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의 시인들 - 鄭夢周 정몽주 (하)
이때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 분쟁이 일어났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고려가 명나라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세공(稅貢)을 늘리겠다고 통보해 온 것이다. 또한 지난 5년 동안 고려가 바친 세공이 약속했던 것과 다르다며 사신으로 간 홍상재(洪尙載), 김보생(金寶笙) 등을 먼 곳으로 유배보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중에도 고려는 태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야 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모두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논의 끝에 밀직부사 진평중(眞平仲)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진평중은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권신 임견미(林堅味)에게 노비 수십명을 뇌물로 바치고 병을 핑계로 사퇴해 버렸다. 그러자 임견미는 정몽주를 천거하였다. 그 또한 지윤, 이인임 등과 같이 평소 정몽주를 눈에 든 가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와 같은 음모에 전혀 개의치 않고 흔쾌히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이때 정몽주는 우왕(禑王)에게
"왕명이라면 물불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명에 가는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남경까지는 무릇 8천리나 되어 발해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것을 빼면 실제로 90일의 일정입니다. 이제 성절까지의 날자가 겨우 60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 또한 순풍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고 나면 겨우 50일이 남을 뿐이니, 다만 이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征婦怨1 정부원 1 전쟁 나간 병사 아내의 원망
一別年多消息稀 일별년다소식희 한번 떠난지 몇 년인가 소식도 없어
寒垣存沒有誰知 한원존몰유수지 찬 병영에서 임의 생사를 그 누가 알까
今朝時寄寒衣去 금조시기한의거 오늘 아침 처음으로 겨울 옷 한 벌 부치고서
泣送歸時在腹兒 읍송귀시재복아 눈물흘리며 돌아와 아이를 가졌다고 하네
구약성경 사무엘 상하는 다윗 왕의 얘기로 거의 채워져 있다.
그 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맺은 여자와의 불의한 관계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되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 사건이 솔로몬을 낳은 그의 어머니와 다윗 왕이 만나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다윗이 전쟁터에 나간 우레아의 아내를 왕궁으로 불러 관계를 맺은 뒤 그만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되자 전쟁터에서 한창 싸움에 임하고 있는 그녀의 남편을 며칠간 출장을 핑계로 왕궁에 왔다가 집에 들려 그의 아내와 동침하도록 하였으나 이 고지식하고 충직한 사관 우레아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가운데 유하고 사령관 요압과 다윗 왕의 중신들이 모두 바깥 들에 유진 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집에 가서 처와 같이 하룻밤인들 잘 수 있겠냐고 하고 이틀 밤을 집 밖에서 잤는데 어찌 보면 참으로 무정한 남편 같기도 하다. 아니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런 남자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이 사건을 살펴보면서 여자가 없는 전쟁 터에서 상당한 세월을 건장한 젊은 남자가 성에 굶주릴 대로 굶주릴 수 밖에 없는데 특별 휴가를 얻어서 아름다운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렇게도 사랑스런 아내를 안아주지 않을 수 있느냐 하는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정몽주의 시에서 아래의 구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궁금해진다. 처음에 병영 나간 남편이 떠나간지 몇 년 째 소식이 없다고 하다가 겨울 옷 부치고 돌아와 눈물 흘리며 배속에 아기가 생겼다고 하니 이는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이라 그렇다.
泣送歸時在腹兒 읍송귀시재복아 눈물흘리며 돌아와 아이를 가졌다고 하네
군대 가더니 몇 년 동안 소식 없는 남편의 무정함을 원망하여 복수하는 심정으로 나 아기 가졌소 하고 약을 올리고 있는 것인지… 물론 다윗 왕의 권위 앞에 옴쭉 달싹 못하고 옷을 벗었던 우레아의 아내 경우는 좀 다른 경우이긴 하다. 그러나 한번의 관계가 그녀의 배를 불러오게 한 임신이 된 사실에서는 어쨌든 위 시의 사연과 같다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왕명이 떨어지자 정몽주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출발했다. 그는 밤낮으로 길을 달려 가까스로 주원장의 생일에 맞춰 표문을 올릴 수 있었다. 명황(明皇) 태조(太祖)는 표문을 받고 날짜를 꼽으면서 "너희 나라 신하들이 서로 사신으로 오기를 미루니 날이 임박하여 이에 그대를 보낸 것이로다. 그대는 전날 촉의 평정을 축하하러 왔던 자가 아니냐?"하고 물었다. 예전에 정몽주는 촉의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명나라에 간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듬해 겨우 돌아왔었다. 정몽주는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했다. 그러자 태조는 그를 위로하고 예부를 시켜 후히 대접해 보내게 하였으며, 홍상재 등을 석방해 주었다.
