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선비정신. 倭,무사도
김 평 일
일순섬광살노호(一瞬閃光殺老狐) 라고 했다던가,--구한말 민비, 명성황후 시해 사건시에 사용된 칼이 일본 어느 신사(神社)에서 발견 되었다고 한다. 절대군주시대의 하나였던 구한말, 왕비라는 자리는 국모의 자리로 만백성의 어머니라는 상징성이 있었다. 을미사변으로 불리우는 이 변란은 이러한 상징성에 대한 모독으로,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요, 왜(倭)인에게는 어리석음의 역사이다.
범인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그 흉기를 신사에 바쳤다고 하는데, 그런 속죄의 마음씨를 가진자가 어찌 흉기의 칼집에 "눈 깜짝할 사이에 칼빛은 늙은 여우를 죽였다."라는 뜻의 一瞬閃光殺老狐라는 살기 등등한 문구에, 모욕적인 호칭을 써넣어 신사에 맡겼단 말인가. 흉기를 신성시하고 무자비한 살인과 무도(武道)를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이 살인을 죄악시 할 까닭이 없다. 필시 "죄를 속죄--운운"한 말은, 기자를 접한 신사의 종사자가 한국기자를 의식하여 좋게 꾸며낸 내용이 아닐까.
일본인들의 잔인성과 호전성은 대체 어디서 생긴 것일까. 지나친 무(武)에 대한 숭배, 도검(刀劍)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갖는 그들, 그러면서도 무도(武道)의 도덕성은 외면한 일본 무사도. 그 까닭은 무었일까. 기원 372년 백제 임금님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왜왕(倭王)이 하사 받은 이래로 도검(刀劍)은 바로 통치력의 상징 이었다. 그후 1500년의 일본 역사는 칼잽이들이 다스리는 막부(幕府)정치를 하면서 도검(刀劍))이 법으로 통하는 사회를 이어 왔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절정에 이르러 지배계급인 무사계급은 피지배 계급인 농,공,상(農,工,商) 및 천인 계급인 예다(穢多:에타) 비인(非人:히닌)들을 마음먹는 대로 참수(斬首) 할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만큼 절대 가치가 도검(刀劍)에 주어졌다고 한다. 이로써 도검(刀劍)은 경외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고, 그들은 살인을 무신경 하게 받아드리는 "양심 불감증"을 면키 어려웠으리라.
일본인들이 소위 "혼(魂)"이며 "근성(根性)"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우리문화로써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 한 예를 들면, 자신의 아들이 떡을 훔쳐 먹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이기 위하여 아들의 배를 갈라 결백을 증명하고, 떡집주인을 살해한뒤, 자신도 자결했다는 믿을수 없는 사실을 일본인 근성이라고 하여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이러한 일본의 도검(刀劍)문화는 다분히 감성편향적(感性偏向的)이고 충동적(衝動的)이어서 매우 비이성적(非理性的)이다.
따라서 그들의 무(武)는 형(形)과 세(勢)를 중시하는 무술(武術)에서 무예(武藝)사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고, 도덕성,이성편향성(道德性,理性偏向性)이 강한 무도(武道)에 이르기는 어렵다. 요시가와(吉川)문학상을 낳게한 요시가와 원작이며 일본인들의 베스트 셀러라는, "미야모도무사시(宮本武藏)"를 보면 일본무인들의 상무정신이 어떤 범주의 것인지 명확히 알수있다. 1억2천3백만부가 팔렸다는 이 책은 일본인들의 경전처럼, 신앙과 같은 무게를 갖는다. 이 책에서 일본인은 무(武)에서 도(道)보다는 예(藝)에 치중하여 선호한다는 점을 들어낸다. 검술의 명가인 야규(柳生)가(家)는 무예 수업자 미야모도무사시와 전인(專人)대화에서 가느다란 작약꽃 줄기를 잘라보낸다. 그 꽃나무 줄기 단면의 날카로운 무공(武功)과 살기(殺氣)를 읽어가는 필담(筆談)아닌 검담(劍談)을 나누는 대목은 예(藝)의 한면을 묘사한 한부분이다.
작약꽃 줄기 단면의 검기(劍氣), 살기(殺氣)는 일본식 표현인"필살(必殺)의 념(念)"과 뜻이 통한다. 살기(殺氣) 가득한 투지만이 크게 자리 잡을뿐, 무도(武道)의 도덕적인 명분따위는 무시되는것 같다. 그래서 민비 시해 당시, 군(軍)출신의 일본공사 미우라라는 자가 동원한 230명의 자객이 저지른 비겁한 만행은 일본인으로는 자연스러운 행위 일수도 있다. 혼(魂)이니 근성(根性)이니 하는것에 충동받아 자행되는 살상행위가 무(武)이전의 폭력임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어둠속을 걸어가는 자가 자신의 얼굴에 묻어 있는 검정 때를 모르듯이.
