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로 믿기 어려운 명량의 승전으로 칠천량에서 거의 전멸했던 조선 수군이 다시 일어나 남해를 되찾기 시작한 점이었다. 왜 수군은 수륙병진 전략을 포기하였고, 육군은 해상 보급에 제약을 받자 내륙으로 진격할 수 없게 되었다. 또다시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르려던 조정은 물론 명나라 장수들까지 무척 놀라고 기뻐했다.
왜군은 결국 남해안의 점령지로 후퇴하여 방어 태세로 들어가게 되었다. ‘칠천량’ 해전 승리 후 왜 좌군은 남해를 통해 사천과 구례로 상륙하여 8월 16일,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성으로 향하였다. 우군은 창녕, 의령을 거쳐 함양의 황석산성을 점령한 후 전주성으로 향했다. 전주성을 지키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은 전주성을 방어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9월 7일, 중요한 직산 전투에서 왜군이 패배하면서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육전 상황에서 9월 16일, 명량해전이 벌어졌고, 왜 수군은 뼈아픈 패전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왜 수군은 ‘아타케부네’를 주축으로, 수백 척의 전선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명량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조선 수군은 탄약 등 전투 물자가 모두 소진되고 군사들이 지쳐있었다. 조선 수군은 전투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적을 먼바다로 유인하여 병참선을 길게 늘여야 했다. 함대는 명량해전 당일 저녁달이 뜨자 조류를 타고 재빨리 ‘당사도’까지 이동했다. 이튿날 ‘어의도’까지 북상했는데 피난선이 많이 모여 있었다. 이곳에서 하루를 쉰 함대는 19일, 법성포를 거쳐 홍농에서 정박했다. 20일에는 위도를 거쳐 21일에 고군산열도까지 북상하였다.
조선 수군이 서해로 북상한 것을 눈치챈 왜 수군은 조선 수군에게 반격을 가하기 위해 기동했다. 아타케부네를 앞세우고 이순신이 사라진 명량을 지나 우수영을 무혈 점령하고, 무안 앞바다까지 진출하였다. 수백 척의 정예 수군 전력이 10여 척의 이순신 수군에게 또다시 패했다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보고에 격분한 왜 육군은 수군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으며 정읍에 모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장수들 간에 격투가 벌어질 만큼 격렬한 논쟁 끝에 가까스로 결론이 났다. “겨울과 함께 조명 연합군은 밀고 내려오고, 이순신은 다시 나타나 바다를 틀어쥐고 있다. 더 북상하였다가 또 군량이 끊기고 일본으로 돌아갈 퇴로마저 끊기게 되면 머나먼 이국땅에서 결국 전멸하고 말 것이다. 한성을 점령해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남쪽으로 회군하여 일본이 가까운 해안 지방에 성을 쌓고 버티자” 고 결정이 난 것이다. 도요토미의 중병설도 은밀히 돌고 있었다.
이순신은 과로로 코피를 되로 쏟고 앓아눕고 했지만 9월 말까지 고군산열도에 주둔하며 전력을 강화했다. 군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백성들의 도움을 받아 화포 탄약과 군량을 계속 보충하였다. 겨울이 다가오므로 고군산열도 바다에는 북풍이 크게 불고 추운 날씨가 시작되었다.
9월 27일, 명량 승첩 장계를 가지고 배편으로 한양으로 출발했던 송한이 역풍이 심해 더 올라가지 못하고 되돌아왔다가 다시 출발하기도 했다. 10월 초, 이순신은 왜군이 자신의 고향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왜군은 명량해전 패전 이후, 북상한 왜군이 이순신의 본가가 있는 금성촌을 파괴하고 불을 질렀다. 이순신은 아들 ‘회’를 아산으로 보내 가족의 소식을 알아보도록 하고 3일 고군산열도를 떠나 법성포까지 내려왔다. 눈비가 오고 바람이 세게 불어 5일을 머물렀다가 9일 우수영으로 돌아왔는데 우수영은 인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이었다. 우수영은 왜군에게 깡그리 파괴되었고, 겨울 북서풍에 노출되어 배를 정박해 두기가 어려웠으므로 이순신은 월동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으며 팔금도에 며칠을 머물렀다.
