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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희 전 장관의 애창곡 부용산 오리길,
그 절절한 감동
김정오
한 지식인으로서 고뇌에 찬 삶을 살아야했던 남재희 전 장관
한 시대의 풍운아 남재희(1934~2024) 전 노동부장관이 2024년
9월15일 오전 8시 10분 쯤 향년 90세의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 소
식을 지현경 박사로부터 전해 듣고, 만감이 교차 했다. 유족으로 부
인 변문규씨와 남화숙(미국 워싱턴주립대 명예교수)·남영숙(이화
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남관숙·남상숙 등 4녀와 사위 예종영(전
가톨릭대 교수)·김동석(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씨 등이 있다.
남재희(1934~2024)전 장관은 언론인으로 출발한 뒤, 정치인과
문필가로 살아오다가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 몇몇 문사들(김종상
시인, 오동춘 시인 김정오 수필가, 김성렬 작가)은 남재희 장관과
이웃에서 정들고 살았기 때문에 자주 만남을 가졌다. 특히 지현경
박사의 효경빌딩 7층 옥상 속칭 하늘공원이 우리들의 대표적인 만
남의 장소였다.
남재희 장관은 1934년 1월 18일 충북청주의 의령 남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청주는 기미 3·1혁명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겨레(民
族)대표 33인 가운데 6명1)의 고향이며, 또한 청주에서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번개장군 한봉수2)의 고향이다.
1) 의암 손병희, 우당 권동진, 청암 권병덕, 동오 신홍식, 은재 신석구, 청오 정춘
수(정춘수는 훗날 변절)..
2) 청암 한봉수 의병장-1907년 군대가 일본에 의해 강제 해산되자 의병을 모아
강원도, 충청도 일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싸웠다. 경기도 평택, 여주, 경
북 문경 등에서 무장 항일운동을 했고 1919년 3.1운동 때 청주에서 독립운
남장관은 청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법과 대학 재
학 때,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양아들이 된
뒤, 서울대 법대에 편입을 하자 그 반대운동을 주도하여 뜻을 이루
었다. 그 뒤, 대학을 졸업하고, 1958년 한국일보 기자를 시작으로
1962∼1972년 조선일보 문화부장·정치부장·논설위원, 1972년
서울신문 편집국장, 1977년 서울신문 주필을 지냈다.
그리고 1979년 서울 강서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제10대 국회
의원이 되고, 13대까지 4선을 지냈으며, 김영삼 정부에서 1993∼
1994년 노동부 장관을 지냈다.
그때, 공권력 사용을 자제하며 현대중공업 노사 간 타협을 이끌어
냈고, 노태우 정부의 민주화합추진위원회에서 국민 통합 분과를 맡
아 그동안‘폭동’으로 정의됐던 19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을
공식 이름으로 정했다. 보수 정권의 핵심 인사이면서도 진영을 뛰
어넘는 정치적 행보를 보였던 인물이었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남 장관을 세간에서는 꿈은 진보에, 체질은 보수에 살았다고
말한다. 시인 고은은 만인보에서 이렇게 썼다.
“이 논쟁적 사내의 삶을 가장 잘 드러낸 글은 지금은 이름을 언급하
는 것조차 무람없어진 한 시인의 것이다.“의식은 야에 있으나/ 현
실은 여에 있었다/ 꿈은 진보에 있으나/ 체질은 보수에 있었다/ 시
대는 이런 사람에게 넉넉히 술을 주었다.”(고은‘만인보’남재희 편)
남장관은 그동안 4만권 이상의 책을 모은 장서가이자 다독가였
다. 그가 읽은 책들은 문학, 역사, 사회과학, 사전까지 광범위 했고,
그 가운데 외국서적이 반이 넘었다고 알려져 있다.
동을 하다 일본군에 체포돼 2년간 복역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
립장을 수여 받았으며 1972년 타계했다.
그리고 수많은 저서를 펴냈다.“모래위에 쓰는 글(1978), 정치
인을 위한 변명(1984), 양파와 연꽃(1992), 일하는 사람들과 정
책(1995), 언론 정치 풍속사(2004),‘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
(2006),‘남재희가 만난 통 큰 사람들’(2014), 진보열전(2016), 시
대의 조정자(2023), (보수와 혁신의 경계를 가로지른 한 지식인의
기록), 그리고 2024년 1월에‘내가 뭣을 안다고(잊혀간 정계와 사
회문화의 이면사)’를 발간했다.
지식인으로서 선인들의 길을 따르려 애썼던 정치인
남재희 전 장관은 선각자들의 삶을 우러르면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노력했다. 특히 김구 선생님께서 휴정 서산대사의 말씀을 집
무실에 액자로 만들어 걸어 두고 본을 보이신 말씀을 좋아했었다.