이듬해 정몽주는 동지공거로서 과거시험을 주관하고, 1386년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관복을 청하고 세공을 감면해 주기를 청했다. 이때 정몽주는 태조에게 고려의 사정을 상세히 알려 5년 동안 미납된 세공과 늘어난 세공을 면제받고 돌아왔다. 우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의대와 안마를 하사하고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제수하였다.
3) 명분과 의리를 지키는 원칙주의자
이렇듯 정몽주가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고려 내부에서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정몽주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원나라가 지배했던 철령 이북의 땅을 요구해 왔는데, 이에 고려 조정은 최영(崔瑩) 등 강경파에 의한 군사적 대응, 즉 요동 정벌을 들고 나왔다. 그리하여 고려는 1388년, 최영의 주도 아래 요동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처음부터 요동 정벌에 반대하고 나섰던 이성계가 그해 6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창왕을 옹립한 것이다. 이로써 친명파(親明派)가 득세하게 되었다.
征婦怨2 정부원2 전쟁 나간 병사 아내의 원망
織罷回文錦字新 직파회문금자신 회문시 짜고 나니 비단 위의 글자 새롭고
題封寄遠恨無因 제봉기원한무인 적어 봉하여 멀리 보내니 원망할 까닭 없네
衆中恐有遼東客 중중공유요동객 무리 중에 요동의 나그네 있을까 걱정되어
每向津頭問路人 매향진두문로인 매양 나루터 향해 길가는 사람에게 묻는다
그동안 명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앞장서왔던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했다. 1389년 예문관 대제학에 오른 정몽주는 이성계를 쫓아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를 내세워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했다.
그해 11월 김저와 정득후가 비밀리에 여흥에 있던 우왕을 찾았는데, 이때 우왕이 울면서
"여기 있으면서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다. 이성계를 제거하면 과인(寡人)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과인이 본래 예의판서 곽충보(郭忠輔)와 잘 지냈으니 네가 가서 만나보고 계획을 도모하라."
는 말과 함께 팔관회 행사 때 거사하라며 구체적인 날짜까지 정해주었다. 개경으로 돌아온 김저는 우왕의 말과 함께 우왕이 보낸 예검(銳劍)을 곽충보에게 전했다. 그러나 곽충보는 거짓으로 승낙한 뒤 곧 이성계에개 그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우왕을 강릉으로 옮기고,
"우와 창은 본래 왕씨가 아니니 종사를 받들게 할 수 없다. 마땅히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워야 할 것이다. 정창군(定昌君) 요(瑤)는 신종(神宗)의 7대손으로 가장 가까우니 그를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 조준(趙浚), 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그 자리에 참석했던 정몽주도 이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창왕을 폐하여 강화로 내쫓고 정창군 요를 군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이다.
이 공로로 정몽주는 문하찬성사 동 판도평의사사사 호조상서사사 진현관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 영서운관사로 승진하고, 익양군충의군(益陽郡忠義君)에 책봉되었으며 순충논도좌명 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작호를 하사받았다.
