죽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죽는가? 그대이다! <나>라고 하는 에고가 죽을 뿐이다. 에고는 삶이 아니라 죽음의 일부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그대로부터 에고가 모두 사라졌을 때는 그대에게 죽음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만약 그대가 의식적으로 에고를 떨쳐 버릴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죽음을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소를 찾을 때 한 가지 꼭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미래의 어느 날 에고를 떨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진정으로 깨어 있다면 그것은 단칼에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깨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서서히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대에게 달려 있다. 어찌 되었든 에고를 떨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에고가 소멸될 때 죽음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니 가서 비파사나의 옆에 앉아 보라. 곧 그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불쌍히 여기지는 말라. 오히려 그대 자신을 불쌍히 여기라. 죽음으로 하여금 그대를 둘러싸게 하라. 그리고 그것을 맛보라. 어찌할 도리가 없는 무력감을 느껴 보라. 누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가? 누가 무력감을 느끼는가? 에고이다. 이제 그대는 그대가 무엇 하나 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를 살리고 싶겠지만, 그대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혼신을 다하여 이 무력감을 깊이 느껴 보라. 그러면 이 무력감 속에서 어떤 각성이, 어떤 기도가, 어떤 명상이 솟아오르게 될 것이다. 그녀의 죽음을 이용하라.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다. 나와 함께 여기에서 모든 것을 하나하나의 기회로 이용하라.
그녀는 삶을 아름답게 이용하였다. 그녀는 곧 이 삶으로 되돌아올 것이므로 나는 그녀와 매우 기쁘게 작별할 수 있다. 그녀는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죽음이 그녀를 도와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육체를 가지고 더 이상의 업(業)을 쌓는다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번 삶에서 치러야 할 업은 다 끝마쳤다. 이제 그녀가 아득히 먼 업을 뚫고 지나가려면 새롭고 신선한 몸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녀는 투쟁하고 있지 않다. 그녀는 그저 연이어 일어나는 상황에 자신을 내맡겨 버렸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만약 그녀가 투쟁한다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사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미 죽음에 순응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떤 사람이 죽음에 순응하고 있을 때는 그 누구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히려 가슴 속 깊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죽음을 초월한 듯한 느낌이 올 때에야 비로소 사람은 죽음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을 맛보게 될 때, 잠시 동안만이라도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죽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는 날, 그는 비로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이제 어디에다 대고 투쟁할 것인가? 그럴 필요가 뭐 있는가? 사람은 자연히 휴식하게 된다. 그녀는 휴식하고 있다. 잠시 후 그녀는 사라질 것이다. 그 기회를 이용하라!
그녀 옆에 있으라. 고요히 앉아 있으라. 명상하라. 그녀의 죽음을 지침으로 삼아 그대의 삶을 계속 낭비하지 말라. 똑같은 일이 그대에게서도 일어날 것이다.
아홉 번째 경문 : 근본으로 돌아가다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귀머거리나 장님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참된 집에 살게 되면
그 무엇도 꺼릴 것이 없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 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은 이 모두 헛걸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홉 번째 지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대는 단 한 걸음만으로도 근원에 이를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헛수고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씩 서서히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단 한 번에 근원으로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내가 “뛰어들라!”고 말하면, 그들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뛰어드는데 무슨 생각이 필요한가? 만약 그대가 생각하고 그 생각에 의해 결정을 내린다면 그것을 어떻게 점프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점프>는 미지의 세계로 그냥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이다. 점프는 계획활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준비할 수 없다. 그대는 그것에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없다. 그대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점프는 에고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무엇인가 에고에 의해 결정되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다. 점프는 전체가 그대를 소유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점프는 그대와의 단절을 말한다. 그것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생각하고 그 생각에 의해 어떤 결정을 내린다면 그때는 그대와 연속적인 관계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산야스를 받게 될지 모르지만, 산야스는 오랜 여행길의 첫 발자국이 될 뿐이다.
내가 그대에게 바랐던 산야스는 단 한 걸음이었다. 그 단 한 걸음으로도 그대는 집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그대는 생각하고 싶어 했다. 나 또한 그대의 문제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생각하지도 않고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겠는가? 생각하지도 않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점프는 신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대는 신뢰할 수 없다. 그대는 의심한다. 그대는 결정하기 전에 모든 가능성에 대해 심사숙고하도록 훈련되어 왔다. 그대는 항상 생각하며 조절하도록 훈련되어 왔다.