踏雪(답설) 눈을 밟으며
-서산대사(西山大師) 선시(禪詩)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今日我行蹟 (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 /오늘 내
가 남긴 발자취(행적)는 /뒤에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될지니...
선각자들의 발자취는 함부로 따라갈 수 없는 길이다 언론인 조용헌
은 남재희 장관을 말했다.“동양학의 고전에서 이중률(二重律)을
빗대‘음중양 양중음(陰中陽 陽中陰)’, 다시 말해 미(美) 추(醜)가
공존 한다”는 것이다. 이런 동양학의 이중률을‘강호’라고 하는 현
실 세계에서 그 현실은 남재희 장관의 한 삶(一生)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삶이 진보인가 했더니 보수였고, 보수인가 했더니 진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 장관의 삶은 곧 동양학의‘강호동양
학’을 제대로 실천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경계 아
우른 시대의 조정자’‘진보 보수 넘나든 자유인’이라는 평을 받으
면서 살아 왔다는 것이다.
특히 남재희 장관은 문필가(文筆家)로서의 그 능력을 높이 평가받
았다는 것이다. 80대 후반까지도 글월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은 타고
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3)이 배어 있으면서도 지나온 자신의 삶에 대한 관조(觀照)
가 묻어 있는 글월들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
다.
남재희 장관을 아는 사람들은 그 같은 평가에 공감하고 있다. 그
의 삶은 대부분을‘모순’과‘긴장’속에 살았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는 그 번민을 다스리려 술을 마셨고, 취기가 오르면 빨치산의 애
창곡‘부용산’을 불렀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겨레 이세영 기자도 삶의 대부분을 책과 사람과 술을 벗
하면서 살아온 남재희는 2024년 9월 15일“솔밭 사이사이로 회오
리바람 타고”잔디 푸른 부용산 허리를 감아 돌아 하늘로 떠났다.
그가 만개하길 응원했던“붉은 장미”는 아직 피어나지 못했다.“
라고 썼다. 그렇다면 남재희 장관이 그토록 애창했던 -부용산 오리
길- 그 노래는 어떤 노래인가를 밝혀본다.
3)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서권기‘책을 많이 읽고 교양이 쌓여 몸
에서 풍기는 책의 기운’. 문자향‘글씨에서 나오는 기운’, 추사 김정희는 아들
에게 문자의 향기가 없는 난을 그리지 말고 독서와 학문에 힘쓰기를 권했다.
- 부용산 오리 길 그 절절한 감동
강서문학 34호에 남재희 전장관의“노래와 대중의 힘”이라는 제
목의 글이 실려 있다. – 감상적인 부용산이 운동권 학생들의 노래가
되기도-라는 부제를 단 이 글월을 훗날 지현경 박사가“내가 뭣을
안다고”라는 단행본으로 묶어 낼 때, 그 글월을 460쪽에 실었다.
필자는 -남장관이 쓴 부용산 오리길-을 읽고, 남장관이 이 노래를
좋아 했지만 이 노래에 대해 자세한 내막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
을 알았다.
남재희 전 장관은 1960년대 말에 전남 순천 출신의 조덕송 논설
위원으로부터 이 노래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을 때
나 혹은 언짢을 때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 진
일이다..
필자는 이 노래를 지은 박기동 시인을 개인적으로도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부용산 오리길 그 절절한 노래가 지어진 사연과 지은이 박
기동 시인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부용산 오리길’의 시인 박기동은 1917년 윤동주와 같은 해에 전
라남도 여수 앞 돌산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에 태어난 윤동주는 우
리나라 최북단의 백두산 아래 옛날 고구려 발해 땅이 었지만 지금
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연변의 명동촌에서 태어났고, 박기동 시인
은“백두대간의 한줄기가 고즈넉한 산줄기로 뻗어, 남해의 땅 끝에
닿고, 순한 바닷물이 먼 바다를 향해 손짓하는 그림 같은 남쪽 섬마
을 돌산”에서 태어났다.
박기동은 7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고, 12살 되
던 해에 한의사인 아버지를 따라 벌교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보통학
교를 졸업했으나 일제강점기의 현실로 인해 한때, 방황하기도 했다.
그 후 10년간 일본으로 유학, 간사이 대학(関西大学)4)에서 영문학
을 전공 했다. 그는 영문학을 공부하면서도 모국어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의 말과 글을 갈고 닦는 시인이 되고자 일찍부터 방향을 정했다.
박기동은 1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 벌교 남초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2년 뒤 광복이 되고, 건국 준비위원회가 꾸려질
때 서민호5)가 지부장, 박기동이 서기를 맡았다.
광복이 조금만 늦었어도 어려운 일이 닥칠 번했다. 일제가 서민호
4) 간사이대학(関西大学) 오사카부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으로, 약칭은 칸다이
(関大かんだい).1886년 간사이법률학교(関西法律学校)로 세위져 1905년 간
사이대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캠퍼스는 오사카부 4곳에 있으며 스이타시에
있는 센리야마(千里山) 캠퍼스가 메인 캠퍼스. 또한 우메다와 도쿄에 간사이
대학 센터가 있다.
