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에 ‘어린아이는 삼신할미가 받쳐준다’는 말이 있다. 삼신할미(삼신할머니)는 아이를 점지하고 산모와 아기를 보호하는, 신神으로 모시는 민간신앙의 의식意識으로, -아기들의 뼈가 유연하고 체중이 가볍고 등의 이유로, 아기들이 사고를 당했을 때 살아남는 확률이 크다는 의학적인 분석보다는- 훨씬 다감하게 들린다. 막연하게나마 말로 설명 안 되는 부분에 대한 감사함과 안도의 마음을 표현하는 일종의 위안이며 세뇌일 것이다.
4세 남자아이가 11층 아파트에서 떨어졌다. 아빠가 2시간 동안의 택배 일 나간 사이에 아이는 스스로 방충망 열쇠를 찾아 문을 열었고 창문 쪽으로 올라가다 11층 건물 아래로 추락했다. 아내 역시 일을 다니기 때문에 서둘러 택배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아이가 없어서 주변을 찾다가 아파트 화단 콘크리트 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아이의 상태는 위중했다. CT 검사 도중 갑자기 피를 토했고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심각한 산소 결핍 증세까지 보였다. 전신 골절과 혈흉, 기흉을 비롯해 간·비장·폐·신장 등 주요 장기 손상을 확인한 의료진은 아이의 생존 가능성을 5% 정도로 판단했다. 이후 아이는 중환자실에서 18일간 집중치료를 받으며 고비를 넘겼고, 상태가 호전돼 현재 일반 병실로 옮겨져 재활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11일, 중국 랴오닝성 다롄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일이다. 정말 삼신할미가 납시었던지, 그 부모의 말처럼 기적이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왜 창문에 올라갔느냐’는 물음에 그 아이가 한 대답이다. 그 기적같은 일도 놀랍지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라는 아이의 그 대답이 나의 젊은 날의 기억 하나를 소환했다.
〈픽사베이〉
딸이 네 살 무렵이었다. 유난히 찬 바람이 불고 매서운 어느 겨울밤, 그날따라 나의 퇴근이 늦었다. 부랴부랴 서둘러 집으로 가는 길에 집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딸아이가 좋아하는 만두를 사서 오버코트의 앞품에 품고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현관문 열쇠를 꽂으려는 순간 잠겨있어야 할 현관문이 조금 열려져있음을 알았다. 가슴이 덜컥했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조심스럽게 들어선 거실의 전등 불빛에 거실 건너편의 안방 문도 반쯤 열려있는 것이 보였다. 마음이 더욱 조였다. 한달음에 달려갔다. 딸아이는 열린 방문 바로 앞, 발에 채일만한 자리의 방바닥에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하나야, 하나야...” 아이를 안아 올렸다. “엄마 왔어?” 잠결에 웅얼거리며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미안해 미안해, 늦어서 미안해... 엄마가 만두 사왔는데... 내일 아침에 먹을까?” “으응, 만두? 지금 먹을 거야...” 그날의 만두는 나의 면죄부였다. 딸을 무릎에 앉힌 채 식탁 의자에 앉았다. 잠을 털어내고 오금오금 만두를 먹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턱까지 차오르는 그 충만함이라니, 눈물겨운 뜨거움이었다.
농부의 가장 큰 기쁨은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라고 했던가! 엄마의 품이 마냥 좋기만 할 뿐, 늦게 온 엄마에 대한 원망 따위는 없었다. 저 어린 것이 오직 어미를 기다리며... 매운 물살이 눈가를 아리게 지나갔다.
평소에도 만두나 떡볶이를 좋아해서 퇴근길에 사 들고 가곤 했었다. 떡볶이는 너무 매워서 내 입으로 대충 빨아서 먹이기도 했었다. “문을 잠그고 자야지, 춥잖아, 현관문도 열려있고... 엄마가 놀랐잖아” “엄만 내 마음도 몰라?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 발소리를 더 빨리 잘 듣고 싶어서 그랬지...” 만두를 우물거리며 옹알이처럼 하는 딸아이의 그 말에 온몸이 녹아들었다. 엄마가 미처 몰랐구나. 어린 너의 그 간절한 생각. 그 마음을 몰랐구나!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마 발소리를 더 빨리 잘 듣고 싶어서!’ 그때 그 말이, 사십 년도 더 된 그 말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튀어나와 가슴이 저릿하다. 여전히 나의 품속에서 뜨끈뜨끈 한 채로 있는 만두처럼... 어린 속도 모르는 바보 같은 엄마의 가슴을 쓸고 가는 매운 물살이다.
아이에게 엄마는 하늘이다. 엄마에게 자식 역시 하늘이다. 그 하늘을 어찌 막으랴. 세태가 바뀌고 인심도 바뀌고... 부모 자식 사이에도 뭔가 서걱이는 낌새로 갈등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지만, 어디 속까지 그러랴. 믿고 싶지 않다. 누구든, 랴오닝성 다롄의 그 녀석도, 그 시절의 그 마음이 영원하길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마의 발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잘 듣고 싶어서! 현관문은 물론 안방 문조차 열어두고 엄마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던 그때의 딸아이. 어느새 히끗히끗 센 머리카락이 눈에 띄는 딸아이의 얼굴에 그때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나에겐 여전히 매운 물살을 일으킨다. 아린, 아리면서도 소중한 추억과 함께, 듬성듬성한 딸의 센 머리카락 또한 아리고 아리다. 그때나 지금이나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 입에 밥 들어갈 때’가 가장 행복한 엄마의 그 맘 너는 아니?