그대는 그대 자신이 생각한 결론으로서 산야스를 받을 수도 있다. 그때는 그것은 그대와 연속 관계를 갖게 된다. 내가 그대에게 주고자 했던 산야스는 사랑이나 죽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대는 사랑에 대해 생각할 수 없다. 사랑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 말에서 <사랑에 빠지다> 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낙하이다. 에고로부터의 낙하인 것이다. 머리로부터의 낙하이며, 통제로부터의 낙하이고, 연속성으로부터의 낙하인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낙하하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연속되는 사념의 일부가 아니다. 돌연 하나의 틈이 나타난다. 혹은 그것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대에게 다가와 그대를 차지해 버린다. 그것은 그대의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대는 집에 점점 가까이 이르게 될 때, 그대의 집이 바로 코앞에 다가오게 될 때 그때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귀머거리나 장님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처음부터 귀머거리나 장님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 - 이것이 신뢰를 뜻하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신뢰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맹신자가 되고 있다. 맹목적이 되지 말라. 여유를 가지고 잘 생각해서 결정하라. 모든 것은 너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한다.” 그대의 탄생은 그대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어느 누구도 먼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누가 그런 질문을 할지라도 그대는 거기에 있지 않는다.
그대의 탄생은 미지의 세계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대는 무(無)에서 태어났다. 그것은 그대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대는 다시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그대의 죽음이다. 그것 역시 그대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이에 가끔 사랑의 섬광이 나타난다. 그것들은 모두 알 수 없는 것에서 오는 것이다. 아니면 그대가 상당히 운이 좋거나 명상이나 기도를 한다면 그때 다시 알 수 없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몇 가닥의 섬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그대 행위의 소산물이 아니다. 그대의 행위는 한낱 장벽이 될 뿐이다.
세상에는 오로지 그대만이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대가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오직 깊은 무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탄생, 죽음, 사랑, 명상이 그러하다. 그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그대에게서 일어난다. 이것을 기억하라! 그런 것들은 그대가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근원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귀머거리나 장님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참된 집에서 살게 되면
그 무엇도 꺼릴 것이 없다.
강은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 있다.
강물을 보라!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개의치 않고 평정 속에서 고요히 흐른다. 강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혼란되지 않고 유유히 흐른다. 강물은 자신의 본성에 맞추어 유유히 흐른다. 강물은 결코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는다. 강물은 언제나 참된 그 자신으로 남아 있다. 아무도 강물을 혼란시킬 수 없다. 아무도 강물에게 명령할 수 없다. 주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을 조금도 잃어버리지 않고 강은 강으로서 유유히 흐른다. 전쟁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폭탄이 떨어진다 할지라도, 좋은 나쁘든 그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강물은 결코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는다. 운행(運行)만이 그 고유의 본성이다. 그리고 그 평정이라 참된 그대 자신으로, 집으로 돌아와 있을 때 저절로 따라붙는 그림자인 것이다.
나무의 꽃들을 보라……. 꽃들은 빨갛게 피어 있다. 나무 또한 그들 자신의 참된 집에서 살고 있다. 그 어떤 꽃들도 다른 빛깔로 피어 있는 꽃들을 흉내 내지 않는다. 거기엔 어떤 모방도, 어떤 경쟁도, 어떤 질투도 없다. 빨간 꽃은 그냥 빨갛다. 빨갛게 피어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기쁘기만 하다. 발간 꽃은 결코 다른 어떤 꽃이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에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그의 참된 본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욕망과 모방과 질투 그리고 경쟁심 때문이다. 인간은 땅 위에서 유일하게 그 자신에 진실하지 못한 존재이다. 인간이라는 강은 그 자신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다른 어떤 곳으로 흐르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누구인가 다른 사람들만 바라보고 있다. 그것이 모든 불행과 재난의 씨앗인 것이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다른 것으로 둔갑할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 그런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에 대한 이해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대는 붓다가 될 수 없다. 그대는 예수도 될 수 없다. 그리고 붓다나 예수가 될 필요도 없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다른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계속 참된 근원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간격은 욕망 때문에 만들어진다. 누가 좋은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면 그대는 그 차를 가지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그 차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대는 그 차가 필요하지 않았었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타고 있는 차를 보고 어떤 욕망이 솟아오른다. 만약 그대가 그 차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런 욕망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그대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어디인가 밖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것은 마치 강물이 바다를 향해 흘러가다가 강변에 있는 어떤 것을 보자마자 그 흐름이 깨어지면서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 이리하여 강은 강변 어디엔가 달라붙어 있고 싶어 한다. 무엇인가 소유하고 싶어 한다. 이제 그 강은 고유한 본성으로부터 멀어졌다. 강은 그 진실로부터 빗나가 버렸다.