5) 서민호(徐珉濠,1903~1974),호 월파(月坡). 전남 고흥출신. 1919년 반도목
탁지(半島木鐸誌) 사건으로 투옥, 보성중학교 3학년 때 3·1 운동에 참여했
다.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 졸업,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
대학을 거쳐, 컬럼비아대학 정치사회학부 수료. 항일 사상으로 컬럼비아대
학 재학 때부터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 설립, 교
장을 지냈다. 1936년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위해 비밀 후원회를 조직 거
액 지원으로 1942년 10월 구속되었다. 한글 운동가들을 탄압한 조선어학
회 사건으로 함남 함흥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1년 간 옥살이를 했
다. 1946년 6월 광주시장, 같은 해 10월 전라남도지사.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1952년 4월 자유당 독재정권의 치안 책임자 김종원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회 조사단장으로 활동할 때, 자신을 암살하려던 대위 서창선(徐昌善)
이 정당방위로 인해 죽게 되자,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복역 8년째 되던 해
1960년 4·19 혁명으로 출옥, 1960년 제5대 국회 부의장, 1961년 제15차
UN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 남북 교류를 주장하다가 입건되었으나 혁명 검
찰에서 기소 유예로 풀려남. 1963년 제6대 국회의원과 자민당 최고 위원, 민
중당 최고 위원을 지냈다. 1965년 한일 협정을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했다.
1966년 민주사회당 창당, 대표 최고 위원. 1967년 제7대 국회 의원, 1971년
통일문제연구소를 열었다. 1973년 정계를 떠나, 이듬해 72세로 세상을 떠났
다. 저서『나의 옥중기』(동지사, 1968)가 있다. 200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와 박기동을 처단하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어느 절에
잠시 피신해 있었는데 판사출신 스님으로 훗날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스님의 도움이 컸다. 그 뒤, 벌교상고 영어교사를 지내고
1947년 순천사범 교사로 근무했다.
어느 날 동료 K선생이 6명의 교사들에게“우리의 권익은 우리들
이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요지의 설명을 한 뒤 서명날인을
받았다. 그것으로 인해 순천 경찰서 형사대가 몰려와 6명 전원을 연
행해 갔다. 좌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박기동은 서명 한번 잘못해
서 꼼짝없이 좌익으로 몰린 것이다. 4개월 동안 순천경찰서 유치장
에 갇혀 있다가 풀려 나오자 학무국에서 6개월 동안 정직처분을 시
켰고, 사표를 쓰게 했다. 그것이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남
조선 교육자 협회(교협)사건이다. 이로부터 비운의 노래 <부용산>과
함께 평생 동안 박기동에게 멍에가 되었다.
목포항구의 낭만과 좌절
1948년 봄, 목포 항도여고(현 목포여고) 조희관6) 교장의 초청으
6) 남도문학의 숨은 별’로 추앙받던 소청 조희관(1905~1958)은 전남 영광읍
남천리에서 태어났다. 배제교보 졸업, 연희전문 문과 2년을 중퇴한 후 중국
북경호스돈 대학에 유학하였다. 수필가, 한글학자, 교육자로 1948년 항도여
중(현 목포여고) 교장으로 부임 후, 유달중, 목포여고, 국립목포해양대의 교가
를 순우리말로 작사하고 학생들의 창작활동을 이끌어 목포지역 문단의 큰 산
맥을 이루었다. 박화성은 조희관을 말했다.“조희관과 처음 만난 곳은 영광
에서였다.(중략)목포 항도여중의 교장으로 부임한 조희관은 가장 먼저 나를
찾았다.(중략)성품은 인자하고, 겸손하여 누구나 경외심을 일으킬 만큼 훌륭
한 교육가였다(중략) 조교장의 부임으로 거리까지 새로운 힘이 일어나는 듯
했다. /학생들도 끔직히 사랑하는 자애로운 교장으로서 주옥같은 문장을 누
애가 비단실 토해내듯이 끝없이 쏟아내던 뛰어난 수필가인 조희관씨도 수재
(秀才)는 단명 한다는 말처럼(중략) 세상을 빨리 뜨고 말았다. 나의 장편소설
<고개를 넘으면>이나 <벼랑에 피는 꽃>도 집필당시 그에게 소설의 구상과
내용을 대강 알려서 그에게 제목을 요청하였더니 숙고를 거듭하여서 두 장
편의 이름을 지어냈다. 나는 봄만 되면 이원수씨의 <고향의 봄>이 아닌 조희
로 영어 교사로 부임했다. 당시 조희관 교장은 남도의 외솔이라는
이름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던 훌륭한 교육자요, 한글학자이
며, 수필가였다. 그 분의 영향을 받고 문단에 나온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조 교장은 전국에서 뛰어난 선생님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연극반
은 유명한 영화감독 엄주선, 무용반은 하르빈에서 백계로인(白系露
人)으로부터 러시아의 정통 발레를 배워 인체예술(人體藝術)의 극
치를 보여 주는 춤 솜씨를 자랑했던 무용가 옥파일, 음악은 6.25때
월북한 후 그곳의 국립교향악단의 단장으로 활동했다는 안성현, 시
의 작법과 낭송 지도는 박기동이 맡았고, 그밖에도 뛰어난 선생님
들이 많이 있었다.