1390년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에 간 윤이와 이초가 명황(明皇) 태조(太祖)에게 이성계가 고려의 종실이 아닌 왕요를 국왕으로 삼았으며, 이색, 조민수 등을 살해하고 우현보 등을 귀양보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왕방과 조반에 의해 고려 조정에 알려지자, 대간이 잇따라 상소를 올려 윤이와 이초를 국문할 것을 청했다. 그리하여 우현보, 홍인계, 윤유린 등을 순군옥에 가두고 국문하고, 이색 등은 청주에서 국문하게 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명사(明史)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어 이성계를 비롯한 역성혁명 세력이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작극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때 정몽주는 "이색, 권근 등을 사면하는 큰 은혜를 내리소서."라며 대사령(大赦令)을 내릴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공양왕이 정몽주의 건의에 의해 대사령을 내렸음에도 헌부와 형조에서는 다시 윤이와 이초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했다. 이에 공양왕은 도당에서 그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정몽주는 또 다시 "윤이, 이초의 죄가 명맥하지 않으며 이미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공양왕은 하는 수 없이 우현보 등을 귀양보내 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형조에서는 윤이와 이초를 두둔한다며 정몽주를 탄핵하고 나섰다.
哭李密直種德 곡이밀직종덕 밀직 이종덕을 곡하다
自是韓山積善餘 자시한산적선여 한산이씨 문벌은 선을 쌓은 일이 있는데
賢郞欠壽竟何如 현랑흠수경하여 아들이 오래 살지 못함은 어찌된 일인가
古來此理誠難詰 고래차리성난힐 옛부터 이러한 이치 정말 알기 어려웠네
孔聖猶曾哭伯魚 공성유증곡백어 공자 같은 성인도 일찍이 아들 백어를 곡하였다
이에 정몽주는 두번이나 표문을 올려 사직을 청했으나 공양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불러 위로했다. 그리하여 공신각에 초상화가 걸리는 벽상삼한삼중대광 판도평의사사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정몽주는 사실상 이성계 일파와 결별하게 된다.
1392년 국왕이 경연관에게 "사람들이 중국의 고사는 알면서 우리 나라의 일은 알지 못함이 옳은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정몽주는 "근대사도 모두 편수하지 못하였고, 선대실록 또한 상세하지 못합니다. 청컨대 편수관을 두어 통감강목(通鑑綱目)에 의거해 수찬하여 열람에 대비하소서." 하고 대답했다. 공양왕은 정몽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실록을 수찬하도록 지시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때 김주(金住)가 조민수(曺敏修)와 뜻을 같이하여 창왕을 세운 이색의 죄를 묻기를 청했다. 그러자 정몽주는 "조민수는 창의 근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조민수의 뜻입니다. 이때에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조민수의 뜻을 어길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니 이색의 죄는 응당 가벼이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라는 상소를 올려 이에 반대했다. 그리하여 공양왕은 정몽주의 주장에 따라 조민수 등만 처벌했다. 또한 정몽주는 "지금부터 이후에 이 일을 논핵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로써 논죄하게 하소서." 하고 쐐기를 박음으로써 더 이상 이색이 고통받는 것을 면하게 해주었다.
이어 정몽주는 대명률(大明律)과 지경조격(至正條格) 및 고려의 법령을 참작하고 수정하여 신율(新律)을 만들어 무너진 법질서를 확립하고자 힘썼다.
4) 아! 선죽교에서 쓰러진 고려의 기둥이여
정몽주는 비밀리에 이성계를 제거할 기회를 엿보았다.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군정을 장악한 이성계의 위세가 갈수록 더해갈 뿐 아니라 그의 추종 세력인 조준(趙浚), 남은(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새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의미했고 고려 5백년 사직의 끝을 의미했다. 고려의 사직을 계속 유지하려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정몽주에게 이성계와 그 추종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왕명을 받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정몽주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정몽주는 대간들에게 사람을 보내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병이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일파인 조준 등을 제거한 후에야 일을 도모할 수 있다."면서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이 기회에 조준, 정도전, 남은 등 이성계의 무리들을 제거해야만 장차 이성계를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조준은 멀리 귀양가고, 남은, 윤소종, 조박 또한 관직을 삭탈당한 채 귀양보내졌으며, 봉화에 유배 중이던 정도전은 보주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순조롭게 진행되던 이성계 일파에 대한 제거 노력은 의외의 사건으로 반전되고 말았다. 정몽주의 의도를 눈치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즉시 해주로 달려가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반드시 우리 집안을 해칠 것"이라고 전한 뒤 그날 밤 비밀리에 개경으로 돌아온 것이다. 또한 이방원은 이성계의 동생 이화 및 사위 이제 등과 의논한 뒤 휘하의 군사들에게 "우리 이씨 집안이 왕실에 충성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아는 바이다. 이제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악평을 받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이를 알아주겠는가?"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뒤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을 통해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정몽주는 좀 더 사태를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방문했다. 이때 평소 정몽주의 학식과 강직함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이성계는 그를 반기며 후하게 대접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이방원은 돌아가려는 정몽주를 자신의 방으로 청해 하여가 (何如歌)로 그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
海東樂府(해동악부)에는 何如歌(하여가)로 한역되어 있는데 마지막 두 줄은 이렇게 직역된다.