일부 병력이 법성포까지 북상한 왜 수군은 겨울이 가까워지자 다시 해남으로 남하하여 우수영에 주둔하였다. 조선 수군을 매우 두려워한 왜 수군은 이순신이 남하하자 더 버티지 못하고 남해안으로 철수하여 육군이 축성한 순천, 거제, 안골포 등지에 진을 치고 들어갔다.
10월 14일 새벽, 이순신은 꿈을 꾸었다. 말을 타고 언덕 위를 달리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에 떨어졌다. 다행히 막내아들 ‘면’을 붙들어 안는 중에 꿈에서 깨어났다. 그날 저녁에 집안의 편지를 받았다. 이순신은 뼈와 살이 떨리고 정신이 혼란해지는 것을 느끼며 봉투를 뜯어보니 둘째 아들 필체로 ‘통곡’이라고 쓴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순신은 직감적으로 면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날의 애통한 심정을 이순신은 일기에 적었다.
“간담이 떨어져 목을 놓고 통곡했다.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지,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빛이 변했구나.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속은 다 썩고 형상만 남아 울부짖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직책상 마음대로 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소식을 접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섬 안에 있는 ‘강막지’의 집으로 가 혼자 실컷 통곡하고 돌아왔다. 이순신은 이런 와중에도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군이 물러간 해남 지방의 치안을 회복하고, 왜군에 붙어서 일반 백성에게 피해를 입힌 자들과 명량해전에 참전하지 않고 도주했던 지방관들을 찾아내어 처벌했다. 조정에서도 무안현감, 목포만호, 다경포만호 등을 체포하기 위해 선전관과 금오랑이 내려왔다. 10월 24일에는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한 ‘우후’, ‘이몽구’를 처형하라는 왕명이 내려왔다. 그러나 연이은 전투와 긴박한 군무로 인해 그 명령은 끝내 집행되지 못하였다.
이순신은 목포 입구에 있는 ‘보화도’를 월동 장소로 정하고 진을 옮겼다. 보화도는 북서풍을 막을 수 있는 뒷산이 있고 배를 감추어 정박하기에 적합하였다. 나주평야의 곡물 등 군수물자를 운반하기에 편리한 나들목이었으며, 주변에 배를 건조하고 집을 지을 수 있는 목재가 풍부했다. 이순신은 정유년 10월 29일부터 이곳에 진을 치고, 집과 창고를 짓고 임시 통제영으로 삼았다. 전선을 건조하고 군사를 충원하고 훈련하는 일보다 어려운 일이 늘어난 군사를 먹이고 입히는 일이었다.
정유년 재침을 시작하며 일본의 전쟁 목표는 달라졌다. 영, 호남 지역을 자국 영토로 만들겠다며 가는 곳마다 잔혹한 살육을 저질렀다. 왜군의 잔인한 점령 정책은 오히려 조선 백성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였다. 젊은이들이 수군에 자원입대하거나, 백성들이 자진해 군량, 포목을 바치는 일이 적지 않았다. 11월에 전 홍산현감 윤영헌, 생원 최집, 무안 진사 김덕수, 영암군수 이종성 등이 군량을 바쳤다. 그러나 늘어난 군사들을 먹이고 입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군사들과 곁꾼들은 추위에 떨었다. 이순신도 배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며 하루하루를 어렵게 보내고 있었다. 11월 초이틀에 김억추의 배가 암초에 부딪혀 깨지는 사고가 났다. 사고로 전선을 잃게 되자 이순신은 책임을 물어 그 배의 군관 당언량에게 곤장 여든 대를 치는 벌을 내렸다. 11월 15일 서둘러 새로 지은 집에 흙을 바르고 들어왔다. 조정에서 명량해전 승전에 대한 포상이 내려왔다. 이순신에게는 숭정(종1품)의 품계가 내려졌고, 거제헌령 양위가 통정대부로 승급한 것을 비롯해 차례대로 포상을 받았다. 명나라 장수들도 이순신에게 크고 작은 선물을 보냈는데 경리 양호는 붉은 비단 한 필을 보내며 “이순신의 배에 직접 붉은 비단을 걸어주고 싶지만 전쟁 중에 너무 멀어 못 간다” 고 하였다. 영의정 유성룡의 서신도 왔다. 선조는 상으로 이순신에게 은자 20량을 하사하였다.