박기동은 그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들을 만나게 된다. 그 가운데
한 학생이 김정희(1931.10.1∼1948. 10.10)7)이며, 또 한 학생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월간 수필문학을 창간하여 수필장르를 활성
화 시킨 수필가 김효자 교수이다. 그밖에도 우리 문단에서 크게 활
동하는 여류문사들이 많이 있으나 지면관계로 다루지 못한다.
특히 김정희는 일제 말엽 경성사범학교(현 서울사대 전신)에 입학
했다가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목포여고에 입학한 수재였다.
조희관 교장이 박기동을 초빙한 가장 큰 까닭이 김정희 같은 수재
관의 <고향의 봄>을 외어보곤 한다. 조그만 시냇물 목 맺혀 울고 금잔디 속잎
나는 깊은 골짜기 /진달래 발그스레 피었으렸다./송살땀 흘리며 넘던 그 산
실/아아아아 내 고향 두메의 /봄이 그리워 /조희관,<고향의 봄>전문, 박화성
이 기억하는 조희관은 `불행한 문학인`이며`주옥같은 문장을 누애가 비단실 토
해내듯 뽑아내던 뛰어난 수필가`였다. 조희관의 수필에 대한 많은 평들은 박
화성의 평가와 다르지 않다, 특히 유려한 문장을 으뜸으로 꼽는다,
7) 김정희의 막내 동생인 김창완 시인은 천재 시인이었던 누나가 써 놨던 많은
시와 사진 등 자료를 남겼으나 너무 일찍 요절하자, 부모님들이 모든 자료를
불살라 버렸기에 아무런 자료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목포
여고에서 김정희와 함께 수재로 알려져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던 김효자 교수
가 여학교 때 찍었던 사진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깊은 뜻이 있었다.
조희관 교장은 박기동 선생께 그 학생들을 특별히 잘 지도해 달라
고 당부까지 했다. 김정희는 목포 앞 고하도(현 목포 신항)에 있던
사회복지시설 감화원을 배경으로 쓴 <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
글짓기대회에서 대상을 타기도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
다.
그러나 1948년 가을, 16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말았
다. 그녀가 시인 김창완8)의 큰누나다. 이 일로 인해 훗날 부용산 노
래가 제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追慕詩)로 제망제가(祭亡弟
歌)라는 설이 퍼지게 된다.
그러나 이 노래는 그 이전 1947년 박기동이 순천 사범학교에 재
직 때에 그의 누이동생이 24세의 나이에 김정희와 비슷한 병으로
요절했다. 그때, 누이동생을 장사지내고 와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었던 것이다.
박기동은“부용산을 아십니까?”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부용
산은 전남 벌교의 읍내를 감싸 안은 어머니 가슴 같은 나지막한 산
이다. 나는 소년시절 그 산에 자주 올라가곤 했었는데 그 산이 나의
운명과 결부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나는 1947년 순천 사범
학교에 봉직하고 있었다.”
박기동에게는 아끼고 예뻐하던 여섯 살 아래 여동생 영애가 있었
다. 박영애는 나이 18세에 결혼하였으나, 몇 년 후 폐결핵으로 순천
8) 김창완 시인(전남 신안출신) - 197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반시동
인으로 활동 - 소설문학 편집장 역임 - 조선일보사 출판부장, 기획출판부장,
가정조선부장 역임- 한국문인협회 사무국장, 출판국장 역임- 한국문예진흥
원 이사 역임- 문화관광부 문화정책 자문위원 역임- 한국외국어대 신방과 출
강- 한겨레문화센터‘좋은 글 바르게 쓰기’강의 - 현재 문장연구소 소장,
월간문학 편집위원, 저서 시집 : 인동일기(창작과비평사) - 우리 오늘 살았다
말하자(실천문학사)-나는 너에게 별 하나 주고 싶다(자유문고) - 동화 : 소금
장수의 재주(창작과비평사) - 호랑이 방귀 뀌는 소리(꿈소담이)-기타 :‘글짱
되려면 이렇게 쓰라’(문장미디어) 외 다수
도립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47년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
았다.
