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한씨 조선설 66번 제목)
(3부)
5. 단군조선(檀君朝鮮) 동국통감 외기(東國通鑑外紀)에는 “동방(東方)에는 최초에 군장(君長)이 없었는데, 신인(神人)이 단목(檀木) 아래로 내려오자 국인(國人)이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다. 이가 단군(檀君)이며 국호(國號)는 조선(朝鮮)이었는데, 바로 당요(唐堯) 무진년(戊辰年, 서기 전 2333)이었다. 처음에는 평양(平壤)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는 백악(白岳)으로 도읍을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서기 전 1317) 을미(乙未)에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神)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문〉 檀君朝鮮 東國通鑑·外紀 東方初無君長, 有神人降于檀木下, 國人立爲君, 是爲檀君, 國號朝鮮, 是唐堯戊辰歲也. 初都平壤, 後徙都白岳, 至商.武丁八年乙未, 入阿斯達山爲神 기타 단군조선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에 전해지는데, 일반적으로 《삼국유사》의 내용이 알려져 있다. 위서(魏書)에 기록하길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는데 백주(白州)에 있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요(堯)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신화라고도 부르는 이 건국신화는 고조선의 건국과 사회상을 알려주는 기록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는 기록은 없다. 20세기 초에 일반에 알려진 《규원사화》, 《단기고사》, 《한단고기》, 《부도지》 등이 역사서의 형식으로 고조선의 역사를 상세하게 서술한 서적들이 있으나 현재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들을 위서로 판단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부 재야사학자들과 네티즌들은 과거에 내려오던 역사들을 정리하여 기록했을 뿐 서술된 내용을 사실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6. 기자조선(奇子朝鮮)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의외의 비사(秘史)를 전한다. BC 1285년 색불루(索弗婁)가 혁명을 일으켜 22대 단군에 오르고, 기자(奇子)가 삼한(三韓)의 왕위에 올라 기자조선(奇子朝鮮)의 시조가 된다. 장자(長子, 가락)를 太子로, 차자 순으로 韓, 奇, 鮮于로 사성을 받는다. 위작(僞作)된 위략과 위지, 일부 문중(門中)들이 보고(寶庫)로 여기는 두 사서와는 전혀 다른 계보(系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계대가 바로 BC 827년 韓나라 한후(韓候)의 한혁(韓奕)과 연결고리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 부분 1천 년이 삭제되었다. 동이(東夷)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자 했다. 그리고 한씨조선설의 음모를 낳았다. 이 음모에 적극 가담한 조선, 같은 음(音)의 ‘기자조선’에서의 앞선 奇子와 후대 箕子는 163년 차이가 있으며 동명이인으로 다른 인물이다. 혼합하여 얼버무려 버렸다. 기자조선(奇子朝鮮), 바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내 뿌리 동이의 근원인 것이다. 奇子는 누구인가? BC 1435년 19대 단군 구모소(緱牟蘇, 縱年 재위 55년)의 아우 종선(縱鮮, 菁莪王)의 증손 서여(西余)가 조선기자(朝鮮奇子 BC 1285∼1225년)의 태조(太祖)가 된다. 단군의 역대(歷代)를 말살하기 위한 화족(華族)과 조선(朝鮮), 강단의 지속적인 연합이 동북공정의 핵심을 불러 오지 않았는가.
7. 춘추필법(春秋筆法) 사필원칙(史筆原則) 尊華攘夷(존화양이) 하화족을 높이고 동이족은 깍아 내린다. 詳內略外(상내약외) 중국사는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히 한다. 爲國諱恥(위국휘치)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 춘추필법의 사필원칙이다. 중국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그의 저서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에 “이 악습은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지나족의 그 악습을 탈피 하지 못하고 있다.”고 썼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높이기 위해 공자가 서경에 기록한 이래 사마천 사기를 거쳐 한민족과 관련된 역사는 상당부분을 날조했다.