그대는 우람하고 아름다운 육체를 가진 운동선수를 본다. 그러면 갑자기 어떤 욕망이 솟아오른다. 그대는 무하메드 알리(Mohammed Ali)가 되고 싶어 한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는 미남이나 미녀를 보게 되면 그와 같이 되고 싶어 한다. 혹은 심원한 이해 속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 붓다를 보면 그대는 또 그와 같이 되고 싶어 한다. 기억하라!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
일단 그대가 이것을 깨달았다면 기본적인 것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얼어붙어 있던 그대의 강은 곧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이제 그대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말하기를 그들은 여기저기에서 많은 장애물을 만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장애물들은 그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하는 뿌리 깊은 욕망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모든 장애물들은 에너지의 냉각화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에너지는 오직 하나의 흐름, 즉 자연스러운 흐름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신경과민의 증세로 연꽃이 되고 싶어 하는 장미를 한번 생각해 보라. 자,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이제 장미는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 뻔하다. 그리고 그런 불행 속에서 그 장미는 장미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이 확실하다. 그것은 장미는 결코 연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장미는 장미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욕망이 다른 곳으로 쏠려서 장미는 연꽃을 꿈꾸며 연꽃에 대한 생각만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미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을 비난하면서 성장할 수 있겠는가?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에너지는 흐르지 않고 장애물로 가득 쌓이게 될 것이다. 이제 장미는 끊임없는 고민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어떤 날은 두통으로, 다음날은 어떤 다른 곳이 또 아프게 될 것이다. 장미는 병들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장미는 꼭 한 가지 가능성만이 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장미가 되는 것이다. 연꽃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장미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장미가 일단 그 자신을 받아들인다면 비난은 사라질 것이다. 장미가 일단 그 자신을 사랑한다면 우아함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다. 품위가 다시 솟아오를 것이다. 이제 장미에게는 어떤 장애물도 없다. 그것들은 녹아버렸다. 이제 장미는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장미는 자연이 선물로 준 빨간 색을 입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환희에 차 있게 될 것이다.
장미에게는 결코 신경과민 증세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인간을 비웃는다. 연꽃에게도 결코 신경과민 같은 것은 없다. 전 세계가 인간을 비웃고 있다. 인간은 신경과민증에 걸려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리고 그 신경과민 증세는 그대에게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강요할 때 일어난다. 그대는 일단 이상(理想)을 갖게 되면 신경과민증에 걸리게 될 것이다. <그대>가 이상인 것이다. <그대>가 하늘의 뜻인 것이다.
참된 집에서 살게 되면……
이 뜻은 다른 누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 자신으로서만 존재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무엇도 꺼릴 것이 없다.
강을 잔잔히 흐르고
꽃은 빨갛게 피어 있다.
산문 주해
처음부터 진리를 맑디맑다. 고요한 평정 속에서 나는 완성되고 붕괴되는 형상들을 지켜본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성형도 필요가 없다. 물은 녹색, 산은 남색. 나는 창조되고 있는 것과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처음부터 진리는 맑디맑다. 처음부터 진리는 숨어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진리는 바로 그대 앞에 있었다. 처음부터 진리 이외에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만이 거짓 속에 살면서 이상하게 돌아버린 것이다.
사람들은 나를 찾아와 묻는다. “신은 왜 보이지 않습니까?”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그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하지 말라.” 신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그 모든 곳에서 그대를 둘러싸고 있다.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었을 뿐이다. 신은 지금 여기에 있다. 신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신이란 전체에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그는 온갖 형상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흐르는 강 속에서는 그는 흐름이다. 빨간 꽃 속에서는 그는 빨강이다.
신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아무튼 그대가 눈이 멀어 버렸거나 아니면 그대 자신이 눈가리개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무엇인가로 눈을 가리고 있다. 그대의 종교, 그대의 문화, 그대의 사회, 그대의 환경, 그대의 문명, 이런 모든 무의미한 것들이 바로 그대의 눈가리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스스로 눈뜨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대는 눈을 감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대는 눈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망각해 버렸다. 그대는 눈뜨고 사는 것을, 진리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대는 거짓과 너무도 장단이 잘 맞아서 진리의 하모니가 들여와도 그대에게는 소음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대의 모든 이미지는 땅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그대가 카드로 쌓아올린 집 전체가 무너져 사라질 것이다. 그대는 꿈과 욕망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리고 그대는 진실을 두려워해 왔다.
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신은 너무나도 환하게 보이고 있다 -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처음부터 진리는 맑디맑다. 그러면 사람은 어디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 것일까? 무엇인가 다른 것이 되어 보려고,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려고, 어떤 이상을 좇으려고, 미래를 향해 달리면서 어떤 특출한 사람이 되어 보려고 하는 그 에고의 덫이 그대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이상을 털어 버리라. 그대가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모든 이상을 털어 버리라. <……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나쁜 독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라.