11월 17일. 경리 양호의 차관이 ‘초유문’과 ‘면사첩免死帖’을 가지고 왔다. 초유문은 명군 사령관의 권한으로 내릴 수 있었지만, 면사첩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까지 용서하는 황제의 특별한 은전을 상징하는 문서로 오직 황제의 권위 아래서만 발급될 수 있었다. 명나라는 수군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한산도, 명량 대첩으로 이순신이 명나라까지 지켜낸 공로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보낸 것은 조선 조정에 대한 경고였다. 이순신을 건드리지 말라는.
도원수 휘하의 군관이 왕의 유서를 가지고 통제영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이번 선전관 편에 들으니 통제사 이순신은 아직도 상제喪制의 예법대로만 따르고 권도權道를 좇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서 용맹이 없는 것도 효孝가 아니라고 하였다. 전쟁에 나가서 용감하다는 것은 소찬이나 먹어서 기운과 힘이 곤비困憊한 자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대는 내 뜻을 받들어 소찬만 먹는 것을 그만두고 방편을 따르도록 하라” 고 타이르며, 고기반찬을 하사하였다. 이순신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정유년은 이순신에게 매우 힘든 한해였다. 2월 말,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어 투옥되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나 백의종군 명을 받아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조선 수군의 패퇴를 보았으며, 백의종군 5개월 만에 교지 한 장으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천신만고 끝에 명량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막내아들이 아산 고향에서 쳐들어온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도요토미의 명령에 따라, 보이는 대로 조선인은 모두 죽이고 그 명령을 철저히 이행했다는 증거로 코를 베어 모아 일본으로 보냈다.
조선은 7년에 걸친 전란 속에서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고,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외침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누적된 군제의 문란과 국방 의식의 해이, 그리고 문치에 치우친 국가 운영이 불러온 혹독한 대가이기도 하였다.
이순신은 이 와중에서도 군비 증강에 꾸준히 매진하였다. 보화도에서 전선을 새로 건조하고 수리하여 함대를 크게 증강하였고, 군사는 8,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여건이 극히 어려운 가운데서도 조정의 도움 없이 호남 백성과 이순신이 구국의 일념으로 일궈낸 또 하나의 승리였다.
11월 22일, 완도와 장흥을 정탐해 본 결과 왜적들이 모두 달아났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남해로 다시 진입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11월 29일, ‘물길로 명나라 군사가 내려오고 있다’는 통보가 왔다. 명나라 수군이 온다는 소식이다.
“왜적을 밀어내기 위해 남해로 들어가야겠다. 고금도다. 일전에 보아 둔 고금도로 진을 옮기도록 하자” 이순신은 명령했다. 고금도는 남해를 다시 찾고,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군을 견제하기에 좋은 위치였다. 진 앞으로 펄 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방어하기에 좋았고, 많은 전선이 주둔하기에도 좋았다. 또한 주변에 완도 등 큰 섬들이 있어서 3만여 호나 되는 백성들이 정착해 살 수 있었다.
“물길이 험하니 중간에 머물렀다가 가자. 물길을 거스르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조방장은 해도를 살펴보며 말했다. “썰물을 타고 내려가다가 신지도에 머물러 물때가 바뀌기를 기다려 신지도 뒤를 돌아 고금도 덕동리로 들어가겠습니다” “뒤로 돌아가자고?” “예, 신지도, 고금도는 물길이 복잡해 예상대로 흐르지 않기 때문에 뒤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그리하라”
그러나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보화도 시설에 피난민이 들어와 살도록 하여 주었으나, 이번에도 모든 피난민이 이순신 함대를 따라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또, 어찌하오리까?” “따라가겠다면 같이 가야지. 어찌 백성을 두고 가겠는가?” “그리하겠습니다. 백성들의 대소 선박이 같이 가면 한 번에 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어란진을 지나서 사구미 해안에 들어가서 물때를 기다렸다가, 다음 신지도로 들어가서 다시 물때를 기다렸다가 덕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신지도에서 한 밤을 보내야 합니다” “어려워도 같이 가야지, 수군만 따로 날아갈 수 있느냐”
1598년 2월 17일, 판옥선 50여 척, 협선 수십여 척이 보화도를 출발하여 고금도로 향하였다. 수많은 백성들의 선박이 이순신 함대의 뒤를 따랐다. 노인과 아이, 젖먹이를 안은 부녀자, 전쟁에 집과 가족을 잃은 백성들은 모두 수군을 따라 바다로 나왔다. 백성들은 조정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이순신을 믿었다. 명량으로 들어 올 때는 밤에 몰래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아침에 군악을 울리며 떠들썩하게 이동하였다. 고금도 덕동리 주민들도 이순신 함대를 크게 반겼다.
