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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9일 아산UBF 주일메시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말씀 / 마가복음 7 :1-37
요절 / 마가복음 7 :20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진짜 더러운 것은 사람의 속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더러운 것은 사람의 내면에 있는 죄입니다. 깨끗이 하고자 애쓸 것은 내면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내면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몇 사람이 예수님 곁에 모여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 앞에서 제자들이 약점을 노출하였습니다.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손 씻지 않고 식사 했습니다. 씻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은 당시 유대인 관점에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ᅠ
3절과 4절은 유대인들이 씻는 것을 어떤 의미로 생각했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씻지 않고는 절대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물을 뿌린다'는 것은 목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손과 몸만 씻을 뿐 아니라 잔과 사발과 놋그릇도 박박 문질러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을 확대시킨 것입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20장 25,26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짐승의 정하고 부정함과 새의 정하고 부정함을 구별하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부정한 것으로 구별한 짐승이나 새나 땅에 기는 곤충으로 인하여 너희 몸을 더럽히지 말라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 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이방인들과 다른 비범함 갖기를 원하셨습니다. 탁월한 깨끗함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식생활과 식재료 선정에서 깨끗함이 반영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지키는 과정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의 교훈을 첨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대 장로들은 정결의 규칙들을 정하였는데, 이것도 율법과 동등한 수준으로 권위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들은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더러운 손을 따라서 마귀가 사람들의 속으로 들어간다고 가르쳤습니다. 전통과 규례 준수의 이면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 더러워진다. 저런 일을 하면 절대 안 된다. 금하고 제한하면 백성들을 통제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규례를 더 세밀하게 만들고 증가시키는 것은 자기들 권위가 강해지고 주머니는 두둑해 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종교지도자들의 율법과 전통과 규례 강조가 오래 지속되면서 유대사회는 정결함에 대하여 맹목적인 집착과 실행이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이런 정결전통은 생활에서의 이점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중세시대에 다른 사람들 다 걸리는 전염병이 걸리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유럽인들은 자기들은 셋 중 하나가 죽고 있는데 유대인들만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페스트는 유대인들이 퍼트리는 것이라며 유대인 혐오를 시작 하였습니다. 비판과 성찰 없는 맹목적인 규범은 집단행동이 정당하다는 맹신을 낳습니다. 덮어놓고 ‘이렇게 해야 해’ ‘저것을 지켜야 해’ 맹종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를 낳습니다. 유대사회는 이렇게 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잊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제자들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덤벼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첫째, 그들의 외식함을 지적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예수님께서 인용한 말씀은 이사야29:13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향하는 비난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손을 씻느냐 씻지 않느냐에 맞춰진 초점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내면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이사야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해마다 돌아오는 절기와 제사를 지켰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과 같았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았고 규례와 전통까지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 진심이 있는 것 같아 보였으나 삶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은 잘 하면서, 자기들은 사람들 보지 않는 곳에서 더러운 죄를 범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을 행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너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ᅠ둘째,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문제를 지적하셨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사람의 교훈과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상태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ᅠ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는데, 좀 지나서 사람의 교훈을 겸해서 지키더니 이제는 아예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교훈을 강요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10-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대표적인 예를 들어 지적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고르반' 해버리면 부모를 섬기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고르반'은 히브리어 또는 아람어로써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는 어떤 물건을 ‘이것은 고르반입니다’ 라고 선언하면 그 재산이나 자원을 하나님께 바쳤다고 주장할 수 있었고 이것을 사회가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빚쟁이가 와서 빚대신 가져가고자 하여도 ‘이것은 고르반입니다’ 하면 가져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쳐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서약문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악용하여 유대인들 중에 부모와 사이가 나쁜 사람들이 이 서약문을 이용해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일을 종교지도자들이 지지하고 용인해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사례는 많이 있다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14-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경계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다 내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고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왜 하셨는지 몰랐습니다. 다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에게 비유의 말씀을 자세히 쉽게 가르쳐 주십니다.
ᅠ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모든 음식은 입으로 씹고 삼켜서 식도를 거쳐 내장 소화기관에서 소화 흡수 된 후에 배설되어 나갈 뿐입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이 마귀와 귀신이 사람 속에 들어올 때 먹는 경로를 따라서ᅠ 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3-21에는 정결한 짐승과 불결한 짐승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먹지 말도록 규정된 불결한 것은 돼지, 쥐, 뱀, 토끼, 낙타, 개, 목 졸라 죽인 짐승, 낙지, 오징어, 문어 그리고 짐승의 피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먹지 말도록 한 것은 생태학적으로 불결한 환경에서 살아가거나 생존행위가 불결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하여 이런 불결한 환경과 더러운 생태를 보이는 동물들을 멀리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근래 밝혀지기로는 이런 동물들을 잡아먹을 때, 사람의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낙지볶음, 오징어튀김을 먹는 다고해서 그것이 악을 삼키는 행위가 아니며 그런 음식이 폭력적 성격을 유발하지는 않습니다. 음식은 음식일 뿐입니다.