박기동은 사랑하는 누이동생을 벌교의 뒷산 연꽃 모양을 닮은 부
용산 자락에 묻었다. 그리고 비틀거리면서 내려와 한 편의 짤막한
시를 썼다. 이 시가 박기동의 운명을 바꾼“부용산 오리길”이란 시
였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 오리길)1절
이 시는 정지용의 시(詩)“압천(鴨川) 십리 벌에 해는 저물
어....저물어”에서 영감을 얻은 새로운 글 누리(詩世界)기법으로서,
낯설게 하기의 성공적인 시적변용(詩的變容)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연암 박지원의 창작기법인 법고창신(法古創新)9) 즉 이미
있던 작품에서 영향을 받고, 새로운 창작기법인 법고이지변창신이
능전(法古而知變創新而能典)의 기법과 같은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박기동은 그 뒤 1948년 목포 항도여고(현 목포여고)로 옮겼다. 그
때 아직 피지도 못한 제자 김정희10)가 폐결핵으로 삶을 등지게 된
것이다. 제자의 무덤까지 따라갔던 박기동의 옆 자리에 있던 동료
음악 교사이며, 작곡가인 안성현11)이 박기동의 책상에서“부용산
9) 법고창신(法古創新), 연암집(燕巖集) 권1 초정집서(楚亭集序)에 나오는 말.
옛 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뜻, 곧 옛 것에 바탕을 두되 그
것을 변화(變化)시킬 줄 알고, 새 것을 만들어 가되 뿌리를 잃지 않아야 한다
는 뜻.
10) 신안군 출신으로 시인 김창완의 큰 누이
11)‘부용산’(芙蓉山)의 작곡자 안성현은 나주 출신으로 일본 동방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한 뒤, 전남 지역에서 음악 교사로 활동했다. 피아노를
오리 길”시를 보고 곡을 붙였다.
그리고 1948년 4월11일 목포 평화극장에서 예술제가 열릴 때 성
악을 하는 2학년(당시 6년째 중학교로는 5학년) 배금순이라는 학
생이 독창으로 불러서 감동을 주었다.12) 품위 있는 슬픔을 담은 그
노래는 목포시와 호남 일대에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져 나갔다.
그러나 당시는 흑백 논리를 내 세우면서 대부분 친일 행위를 했던
자들이 자유당의 앞잡이가 되어 반공을 내세우면서‘그레샴의 법
칙13)’으로 세상을 흔들고 있었다. 그들은 박기동을 빨갱이로 몰아
가는 데 핏발을 세웠다. 더욱이‘엄마야 누나야’의 작곡가이기도
한 안성현14)이 6.25 동란 중에 북에서 선무공작 차 내려온 무용가
잘 쳤고, 또 용모도 뛰어나 인기가 높았다.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동요‘엄
마야 누나야’로 더 알려졌다.‘부용산’은 목포 항도여중(목포여자고등학교
의 전신)에서 교사로 근무할 때인 1948년에 동료 교사 박기동과 옆자리에
있던 안성현이 박기동이 병으로 죽은 누이동생을 그리며 쓴 시를 안성현이
서정적인 가락으로 작곡하였다. 이 노래가 구전을 통해 널리 퍼지면서 아무
관계도 없는 호남 지역 인민유격대 대원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그 이유로 오
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다. 더욱이 안성현이 한국 전쟁 중 월북했고, 북조
선에서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으며,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조카로
도 알려져 있다. 안성현도 김정희를 특별히 아꼈기 때문에 어린 제자를 추모
하며,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붙인 것이다. <부용산>은 박영애, 김정희
두 애잔한 젊은 죽음을 서러워한 제망매가(祭亡妹歌)이자 제망제자가(祭亡
弟子歌)였던 셈이다.
12) 안성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자료집과 안성현의 두 번 째 작곡집에 실렸다.
13)“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말로 아직 지폐
가 사용되지 않던 시절, 유럽에서는 주로 동이나 은이 화폐를 대신하였다.
정부에서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따금 화폐의 질을 떨어뜨렸다. 이 때
실질 가치가 떨어지는 악화만 유통되고 양화는 장롱으로 감추어 버렸다.
14) 안성현 2006년 4월 펑양에서 삶을 마감했다. 2009년 4월 나주시 남평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노래비가 세워졌다. 안성현이 작곡했던 11곡이
담긴 작곡집만 전해왔었다. 그런데, 안성현의 처조카 성경래(49, 광주시 북
구 연제동)가 두 번째 작곡집을 발굴했다. 그는“고모부의 음악적 발자취를
찾기 위해 또 다른 안성현 작곡집을 찾아냈다. 이 작곡집에는 일제 강점기
때 전 국민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를 비롯해 <부용산>(박기
동시), <낙엽>(안성현 작사 작곡), <앞날의 꿈>(조희관 시), <진달래>(박기동
시)‘내 고향’(조희관 시) 등 어둡던 시절 겨레의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최승희15)의 딸인 안성희를 만나 월북했다고 알려지자16) 이 노래는
금지곡이 되었다. 그리고 박기동 시인은 더욱 핍박을 받게 된다.
