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소시집 해설○
오래된 새로운 시간
황정산(문학평론가)
현대를 사는 우리는 항상 시간에 얽매여 살고 있다. 어쩌면 얽매여 산다는 표현은 부족하고 우리의 삶 자체가 모두 시간으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간을 확인하며 아침에 눈뜨는 것부터 시작해서 먹고살기 위한 직장 생활, 봐야 할 드라마, 사람들과의 약속 등 모두가 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는 일은 시간으로 보상을 받고 물건 값은 사실 거기에 투여된 인간들의 노동 시간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배하는 삶을 살면서 우리는 항상 시간이 없다. 시간이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시간으로부터도 소외된다. 때문에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김기리의 시들은 한 마디로 말해 이 빼앗긴 시간들을 찾아가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산골마을 복사꽃 잔치에 다녀오고 난 후
나는 한 동안 가려움증으로 몸살을 앓는다.
이 늦은 독수공방에
잠들지 않는 가려움과 한 이불을 덮는 호사
긁적이는 새벽, 온 몸으로 깨어 있어본 날의 아득한 기억이
피부 여기저기에서 붉게 일어난다.
봄날의 버릇,
가려움은 봄날의 손버릇일까
- 「가려운 봄」 부분
시인은 봄이면 가려움증을 겪는다. 그런데 그 가려움증을 통해 시인은 잊혀진 “아득한 기억”을 되살린다. 봄이라는 계절이 주는 자연환경이 시인으로부터 하여금 사라진 시간들과 그 시간 속에 들어 있을 삶의 많은 계기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귀찮은 병이나 증상이 아니라 “한 이불을 덮는 호사”로 느껴진다.
그런데 반대로 뒤집어 생각해 보면 시간을 되살리고 잊혀진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가려움이라는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동화된 시간 속에서 살면서 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시간을 다른 무엇인가에 저당 잡히고 사는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자신의 시간을 다시 찾고 그 시간 속의 삶을 되살린다는 것은 어찌보면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괴로운 일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이다.
사람의 몸에는 그 어떤 것이라도 가두어 둘 수 있는 감옥이 몇 채는 될 것이고.
가두어 놓은 헛소문은 오래 굶겨서
회초리로 만들었다
감옥의 자물통은 참을忍자 모양일 것이고.
그 속에는 온갖 남루한 말들이 있다
입맛을 보지 않으면 죽는 말
하나 씩 차분히 불러내어 그 입을 열어 주면 되는 것이다
지난 한 시절,
말들이 말갈기를 휘두르며 발 없이 왔다 갔다
큰 입술은 나불나불 눈알은 붉으락푸르락 한동안 무단으로 살다 나간 적이 있었다
- 「말」 부분
言이라는 뜻의 말과 馬라는 뜻의 말을 이중적으로 재미있게 사용한 작품이다. 시인은 자신의 말들이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살도록 강요받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현대사회의 소외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노동이 자신의 것을 만들이 못하고 자신의 시간이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자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결국 자신의 말도 자신의 것이 아니다. 결국 이제까지 자신이 한 말은 진정한 말이 아니라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기호에 불과했을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말은 우리에 갇힌 말처럼 자신의 몸 깊숙이 갇혀 있다가 남루한 모습으로 죽어가리라고 시인은 생각하고 있다.
그 말들은 풀어주자 말들은 다음 구절에서처럼 각자의 개성과 의미를 가지고 살아있는 형상으로 바뀌어 간다.
忍의 수없는 종의 말들이 자라고 있었다.
입을 열어놓자
밖으로 나가는
고운 말, 늠름한 말, 멋진 말, 따뜻한 말,
말은 형체도 색깔도 발도 손도 맛도 귀 눈도 없고
다만, 말 속에는 씨가 들어 있을 뿐이다.
시인은 자신이 시를 행위를 이렇게 묘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갇혀 있는 언어를 풀어주어 살아 있는 언어가 되도록 만드는 행위, 그것이 바로 시인이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고 또 시인이 해야할 의무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갇혀 있는 자신의 말을 되찾아 살아있는 말로 만드는 일은 오래된 시간들을 다시 되찾아 잊혀지고 사라진 기억들을 더듬는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항상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는 삶의 흔적은 말을 통해 기억되기 때문이다.
