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출전: 스피노자 <에티카/정치론>, 추영현 옮김, 동서문화사, 2016)
제5부 지성의 능력 또는 인간의 자유에 관하여
서론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감정은 우리의 의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며, 우리는 감정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경험의 모순에 의하여, 그들 자신의 원리를 위반하여 감정을 억제하고 통솔하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훈련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신체의 힘은 결코 정신의 힘에 의해서 결정될 수 없다.
공리
결과의 본질이 그 원인의 본질에 의해서 설명되거나 규정되는 한, 결과의 힘은 그 원인의 힘에 의하여 규정된다.
정리
수동적인 감정은 우리가 그 감정에 대해서 명료하고 판연한 관념을 형성하자마자 곧 수동적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가 감정을 보다 더 잘 인식함에 따라서 그만큼 감정은 우리의 지배 아래 있으며, 또 정신은 그만큼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는다.
어떤 결과를 낳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타당한 관념에서 생기는 모든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 각자는 자기의 감정을 비록 절대적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는 힘을 가지며, 따라서 그들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는 힘을 가진다. ㄱ러므로 우리들이 특히 노력해야 할 것은 각 감정을 가능한 한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고 정신이 감정으로부터 떠나서 명료하고 판연하게 지각하고, 그리고 자신이 전적으로 만족하는 사유로 옮아가도록 한다. 즉, 감정 자체를 외부 원인의 사상으로부터 분리하여 참된 사상과 결합시키는 것이다.
모든 충동 내지 욕망은 타당치 못한 관념에서 생기는 한에서만 수동이며, 그와 같은 충동 내지 욕망이 타당한 관념에 의해서 환기되거나 생겼을 때에는 덕으로 간주된다.
감정에 대해서는, 감정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이상으로 뛰어난 요법은 우리의 능력 속에 없다.
우리가 단순히 상상(표상)할 뿐이고, 필연적이나 가능적 또는 우연적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감정은 기타의 사정이 같다면 모든 감정 가운데서 가장 크다.
정신은 모든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한, 감정에 대해서 좀더 큰 능력을 가지며, 또는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이 적다.
이성 간에 생기는 감정이나 이성에 의해서 환기되는 감정은, 만일 시간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관조되는 개체에 관한 감정보다 더 강력하다.
어떤 감정을 환기하기 위해서 동시에 작용하는 원인의 수가 크면 클수록 그만큼 그 감정은 클 것이다.
정신이 동시에 관조하는 많은 다른 원인에 관계되는 감정은 단 하나의 원인 또는 소수의 원인에 관계하는 동등한 크기의 다른 감정의 경우에 비해 해가 적을 것이며, 영향도 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각 원인에 대해서 자극을 받는 일이 보다 적다.
우리는 자기의 본성과 대립되는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동안은 지성과 일치한 질서에 따라서 신체의 변화에 질서를 부여하고 연결하는 능력을 가진다.
신체의 변화에 올바른 질서를 부여하고 연결하는 힘에 의해서 우리는 나쁜 감정에 의해서 쉽사리 자극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에 대해서 완전한 인식을 갖지 못한 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올바른 생활법 내지 일정한 규칙을 세워 이것을 기억하고, 인생에 있어서 자주 일어나는 개개의 경우에 부단히 그것을 적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일은 우리가 사고와 표상상에 질서를 세움에 있어서 언제나 기쁨의 감정에서 행위가 결정되도록, 개개의 사물 가운데서 선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표상상表象像은 보다 많은 대상에 관계하면 할수록 그만큼 빈번히 나타난다. 다시 말해 그 자체만으로 빈번히 나타나며 그만큼 정신을 더 많이 점유한다.
사물의 표상상은 다른 표상상에 연결되는 것보다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는 사물에 관한 표상상과 더 쉽게 연결된다.
표상상은 보다 많은 다른 표상상과 결합함에 따라서 그만큼 자주 나타난다.
왜냐하면 표상상이 더 많은 다른 표상상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환기되는 원인도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의 모든 변화 또는 사물의 표상상을 신의 관념에 연관시킬 수 있다.
자기와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고 판연하게 인식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감정을 더 많이 인식할수록 그만큼 더 신을 사랑한다.
신에 대한 이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도 정신을 많이 점유해야 한다.
신은 어떠한 수동에도 관여하지 않으며, 또 어떠한 기쁨이나 슬픔의 감정에도 동요되지 않는다.
모든 관념은 신에 관련하는 한 진실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며 또 미워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신을 미워할 수 없다.
신에 대한 사랑은 미움으로 변할 수 없다.
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신이 자신에게 사랑을 보답하도록 노력할 수는 없다.
신에 대한 이 사랑은 시샘이나 질투의 감정으로 더럽혀질 수 없다. 오히려 보다 많은 사람이 같은 사랑의 유대에 의해서 신과 결합한다고 우리가 표상한다면 이 사랑은 그만큼 많이 함양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에 대한 이 사랑이 모든 감정 가운데서 가장 항구적이라는 것, 그리고 이 사랑은 신체에 관련되는 한, 신체 자체와 함께가 아니라면 파괴될 수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정신의 능력은, 감정의 인식 자체 안에, 우리가 혼란하여 상상하는 외부 원인의 사상으로부터 감정을 분리하는 데에,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에 관계하는 감정은 우리들이 혼란 또는 훼손하여 파악하는 대상에 관한 감정보다 지속에 있어 우월하다는 점에, 사물의 공통적 특질 내지 신에 관한 감정을 함양하는 원인은 다수라는 것에, 정신이 자신의 감정을 조정하고 그것들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그 질서 속에 있다.
