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고토수복과 역사회복 원문보기 글쓴이: history author
동사강목(東史綱目) | 동사강목 제17하 | 임신년 공양왕 4년(명태조 홍무 25, 1392) |
명나라가 위를 설치했다고 해서 다 지들 땅이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원나라가 망하지도 않았는데도 원나라 수도 개평을 본딴 개평위를 명나라수도 난징에 설치한 적이 있다.또한 조선땅 철령에 철령위를 세우지 못해서 무려 5백리나 서쪽에 철령위를 세운 기록도 있다.
올량합부족이 점령한 대녕과 태녕땅은 명나라와 관계가 없는 땅이다. 또한 올량합은 조선변방을 지키는 부족이며 태조이성계에게 충성맹세한 부족이므로 당연히 대녕과 태녕땅은 조선의 간접지배지이며 광의의 의미로 조선땅이다.
自龍門至獨石及黑峪口五百五十餘裏
명사
용문에서 독석에이르러 흑욕구까지 550리이다.
흑욕구는 중국백과사전을 참고하니 지금 산서성 서북부의 흥현일대라고 한다. 용문은 지금도 산서성 서남부에 그 지명이 남아 있다. 그럼 독석은 그 중간에 있다고 봐야한다.
開平衛本獨石堡,宣德五年築。六月自開平故城移衛,置於此。東有東山,韭菜川出焉,經城南,與氈帽山水合。又南有獨石水,下流合於龍門川。南有半壁店、貓兒峪等堡。東北有清泉堡。西南距都司三百里。
명사
개평위는 본래 독석보이다 1430년 쌓았다 6월에 개평옛성에서 위를 옮겨서 여기에 위를 설치했다. 남쪽에 독석수가 있는데 하류에서 용문천에 합류한다.
명나라가 설치한 개평위는 기록에서 보듯이 실제 개평에 설치한 것이 아니다. 독석이라는 곳에 설치한 것으로 한족들이 전형적으로 자기땅이 아닌데 자기땅으로 우기는 수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십오국풍지리지도라는 고지도를 보면 이해하기 쉽다. 명나라는 지금 산서성 서북부에 있던 개평에 위(군대의 단위)를 설치하지 못하고 용문근처에 개평위를 설치한다.
원나라상도인 개평을 지금 베이징동북쪽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이 모두 엉터리임을 알수 있다.
雲州堡元雲州,屬上都路。洪武三年七月屬北平府。五年七月廢。宣德五年六月置堡。景泰五年置新軍千戶所於此。東北有龍門山,亦曰龍門峽,下為龍門川。又北有灤河。東北有金蓮川。西北有鴛鴦泊。又金蓮川東有鎮安堡,成化八年置。西南距都司二百十裏
명사
운주보는 원나라 운주인데 상도로에 속한다. 홍무3년7월에는 북평부에 속했다.1430년 6월 보를 설치했다. 동북으로 용문산이 있고 아래로 용문천이 있고 북으로 난하가 있다. 동북에는 금련천이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운주의 위치가 명나라때에도 산서성 서북부가 아닌 산서성 서남부 용문의 서남쪽임을 알수 있다. (요나라기록에는 운주지방이 원래 발해땅이라고 한다. ) 그럼 명나라의 북쪽 경계는 산서성서북부의 고대 진나라장성이 아닌 것이다.
장성지도를 보면 산서성 북부에 장성이 있고 남부에도 장성유적이 있다. 게다가 하북성과 산서성을 수직으로 가르는 장성을 중국학자들은 명나라가 쌓았다고 주장한다. 만일 명나라가 하북과 산서를 모두 점령했다면 하북성과 산서성사이에 있는 장성은 명나라가 쌓은 것이 아닐 것이다.
명나라 운주의 북쪽에 난하가 있는데 원래 난하라는 지명은 노룡과 비슷한 위치에 있다. 지금도 난하하류에 노룡이 있다. 게다가 조조가 노룡을 지나서 오환과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제일처음지도인 천하고금대총편람도의 오환위치를 감안하면 오환과 난하, 노룡은 거리가 대략 가깝다고 할수 있다.
국경은 노룡현(盧龍縣)의 옛터와 접하고 한 줄기 긴 강을 한계로 삼는다. 이 땅은 기자(箕子)의 옛 나라로 그분이 남기신 팔조(八條)의 가르침을 징험할 수 있다. 담비와 인삼, 금과 비단을 구름처럼 실어 나르니 백성이 많고 물산이 풍부한 도회라 이를 만하다. 진(鎭), 보(堡), 성(城), 지(池)가 별처럼 빼곡히 펼쳐져 있으니, 이는 진실로 국가를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다.
국역승정원일기 > 영조 1년 을사(1725, 옹정3) > 6월 25일(신묘) >
조선의 국경이 노룡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즉 연산도의 조선땅이 연연산근처인것이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서도 동일한 내용으로 입증이 된다. 조선땅은 직할령으로 오환즉 원나라 수도 상도인 개평바로 근처까지 였고 그 남쪽은 올량합부족의 땅으로 조선의 간접지배를 받은 것이다.
조선의 지리지는 시종일관 고구려의 땅을 수복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의 관북은 훈족(흉노)을 몰아내고 점령한 땅이라고 적혀 있다. 명나라는 생각보다 작았고 조선은 생각보다 더 거대했던 것이다. 운주북쪽은 나중에 몽골계열의 토묵특과 타타르족이 점거하기도 했으며 세종때는 실록에 사막을 넘어 한해에까지 정벌군을 보낸 기록이 있고 세조때는 북적(지금 감숙성 )이 귀순하고 있다라고 적고 있다.
고구려 백제의 영토 상당부분을 수복한 조선이 명나라에 맞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대등하게 외교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태조가 궁궐을 황제의 궁궐형식에 맞춰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세조가 황제가 쓰는 통천관을 쓴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칭제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