닳고 허리가 휜 오래전 바늘들이
오래된 바늘꽂이에 꽂혀있다
각각의 소용이 무뎌져 있는 바늘들은
대침, 중침, 세침.
연중무휴였던 바늘땀에서 모친의 말씀이 매듭져 있다
(중략)
넝마 같은 조각들을 감치고 홈질하고 박음질하여 이어 놓은 보자기는 세상바닥 이였어야.
부지런한 감침질이 만든 커다란 조각보는 쓰임새도 많았어야. 세침은 바늘귀보다 귀도 키도 작고 세심 하여 잘못 꿰매지나 않았나, 엉뚱한 것을 갖다 붙였으면 어쩌나 실을 팽팽히 잡아당겨 아프게 하지나 않았나, 작은 몸뚱이가 걱정걱정 긴 한 세상이었어야.
- 「바늘의 여행」 부분
오래된 바늘은 그 바늘이 지내온 무수한 시간과 그 시간의 일들로 의미를 갖는 존재이다. 단지 하나의 굽어진 그래서 이제는 쓸모없는 바늘이 아니라 그 바늘이 만들어 놓은 온갖 아름다운 물건들과 함께 한 세상을 만들었던 존재이다. 시인은 바로 자신의 언어로 이 잊혀진 시간들을 불러내고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시간이다. 한 사람이 꿈 많던 청춘을 지나 이제 굽어진 허리로 죽음을 준비할 만큼의 시간이고 바늘이 쓸모없는 형상으로 굽어져 바늘집에 꽂혀 잊혀져갈 만큼의 긴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이 시간들을 낡은 것으로 치부하고 가급적이면 기억에서 지우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지금 할 일이 너무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싱싱한 시간들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좋은 것들이 너무도 많이 생겨나고 있다. 과거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모두가 손안에 세상 하나를 가지고 다니면서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실시간으로 소통을 한다. 그런 세상에 오래된 낡은 시간들의 기억은 스스로를 누추하게 만들 뿐이라고 우리는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이렇게 사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을 누군가에게 저당 잡혀야 한다. 시간은 통화 요금으로 때로는 임금으로 때로는 주차요금으로 바뀌어져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 각자는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지도 스스로 통제하지도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김기리 시인이 오래된 시간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오래된 시간을 바라볼 때 거기에 새로운 삶의 계기가 들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김기리 시인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마을에서 사람이 죽을 때 마다
석재 장에선 돌 깨는 소리가 났다
등 굽은 석공은 눈도 어두웠으나 손끝의 눈만은 밝았다
새 주소를 새기는 중이라고
本官으로 전국의 지명들을 더듬었다고
묘비에 후생의 주소를 새길 때
가벼운 가루로 날아가는 이승의 주소들
묵직한 내력들만 뽑아서 음각으로 새긴다.
천하 없는 딱딱한 돌일지라도
한 사람의 일생보다는 무르다는 등 굽은 석공
단단하게 들어앉은 글자들은
비바람에도 끄떡 않고
심지어 파릇한 이끼가 꽃처럼 피어나기도 했다
- 「손끈의 눈」 부분
비석을 새기는 석공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석공은 시인을 비롯한 예술가를 대변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과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승의 내력을 새기는 것은 지나간 오래된 시간과 그 시간 속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김기리 시인이 생각하는 시인의 작업이기도 하다. 시간 속에서 점점 잊혀진고 사라지는 삶의 기억과 계기들을 다시 붙잡고 되살려 새로운 기억과 삶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작업이 그가 꿈꾼 시인의 작업일 것이다. 이 시에서의 핵심은 “심지어 파릇한 이끼가 꽃처럼 피어나기도 했다”라는 구절이다. 다는 아니지만 오래된 시간을 되살리려는 예술적 작업들이 이끼처럼 낡아 보이지만 더러 꽃처럼 새롭고 아름다운 어떤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오래된 새로운 시간들을 엮어내 아름다운 언어를 만들어낸 김기리 시인에게 경의를 표하며 다음 작품을 기대해 본다.
■황정산 문학평론가
1992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등단. 고려대 불문학과 및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시인. 저서로『쉽게 쓴 문학의 이해』『주변에서 글쓰기』등이 있다.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이메일 : rivertel@hanmail.net
첫댓글 장수청 시인 고마워요, 황정산 교수가 돌아와 주간을 맡게되어 더 기쁘구요.
별말씀을요...감사합니다...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