8. 箕子朝鮮 성립의 폐해(弊害)와 변화 1) 《천추금경록(千秋金鏡錄)》 고려 태조 왕건(王建) 외6대조인 호경대왕(虎景大王)부터 24대 원종(元宗, 1259∼1274)까지 500여 년 역사를 기록한 관찬사서이다.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 이인복(李仁復)·이색(李穡)의 금경록(金鏡錄)이 있다. 조선에 들어와 고려사를 편찬하는 근간이 되었다. 『고려사』 민지전(閔漬傳)에 의하면, “충렬왕이 일찍이 민지에게 명하여 정가신이 찬한 『천추금경록』을 중수하게 하였다. 뒤에 권보(權溥)와 함께 교열을 보아 완성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세대편년절요(世代編年節要)』라 하였다.”라고 했다. 고려시대의 역사 중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뽑아 편찬한 사서로 추측되고 있다. 2)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 1091∼1153)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보고서다. 원래 이름은 송 휘종의 연호인 선화(宣和, 1119~1125)를 넣어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라고 하며, 이를 줄여 고려도경이라고 한다. 내용 중 서긍은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헤아리기 어렵다고 했다. 또한 기서(奇書)와 이서(異書)가 많아 그중 128종(種)을 요청한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고려의 임천각(臨川閣)은 회경전(會慶殿)의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장서(藏書)가 수만 권이나 된다고 기록했다.’ 3) 파한집(破閑集) “진양(晉陽)은 옛 도읍 터로 계산승치(溪山勝致)가 영남(嶺南)의 제일이다(晉陽古帝都 溪山勝致爲嶺南第一).” 고려의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가 쓴 파한집(破閑集) 첫 머리에 나오는 대목이다. 송나라 서긍(徐兢)이 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고려 서책이 많음을 부러워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고려 서책 중 어렵게 살아남은 파한집에서 고려의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鄭氏의 고향으로 본 고려의 위치를 살펴 보자. 이인로는 이 글에서 ‘어떤 사람이 그 곳(晉陽) 그림을 이상국(李相國 之氏, 1092∼1145)에게 바쳤고, 군부참모 영양(榮陽) 여령(與齡)이 보았다. 이상국은 이 그림이 그대의 고향이니 시 한 귀를 짓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했다. 그는 “두어 봉우리 청산(靑山)이 벽호(碧湖)를 베고 있으니, 공(公)은 이것이 진양(晉陽)의 그림이라네. 물가에 초가들이 몇인 줄 알겠는데 그 중에 내 집은 보이지 않네”라고 했다. 여기서 지칭한 여령(與齡)은 정여령(鄭與齡)이다. 여기에서 지명을 고찰해 보자. 임금의 옛 도읍터(古帝都)인 진양(晉陽)이라 했으니, 한반도 진주(晉州)일 수는 없다. 산서성 진양이다. 역주에서 확인되 듯 영양(榮陽)은 형양(熒陽)이며 정씨(鄭氏)의 관향으로 고려조의 정여령, 정습명, 정지상, 정숙첨 등의 관향으로 되어 있다. 이상국은 ‘그대의 고향이다’라 말하고 있다. 이 내용은 동문선 제19권에서도 확인된다. 영양(熒陽)은 현재 하남성 지역이며, 진양과는 상근 지역임을 볼 때 지리지의 변천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겠다. 정씨(鄭氏)의 관향에 적시된 이들의 행적을 보자 정여령(鄭與齡)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단, 이지저(李相國 之氏)는 시중 이공수(李公壽) 아들로 중신이었으며, 서경 천도론을 극력 반대했던 시기로 보아 인종조의 무인으로 보인다. 정습명(鄭襲明, ?∼1151(의종 5))은 고려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 영일정씨형양공파(迎日鄭氏滎陽公派)의 시조로 호가 형양(滎陽)이다. 1140년 김부식(金富軾), 임원애(任元?, 元厚), 최자(崔滋) 등과 함께 시폐 10조(時弊十條)를 올리기도 했다. 정지상(鄭知常, ?∼1135(인종 13)은 문신으로 고려사에는 서경출신으로 되어 있고,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이다. 이인로는 영양(榮陽) 정지상이라 썼다. 정지상은 음양비술(陰陽?