그 후 이 노래는 쫓기던 빨지산17)들이 부르게 되었고, 독재와 싸
우던 민주투사들이 불렀으며, 군사독재시절 운동권 학생들과 민주
인사들과 진보적 지식인들18)의 애창곡이 되었다. 박기동은“부용산
노래한 23편의 작품이 실려 있었다. 그 작품집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질 뻔 했던 조희관과 박기동의 시들이 담겨 있어 문학적으로도 소중
한 자료가 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5) 최승희(崔承喜,1911~1969), 서울 출신. 작가 안막의 부인, 숙명여자고등
보통학교 졸업, 큰오빠 최승일(崔承一)의 권유로 일본 현대무용의 선구자 이
시이 바쿠〔石井漠〕의 영향을 받고, 무용가가 되었다.“반도의 무희”“동
양의 진주”라 불리며, 1936년 말부터 4년간 전 세계를 무대로 유럽에서는
「초립동」·「화랑무」·「신로심불로」·「장구춤」·「춘향애사」·「즉흥
무」·「옥저의 곡」·「보현보살」·「천하대장군」등 신무용사 등 작품 발
표, 아르헨티나(Argentina,La)·상카(Shankar,U.) 등과 대비되면서 세계 정
상에 올랐다. 1938년 브뤼셀에서 열린 제2회 세계 무용경연대회에서 라반
(Lavan, R.)·비그만(Wigman, M.)·리파르(Lifar, S.) 등 세계 최고의 무용
가들과 심사위원을 맡았다. 뉴욕에서는 흥행계의 제왕 휴록(Hurok,S.)의 기
획으로 NBC전국체인과 제휴하면서 미, 전역과 중남미 여러 나라에서 공연
하였다. 광복 후 1946년 문인 남편 안막과 함께 월북한 뒤 최고인민회의 대
의원, 최승희 무용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다 1967년 숙청 되었다가 복권,
죽은 후 애국 열사 능에 묻혔다.
16) 안성현이 안막의 조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안막은 경기도 안
성 출신이고, 안성현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출신이기 때문이다.
17) 빨치산은 일제강점기 야산에서 비롯했다. 본격적으로 무장을 갖추고 투쟁에
나선 것은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 이후부터다. 여순 사건은 여수에 머
물던 국군 14연대 군인들이 제주 4·3항쟁 진압 명령에 불복해 일으킨 반
란이다. 한때 여수와 순천을 점령했지만 곧 무너졌다. 남로당에서 급파된 이
현상이 패주병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이 빨치산이다. 토벌
대에 쫓겨 2년여를 헤매다가 6·25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
과 함께 전세가 뒤집혀 다시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빨치산은 두 종류가 있
다. 전쟁 전부터 좌익 활동을 하던‘구빨치’, 낙동강 전선에서 낙오한 인민
군들과 북한 점령 하에서 공산당에 협력한 사람들로 이루어진‘신 빨치’이
다.
18) 노래 <부용산>이 입소문으로 전해지게 되는 데는 시인 김지하, 김남주, 소설
가 천승세, 송영, 황석영, 경제학자 고 박현채,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고 정
윤형, 전 노동부장관 남재희, 전 교통부장관 이계익, 전 연합뉴스 사장 김종
을 아십니까?”에서...이렇게 썼다.
“다른 요인도 있었겠지만 이‘부용산’의 시 때문에 나는 많은 어
려움을 겪었다. 작곡자 의 월북, 빨치산들과 운동권학생들 그리고
민주인사들이 애창했다는 이유로‘부용산’의 시를 쓴 사람으로서
좌경시인이라는 이름이 따라 다녔으며,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영광도 수치도 아닌 채로...