이것이 바로 선(禪)의 독특한 점이다. 선은 그대에게 어떤 이상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대가 자연스러워지도록 도와준다. 선은 그대가 따르거나 모방할 만한 그 어떤 이미지도 주지 않는다. 선사(禪師)들은 말한다. “그대가 만약 길에서 붓다를 만난다 하더라도 그를 무시해 버려라. 그에게 조금도 신경 쓸 것이 없다. 만약 그대가 붓다의 이름을 입에 올린 날은 그대의 입을 씻으라.”선사들은 붓다의 메시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들은 매우 엄격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단지 그대 자신이 될 수 있을 뿐이며, 그리하여 어떠한 흉내도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말이다. 그대는 모방하여 꽃피우고 싶어 하는 모든 마음의 씨앗을 두들겨 깨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거짓이 될 것이다. 그대는 엉터리 존재가 될 것이다.
바로 그대 자신이 되라! 그대 말고는 도달해야 할 어떤 다른 목표도 없다. 그러므로 <……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진리가 그림자처럼 그대를 따를 것이다. 그러니 긴장을 풀고 그대의 타고난 본성에 따르기만 하라. 자연스럽게 살라. 규칙을 따르며 살지 말라. 그대의 타고난 본성으로부터 규칙을 쫓아 버리라.
선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종교이다. 선은 종교가 아닌 종교이다. 신이 없는 종교이다. 선은 예사로운 도덕을 초월한다.
처음부터 진리는 맑디맑다. 고요한 평정 속에서 나는 완성되고 붕괴되는 형상들을 지켜본다.
만약 그대가 그저 자연스러운 상태로 머문다면, 그대는 하나의 관조자가 될 것이다. 욕망이 일어나서 뭉쳐도 그대는 하나의 관조자로 머물 것이다. 그것은 뭉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 자체를 허물어뜨릴 것이다. 그대는 그 무엇도 할 필요가 없다. 마치 큰 바다에서 파도가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처럼 그대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투쟁할 필요도 없다. 여러 가지 형상들이 일어났다 사라진다. 그대는 하나의 주시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어떤 형상도 그대가 아닌 것이다. 그 어떤 형상에도 그대는 갇혀 있지 않다.
그대는 어린 아이였다. 그 형상은 왔다가 사라졌다. 만약 그대가 어딘가에서 어린 시절의 그대를 우연히 만난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젊은이가 되었다. 그 형상 또한 사라졌다. 이제 만약 그대가 어딘가에서 젊은 시절의 그대를 우연히 만난다 하더라도 그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노인이 되었다. 이 형상 또한 죽음으로 사라질 것이다. 형상은 파도처럼 왔다가 가고,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런 것에 혼란될 필요가 없다. 분노가 왔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에 대하여 손쓸 필요도 없다. 만약 그대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분노는 더 이상 그대에게 독을 내뿜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분노 속에서도 초연하다. 그대는 분노 속에 머물러 있지만 그대로 초연하다. 그것이 가까이 다가와도 그래도 그대는 멀리 있듯이 초연하다.
마치 활활 타는 불 속에 존재하는 눈송이처럼 그대는 형상의 한가운데 머물러 있다. 그러나 그대는 어떤 형상도 그대가 아님을 깨닫고 있다. 그대의 실존은 어떠한 형상으로도 변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대의 실존은 순수한 각성이다. 그것은 무형의 순수한 각성이다.
고요한 평정 속에서 나는 완성되고 붕괴되는 형상들을 지켜본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성형도 필요가 없다.
이것은 참 아름답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떠한 성형도 필요가 없다. 처음에 그대는 분노나 욕심이나 질투나 소유욕이나 기타 등등의 형상에 달라붙을 것이다. 처음에 그대는 분노의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할 것이다. 그때 의문이 솟아오르게 된다. 어떻게 하면 그 분노를 털어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처음에 그대는 욕망의 형상에 달라붙을 것이다. 다음으로 그대는 어이없는 질문을 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이리하여 이제 성형은 불가피해진다. 이렇게 하여 다람쥐 쳇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선(禪)에서는 말한다. 처음부터 어째서 다른 형상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가? 분노를 참기보다, 폭력을 억제하기보다, 욕심을 감추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왜 처음부터 그런 동일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분노를 지켜보라. 그것과 자신을 동일화시키지 말라. 돌연 그대는 분노하는 것도 아니며 분노하지 않는 것도 아니게 된다. 그대는 지켜보는 자일 뿐이다. 폭력과 비폭력은 둘 다 같은 스크린에서 뛰어놀고 있는 같은 형상들이다. 그대는 관람객일 뿐이다. 그대는 형상을 초월하였다. 이제 어떤 성형도 필요하지가 않다. 이 매우 기본적인 것을 이해하도록 하라.
