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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이성룡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말에 송암 이노가 편찬한 독특한 체제의 족보 임진왜란을 전후한 16세기말에 송암 이노(李魯)가 편찬한 독특한 체제의 족보. 불분권 1책(71장 142쪽). 필사원본이며, 크기는 가로 25㎝×세로 24㎝이다. 무계(無界), 항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1쪽 15행(行) 일행 25자가 가장 많으며, 행서체, 주는 쌍행이고. 가철(假綴). 저지(楮紙)이다. 책의 목차는 권두에 이노의 서문이 있고 그 다음 “송암세보사성강목”으로 표제한 뒤 목록과 기법(記法 : 범례) 27조 및 부모 양계의 내외 4성에 연접된 41개 성관(姓貫)을 나열하고 고려시대 관사 관직인 전조관호품질(前朝官號品秩)을 기재한 다음 송암세보사성강목 건부상(乾部上) 후손송암만회이노근찬(後孫松巖晩悔李魯謹撰)이라 쓴 다음 부계(父系)의 부계인 고성이씨(固城李氏)부터 모(母)의 모계(母系)인 안악이씨(安岳李氏)까지 2부(건곤 : 乾坤) 4편(부모의 내외양계)으로 나누고 각 4편마다 직계(直系)를 강(綱), 방계를 목(目) 기타 연접되는 계파를 부록으로 서술하였다. 그 원본은 현재 경상남도 의령군 이노의 종가에 소장되어 있다. 편찬자 이노(1544∼1598)의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 본은 고성, 경상도 의령 출신이며 정황(丁熿)·최영경(崔永慶)·조식(曺植)을 차례로 사사하였다. 1564년 진사,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직장·참봉·전적·좌랑·현감·정언·도사 등 내외관직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때는 경상도초유사 김성일의 막료와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어 모병·모량과 관·의병의 조제·화합에 많은 공적을 남겼고 사후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유고로는 ≪용사일기 龍蛇日記:文殊志≫와 본서 및 시문집인 ≪송암집 松巖集≫을 남겼다. 이 족보의 편찬동기는 서문과 범례에 잘 나타나 있듯이 찬자의 부의 내외양계(고성이씨와 창녕성씨)와 모의 내외양계(남평문씨와 안악이씨) 4성의 직계를 강, 방계를 목으로 설정하고 종적인 세계(世系)와 횡적인 족파(族派)를 횡간으로 둔 보도(譜圖)가 아닌 서술형식으로 기술하되 사성의 지계조상은 명자성관(名字姓貫)과 생몰년월일·직역·처계(妻系)·묘소까지 상세히 적었고 명조·현조에 대해서는 간단한 전기〔略傳〕까지 첨가하였다. 이 족보에는 장재(張載)의 서명(西銘 : 乾稱父, 坤稱母, 民吾同胞, 物吾與也)의 취지와 정자(程子)의 이일만수(理一萬殊)의 원리 및 주자(朱子)의 일통만수(一統萬殊)라는 성리학적 존조(尊祖)·수족(收族)의 원리를 적극 반영한 것이다. 이 족보는 1577년부터 1597년까지 근 20년 동안 자료를 널리 수집하고 탐방하여 많은 노력 끝에 초안한 것이며 그 안에는 16세기 후반을 기준으로 진주·합천·성주 등 경상우도 남명학파(南冥學派)에 속했던 인사들의 가계가 거의 망라되다시피 하였다. <<참고문헌>>松巖集 <<참고문헌>>龍蛇日記(李魯) <<참고문헌>>朝鮮前期 姓貫体系와 族譜의 편찬체제(李樹健,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上, 1992) 四姓綱目序 丁酉 氏族之有譜, 古矣. 上世中國家藏而人誦之. 我國, 則及本朝, 文獻足徵之後, 間始有, 而不能每姓而有之. 雖巨家大族, 闕焉者, 多矣. 是故, 貿貿之徒, 已不足論, 拚品解事之人, 亦惑不省, 其高玄之而徒來, 況望其純尋外波之源委乎? 此吾四姓綱目之所以作也. 何謂四姓? 吾父之乾坤也, 吾祖之乾坤也, 合二代內外是爲四姓. 乾無獨成之理. 至歲, 坤元萬物資生, 則吾身何從而生乎? 坤部之徧, 其可已乎. 何以謂之綱目, 直系爲綱, 傍親爲目, 吾作之也. 重吾宗也. 配某氏, 生某年, 死某日, 葬某山. 與配之先, 只書于綱, 而不及于目者, 詳吾宗也. 勢不可究也. 四譜中, 人有善行美事, 必書之者, 尙賢而勸後也. 四邑名號․姓氏․山川․名宦曁大年號之下竝記. 其年國乘者, 欲使人樂觀, 而知古也. 所謂附錄者, 何求諸祖也? 合衆脉也, 不屛遠也. 天地之理無乎不在? 