그 최대 부분이 타당치 못한 관념으로 구성된 정신, 즉 능동적이기보다는 수동적이라는 점을 특징으로 하는 정신은 가장 수동적인 정신이며, 반대로 그 최대 부분이 타당한 관념으로 구성된 정신, 바꾸어 말해서 비록 다른 정신과 마찬가지로 타당치 못한 관념을 많이 포함하고 있더라도 인간의 무능력을 표시하는 타당치 못한 관념에 의해서보다 인간의 덕에 속하는 타당한 관념에 의해서 구별되는 정신은 가장 능동적이다.
마음의 병이나 불행은 주로 많은 변화에 속하는 것에 대한 그리고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서 일어난다.
정신은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 외에는 아무것도 표상할 수 없으며 또한 과거의 어떤 것도 상기할 수 없다.
그러나 신 안에는 이 또는 저 인간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相 아래 표현하는 관념이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인간 정신은 신체와 함께 완전히 파괴될 수 없으며, 그 중 어떤 것은 영원한 것으로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은 신체의 현실적 존재를 포함하는 한에서만 지속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한 한에서만 우리의 존재는 일정한 시간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만 우리의 정신은 사물의 존재를 시간 속에 결정하는 능력, 사물을 지속의 형식 아래 파악하는 능력을 갖는다.
정신의 최고의 노력과 덕은 제3종의 인식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 제1종- 의견 혹은 표상, 제2종- 이성, 제3종- 직관지)
정신은 사물을 제3종의 인식에서 인식하는 일에 더 많이 적합할수록 그만큼 더 많이 이러한 종류의 인식에 의해서 사물을 인식하려고 한다.
이 제3종의 인식으로부터 존재 가능한 최고의 정신의 만족이 생겨난다.
제3종의 인식에서 사물을 인식하려는 노력이나 욕망은, 제1종의 인식에서는 일어날 수 없으나 제2종 인식에서는 일어날 수 있다.
정신은 영원한 상 아래 인식하는 모든 것을 신체의 현실적 존재를 생각함으로써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 생각함으로써 인식한다.
정신은 사물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물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생각하는 것이 이성의 본성이며,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생각하는 것도 정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 따라서 사물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생각하는 이 능력은 정신이 신체의 본질을 영원한 상 아래에서 생각하는 한에서만 정신에 속한다.
우리의 정신은 그 자신과 신체를 영원한 상 아래 인식하는 한 필연적으로 신의 인식을 가지며, 또 자신이 신 속에 있으며 신에 의해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제3종의 인식은 정신 자체가 영원한 한에서 형상적 원인으로서 정신에 의존한다.
우리는 제3종의 인식에서 인식하는 모든 것을 즐기며,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은 그 원인으로서 신의 관념을 동반한다.
이 종류의 인식으로부터 존재 가능한 최고의 평온이 나타난다. 바꾸어 말하면 정신 자체의 관념을 동반하는 최고의 기쁨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한 기쁨이다.
제3종의 인식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이 생겨난다. (…) 신을 현존하는 것으로 표상하는 한의 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영원하다고 인식하는 한에 있어서의 신에 대한 사랑이다
제3종의 인식에서 생겨나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은 영원하다.
신에 대한 이 사랑은 시초가 없지만, (…) 마치 처음으로 비롯하는 것처럼 사랑의 모든 완전성을 지니고 있다. 오직 한 가지 다른 점은 지금 우리가 처음으로 획득한다고 생각하였던 완전성을 정신이 영원히 소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영원한 원인으로서의 신의 관념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쁨이 보다 큰 완전성에로 넘어가는 데 존재한다고 한다면 복지는 참으로 정신이 완전성 자체를 소유하는 데 있다고 해야 한다.
정신이 수동에 속하는 감정에 지배되는 것은 오직 신체가 지속하는 동안뿐이다.
신은 무한한 지적 사랑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바로 신의 사랑 자체이다. 신은 무한한 한에서의 신이 아니라, 영원한 상 아래 고찰한 인간 정신의 본질을 통해서 설명되는 한에서의 신이다. 말하자면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신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무한한 사랑의 일부분이다.
여기에서, 신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한에서 인간을 사랑하며 따라서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신에 대한 정신의 지적 사랑은 동일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의 행복이나 지복至福 또는 자유(는) (…) 신에 대한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 또는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에 있다. 이 사랑 혹은 지복은 성서에서는 ‘영광’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타당하다.
자연 속에는 이 지적 사랑에 반대되는 것 또는 그것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신이 제2종(이성, 일반적 인식)과 제3종(직관지)의 인식에 의해서 대상을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쁜 감정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으며, 또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덜하다.
많은 일에 대해서 적합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대부분 영원한 정신을 소유한다.
인간의 신체는 매우 여러 가지 일에 적합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신에 대해서 커다란 인식을 가지며, 그 최대 부분 또는 주요 부분이 영원하며 따라서 죽음을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에 관계되는 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가 없다.
저마다의 사물은 더 많은 완전성을 가짐에 따라서, 그만큼 많이 활동하며 영향을 받는 일이 그만큼 적다. 거꾸로 각 사물은 더 많이 활동할수록 그만큼 완전하다.
지복至福은 덕의 보수가 아니라 덕 자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을 억제할 수 있다.
무지한 사람은 외적 원인에 의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선동되어 결코 정신의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과 사물에 대해서 거의 무지한 채로 생활하며 그리고 영향받는 일이 끝나자마자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그친다. 반대로 현자는 그가 현자로 여겨지는 한 마음 속에 동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신과 사물의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의식하며 결코 존재를 멈추지 않고 언제나 마음의 진정한 만족을 누린다.
분명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물고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