20-2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간음은 정한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적인 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탐욕은 돈과 육신의 만족을 얻으려는 무절제한 욕망입니다. 악독은 악을 행하려는 욕망과 악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속임은 악이 확실하게 수행되도록 악을 숨기는 것입니다. 음탕은 성적 쾌락을 무절제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질투는 남을 부러워하여 증오로 커가는 것입니다. 비방은 남을 헐뜯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잘난 체하여 방자하고 버릇없는 것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부인하는 최고의 범죄입니다. 우매는 어리석음과 사리에 어두워진 것으로써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고 불경건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뿐 아니라 유대사회 전체가 율법을 지키는가? 장로의 전통과 규범을 지키는가? 이 이슈에만 몰입되어 있고 각자 개인의 마음 중심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을 심각하게 지적하신 것입니다. 외적인 규범을 중시하는 사회가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럴듯한 명분과 도덕에 깊이 몰입하는 공동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곳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것이 개인의 마음 중심을 돌아보지 않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열을 내면 중요한 진실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강조하는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보다 마음 중심이 더 중요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 중심이 청결한지 하나님 앞에서 항상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24절을 보십시오. 마가복음 저자는 장로들의 전통과 규범에는 철저하면서도 마음 중심에는 정욕과 탐욕과 불신을 품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대비하여 한 이방인 여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셨습니다. 두로는 갈릴리 북쪽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지금은 레바논 입니다. 두로는 무역으로 돈이 많고 사람들이 활발하게 오가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로에 가셔서 다른 사람들 몰래 어떤 집에 들어 가셨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곧 알아챘습니다. 갈릴리 곳곳에서 말씀역사를 섬기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님은 멀리까지 소문이 났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두로 까지 전해져 있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님께서 두로에 오셨다는 소식이 들리자 예수님께 급하게 나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두로 거주 헬라인이었습니다. 인종적으로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하였습니다. 페니키아인인데, 지중해 타지역으로 이주해간 페니키아인과 구별하여 시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페니키아인을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합리적인 사고와 깊은 철학적 논리가 일상화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논리로 극복할 수 없는 삶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녀의 딸이 더러운 귀신에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신은 영어로 ‘Demon’으로써 마귀에게 속한 악한 영들을 지칭합니다. 귀신은 그 자체로는 강한 힘이 없으나 사람의 속에 들어가 그 사람의 생각과 인격을 제어합니다. 더러운 생각을 하게하고 하나님을 배신할 마음을 품게 하며, 하나님이 아닌 땅위의 것들에 집착하게 하여 진리를 떠나게 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을 억눌러 고통스럽게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온 여인의 딸은 더러운 귀신이 그 안에 들어가 발작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거품을 물고 뛰어 다니며 온갖 몰상식한 짓을 하게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의 발작하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여인은 갈릴리에 소문 난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자 오직 예수님이라면 딸을 낫게 해주시리라 믿고 그 앞에 간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고 간절한 이 여인의 기도에 어떻게 답해 주셨습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을 먼저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서 개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 자녀들은 누구고 개는 누구 입니까? 자녀는 유대인들입니다. '개'는 이방인들을 지칭할 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를 이방인들에게는 주시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인에게 충격과 아픔을 주었을 것입니다. 딸을 고쳐주시겠다는 말씀은 안하시고 '개'라고 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인에게 깊은 낙심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인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화내지 않았습니다. 서러워 하지도 않았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영어로 “Yes, Lord”입니다. 여인은 유대인이 은혜 받는 것 맞다고 합니다. 자신은 이방인에 속한 것이 맞다고 합니다. 은혜 받을 자격 없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여인은 근본적으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개'라고 해도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여유, 자녀들을 먹이고 개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 없다고 해도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재치는 여유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여유가 없습니다. 쉽게 상처받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반드시 자기의 딸을 고쳐주시고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 믿음이 예수님의 거절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여인의 재치 있는 대답, 겸손한 말은 여인의 마음에 품은 믿음에서 나온 것들이었습니다.ᅠ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대답에 어떻게 응답해주십니까? 29, 3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대답에 크게 만족하셨습니다. 이런 믿음 있는 말을 하였으니 너의 기도를 예수님께서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말이란 무엇입니까? 앞서 얘기했듯이 말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마음의 품은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향해서 믿음의 말을 한 여인을 귀하게 받으셨습니다. 그의 기도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정하실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믿음 없이 믿음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내면과 인격이 아름답지 않고서 아름다운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말을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침에 일어나 두 가지 감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첫째가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음이고 둘째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음이었다고 합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인 여자입니다. 유대인들이 부정한 인생이라 여기는 대표격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이 페니키아인들이야말로 바알숭배의 원조들입니다.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타락시킨 그 바알숭배의 원조의 자손이 바로 이 여자입니다. 이런 부정한 인생일찌라도 그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믿음,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을 품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이 여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이런 말을 하였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출신과 성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학벌과 지연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무엇을 품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두로와 데가볼리를 지나 다시 갈릴리 지역으로 돌아오셨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나왔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셔서 그의 귀와 혀를 만지시고 에바다 우리말로 하면"열려라" 하심으로써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귀머거리와 벙어리를 낫게 하시는 표적은 구약성경에 메시야에 대한 표적으로 기록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의 표적을 행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이는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추대하고자 하는 유대인들로 인하여 오히려 메시야 사역이 방해받게 됩니다.