自衆孫而觀一祖, 則一本而萬殊由諸祖, 而視一身, 則萬殊而一貫, 人之爲身, 豈偶然哉? 非若螻․蛄․蟪․蠛․螟․蛉․蚌․䖬之自生自化也. 玆非所以靈於萬物, 以秀出參三者歟? 此非吾身也, 乃先羣祖之遺體也. 其忍安於暴棄, 而忝厥所生乎? 況理不由本譜四姓, 緣他姓, 同出一祖, 而其子孫之賢者·顯者·貴者·蕃者, 烏可以遠而畧之乎? 要使後孫, 反本窮源, 觀感興起, 以有所激勵也, 附錄之間, 見者此也. 橫渠張先生, 『西銘』曰 : “乾稱父, 坤稱母, 民吾同胞, 物吾與也. ” 程子以爲明理一而分殊, 朱子以爲一統而萬殊, 則雖天下一家, 中國一人而不流於兼愛之弊. 萬殊而一貫, 則雖親疎異情, 貴賤異序, 而不梏於爲我之私, 此『西銘』大旨也. 賢者之言, 忠厚譪然, 生意無窮而蘓明允, 族譜序曰 : “無服則親盡, 親盡則情盡, 情盡則塗人也.” 其與, 夫橫渠之言異矣. 擧天下之民而視猶同胞, 則同出於一祖者, 不惟逾於齊民之同胞者乎. 世之爲譜者, 皆作橫間, 分行列書而已. 雖有韻人·達士·事業功名之表表者, 茫昧而不傳外家之所自出, 亦無憑可考. 是無異無星之秤, 無寸之尺也. 此吾所以刱爲綱目, 直行流書而其文, 則畧倣碑銘誌法也. 嗚呼! 余於丁丑丁內艱, 始有志于此, 廣詢博訪旁, 搜窮索積十五年, 至辛卯而粗成. 壬辰之亂, 不暇顧他書, 而唯此譜將焉, 得至今日, 何其幸矣? 然以, 此後之得保與否, 付諸蒼蒼而已, 吾無所容力焉. 噫! 譜則修矣, 而吾宗衰歇, 嗣續亦落落. 孰謂: “根深而末茂, 源遠而流長乎!” 抑不知, 天將凝聚精神, 厚積大畜而峻發於後乎. 寧有種而不生者乎? 吾先代之所種者, 膴矣. 勗哉! 勗哉! 噫! 此雖一家私書, 而其間亦多賢人君子·名臣達士·文章事業之可述焉, 則寧獨爲一家之私書而已? 聊用自寬而有待, 凡我後孫, 如使行於世, 而傳於後. 其於厚倫, 成俗之道, 亦惑有少補云. 皇明萬曆 二十五年 丁酉 仲夏之下浣 朝奉大夫 前慶尙道都事 兼 春秋館記注官 李魯謹序 씨족(氏族)에 족보(族譜)가 있은 지는 오래되었다. 상세(上世) 중국에서는 집안에 간직하여 사람들이 족보를 암송하였다.[이 문장은 송암문집에는 아예 없다. 중국의 족보가 만들어 진 것은 북송시대(서기 1000년 전후) 소동파의 아버지인 蘇洵(소순)이 만든 소씨가문 족보가 표본이다. 아주 오랜 옛날 중국에서 집집마다 족보가 있었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인정하지 않아 이 문장을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문헌이 실증된 이후[이 부분도 문집에는 없다.]에 간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나 모든 성씨가 이를 가지지는 못하였다. 비록 거가대족(巨家大族)이라 할지라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까닭으로 교양 없는 사람들은 이미 논할 가치도 없겠으나, 품위가 뛰어나고 사물을 밝게 아는 사람들도 역시 그 조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간혹 깨닫지 못하는데, 하물며 외가의 근원을 자세히 찾아 온전하게 하는 것을 어찌 바랄 것인가? 이것이 내가 사성강목을 만든 까닭이다. 무엇을 일러 사성이라 하는가 하면 내 아버지의 乾坤(건곤)과, 내 조부의 건곤으로 해서 合二代內外(합이대내외)를 사성이라 한다. [사성강목의 사성은 고성이씨, 창녕성씨, 남평문씨, 안악이씨를 말한다. 乾坤은 부부의 뜻으로 쓰이니, 2대 내외의 합을 의미한다고 했다. 나열한 4성은 이렇게 하면 맞지 않다. 건곤대신 부모라 하고, 조부 대신에 어머니로 해야 부합된다. 2대의 합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 양친을 합해야 맞다. 즉 아버지 효범공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면, 고성이씨와 창녕성씨가 되고, 어머니 남평문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하자면 곧 남평문씨와 안악이씨가 되니 사성강목의 내용과 일치한다. 서문에 기록된 원문의 내용대로 하면, 아버지의 건곤은 고성이씨와 남평문씨가 되고, 조부의 건곤 또한 고성이씨와 창녕성씨가 되니 4성이 아니라 3성이 되고, 차이는 안악이씨에서 생기니 문제다. 吾父之兩親也, 吾母之父母也, 合內外是爲四姓. “내 아버지의 양친과 내 어머니의 부모를 말하는데, 이 내외를 합쳐 4성이라 한다.”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집에서는 예의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함부로 고쳐 더 혼란을 주고 있다. 