우리 모두 다시 한번, 부모가 하늘이었던 시절을 상기하며 되돌아보고,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2. 카네이션 혁명(Carnation Revolution)
1974년 4월 25일 아침, 리스본의 생기발랄한 아가씨, ‘셀레스치 카에이루’(Celeste Caeiro)는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가 일하는 리스본 시내의 번화가에 있는 레스토랑의 개업기념일이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그날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나누어줄 카네이션을 준비했다. 설레는 마음을 누르며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갑자기 레스토랑 앞의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속에서 색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장갑차를 앞세운 청년 장교들이 총을 들고 줄을 지어 행진하며 거리를 가득 메웠다. 라디오에선 그동안 금지되었던 ‘조제 아폰수’(José Afonso)의 ‘파두(Fado)’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ândola, Vila Morena)가 흘러나왔다.
파두(Fado)는 포르투갈의 서정성이 짙은 전통 대중음악의 형식이다. 포르투갈어 표기로 ‘Fado’이고, 라틴어로는 ‘fatum’로 표기하는데, ‘운명’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ândola, Vila Morena)는 ‘그란돌라, 검은빛 마을이여’ 혹은 ‘그란돌라, 소박한 마을이여’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음 구절은 ‘민중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다’로 이어진다. 그동안 금지되었던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것은 민중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우 살라자르’와 그의 후임자 ‘마르셀루 카에타누’로 이어지는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신체제)라는 극우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무려 40년이 넘는 독재정권에 국민들이 억압당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가장 길게 이어진 독재정권이라고 한다. 포르투갈 정부는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서 3F 정책을 펼쳐왔다. 3F는 축구(Futebol), 파두(Fado-전통음악), 파티마(Fátima-카톨릭 성지)를 말한다. 축구를 장려하고, 종교를 허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술수로, 장려했던 것. 소위 국민들을 어리석게 만드는 우민화愚民化 정책이었다. 우민화, 동굴화, 우민정책... 말馬이나 개에게 옆을 돌아볼 수 없게, 앞만 보고 달리게하기 위하여 ‘블라인더’(blinder, 눈가리개)를 씌우는 것과 같다.
▲ AI 생성 이미지(권천학 제공)
파두를 장려하면서도 같은 파두 음악인 가수 ‘조제 아폰수’(José Afonso)의 파두 노래 〈그란돌라, 빌라 모레나〉(Grândola, Vila Morena)는 금지곡이었다. 이유가 있다. 가사에 담긴 저항의 내용 때문이었다.
그란돌라, 검은(또는 소박한) 마을이여∼ 민중이야말로 가장 큰 힘이다∼ 가사의 이 구절만 봐도 뭔가 의미가 심상찮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나간 한때 우리에게도 비슷한 시기가 있었다. 3S 현상(Sports, Sex, Screen)이다. 운동경기와 성性, 그리고 영화. 그 시기에는 방송마다 운동경기의 중계방송이 성행했고, 퇴폐적인 분위기 속에서 영화나 대중오락이 유행처럼 번졌다. 국민들은 모르는 사이에 빠져들었고, 그것은 사회 현상이 되었다.
금지된 ‘파두’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리를 가득 메운 총을 든 청년군인들, 장갑차들, 그리고 쏟아져 나와 함께 행진하는 시민들의 물결... ‘셀레스치 카에이루’는 그날 영업을 할 수 없음을 즉각 알아채었다. 개업 축하 손님들을 위해 준비한 카네이션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군인들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장갑차 위로 던지기도 했다. 군인들은 그 꽃을 총구에 꽂았다. 시민들은 머리에, 옷깃에, 가슴에 카네이션을 꽂고, 구호를 외치며 군인들과 합세하여 행진을 이어 나갔다.
“받들어 꽃!”
그 순간, 카네이션은 총칼이나 폭력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평화의 메시지가 되었다. 군인과 시민의 자유연대, 반독재, 평화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거대한 시위 물결을 본 독재자 ‘카에타누’ 총리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손을 들었다. 민중의 역사적 물결을 거스를 수 없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이어온 독재체재가 그렇게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무너졌다. 정권을 민간에 이양했고, 1976년 총선을 통해 포르투갈은 마침내 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름 하여 ‘카네이션 혁명’(Carnation Revolution)이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탈식민 시대이던 1970년대 초, 그 무혈혁명은 포르투갈이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던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카보베르데, 상투메프린시페 등이 독립을 앞당기게 되는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비록 무장투쟁이나 전쟁을 통한 어려운 독립이긴 했지만, 독립의 빌미가 되었고, 반대로 포르투갈 제국의 붕괴로 이어지는 계기도 된 셈이다.
어떻든, 카네이션은 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과정도 그러하였으니, 세계 역사상 가장 우아한 혁명이 아닌가 한다. 포르투갈 국민들은 그날을 ‘자유의 날’(Dia da Liberdade, 디아 다 리베르다지)로 정했다.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4월 25일이 되면 포르투갈 국민들은 그날 아침의 카네이션을 생각하며, 기념한다고 한다.
카네이션의 계절, 5월이 거의 다 가고 있다. ‘어머니의 날’ ‘어버이의 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을 총칭하여 ‘가정의 달’인 5월, 우리에겐 자애의 상징인 ‘카네이션’에 담긴 또 하나의 의미를 새겨보았다. 미스 2호, 거기에 탑재된 한국산韓國産 ‘K-라드큐브’, 아무 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업무수행을 완수하기를 거듭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