선은 그대에게 브라마챠리아를 실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절대 그러지 않는다. 선은 꾸밈없이 말한다. 성(性)이라는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한번 그대가 성이라는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면, 그때는 그대는 악순환의 노예가 될 것이다. 첫발부터 잘못 대디딘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첫발부터 바로 내디뎌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성자에게 찾아가 브라마챠리아를 선서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브라마챠리아는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억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대는 더욱 불행해질 것이다. 그대의 성욕만 더욱 강력하게 뻗어 나올 것이다. 그것은 한층 더 그대를 매혹시킬 것이다. 그대는 변태적인 성생활을 시작할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대는 <브라마챠리아>이다. 그러나 그대의 깊은 내면에서는 커다란 혼란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선에서는 말한다. 브라마챠리아에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그저 성이라는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 성적 욕망이 솟아오르면 그냥 지켜보는 자가 되라. 성을 비난하지 말라. 그대가 만약 성은 비난한다면 주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어느 한쪽에 가담한다면, 그대는 공정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미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다. 그것을 비난하지 말라! 그것을 심판하지 말라! 어떤 비평도 하지 말고, 깨어 있기만 하라. 왜냐하면 모든 심판은 미묘한 자기 동일화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나쁘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이미 그것과 자신을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이 그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그것이 그대 안으로 침투한 것이다. 그대가 그것을 좋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그대는 그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좋다, 나쁘다를 말하지 말라. 아무 말 없이 그저 잠자코 있어 보라. 그대에게 분노가 솟아오를 대, 성욕이 솟아오를 때, 욕심이 일어날 때 <예>나 <아니오>라는 말 없이 그저 덤덤히 깨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이 거기에 있음에 주목하면서 어떠한 비평도 가하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대는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선의 열쇠이다. 그것은 모든 자물쇠를 여는 마스터키이다. 그것은 거기에 있는 모든 의문의 자물쇠를 열어 준다.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 자는 어떤 성형도 필요가 없다. 물은 녹색, 산은 남색. 나는 창조되고 있는 것과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선인(禪人)에게는 문제될 만한 것이 정말로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사물들을 보고 그들의 자연성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몰은 녹색 - 무엇이 문제인가? 산은 남색 - 무엇이 문제인가? 꽃은 꽃, 가시는 가시이며,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그대가 평가할 때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말한다. “물이 녹색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말이다. 이때 문제가 생긴다. 만약 그대가 “산이 남색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하고 말한다면 곧바로 그대는 골칫거리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물은 녹색이며 산은 남색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여라. 그 사실과 함께 살라. 그리고 이론 같은 것은 개입시키지 말라. 그대의 마음을 계속 지켜보라. 마음은 끊임없이 이론을 가져온다. 그것은 그대가 어떤 것도 받아들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마음은 계속 생각에 잠긴다. “그것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럴 것이다.” 마음은 계속해서 망상을 불러일으킨다.
주시하라.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사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그 무엇도 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온다! 이제 그대는 계속 지켜보고 계속 즐길 뿐이다. 풍경은 아름답다. 풍경은 무한히 아름답다. 그러나 그 속에 그대 자신을 집어넣지는 말라. 그대가 내린 평가와 심판 속으로 에고가 숨어든다. 어린 아이는 한 곳에 앉아 있지 못하고 여기저기로 뛰어다닌다. 그것은 당연하다. 그는 어린 아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대가 어린이를 노인처럼 조용하게 길들이려고 한다면 거기에서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이제 그대는 그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가 어린 아이라는 것을 모르게 된다. 그대는 어린 아이를 다른 무엇인가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되면 그대가 골치를 앓게 되는 것은 물론, 어린 아이까지도 고통스러워진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개들이 짖어도 그대는 명상 속에 잠겨 있다. 개들이 그대의 명상을 방해하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 개들은 그대에게 조금도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그들은 그대가 명상에 잠겨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그들은 개다. 멍멍 짖어대는 것이 그들의 명상이다. 그대는 그대 나름대로 명상을 즐기고 개들은 개들 나름대로 명상을 즐기도록 놓아두라.
일단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문제는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깊은 내면 속에서는 평가가 계속되고 있다. “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개들이 어째서 짖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들은 개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라. 그대가 그것을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더 그대의 명상을 혼란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면 개들은 계속 짖어댈 것이고, 그대는 명상을 계속하게 된다. 거기에서는 어떤 충돌도 일어나지 않는다. 충돌은 그대의 마음가짐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것의 본성 안에 있다. 그대 또한 그대의 본성 안에 있다. 이 세상은 모두 좋다. 이 세상은 모두 아름답다. 이 세상보다 더 좋은 세상은 있을 수 없다.
열 번째 경문 : 세상에서
아홉 번째 경문은 근원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대가 근원에 귀착하였을 때, 원(圓)은 완결되어야 한다.
나는 짧은 이야기를 하나 읽은 적이 있다.