박기동은 여러 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낼 원고를 썼다. 그러나 모
두 빼앗기고 말았다. 시를 쓴 사람이 시집 한권 내지 못했다는 것은
원통한 일이요, 비극이라고 술회 하고 있다. 자기를 낳아 주고 삶을
지탱해 준 조국에서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살아가지 못하고, 삶 같
지 않은 삶을 살아오다가 80년대에 홀연히 수만리 타국 호주로 떠
나게 되었다. 그렇게 먼 나라에서 외로움을 벗 삼고, 지내던 박기
동, 시인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다시 빛을 보게 된 부용산 오리길
1998년 목포여고에서 박기동의 수제자였던 경기대 김효자 교수
가 오래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부용산 오리길>의 원시와 원곡을
찾아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정종교수가 <부용산>의 사연을 밝혔
으며, 한국일보 김성우 논설고문이 1998년 2월 14일과 3월 28일
두 차례에 걸쳐 <부용산을 아십니까!>라는 칼럼을 써서 널리 알려
철 등이 <부용산>을 자주 불렀다. 1997년 안치환이 낸 앨범‘노스탤지어’
에‘부용산’을 작가 미상의 구전가요로 올렸다. 안치환이 부른 부용산은 목
포 출신 시인 김지하가 후배인 춤꾼 이애주에게, 1980년대 작곡가 문승현에
게, 다시 안치환으로 구전돼 불리어지면서 이동원·한영애 등 가객들에 의
해 전해졌다. 필자가 2천년 6월 중순, 남재희 장관과 강서문단 회원들이 강
원도 정선에서 세미나를 할 때, 남장관이 부용산을 열창, 박수를 받았다. 또
소설가 송영과 김남주 시인이 가장 정감 있게 <부용산>의 애절한 사연을 잘
드러냈다고 알려져 있다.
지게 되었다. 그때 박기동 시인이 호주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
졌다.
이 후부터 목포와 벌교에서 <부용산> 행사가 이어졌다. 1999년 5
월 목포에서‘부용산 음악회’가 열리고, 목포 출신 원로 연극인 김
성옥(연극배우 손숙씨의 부군)이 행사를 주관하여, 소프라노 송광
선 교수의 부용산 독창회가 열렸다.
그리고 필자도 최일환 전남 문협회장의 초청으로 그해 6월 유달호
텔에서“박기동 시인과 부용산 오리길”이라는 주제로 특별 강연을
했다. 그때, 차범석 예술원 회장이 축사를 했고, 전석홍(전 전남지
사, 보훈부장관, 시인)과 문학평론가 이명재 교수가 토론에 참석
했었다. 이 무렵 뜻있는 분들이 박기동 시인에게 일절 밖에 없던
<부용산>을 2절까지 지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렇게 해서 박기동
은“<부용산 오리길>”2절을 쓰게 된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
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
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
러 푸르러 (부용산 오리길) 2절
시 작법에서 한 편으로 끝난 자유시를 2절까지 쓴다는 것은 어색
한 일이다. 그러나 박기동은 <부용산> 이후 힘겹게 살아왔던 한 삶
을 돌아보면서 제2절을 썼다. 자유시 <부용산>이 노래 <부용산>으
로 마무리되기까지 50년의 무겁고도 긴 세월이 흐른 것이다.
‘부용산 오리길’1절이 24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이
의 제망매가(啼亡妹歌)19)로서 안쓰러운(憐憫) 정(情)을 읊었다면 50
19) 제망매가(祭亡妹歌)- 신라의 월명사가 지은 10구체의 향가.《삼국유사》
권5“월명사 도솔가조(月明師兜率歌條)”에“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향가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무를 떠나야만 하는 수많은 나뭇잎들
년 후에 지은 제2절의‘부용산 오리길’은 머나먼 남의 나라에서 외
로움을 달래며, 텅 빈 가슴을 적시는 읊조림이었을 것이다.
김효자 교수의 부군으로 한때 목포에서 박기동 시인과 함께 교편
을 잡았던 김승우 교수가 부용산 오리길 2절을 말했다.“...고향
의 부용산과 모국을 못 잊어 하면서<그리움 강이 되어 가슴 맴돌아
흐르고 > <재를 넘는 석양처럼 > 팔순이 넘은 삶의 황혼을 설피시
비껴가며, 외롭게 지내는 그를 생각한다. 다링 하이바아((Daring
Harbour)모서리에 <저만치 홀로>서서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젊
은 날의<꿈, 간데없음>을 서러워하는 그가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그러나 내친걸음<돌아서지 못한 채> 오스트레일리아 남태평양 해
안까지 밀려온 자신을 보면서 새삼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는 그를
생각한다...<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허허로울 뿐이라고
읊은 이 시는 <내가 임종하는 밤에는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고.>
한 정지용20)에 버금가는 고독의 극치라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박기동의 <부용산 오리 길>은 그리움이 강물이 되어 끝없이
을 통해 죽음의 세계로 떠나야 하는 인간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다. 향찰표
기-生死路隱/此矣有阿米次肸伊遣/吾隱去內如辭叱都/毛如云遣去內尼叱
古/於內秋察早隱風未/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一等隱枝良出古/去如隱處
毛冬乎丁/阿也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중세국어-生死路ᄂᆞᆫ/예
이샤매 저히고/ 나ᄂᆞᆫ 가ᄂᆞ다 말ㅅ도/몯 다 닏고 가ᄂᆞ닛고/어느 ᄀᆞᅀᆞᆯ 이른
ᄇᆞᄅᆞ 매/이ᅌᅦ 저ᅌᅦ ᄠᅥ딜 닙다이/ᄒᆞᄃᆞᆫ 가재 나고/가논 곧 모ᄃᆞ온뎌/아으 彌
陀刹애 맛보올 /道 닷가 기드리고다-현대어 풀이- 삶과 죽음의 길은/여기
에 있음에 두렵고/’나는 간다’는 말도/못 다 이르고 가십니까/어느 가을 이
른 바람에/이리 저리 떨어질 잎처럼/한 가지에 나고도/가는 곳 모르는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도 닦아 기다리겠도다. ”
20) 나의 임종하는 밤은 /귀또리 하나도 울지 말라. /나종 죄를 들으신 신부(神
父)는/거룩한 산파처럼 나의 영혼을 갈르시라./성모취결례 미사 때 쓰고 남
은 황촉 불!/담 머리에 숙인 해바라기 꽃과 함께 /다른 세상의 태양을 사모
하며 돌으라./영원한 나그네길 노라로 오시는 /성자 예수의 쓰신 원광!/나의
영혼에 칠색(七色)의 무지개를 심으시라./나의 평생이오 나종인 괴롬!/사랑
의 백금(白金) 도가니에 불이 되라./달고 달으신 성모의 일홈 불으기에/나의
입술을 타게 하라 정지용의<임종>전문
흐를 것이다.