3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 사람들에게 각별히 소문을 내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멀리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그가 다 잘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본문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때, 그의 양귀에 손가락을 넣고 그의 혀에 손을 대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고침 받을 때, 이 사람은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말을 못하므로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을 맺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와 혀를 고쳐주시기 전에 그의 귀와 혀를 만져 주심으로써 그가 예수님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를 열어주실 때 예수님의 손길을 기억하게 하셨고 자신의 혀를 만져주신 예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처음 대학에 왔을 때 꽤 많은 분량의 과제를 학생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주로 첫 주 과제를 상당히 많이 내주었습니다. 두 학생이 인상 깊었습니다. 두 학생 다 많은 분량의 과제를 해왔습니다. 한 학생은 뇌성마비 장애학생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손을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있는데도 이 많은 과제를 어떻게 해왔나? 생각 들어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다른 학생은 과수석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분량의 과제 그 이상으로 과제를 제출하여 놀라게 하였습니다. 이 과수석 하는 학생에 대하여 조금 후 진실을 알았습니다. 이 학생은 모든 과목 과제와 개별 이메일을 통하여 교수에게 잘 보이는 법을 실행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이 학생은 학점 따는 일에는 뛰어나나 학문에 정진하는 법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과거 우리 모임 안에도 그 학생 같은 양들이 있었습니다. 목자를 기쁘게 하는 양이었습니다. 말씀공부 노트를 기가 막히게 잘 정리하였습니다. 말씀공부 할 때 목자가 기뻐할만한 리액션을 해주었습니다. 목자는 좋은 양을 얻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많이 사랑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목자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충성도 헌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학점에는 뛰어나지만 학문에 힘쓸 줄 몰랐던 학생은 졸업 후 목표로 하는 시험에 계속 떨어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목자를 기쁘게 하는 기술은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법은 몰랐던 양은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열매는 하나도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적인 이슈에 몰입한 나머지 미처 자기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간음한 여인이 끌려 나왔을 때 현장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큰 이슈에 흥분한 나머지 자기가 어떤 죄인인지 망각하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자기도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 자기 마음이 유순하고 자기 생각이 착하고 정의롭고 합리적이라고 여깁니다. 일상생활에서 공평하지 않은 사람이 스스로 공평하다고 확신하는 경우를 봅니다. 곁에서 보기에 생활이 정의롭지 않은데 정의를 강조합니다. 무례함 오만함이 일상적으로 드러나는데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자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본질을 보고자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정도 지키는 것만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이건 아직 내가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 대하여 설명하거나 사람에게 납득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갈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 중심을 두고 가슴 아파하고 성령을 의지하고자 내적 투쟁하는 것이 옳은 방향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한 가지 더 추가하여 주목할 교훈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품은 믿음을 어떻게 예수님께 보이겠습니까? 마음에 품은 신뢰와 감사가 어떻게 하여야 실체가 되겠습니까? 말입니다. 믿음을 품고 있으면 믿음의 말, 믿음으로 말미암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감사를 품고 있으면 감사의 말, 감사에 바탕을 둔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 중심을 돌아볼 줄 알고 또한 믿음의 말, 신뢰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요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대할 때 조심하여야 하는 것은 메시아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 중심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높일 생각,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을 중심에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의 영광을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높이지 않지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 순종은 못하지만 나는 잘 되면 좋겠는데요, 충성하지 않지만 나를 지켜주시고 헌신하지 않지만 나를 도와주시고... 나, 나, 나 이런 마음 행로가 굳어지는 일이 없도록, 예수님 앞에 깨끗한 마음과 믿음 갖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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