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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104
창세기 39:13-23
요셉의 형통(2)
요셉의 형통은 세상적으로 잘 나가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요셉은 야곱의 언약 성취를 위해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에 보냄을 받았다. 애굽은 죄악된 땅을 상징한다. 그러한 애굽에 언약의 아들이 드러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다시 말해서 오직 복음이다. 따라서 요셉은 복음 그 자체를 위해 부르심은 입은 존재로 애굽에서는 고난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이기에 성경은 형통이라고 표현하였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13-15절). “사람들”이란 ‘에노쉬’로 ‘인간, 인류’이다. “그 여인의 집 사람들”에게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나가자 보편적인 인간들, 진리에 관심이 없고 그저 종교에 맹목적인 자들을 불러다 놓고 자신의 종교를 진리로 설파하며 전한다.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였는데 “히브리”는 동쪽에서 건너왔다는 뜻으로 문자적인 율법에서 생명의 자리, 말씀의 자리로 건너온 자로서 요셉은 가정 총무, 즉 감독자가 되어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 주었으나 보디발과 그의 아내는 자기 말씀을 고수하는 자들이었다. 요셉이 진리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죄악을 범하지 않는 복음으로 행한 것을 보디발의 아내는 자신을 희롱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9-13)
보디발의 아내는 복음은 자신을 희롱하는 것으로 받으면서 자기 복음을 큰 소리로 퍼뜨린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라고 거짓 복음을 말한다. 복음은 언약의 아들이 요셉과 하나 되는 것인데 보디발의 아내는 그것을 거짓 복음이라고 외친 것이다. 오히려 자신이 요셉을 탐하여 이루어진 자기 행위가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은 각기 다 자기 복음을 가지고 진리의 말씀을 밀어내는 것이 본성이다.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16-18절). “주인”이라는 말의 ‘아돈’은 ‘주, 주님, 주인, 소유주’라는 뜻이다. 보디발은 요셉에게도 주인이기는 하였으나(2, 3, 4, 6, 7, 9절)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도록 가정 총무로 삼았다는 측면에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보디발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측면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인이시다. 그러나 보디발의 아내는 씨 없는 남편을 자기 남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 요셉이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것이 선이고, 씨 없는 남편과 하나 되어 다른 말씀에 탐욕을 나타낸 것이 악이지만 보디발의 집에서는 거꾸로 정의된다. 다시 말해서 요셉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한 것이 선이고 씨 없는 남편 보디발과 하나 되어 그를 주님으로 삼는 것이 선으로 정의된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드러낸다. 말씀을 자신의 삶을 위한 유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셉의 육의 옷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기 선함의 증거물로 삼는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과 같은 모습이다.
3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32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창 37:31-32)
요셉의 옷은 왕과 제사장을 상징하는 옷이다. 그러나 그것을 벗겨 자신의 선함을 위한 증거물로 삼게 되면 그것은 육의 말씀에 불과한 것이다. 그때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 아닌 문자라는 율법이 된다. 하늘의 것이 주어져도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은 그렇게 모든 것을 육의 것으로 바꾸어 버린다.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2-25)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주를 경외함 그 자체가 박해요 고난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19-20절). “옥”이란 ‘소하르’는 ‘둥근 집(건물)’이라는 뜻이다. 문자적으로는 요셉이 감옥에 갇혔지만 언약적 입장에서는 또 다른 성전에 보내졌다는 것이다.
결국 보디발은 자기 집의 주인임을 드러낸다. 비록 씨 없는 자였으나 여자와 하나 되어 있기에 주인 노릇을 할 수밖에 없다. 거짓된 신전의 주인으로 언약의 복이 오게 한 요셉을 밀어냄으로 진리의 말씀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주인이 노하여 심판한 결과는 요셉을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집어넣었다. 사실 보디발이 왕의 친위대장 위치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요셉을 바로 처단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을 왕의 죄수에 가두는 감옥에 넣었다는 것은 보디발의 입장에서는 나름 신뢰하였던 가정 총무로 일한 것에 대한 호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언약 성취를 위해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보디발이 노하여 심판하였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는 언약을 이루시는 일을 위한 통로가 되었다. 그것을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라고 밝힘으로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예시하였다. 그러기에 이 일에 대하여 요셉이 어떤 항변을 하였는지 전혀 말씀하지 않는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7-10)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21-2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라고 말씀하여 여기서도 여호와께서는 요셉을 형통케 하심으로 옥 안의 모든 것을 요셉에게 맡기도록 만드셨다. “인자”라고 번역하였는데 ‘헤세드’로 ‘은혜, 인자, 자비’라는 뜻이고, “더하사”라는 말의 ‘나타’는 ‘내뻗다, 펴다, 늘이다, 구부리다, 기울이다’라는 뜻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편 팔”(출 6:6)을 표현한 말이고, 또한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신다는 의미의 단어이다(왕상 11:2). 그러니까 요셉의 입장을 성경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기에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계속 자기 언약 쪽으로 돌이키고 은혜를 베풀고 계셨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생각한 것처럼 요셉이 더욱 잘 나가고 있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입장이 곤란하고 힘든 상태로 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어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대로 요셉을 철저히 이끌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이로 보건대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적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요셉의 입장에서는 힘들게 힘들게 이 일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요셉의 마음을 돌이키도록 일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뻗어 요셉을 돌보고 계셨다. 요셉을 통하여 이루실 일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먼저 애굽에 이르게 하시고 그를 강하게 붙잡고 계시며 언약을 위해 철저히 순종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서였다. 결국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말씀에 철저히 매여 있었던 것이 요셉의 생애였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7-19)
“몸”이라고 번역된 말은 ‘네페쉬’로 ‘숨 쉬는 존재, 영혼, 생명’이라는 뜻이다. 단순히 그 몸이 쇠사슬에 매인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자기 언약 성취를 통해 생명을 드러내시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 성경에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고 번역하였는데 직역하면 ‘여호와의 말이 말씀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라는 말이다. “단련하였도다”의 ‘차라프’는 ‘정련하다, 정제하다, 시험하다’라는 뜻이다. 즉 요셉이 말씀 안으로 들어와 온전히 말씀으로 정제되어 드러나기까지 하나님께서 그 말로써 요셉을 묶어놓으셨다는 의미이다. 요셉은 말씀에 붙잡혀 갔고 그 말씀이 되었다는 뜻이다.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7-28)
그러므로 우리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분은 언제나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생명을 이루시기까지 이스라엘을 이끄셨고 마침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온전히 성취하셨다. 그 십자가의 성취가 성령에 의해 자기 백성에게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 죽음에 함께 죽고 살아나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라고 한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벧전 4:6)
우리 성경에 “하나님을 따라”라고 번역하였는데 ‘카타’는 ‘~으로부터, ~을 통하여, ~을 따라, ~으로’라는 뜻이다. 죽은 자에게 복음이 주어져 성령에 의해 하나님으로 살게 하신 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이다(2025020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