2000년 10월. 박기동 시인이 자리한 가운데 벌교 부용산 자락에
<부용산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박기동은 제막식이 끝난 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시들어버린 동생 영애의 무덤을 찾아 부용산 자락
을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했다.
2002년 4월, 목포여자고등학교 교정에도 부용산 시비가 세워졌
다. 그리고 2006년 월간 한국소설 11월 호에 여수출신 소설가 김용
필의 단편소설“부용산 오리길”이 발표되고, 이어서 소설 1부, 2부
로 출간했다.
박기동은 말했다.“서양의 어떤 천문학자는 50년 동안 한 별을
연구했다. 그런데 훗날 자신이 연구하고자 했던 별이 아니라는 것
을 알았다, 그는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 거기서 삶을 마쳤다는 것이
다. 그러나 나는 그 보다 더 오랜 60년을 시(詩)라는 것을 추적해
왔지만 아직도 그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좌절하지
않으리라, 절망하기엔 아직 이르다. 이제 허무, 허탈, 비애, 고독,
애상... 이런 것에서 벗어나 이런 것을 이겨낸 시를 쓰고 싶다...”
(꺼꾸로 보는 세상에서)
시인이 시를 쓰지 못하면 정신적으로 죽음이나 다름없다. 박기동
의 역량으로 보아 여러 권의 시집과 수필집이 나왔어야 할 일이었
다. 그러나 험한 세상을 잘못 만남으로 뜨겁게 타오르던 시혼은 억
눌림 속에서 꺾이고, 그동안 써왔던 작품조차 모조리 빼앗기고 말
았다. 참으로 운이 나쁜 시인이었다. 하지만 늦게라도 단절 되어 버
렸던 문학의 혼을 다시 찾아 <부용산 오리길> 그 한 권의 수필집이
라도 엮어낼 수 있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맺음말
박기동의 글월누리(作品世界)는 한국적인 향토적 소재를 바탕으
로 구수한 옛이야기처럼 한 삶을 풀어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깊
은 사상과 뚜렷한 역사의식이 스며있다. 감추어진 예지(叡智)는 만
개했고, 깊은 사색은 천마의 나래처럼 아름답다. 아무나 경험 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나 찾을 수 없는 오묘한 진리를 밝
혀내고 있다.
박기동 시인은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향토적인 것을 찾기 위해
고뇌하면서, 황폐 되어가는 인심과 오염되고, 타락한 윤리의식의
심각성을 아파하는 시인의 마음이 스며있는 글월을 쓰고 있다. 머
무르지 않는 것이 무심한 세월이라지만 멈추지 않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 머나먼 세월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옷깃을 여미며, 펴낸 한권
의 수필집이 우리를 감동 시키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게 나이를 잊은 채 사물에 대한 냉철하고, 해박한 우주관의
사유와 지성을 지닌 큰 선비로 우리 앞에 우뚝 선 박기동 시인이었
다. 2003년 호주생활을 접고, 귀국 후 서울에서 치과의사인 아들과
가족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2004년 87세를 끝으로 한 삶을
마무리했다.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박기동시인과 남재희 전 장관의 모습을 뵐
수는 없다. 하지만 노래로 만든‘부용산 오리길’을 남재희 장관과
같은 최고의 지성인들이 좋아 했던 노래가 되었으니 영원히 사랑받
는“부용산 오리길”이 되어 그 아름다운 예술이 후학들의 가슴 속
에 고운 빛깔과 짙은 향기로 오래도록 남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박기동 시인과 남재희 장관의 아름다운 해후가 천국에서 이루어 질
것을 믿으면서 글월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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