術)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노장사상에 심취하였으며, 역학(易學), 불교(佛敎)에도 조예가 깊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글씨에도 능통하였으며, 고려 12시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하였다. 묘청의 난 때 김부식에 의해 참살당했다. 동명이인 정지상(鄭之祥)이 있다. 생몰년 미상으로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되어 있다. 1358년 찰방에 임명되어 군사를 이끌고 가서 왜적을 방어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공민왕 때 사람이다. 1362년 어사중승으로 있으면서 고용보(高龍普),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 등의 제거에 관여하였다. 관직은 판사에 이르렀다. 정숙첨(鄭叔瞻)의 생몰년은 미상이며, 고려시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형부상서 세유(世猷)의 아들이고, 최우(崔瑀)의 장인이다. 1217년 최충헌 모살사건에 연루되어 원수직에서 파면되고 하동에 유배되었으나, 최우가 구해주었고 뒤에 평장사에 올랐다. 정씨(鄭氏)의 본관이 나뉘어져 있으나, 위의 기록으로 보면 진양 지역인 영양(榮陽=熒陽)이 이들의 관향이요, 고향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지상(鄭知常)의 경우, 서경 세력으로 몰려 김부식에게 참살당했다. 인종은 금국을 정벌하여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고자 묘청, 정지상 등과 논의했다. 이를 묘청의 반역이라 하여 무산시킨 문벌 귀족 김부식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러면 천도하고자 했던 서경의 위치는 또 어느 곳이 되어야 할까? 우선 과제로 남기자. 파한집에서 정씨가의 관향을 보 듯, 국내 성씨(姓氏)들은 대륙을 본관으로 삼은 문중이 태반이다. 이는 고려가 대륙에 존재했음을 상징적으로 밝혀 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웃한 고려 지역으로 이동이 손쉬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무신정권기 홍건적의 난 때 고려의 서울이 한반도로 이동되면서 많은 성씨들이 유입된 것으로 파악되며, 당시 최종 살던 지역을 관향으로 삼게 되므로써 본관이 또 나뉘었을 개연성이 커 보인다. 조선 중기의 문신 최립(崔岦, 1539~1612)은 그가 쓴 간이집(簡易集 제7권) 공산록(公山錄) 편에 국어(國語, 晉語9)를 인용, “전국시대 조간자(趙簡子)가 윤탁을 진양 태수(晉陽太守)로 임명하면서, “세금을 많이 걷겠는가, 아니면 백성을 안정시켜 나라의 보장(保障)이 되게 하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보장이 되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는데, 그 뒤 조간자의 아들 조양자(趙襄子) 때에 지백(智伯)이 침입해 오자, 진양으로 피신해서 지백의 군대를 대파(大破)했다는 고사가 있다”고 썼다. 고려의 위치는 산서, 하남, 안휘, 절강성 등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음을 연구해야 하는 계기가 되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인로(李仁老)는 누구인가. 무신집정기 때의 문인으로 본관은 경원(慶源)이다.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이다. 무신란 이전 고려 전기의 3대 문벌 경원이씨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데 없는 고아가 되었다. 화엄승통(華嚴僧統)인 요일(寥一)이 거두어 양육하고 공부를 시켜 유교 전적과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했다. 1170년(의종 24) 그의 나이 19세 때 정중부(鄭仲夫)가 무신란을 일으키고,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하며 횡행하자, 피신하여 불문(佛門)에 귀의하였다. 1180년(명종 10) 29세 때 진사과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이 사림에 떨쳤다. 후일 비서감우간의대부(秘書監右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저술로는 파한집만 전해 오고, 은대집(銀臺集) 20권, 후집(後集) 4권, 쌍명재집(雙明齋集) 3권은 사라졌다. 고려를 고증할 은밀한 기록들이 더 있었을 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계속
(4부- 익제 이제현(李齊賢)의 행로(行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