“누가 하나님을 만들었을까요?” 여덟 살 짜리 꼬마가 물었다. “하나님이란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에요!” 하고 선생님이 대답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는걸요?” 하고 꼬마가 고집을 부렸다. 다른 꼬마가 빈정거렸다. “원에서 처음 시작되는 것과 끝나는 곳이 어디 있어?” “이제야 조금 알 듯 말 듯한데.” 하고 처음 꼬마가 대답했다.
만약 삶이 정말로 완전하다면, 원은 최초의 발자국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원은 완결된다. 그것은 곽암 선사 이전에는 간파되지 못했던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팔우도로서 끝났던 것이다. 그러나 곽암 선사는 그 원이 완전하지 못함을 느꼈다. 무엇인가가 빠져 있음을 느꼈다.
사람이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만이 원은 완결되고 사람 또한 완전해진다.
선(禪)에서는 말한다. “내가 도(道)에 이르기 전엔 강은 강이고 산은 산이었다. 내가 도에 깊이 들어갔을 때는 나는 혼란스러워졌다. 강은 이제 더 이상 강 같지 않았고 산 또한 더 이상 산 같지 않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거꾸로 되어버렸다. 그것은 카오스(chaos)였다. 그러나 내가 끝에 이르러 도를 깨쳤을 때는 다시 강은 강이 되었고 산도 다시 산이 되었다.”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대는 세상에서 출발한다. 이 세상은 그대에게 <주어진 것>이다. 어디에서 출발하든지 그대는 세상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즉 만약 원이 완결되고 여행을 다 마친 후 그대가 성취하게 된다면 그대는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도중에서 끝을 맺는다면 사물들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것이다.
싯다(Siddha) - 성취한 자 - 는 보통 사람으로 세상에 다시 돌아온다. 때로는 싯다가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고 해도 그대는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누구인가 그대가 아는 사람이 싯다일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것을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원은 너무도 완벽해서 그는 보통 사람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전히 에고의 덫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이라! 그대는 시장 바닥에 앉아 있는 싯다들을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깨어 있으라. 바로 그대 옆에 원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온 붓다가 앉아있을지도 모른다.
동양에서는 마음 속 깊이 신을 경배하며 서로 머리를 숙이고 인사를 한다. 서양에서는 서로 만나면 <헬로우>라고 말하든지 <굿모닝>, <굿 이브닝>이라고 말한다. 동양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이 람(Jai Ram)>, 즉 <신은 위대하다>라는 인사말을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신을 인식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신을 환영하며 맞아들인다. 누가 아는가? 그가 원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온 붓다인지를 말이다.
그것을 깊이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아침이라든지 저녁 또는 오후라든지 밤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런 것은 쓸데없는 말이다. <굿 나잇>은 단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굿 모닝>도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 그러나 누가 <자이 람(나는 그대 안에 있는 신에게 머리를 숙입니다)>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무한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누가 아는가? 나는 아직 깨어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사람은 람(Ram)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바로 신일지도 모른다. 이 사람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드리도록 하자.”하고 말하는 것이다. 붓다가 원을 완전히 한 바퀴 돌아왔을 때는 언제나 그는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 세상은 누구나 출발하는 곳임과 동시에 누구나 끝맺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열 번째 경문이다.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
옷은 누더기,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도
나는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흐른다.
나는 마술 같은 것을 부려
삶을 연장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바로 거지와도 같이 매우 예사롭다.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누구나 신성하다는 고귀한 인식이며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이제 히말라야로 가야 할 필요가 없다. 수도원에 은둔하면서 그대 자신을 숨길 필요가 없다. 그대 자신을 고립시켜 둘 필요가 없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 속에 있는 신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다.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
이제 세속과 열반이라는 구별이 사라졌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이라는 구별도 사라졌다. 속된 것과 성스러운 것이라는 구별도 사라졌다. 이제 모든 것이 속되거나 성스럽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세속이라고 부르든지, 열반이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그 어떤 이름을 붙여도 그 무엇도 달라질 것이 없다. 세상이 곧 해탈이다. 세상이 곧 열반이다.
선(禪)의 마스터들이 하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선의 마스터들은 말한다. “이 세상이야말로 열반이다. 이 세상이야말로 무상의 궁극적인 깨달음이다. 그러므로 다른 저 세상이란 없다.”이러한 이야기들이 다른 종교의 사람들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속된 것이 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사로운 것이 특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길에 깔린 조약돌이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의 통찰은 절대적인 진실이다. 저 세상은 다른 어느 곳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다. 오직 그대의 청명한 지각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그대의 눈이 순결할 때, 조약돌은 다이아몬드가 된다. 그대가 청명한 경지에 이를 때, 모든 돌멩이들은 신의 모습으로 변한다. 그대가 그대 자신의 실존을 이해하게 될 때, 돌연 그대는 전체를 이해하게 된다. 저 세상이라는 것은 없다. 이 세상만이 유일하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데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그 하나는 눈가리개를 하고 보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는 방법이라고 하는 표현은 알맞지 않다. 차라리 그것은 보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 낫다. 또 하나는 맑고 깨끗하고 지각 있는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때에는 모든 것이 돌연 아름답고 신성해진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그대가 밟고 있는 땅은 성지인 것이다. 성스러운 것들 중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것에 그대는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맨발에 가슴은 벌거숭이,
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산다.