〈이충무공행록〉은 고금도 진영의 위세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598년 2월 17일, 고금도로 진을 옮겼다. 그 섬은 강진 남쪽 30여 리 지점에 있으며, 산세가 기이하고. 넓은 농지와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다. 이순신은 백성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고 생업을 돌보았으며, 이를 통해 군량도 확보하였다. 남도 백성 수만 호가 공을 의지해 살았으며, 함대 위세의 장엄함 또한 ‘한산진’ 시절보다 훨씬 장대하였다’
이순신은 노구를 이끌고 조선 수군의 재건과 제해권 탈환을 위한 전력 강화에 매진하였으며 둔전과 염전을 경영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세심히 보살폈다. 또한 피난 어선을 통제하는 〈해로통행첩〉을 구상하여 삼도 바다를 통행하는 모든 선박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통행증을 발급받고 다니도록 하였다. 증명서가 없는 선박은 수상한 선박으로 간주해 통행을 금한다고 포고하고, 이에 따라 등록하는 모든 선박을 대-중-소로 나누어 식별하고 곡식을 내게 했다. 바다로 피난 오는 백성들은 곡식을 배에 싣고 다니기 때문에 조금씩 내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선과 대포, 염초와 군량과 소금이 확보되고 민생이 안정되었다. 백성들은 잔혹한 전쟁 중에 이순신을 따라와 비로소 농사짓고, 고기잡이와 생활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이순신은 어슴푸레 낮잠이 들었는데 꿈에 아들 ‘면’이 나타나 “저를 죽인 원수가 같은 진 안에 있는데 어찌 그대로 놓아두시나요?” 하고 울며 갔다. 이순신이 깜짝 놀라 확인해 보니 새로 잡혀 온 왜적 하나가 배에 갇혀 있다고 하므로 그놈의 내력과 행적을 상세히 문초하였더니 바로 면을 죽인 놈이 틀림없었다. 이순신은 그를 처형하였다.
1596년 9월에 명나라 책봉 사절을 만난 도요토미는 자신이 요구한 강화 조건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재침을 선언했다. 명나라는 전쟁에 개입한 이상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강화 협상을 맺거나, 싸워 이기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화 협상이 도요토미의 재침 선언으로 끝나게 되자, 명나라는 일본군이 재침하면 즉시 원군을 보내겠다는 뜻을 조선 조정에 알렸다. 정유년 연초부터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자, 명나라는 예정대로 5만 정도의 병력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정유재란 초기에 남원성과 전주성을 잃고 경기도와 충청도 경계까지 밀린 명군은 곧바로 전투 체제를 정비하고 9월 7일 직산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명나라는 정유재란 초기에 일본군에게 밀렸지만, 9월 초부터 조선군과 합동으로 반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을 남해안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당시 남해안에 주둔한 일본군 중에서 우군의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는 대표적인 강경파로서 울산 지역의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본진으로 삼아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보다 북쪽에 다시 ‘도산성’을 쌓아 완공을 앞두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은 이곳을 목표로 공략 작전을 전개하였다.
12월 21일, 경리 마귀가 거느리는 명군 4만, 도원수 권율이 거느린 조선군 1만이 이 작전에 투입됐다. 조명 연합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패퇴하여 도산성에 고립되었다. 가토는 피습 보고를 받고, 급히 도산성으로 들어갔다. 전투 와중에 연합군은 도산성의 식량과 식수가 부족하여 성을 포위만 하고 있어도 일본군이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월 말, 큰 비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졌다. 성 내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우물도 없었기 때문에 일본군은 매우 큰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말의 피를 마시고 오줌을 받아 마셨다. 이때 큰 고난을 겪은 가토는 훗날 자신의 영지에 성을 쌓을 때 우물을 100여 곳이나 팠다고 한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공성 작전은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월 1일과 2일 벌인 연합군의 공격이 또다시 실패로 돌아간 상태에서 2일 가토군을 구원하기 위해 1만 3천여 명의 왜 수군이 태화강을 타고 몰려왔다.