此亦何如 彼亦何如 이런들 엇더하며 저런들 엇더하리 城隍堂後壇 頹落亦何如 성황당 뒷 제단이 무너진들 엇더하리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하여 안죽은들 엇더하리
정몽주는 이에 대해 단심가(丹心歌)로 자신의 마음을 대신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此身死了死了 (차신사료사료) 一百番更死了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백골위진토) 魂魄有也無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향주일편단심) 寧有改理也歟 (영유개리여지)

이에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조영규(趙英珪) 등을 보내 집으로 돌아가는 정몽주를 습격하게 하여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했다. 1392년 4월 4일의 일로 이때 정몽주의 나이 쉰여섯이었다. 또한 이벙원 등은 정몽주의 지시에 따라 조준 등을 탄핵한 대간들을 국문하여 귀양보내고 그 일당을 유배시킨 뒤, 정몽주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거짓으로 일을 꾸미고 대간을 꾀어 대신을 모해하고 국정을 혼란시켰다."는 방을 붙였다. 그리고 상소를 올려 정몽주의 가산을 몰수하였다.
고려 사직을 지키려던 정몽주의 마지막 몸부림이 이와 같이 물거품이 되어버림으로써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성계는 정몽주가 죽은 지 3개월 후인 1392년 7월 정도전, 조준 등의 추대를 받아 공양왕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듬해 1393년 3월 15일 새 국호로 조선을 씀으로써 고려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후 조선왕조 제3대 국왕으로 등극한 태종(太宗)은 정몽주가 죽은 지 13년만인 1405년 권근 (權近)의 건의에 따라 그를 대광보국승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겸 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 에 추층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방원이 임금이 되어 반역자로 자기가 죽였던 두 사람 정몽주와 정도전에게 취한 일련의 조치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
왕자 이방원이 아닌 임금 태종이 본 정몽주는 자기의 야심에 함께 하지 않은 반대자였던 반면, 정도전은 자기의 야심에 함께 하였던 배신자 곧 변절자였던 것이다.
권력자가 반대자에게는 관용을 베푼 대신 배신자에게는 철저하게 응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말충의열전(麗末忠義列傳)은 정몽주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정몽주는 타고난 자질이 지극히 높고 호탕하며 인품이 뛰어나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니 부지런히 성리학을 연구하여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평소 이성계가 그의 재주를 중히 여겨 토벌할 때에 반드시 그와 같이 갔으며 여러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이 되었다. 이때 나라에 사고가 많아 정무가 번거로웠는데, 정몽주는 큰 일을 처리하고 의심스러운 일을 결단하는데 있어 목소리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좌우에 응답하여 모두 그 적당함을 얻었다. 이때에 풍속이 오로지 불법(佛法)을 숭상하는지라 정몽주가 비로소 선비와 서민으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방하여 가묘(家廟)를 세워 조상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또 도성 내에 5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는 향교를 두어 유학을 일으켰다. 그밖에 의창을 세워 백성들을 진휼하고 수참을 두어 조운을 편리하게 한 것 등이 모두 그가 계획한 것이다.
그의 시문은 호방하면서도 엄숙하고 깨끗하며, 포은집(圃隱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출처 : 大東民族史대동민족사 <네이버 불로그>의 글을 일부 가필 수정함
http://kr.blog.yahoo.com/lisukum/1238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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