한자(漢字)를 사용한 이래로 "무(武)"는 과(戈)를 지(止)한다는 의미로 무(武)의 개념이 명확히 정립 승계되어 왔다. 즉 전쟁,반란등 부도덕한 폭력을 상징하는 과(戈)를 제압 억제(止)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정한 무(武)는 도덕성을 전제 하지 않고는 성립되지 않는다. 무도(武道)라는 것은 무예(武藝)라는 수단 보다는 정신 도덕적으로 수신(修身)하여 완전한 인간의 경지에 달하도록 노력하는 구도(求道)의 길이어야 한다. 과(戈)를 제압 억제(止)하기위한 덕목이기에 무도(武道)를 "평화를 지키는 모든길"로 이름하는 것이 올바를 것같다.
작자미상으로 전해오는 우리의 고전 "임진록"에는 참다운 무도의 정신을 목 말라하는 우리 민중들이 그리는 임진왜란의 여러 영웅들이 등장한다. 이순신, 곽재우,김덕령,정문부, 조헌,사명당,영규, 김응서, 논개, 계월향등의 무용담. 그 빛나는 이름이 사랑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야기 속에 전하여져 왔다. 그들의 이야기는 작약줄기의 단면에 나타나는 검기,살기같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고, 선비의 기개와 덕목이었다.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한 우리네 무도(武道)는 무예가 뛰어난 무반(武班)뿐 아니라, 백면서생의 문반(文班), 주경야독(晝耕夜讀)의 농부로부터 연약한 기생, 아녀자에게까지 군담(軍談),영웅지(英雄誌)에 그 이름이 오른다. 무도를 성취 하는데 왜무사(倭武士)의 날카로운 도검(刀劍), 현란한 무예보다도 논개 계월향 같은 연약한 여인의 장한 뜻이 더 강할수 있다는 점을 "임진록"같은 군담고전은 이야기 하고 있다.
나라를 왜인들에게 짓밟히면서 국권광복(國權光復)을 위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키워줄 선비의 기개가 민비시해 을미사변 이래 나라 곳곳에서 일어났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어난 유림(儒林)의 최익현(崔益鉉)선생께서 일으키신 의병운동이 그 큰맥, 역부족으로 패전하시어 대마도로 유배되시자 적이 주는 음식을 거절 하셔서 단식자진(斷食自盡)하신다. 선생의 큰뜻은 많은 이들이 이어받아 만주, 중국, 연해주등지로 의병활동으로 확대 되었다. 이분들 가운데에 대한의군 아령지구 사령관(大韓義軍 俄領地區 司令官)안중근(安重根)의사의 이름이 뚜렸하다.
만주 하얼빈 역두에서 삼엄한 일본군 경비 가운데에서 동양평화를 유린하고 조국을 짓밟은 일본 제1일의 권력자 伊藤博文을 육혈포로 총살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안의사의 행적은 우리 선비의 몸가짐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덕목을 극명하게 보이셨다. 애국애족,동양평화라는 인의(仁義)의 덕(德)과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의 신분으로 삼엄한 일본군 경비를 뚫고 정면대결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예(禮)로, 빈틈없는 모사(智)와 조국과 동포들에 대한 약속(信)을 지킨 안중근의사의 행적은 선비의 뜻이 왜무사의 일순섬광(一瞬閃光)을 눌러 버린 것.
최익현 선생, 안중근의사 같은분들의 선비정신은 일부 지각 있는 일본인들에게 무도(武道)의 참 의미를 일깨운 계기가 되어 살기(殺氣)와 검기(劍氣)의 예(藝)만을 추구 하던 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제2의 민비시해와 같은 폭력, 진주만 기습을 단행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여 패망을 재촉했다.
진주만 기습이래 현대의 전쟁 양상을 바꾸었다. 당당히 선전 포고를 하고 전장에서 진을 친뒤 정면 대결 하던 재래 전쟁과 달리 등뒤에서 암살 하는 파렴치 기습전투의 시대를 열어준 것이다. 현대에는 무(武)의 개념이 없어졌다. 폭력이 무(武)의 자리를 차지하여 살상무기의 잔혹성 기만성 은밀성은 점차 더해진다. 잔혹한 원자탄, 인간덫 지뢰 부비트랩, 싸일런트 킬러라는 화학, 세균무기가 각각 세 성질을 대표하여 인간을 살상한다. 비싼돈을 뿌려가며 순도 높은 플루토늄을 밀매매 하는 사람, 조직, 국가,--.
1995년은 민비가 시해된지 정확히 100년이 되는해이다. 그리고 100년전보다 현대는 얼마나 더 위험한가. 특히 그때 그 사람들 이제는 안심 해도 되는것인지. ---촌철(寸鐵)을 지니지 못한 연약한 민비를 잔인하게 시해하고 칼집 나무껍질에 써놓은 "一瞬閃光殺老狐"라는 섬뜩한 글씨를 아직도 지우지 않는 사람들이 바다 건너 이쪽을 보며 숨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