결과적으로 도산성 공략 작전은 왜성의 강력한 방어력, 기상 악화, 왜 수군에 대한 방어 실패 등으로 조명 연합군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도산성 공략 작전 실패를 계기로 수군의 중요성을 재 인식하게된 명나라는 육군에 이어 수군을 서둘러 조선에 증강 파병하게 되었다. 총병관으로서 수로 대장으로 파견된 진린은 휘하에 노장 등자룡을 포함한 십수 명의 장수와 1만 5천의 병력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다.
6월 중순 경, 한성에 도착한 진린은 며칠을 한성에 머물렀다. 그와 접촉한 조선 관료들은 진린의 성품이 급하고 사나워서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유성룡은 “안타깝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장차 또 패 하겠구나. 진린과 같이 진중에 있으면 반드시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이다. 이를 제지하면 더 화를 낼 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이 없을 것이니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하였다. 명군의 파병 후, 군량 조달이 잘되지 않는다고 호조판서가 명의 종6품 주사에게 곤장을 맞은 사건, 진린의 군사가 노끈으로 찰방의 목을 매어 끌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사건, 조선의 장수가 명의 하급 장수에게 구타당하는 사건 등이 벌어졌다. 이는 임진왜란 초기에 선조가 조선군의 군령권을 이여송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곧은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진린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주며, 진린의 고약한 성격과 이순신의 대쪽 같은 성격이 부딪히면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염려하여 이순신에게 특별히 성질을 좀 죽이도록 서신을 보냈다.
이순신은 이제 막 일어선 조선 수군의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다. 한양을 거쳐 선조의 환송을 받은 명 수군은 7월 16일, 고금도에 도착하였다. 이순신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바다 멀리까지 나가 진린을 맞이하였으며, 명나라 함대를 위한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순신이 명장임을 미리 알고 온 진린은 늘어선 조선 함대의 위용에 적잖게 놀라고, 성대한 환영식에 흡족해했다. 진린이 도착한 지 며칠이 지난 7월 18일, 왜선 100여 척이 녹도로 쳐들어온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진린과 이순신이 연합 수군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수색한 결과, 왜 정탐선 2척이 조선 수군을 보고 도주할 뿐이었다. 이순신은 전선 8척을 ‘절이도’에 매복시키고 돌아왔다. 명 함대도 30여 척의 전선을 남겨 두었다.
7월 24일, 진린과 이순신이 연회를 하고 있을 때, 전령이 달려와 “녹도 만호 송여종이 일본 군선 6척을 격파하고 수급 69개를 거두었다. 명 함대는 바람이 순조롭지 못해 싸우지 못했다”라고 보고 했다. 진린이 대로하여 장수들을 심히 질책하며 분위기가 험해졌으나 이순신은 웃는 낯으로 진린에게 수급 대부분을 양보했다. 이런 사건을 통해 이순신은 진린의 호감을 얻었지만, 진린은 군령에 있어서는 이순신의 군사 활동이나 작전을 끊임없이 통제하려 했다. 명 수군은 연합군을 구성한 초기에 조선 수군과 백성들에게 권한을 남용하고 많은 행패를 부렸다. 때문에 이순신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사태를 지켜보던 이순신은 어느 날 관내 집을 허물고 이삿짐을 꾸렸다. 보고를 받은 진린이 달려 와 까닭을 묻자 이순신이 답했다.
“귀국이 왜군의 침략을 받은 우리를 도우러 온다 하여, 우리는 부모를 맞이하듯 하였으나, 귀국 군사들이 우리 백성을 못살게 굴어 백성들이 떠나려 하기에 대장 된 나도 같이 떠나려 하는 것이오”
진린은 재빨리 이순신의 의도를 파악하고, 명나라 수군의 잘못을 시인한 후, 명 수군의 범법 행위에 대해 이순신이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으로 사건을 정리하였다. 진린이 이렇게 협조한 것은 조선 수군의 전투력이 상당한 수준이어서 함부로 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꾸준히 전쟁을 준비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이순신의 성실한 인품에 감복했기 때문이었다.