선조의 기록은 그대로 쓰거나 인용하고 다른 점은 토를 달아 의견을 표시하면 된다. 건곤(乾坤)이라는 말은 곧 하늘과 땅인데 이것을 사람에게 쓰는 경우에는 부부관계나 남녀를 뜻한다. 남편을 하늘로 여긴다는 그런 취지이다. 문집에서는 사성은 吾父之乾坤也(오부지건곤야), 吾母之乾坤也(오모지건곤야)라고 했다. 아버지의 부부와 어머니의 부부를 합쳐 사성이다. 이쯤 된다. 이게 무슨말인가? 아주 이상하다. 그러나 문집의 해석은 건곤을 부모로 해서 실세 사성과 억지로 맞추고 있다. 이것은 牽强附會(견강부회)가 아닐 수 없다. 곳곳에 변조가 심하다. 송암의 문장은 서애선생도 인정한 바 선조실록의 기록에 나온다. 여태 400년이 지나도록 송암을 능가하는 후손은 아직 오지 않았다. 누가 감히 함부로 송암의 글을 다듬어 허물로 만들 수 있다던가?] 하늘은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치이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땅은 만물을 資生(자생)하게 하는 근본인 즉 나의 몸은 무엇을 좇아 태어났겠는가? 사성강목의 坤부에서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두루 기록하였다. 무엇을 일러 綱目(강목)이라 하느냐면, 직계를 강이라 하고, 방친을 목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다. 나의 문중을 중히 여긴 것이다. 아내는 모씨라 하고, 태어난 해는 모년이라 하였으며, 장지는 모산이라 하였다. 더불어 아내의 선조는 강에다 반드시 기록하였지만 목에는 언급하지 않은 것은 나의 문중을 자세하게 하기 위함이다. 연구할만한 형편도 아니었다. 四譜(사보) 안에 선행을 하거나 칭찬할만한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한 것은 후인들에게 현인을 숭상하도록 권면한 것이다. 네 고을의 명호와 성씨 그리고 산천과 名宦(명환)은 이미 大年號(대연호)에 따라 아울러 기록하여 그 해의 나라 역사에 맞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이 보아서 옛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이른바 부록이라 하는 것에는 어떻게 모든 선조를 찾아 구할 수 있겠는가? 줄기를 모아서 하나가 되는 것이지, 감추거나 멀리하는 것이 아니다. 천지의 도리는 없어지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가? 중손(맏손자 이외의 여러 자손)도 생각하자면 한 조상에서 비롯되는 것인 즉, 근본은 하나이지만 모두 다르다는 것이 여러 조상이 그 이유라면, 이것은 한 몸으로 간주된다. 즉 말하자면 만 가지로 다른 것이 일관되게 사람의 몸이 되는 것인데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청개구리, 땅강아지, 여치, 멸봉, 멸구, 잠자리, 펄조개, 갑이 제멋대로 나서 제멋대로 죽는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天地人의 삼재에 해당하여 빼어나게 태어난 만물의 영장으로써 할 까닭이 아니지 않겠는가? 이러하다면 나의 몸이 아니라 곧 누대에 걸쳐 여러 조상의 遺體(유체)이니라. 차마 어찌 自暴自棄(자포자기)하는 것을 못하여, 그 所生(소생)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물며 도리는 본 족보의 四姓(사성)에 말미암지 않아도 타성에 연유하여 한 조상에서 함께 태어났으니 그 자손이 어진 者이거나 명성이 드러난 자이거나 귀한 사람이거나 번성한 자라도 어찌 경계하여 멀리할 수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후손들로 하여금 근본을 돌이켜 근원을 궁구하여, 감흥을 보고 일으켜 격려하는 바가 있을지니, 부록의 중간에 보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횡거 장선생이 西銘(서명)에서 이르기를 “건을 칭하여 아버지라 하고, 곤을 일러 어머니라 하였으며, 백성은 나의 동포이고, 만물은 나와 더불어 하는 것이다.”하였다. 