옷은 누더기,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도
나는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흐른다.
이 또한 예사롭다. 아마도 나무를 베거나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평범한 일을 하면서 지낼지도 모른다. 집안 청소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며 손님들을 시중들지도 모른다.
옷은 누더기, 찌들대로 찌들어도……
아주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 있다.
나는 언제나 지복으로 넘쳐흐른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지복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나에게 일어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고유한 본질이 된 것이다. 어떤 때는 지복으로 넘쳐흐르고 그리고 어떤 때는 메말라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본성이 되었다. 내가 지복이다.
나는 마술같은 것을 부려
삶을 연장하려 하지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 나가고 있다.
삶을 연장하는 것 같은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영원히 살기 때문이다. 이제 죽음 같은 것은 없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삶을 연장하려 하겠는가?
요기(Yogi)들은 삶을 연장하는 것에 무섭게 관심을 쏟으며 오래오래 사는 것에 대한 망상에 사로잡혀 왔다. 사실 그런 욕망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히말라야에 가서 백 오십 살 된 사두(Sadhu. 거지 생활을 하며 오직 신만을 추구하는 요기)를 우연히 만났는데” 라고 말하면 갑자기 그대는 흥미를 갖게 된다. 왜 그러는가? 그가 오십 살이든, 백 오십 살이든 또는 삼백 살이든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대는 여전히 육체를 그대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사두가 히말라야에 살면서 자기는 천 살이나 되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한 서양 사람이 천 살이나 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동양은 워낙 신비한 곳이니까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그를 만나려고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먼 곳에서 히말라야로 달려갔다.
그는 천 살이나 먹었다는 사람 가까이 가 보았지만 아무래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며칠 동안 그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그가 천 살이나 먹었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육십 살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것도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수제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었다. “저 분이 천 살이나 되었다는데, 당신이 보기에도 정말 그렇습니까?” 그 제자가 말했다. “글쎄요, 그것은 나도 잘 모릅니다. 나는 이곳에 온 지 삼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제자도 삼십이 넘어 보이지 않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인간의 마음이란 이렇게도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 흥미란 아주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만약 누군가가 천 살을 먹었다고 한다면 그대는 그 사실에 흥미를 느낀다. 그를 만나면 오래 살 수 있는 비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떤 연금술적인 처방이나 비밀스러운 열쇠를 얻으면, 나 또한 오래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선(禪)은 장수 같은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은 “일단 그대가 그대 자신을 이해하게 되면 그때에는 영원한 삶이 있게 된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누가 장수를 열망하겠는가?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은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자기 자신을 육체와 동일시하고 있는 인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음 같은 것은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이 일어나는 것은, 오로지 그대가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대 자신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대는 육체로부터 떨어져나갈 것이다. 만약 그대가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면 그 분리가 마치 죽음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가 육체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지켜보는 혼으로서, 의식으로서, 각성으로서 그대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때는 죽음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마술 같은 것을 부려
삶을 연장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떠한가? 지금, 내 앞에 있는 나무들이 싱싱하게 뻗어나가고 있다. 죽은 나무조차도 내가 지나가면 싱싱하게 살아난다.
존재의 가장 깊은 핵심에 도달한 사람은 삶으로 넘쳐흘러 그가 어디로 가든지 모든 것들에게 자신의 삶을 흠뻑 뿌려줄 수가 있다. 붓다가 숲으로 갔을 때 죽은 나무가 다시 살아나고, 계절이 지난 나무들이 꽃을 피웠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그냥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신화적인 것이지 역사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적인 의미로는 사실이 아니지만, 더욱 깊은 의미로 보면 진실이다. 그대가 싱싱하게 살아 있을 때는 그대에게 닿은 것은 무엇이든 싱싱하게 살아나게 된다. 그대가 생기가 없을 때는 그대에게 닿는 것은 무엇이든 그대가 내뿜는 독으로 인해 죽어갈 것이다.