진린은 이순신을 곁에서 지켜보며 이순신의 성실함과 인간적인 성품에 깊은 신뢰를 갖게 되었다. 연합 수군을 구성한 초기에는 이순신이 진린의 군령권 행사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 존중하며, 점차 협조적인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 도우며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 당시 조선 수군은 전선 약 80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승선 병력만도 1만 명을 넘는 상당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무렵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를 비롯하여 서쪽으로 진출한 일본 수군 부대는 고흥 주변 해역에서 이순신 함대 탐색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의 향방을 결정하는 더 큰 사건이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몸이여, 이슬로 왔다가 이슬로 가나니, 나니와(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3세를 일기로 ‘도꾸가와 이예야쓰’에게 자신의 어린 아들을 부탁하고 죽었다.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명량해전 패배 이후 남해안 일대 왜성에 모여 버티던 왜군에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나고야 본영의 철군 지시가 떨어졌다. “내가 죽거든 원정군을 철수시키되, 철군이 완료될 때까지 나의 죽음은 절대 비밀에 부치라” 는 유언이 있었으나, 도요토미의 사망 소식은 곧 조선과 명 측에 알려지게 되었다. 명 황제 ‘만력제’ 또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하였으므로 명군의 최고 선임자이던 병부상서 총독군무 형개는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을 계획하였다.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치는 총병과 마귀의 동로군 2만 7천,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치는 제독 동일원의 중로군 2만,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치는 제독 유정의 서로군 2만, 순천의 왜교성을 바다에서 치는 도독 진린의 수로군 2만 3천으로 편성된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은 일본군을 한꺼번에 몰아내고 전쟁을 종료시키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사로군의 왜성 공격 작전은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당시 일부 명군 지휘부는 도요토미 사망 이후 일본군 철수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대규모 희생이 발생하는 왜성의 공격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진린-이순신의 수로군 만이 공격 태세를 늦추지 않고 순천 왜교성의 공격 적기를 노리고 있었다.
9월 15일, 연합 함대는 서로군의 유정과 협동하여 순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교성을 공략하기 위해 고금도 통제영을 출항하였다. 연합 함대는 나로도, 방답진, 하개도를 거쳐 20일 묘도(광양만 입구에 있는 작은 섬)에 도착하였다. 함대는 도착 즉시 전투를 개시하였지만, 유정은 고니시를 사로잡고자 꾸민 계책이 실패로 끝난 뒤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이순신과 진린은 20일부터 22일까지 해상에서 왜교성을 향해 전면적인 공격을 하였으나 유정은 육상에서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유정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공격에 참가하지 않았다.
22일 이후는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함대를 운영할 수 없었다. 이순신과 진린은 10월 1일부터 적극적인 공격을 펼쳐 고니시군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붙였다. 이 과정에서 왜교성에 바짝 접근했던 진린의 병선 39척과 판옥선이 썰물에 얹혀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다리던 일본군이 몰려나와 기습하여 진린의 판옥선에 기어올라 칼을 휘둘렀다. 이순신의 기함이 거의 갯벌에 닿을 정도로 접근하여 포와 활을 쏘며 진린을 구해냈다. 진린이 넘어지고 구르던 모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명 사선과 호선 39척이 불타고 명 수군 800여 명이 전사했다. 안골 만호 우수는 탄환 6발을 맞았지만 죽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물이 차올라 이순신과 진린은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실로 위험한 순간이었다. 육상의 유정이 협공하지 않아 피해가 더욱 커졌다. 화가 난 진린은 유정을 찾아가 칼을 내리치며 항의했다.
10월 2일, 연합 수군은 아침 일찍 진군했는데 조선 수군이 먼저 도착하여 정오까지 싸웠으며 많은 적을 죽였다. 조선 수군은 사도첨사 황세득과 이정일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고 제포만호 주의수, 사량만호 김성옥, 해남 현감 유형, 진도 군수 선의경, 강진 현감 송상보 등은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전투는 매우 격렬하였다.