程子(정자)는 理는 하나이지만 다르게 나누어지는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朱子(주자)는 만 가지로 나누어 졌지만 하나로 합쳐진다고 한 것인 즉, 비록 천하가 한 집안이라 하여도 중국인 한 사람도 兼愛(겸애)의 弊端(폐단)에 흐르지는 않았다. 만 가지로 갈라져도 일관한다는 것은 곧 비록 친소의 정이 다르고, 귀천의 차례가 다르다고 하여도 나의 사사로움을 위해서 얽매일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서명의 큰 뜻이다. 현자의 말은 충의는 두텁고 藹然(애연)하며, 생각은 무궁한데, 소명윤이 소씨 족보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촌수가 벌어져 상복을 입지 않으면 곧 친족 관계가 다하는 것이고, 친족관계가 다하면 곧 정 또한 다하는 것이 되니, 정이 다하면 길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와 같다면 대저 橫渠(횡거)선생의 말과 다른 것이다. 온 천하의 백성을 같은 동포로 본다면 곧 한 조상에서 함께 태어났다는 것인데, 이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이 동포라는 것을 넘기는 것이다. 세상에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은 모두 橫間(횡간)을 만들어 줄을 나누어 늘어서 기록할 따름이다. 비록 운인, 달사, 사업의 공명이 두드러진 사람이라도 茫昧(망매)하여 외가가 유래한 곳을 전하지 못하며, 또한 증거로 삼아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 이것은 눈금 또한 증저울과 치 또한 증잣대와 다름이 없다. 이것이 내가 사성강목을 처음 만든 까닭이며, 그 글을 곧바르게 줄을 내려 쓴 것은 즉 碑銘(비명)을 기록하는 법을 대략 본뜬 것이다. 아! 나는 정축년에 모친상을 당하고, 이때에 처음 뜻을 가져 널리 묻고 두루 곁을 방문하여 찾기를 다하고, 다듬어 자료 쌓기를 15년을 하여, 신묘년에 이르러 대강 완성을 하였다. 임진란 때에는 다른 서책을 돌볼 겨를이 없었지만 오직 이 보서를 지켰을 따름이었는데, 오늘에 이르러 얻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그러나 차후에 보전하는지 여부는 蒼蒼(창창)함에 의지할 따름이니, 나는 받아들일 곳도 힘도 없을 따름이다. 아! 족보는 곧 수찬하였지만 나의 종중은 쇠진하고, 대를 이을 아들 또한 落落(낙락)하였다. 누가 일러 말했던가? 뿌리가 깊으니 枝葉(지엽)이 무성하고, 근원이 멀리 있어 길게 흘러간다고! 하지만 알지 못하겠지만 하늘이 장차 정신을 凝集(응집)하여 大畜(대축)을 두텁게 쌓게 한다면 후손에 이르러 크게 피어날 것이다. 어찌 씨앗이 있는데 싹이 나지 않겠는가? 나의 선대의 씨앗이라는 것은 두터운 것이니, 힘쓰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아! 이것은 비록 한 집안의 사사로운 책일 것이나, 그 속에는 또한 많은 현인군자와 명신, 달사와 문장과 사업이 가히 기술되어 있을 따름인 즉 어찌 다만 한 집안의 사서일 따름이겠는가? 오로지 스스로 너그럽게 행하고 有待(유대)해서, 무릇 내 후손이 만약 세상에 使行(사행)한다면 후세에 전해야 할 것이다. 이 족보로 하여금 인륜을 두텁게 하고, 풍속의 도를 이루는 것에 또한 작은 보탬이 있을 것이다. 황명만력 25년 丁酉년 5월 下旬 조봉대부 전 경상도도사겸 춘추관기주관 李 魯 謹序 |
첫댓글 팔고조도(八高祖圖)를 아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듯한데...
관심이 가는 대목이 있어 여러분께 소개드립니다.
팔고조도는
1) 나를 출발점으로 해서 위로 1세씩 올려 부와 모를 알고
2) 다시 부의 부모/모의 부모에 해당하는 위 사성(四姓)에서
3) 한단계 더 알아야 한다는 것이
조부의 부모/조모의 부모/외조부의 부모/외조모의 부모
즉
증조부/증조모/진외조부/진외조모/외증조부/외증조모/외외증조부/외외증조모까지를
모두 아실 분이 얼마나 될까요?
4)그런데 여기서 한단계 더 올라가는(父에 해당하시는) 분들
다시말하면 고조(高祖) 열의 8분까지 확실히 아셔야 한다는 겁니다.
아마도 이 8분을 모두 아실 현종님들이 요즘 시대엔 극히 적으실 것 같습니다.
핵가족시대니 뭐니들 하시니 말인데
이렇게 4단계까지 추적하시려면 머리가 너무 아프실겁니다~!
고(考) : 아버지
비(妣) :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