산문 주해
내 문중(門中)에 속하는 천 명의 현자들도 나를 몰라본다. 내 정원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다. 왜 스승들의 발자취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술병을 차고 시장 바닥으로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집과 시장으로 가니,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내 문중에 속하는 천 명의 현자들도 나를 몰라본다. 사람의 실존에 관한 진리라는 것은 천 명의 제자가 모여 있다 할지라도 알 수 없을 만큼 광대한 것이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대는 그것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불가지성(不可知性)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신비이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도 같다. 그것은 점점 더 크게 몸체가 불어가는 신비인 것이다. 그대는 그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물의 근저인 것이다. 그것은 궁극이다.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그 무엇도 그대를 넘어설 수 없다. 그대야말로 실존의 주춧돌인 것이다. 물론 그 주춧돌은 지식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지식보다 더욱 깊은 것이다. 그것은 지자(知者)보다 더 깊은 것이다!
내 문중(門中)에 속하는 천 명의 현자들도 나를 몰라본다. 내 정원의 아름다움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그것을 느낀다. 사람은 그것을 느낄 수 있지만 알 수는 없다. 사람은 그것을 주시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미묘하다. 그것은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그것을 깨달을 수는 있다. 그 속에서 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손으로 잡을 수는 없다. 그대는 그것에 달라붙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날아가는 새처럼 잘 빠져 나간다.
왜 스승들의 발자취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무엇 때문에 붓다나 다른 지자들이나 또 깨달은 사람들에 대해 골치 아프게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 때문에 예수나 크리슈나나나 노자 같은 사람들을 골머리 아프게 연구해야 한단 말인가? 찾는 것은 끝났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 때문에 스승들의 발자취를 찾아야 한단 말인가?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일단 그대가 비할 바 없이 깊은 그대의 본성에 이르게 되면 그 어떤 경전도, 그 어떤 교리도, 그 어떤 요가도, 그 어떤 방법도, 그 어떤 탐구도 필요치 않다.
술병을 차고 시장 바닥으로 나가……
여기에서 곽암의 독특한 점이 나타난다. 그는 정말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그처럼 용감한 사람을 찾아내기란 매우 힘들 것이다. 오직 정말로 종교적인 사람만이 그렇게 용감할 수 있다. 그는 세상을 전체로 받아들인다.
술병을 차고 시장 바닥으로 나가 지팡이를 짚고 집으로 돌아온다. 술집과 시장으로 가니,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이제 무엇 하나 막혀 있는 것이 없다. 이제 무엇 하나 거절할 것도 없다. 이제 <아니다> 같은 것도 없다. <그렇다>의 합창 속에 모든 것이 메아리친다. 무엇이든지 다 포함되어 있다.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다. 그것이 술집이라 해도 빠지지 않는다. 무엇 하나 빠진 것이 없다. <그렇다>라는 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이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하므로 시장으로 간다. 심지어 술집에도 간다. 이제 모든 곳에서 그는 숨어 있는 신을 본다. 이제 그는 어떠한 것도 비난하지 않는다. <아니다> 같은 것은 모두 사라졌다. 기억하라. 오로지 <아니다> 라는 말이 사라질 때만이 에고는 사라진다. 만약 어떤 <아니다>가 남아 있다면 그것이 그대를 꽁꽁 묶어버릴 것이다. 그리하여 에고는 아직도 미묘한 방법으로 어디엔가 숨어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곽암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제 <그렇다>라는 것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전체이므로 절이나 술집이나 내게는 똑같다. 이제 나는 모든 곳에서 신을 본다. 이제 신은 모든 곳, 그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
이것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라. 한번 그대가 깨닫게 되면 누구 하나 깨닫지 않은 사람을 찾아 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깨닫는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대를 볼 때 그대가 깨닫고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계속해서 그대를 붓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붓다후드(Buddhahood. 불성, 佛地)야말로 그대의 참된 본성이다. 내가 나 자신을 보게 되는 날, 바로 그날이 내게 있어서는 전 세계가 깨달음으로 열리는 날인 것이다.
그대는 당황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 혼란을 잘 알고 있다. 그대는 그대 자신의 보물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대는 삶이라는 가장 고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그대 안에 신을 지니고 있다. 그대는 그대를 완전히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완전히 잊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리고 곽암은 옳다. “내가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게 된다.”는 곽암의 말은 옳다. 만약 내가 그대를 쳐다본다면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내게는 오직 깨달음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누구일지라도 세상은 모두 같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 그대 자신을 계속해서 찾고 또 찾아다니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한 장의 거울과 같다. 만약 그대가 깨닫게 된다면 그대는 깨달은 존재들로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깨달은 우주로 둘러싸이게 될 것이다. 모든 존재 - 바위, 강, 바다 그리고 별들 - 모두가 깨달은 존재들이다. 그대가 어디에 있을지라도 깨닫고 못 깨닫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그대가 그대의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 만약 그대가 불행하다면 그대는 불행한 세상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깨달았다면 그대는 깨달은 세상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의 에너지가 그대 안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다면 전체(the Whole)가 축제의 교향악으로 진동할 것이다.
그대가 세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