10월 6일, 중로군이 사천성 공격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정은 군량미까지 내버린 채 야밤에 순천으로 퇴각해 버렸다.
10월 10일, 합동 작전이 불가해지자 연합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회군하였다.
당시 해금정책을 취했던 명 수군의 병선은 보잘 것이 없었다. 명의 사선과 호선은 판옥선과 비교할 수 없었고, 왜의 ‘아타케부네’나 ‘세끼부네’보다도 전력이 떨어졌다. 이순신은 진린과 등자룡에게 판옥선을 1척씩 주었다. 이들은 매우 기뻐하며 모든 전투에서 크고 튼튼한 판옥선을 타고 지휘했다. 진린과 등자룡은 이순신을 전우로 인정하고 생사를 같이 하였다. 이순신을 ‘이야(어르신)’이라 부르고 함께 행차할 때 항상 이순신의 가마가 앞서 나가게 했으며, 전투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진린보다 연세가 2년 아래였다. 연합 수군의 실제적인 ‘군령권‘은 자연스럽게 이순신에게 넘어와 있었다.
〈이충무공 행록〉은 ‘도독은 진에 머물러 있는 동안 공이 호령하고 지휘하는 범절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배가 비록 많다고 해도 적을 막아내기는 어려울 것으로 짐작하고 매번 전투가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 판옥선을 타고 공의 지휘를 받기 원하였고, 모든 호령과 지휘를 모두 공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또 반드시 공을 ‘이 대인’이라고 부르며 “공은 작은 나라에서 살 사람은 아니오!”라고 하면서 중국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라고 권하기를 여러 번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진린은 명나라의 수군 제독으로 그동안 조선에서 벌어진 해전 상황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이순신의 활약상을 알게 되었고, 이순신이 천하의 명장임을 알아보았다. 진린은 이순신과 동고동락을 했던 터인지라 이순신의 무훈과 인품, 더 나아가 이순신의 성자 같은 모습에도 큰 감동을 하였다. 이 같은 심경에서 진린은 이순신을 제갈량에게 비유하기도 했다. 중국 최고의 전략가로 통하는 제갈량을 조선의 인물과 견주었다는 것은 결코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하고 부산성 전투, 동래성, 탄금대, 한양, 평양까지 점령하였으며, 무리하게 휴전을 추진하다가 조선 땅에 지옥 같은 정유재란을 일으키게 한 인물이었다. 천주교 신자였으나 싸움에서 정정당당하지 않고 반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제거토록 음모를 꾸민 자였다. 조선 조정은 꼭 순천 왜교성을 점령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을 베고 싶어 했다.
고니시는 유정과 진린이 물러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뇌물 공세가 성공한 것으로 생각하고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왜 장수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철수를 자축하고 기쁨에 들떴다.
11월 8일, 이순신을 찾은 진린은 ‘순천 왜교성의 적들이 이달 10일 달아나려 한다’는 〈통문〉이 육지로부터 왔으니, 급히 진군하여 적들이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자고 하였다. 진린은 유정과는 전공을 서로 다투었으나, 항시 타협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적을 섬멸하려 하는 이순신에게 같은 군인으로서 존경심을 갖고 도우려 하였다.
9일, 이순신은 왜교성 고니시 유키나카의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수많은 백성들의 환송을 받으며 고금도를 출항하였다. 임진란 이후 수도 없는 많은 출항과 귀항을 거듭하였지만, 이번 출항은 조용한 가운데 유달리 엄숙하였다. 이순신 또한 낯익은 산하를 뒤돌아보고 또 뒤돌아보았다. 조국의 산하는 말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열흘 후의 비극을 예지함이었을까? 전장을 압도하던 삼도수군통제사 대장 깃발이 외로이 펄럭이었다.
11월 10일, 조명 연합 함대는 전라좌수영 앞바다에 진을 쳤다. 11일에는 묘도에 이르러 진을 쳤다. 13일, 왜 탐색선 10여 척이 장도에 나타났기에 진린과 함께 추격하니 왜선은 방파제 안으로 도망쳐 다시 나오지 않았다. 연합 함대는 장도로 돌아와 왜교성 앞 바다를 틀어막고 고니시 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물러갔던 조명 연합군이 다시 진군하여 장도에 진을 치자 고니시는 대경실색하였다. 부산 본영의 철수 명령을 수령한 고니시는 조명 연합 함대가 지키고 있는 한 왜교성을 무사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동쪽에 있는 모든 일본군은 철수 준비에 여념이 없을 것이고, 서쪽 끝에 있는 1만 5천 자신의 부대만 고립될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고니시는 고민 끝에 진린을 매수하기로 결심했다.
진린과 고니시 사이에 비밀스러운 교섭이 진행되는 가운데 진도독은 몇 차례 고니시의 뇌물을 건네받고 이순신에게 그만 고니시와 강화를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 이순신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조선의 원수를 그냥 놓아 보낼 수는 없소”라고 결연히 말하며 한마디로 거절하자, 진린은 고니시의 첩자에게 “이순신 반대 때문에 무사한 퇴각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해 보냈다.
11월 14, 15, 16일, 왜선 수척이 명 수군 진중을 드나들고 진린은 진문동을 일본군 진영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고시니는 진린과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순신에게까지 장수를 보내 길을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감히 나에게 오느냐? 내 너를 죽여버릴 것이로되, 싸우는 중에 만난 것이 아니므로 살려 보낸다. 다시 오면 죽는다” 이순신은 크게 호통을 쳐서 왜장을 내쫓았다.
진린은 말이 통하지 않자, 남해도로 혼자 가서 그곳의 적들을 소탕하겠다고 했다. 이순신은 남해도에 있는 사람들은 적이 아니고 모두 조선 백성이라며 아니 된다고 말하자 화가 난 진린은 칼을 뽑아 들고 “이 칼은 우리 황제께서 나에게 하사한 칼이요” 하며 이순신을 위협했다. 이순신은 “나는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나는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 없소” 하고 진린의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 험악한 대치 끝에 진린이 물러나자, 11월 16일, 고니시는 몰래 왜선 3척에 뇌물을 실어 진린에게 보내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위인 ‘소 요시토시’(대마도 도주)에게 소식을 전할 연락선 한 척만 내보내게 해 달라고 진린에게 간청했다. 진린이 마지못해 이를 허가하자 그날 밤 왜군 8명이 탄 쾌속 연락선 한 척이 명 수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고 말았다.
명과 왜군의 강화 협상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이순신은 고니시의 연락선 한 척이 사천 쪽으로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수군을 쫓아 보냈으나 왜 연락선은 한산도까지 달아나 놓치고 말았다. 한산도에는 철수하는 왜 수군이 우글우글했다.
이순신은 장수들에게 일렀다. “적의 연락선이 나갔으니 반드시 동부 구원군이 올 것이다. 이 위치에서는 우리가 고니시와 구원군에게 포위되어 앞뒤에서 적을 맞게[腹背受敵] 될 것이다. 우리가 먼저 바다로 나가 노량을 나오는 적을 기다려 쳐야 한다.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라”
이순신은 고니시가 동부 구원군을 맞아, 봉쇄를 풀려 할 것을 알고, 선공을 가할 결심을 하고, 진린에게도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감을 알렸다. 몹시 놀란 진린은 크게 당황하였다.
11월 17일, 저녁 왜교성 높이 봉화불이 올랐다. 고니시 유키나카가 연락선을 보내 약속한 신호였다. 시마즈 요시히로의 긴급 연락을 받은 남해 동부의 일본 장수들은 예하 수군을 이끌고 속속 창신도로 모여들었다.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군은 일본 ‘살마지역[사쓰마]’ 출신 부대로서 용감하고 잔혹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수군 부대였다. 남해도의 ‘소 요시토시’는 고니시의 사위였다.
이순신 역시 그 봉화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한 번의 결전뿐이었다. 조선-명-일본, 세 나라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이 노량의 검은 바다를 향해 서서히 모여들고 있었다.〈계속〉
__________________ *고니시 유키나가(일본어: 小こ西にし 行ゆき長なが, 고지 1년 (1555년)? 에이로쿠 원년(1558년)? ~ 게이초 5년 음력 10월 1일(1600년 11월 6일))는 일본 상인(商人) 출신의 무장이다. 세례명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히포넨시스(라틴어: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장수였으며, 당시 대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쓰시마국주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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