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왕상 19장 1-8절
설교제목 : 로뎀 나무 아래에서
첨예한 갈등
좋으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년 초에 미국은 이란 군부 실세, 가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을 사살하였습니다. 이에 이란은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대한 미사일 공격으로 보복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적인 경제 추가제재로 맞서고 있습니다. 첨예한 갈등을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듯 보입니다. 때로 지도자들은 내적 결속을 다지고, 그 결속으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세우기 위해 외부적으로 공공의 적을 만듭니다. 그런 과정에서 눈먼 군중들은 공공의 적을 향하여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버리며 피의 복수를 감행하곤 합니다. 우리 사회도 대립각을 세우며 평행선을 달리며 보수와 진보가 여전히 격돌하고 있습니다. 이런 새해의 모습들은 미세먼지만큼이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듯 합니다. 언제나 맑은 세상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런 답답하고 갈등하는 세상에 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희망들이 자라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자신이 갈등과 반복의 세상 속에서 평화의 일, 생명의 길을 도모하며 살아가는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판 승부
예언자 엘리야는 여러 해 동안 비는커녕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아합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삼년의 가뭄 후에 주님은 엘리야에게 가서 아합을 만나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만났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예언자들을 갈멜산으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를 가려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갈멜산에 모인 백성들을 향하여 꾸짖으며 결단을 촉구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며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시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18:21) 백성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알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겨도 문제없이 잘살고 있고, 풍요로움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과 믿음의 가치는 마음이 가운데로 향해가는 충성스러움에 있습니다. 인생에 필수적인 가치는 하나이면 충분합니다. 양다리는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태일 뿐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분을 신뢰한다면 양다리를 걸치며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엘리야와 바알의 사백명의 예언자들은 누가 참 하나님이신지를 따져보기로 합니다.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소를 잡아 각을 떠서 올려놓고, 각자의 신의 이름을 부를 때 불이 내려와 응답하는 신이 참 하나님임을 판가름하자는 것입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은 아침부터 한낮이 될 때까지 응답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응답이 없자 제단 주위를 돌며 춤추었고, 그래도 응답이 없자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피나도록 찔렀습니다. 그래도 허사였습니다. 엘리야 차례가 되자 백성들을 제단에 불러모으고, 제단을 쌓고, 각을 뜬 소를 제단 위에 올려놓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파내었습니다. 그 도랑에 네 개의 물통의 물을 세 번씩 12통의 물을 붓자 도랑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12통의 물은 전체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불을 내려 주시라고 간청했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의 불이 떨어져 제물과 나뭇단, 돌들과 흙을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은 경외감에 사로잡혀 엎드리며 외칩니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 그가 주 하나님이시다!”(18:19)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는 것은 개인의 한계를 초월하는 영향력을 불러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엘리야는 그 즉시 백성들에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을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서 기손 강가로 내려가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피의 살육이 벌어집니다. 엘리야는 자극된 군중들을 선동합니다. 엘리야는 여기에서 팽창이 일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초월적인 영향을 불러내는 것이 집단적인 배경에서 행해질 때 민중은 그것에 선동당하고 맙니다. 군중 집단의 원형적인 감정이 일어나면 군중들은 집단적인 방법으로 복수하는 군중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그런 군중의 원형적인 감정에 노출되면 복수심에 불타게 되는 것입니다.
대극의 반전 현상
모두 죽이고 난 후 엘리야는 일곱 번 엎드려 비를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큰 비가 내렸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진정한 응답은 불이 아니라 비였습니다. 그런데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왕비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합니다. 하늘에서 불과 비를 내리게 했던 예언자가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은 처량하기 까지합니다. 어제의 놀라운 영웅이 오늘은 이렇게 겁쟁이가 된 것일까요? 이것은 대극의 반전현상, 에난티오드로미아 현상입니다. 어제의 환희와 승리가 오늘의 절망으로, 어제의 팽창이 오늘의 수축으로 전도된 것입니다. 지나치게 부풀려진 풍선은 터지거나 구멍이 나서 수축이 일어납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할 때는 가장 높이 올라섰을 때입니다.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치더니 로뎀나무 아래에서 살기 싫다고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합니다.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19:4)
필사적으로 도망쳤고, 죽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나는 우울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일종의 탈진상태입니다. 공적이고 집단적인 상황에서의 모습과 개인적인 우울 상태의 엘리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무언가 성공적인 성취가 일어났을 때 그 공적을 계속 취하고 있으면 우리는 이내 우울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의 공적은 나의 것으로 돌리기보다 모두 공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 나의 성취에 우리 자신도 모르게 팽창되거나 수축될 때마다 나의 나 됨은 그분의 은총임을 마음에 품고 살았으면 합니다.
로뎀 나무 그늘
엘리야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가장 마음에 감동을 주는 부분은 로뎀나무와 하나님께서 차리신 밥상 부분입니다. 엘리야가 숨을 몰아쉬며 탈진한 상태에서 쉼을 가졌던 곳이 로뎀나무입니다. 이 로뎀나무 Broom tree는 광야에서 자라는 나무로 사리나무와 같은 가늘고 그리 크지 않은 나무입니다. 나무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재료로서 활력적 요소와 연결됩니다. C.G. 융은 나무의 이미지가 모성성 또는 여성성 뿐만 아니라, 남근적 상징을 예시하고, 그것이 지닌 양성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나무를 리비도의 상징으로 보았다.(Jung CG(1976) : Symbols of Transformation, C.W.5, par324.) 자연적 성장을 의미하는 나무는 “철학자의 나무”에서 변환 과정의 발전과 그 국면, 개성화 과정을 의미합니다.
엘리야가 탈진하여 죽기를 간청했던 광야의 로뎀나무는 엘리야에게 활력을 제공하고 쉼을 제공하는 신성한 영역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하나님과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인간의 발달을 위한 영역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과 연결할 수 있는 로뎀나무 그늘이 필요합니다. 탈진한 상태에서 쉼과 회복을 얻을 수 있는 신성한 영역일 것입니다. 내가 하루의 10분 정도라도 나만의 공간에서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나무 그늘입니다. 또한 우리가 거대한 백향목은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고 잠시 쉼을 줄 수 있는 나무와 같은 존재일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작지만 누군가에게 로뎀나무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쉼과 회복을 이루어낼 수 있는 나무 그늘이 우리의 일상 속에 있었으면 합니다. 더 나아가 군가에게 로뎀 나무 그늘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밥상을 차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죽기를 간청하며 탈진한 엘리야를 꾸짖지 않습니다. 훈계도 아니하십니다. 천사를 보내어 그저 그에게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두 번이나 와서 그에게 밥상을 차려놓으시고 잠자는 그를 깨우며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절망이 온몸을 짓눌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지경에 빠진 엘리야를 위해 밥상을 차려놓으신 하나님을 상상해보십시오. 이런 장면을 떠올리면 저는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실의 빠져 옛 생활로 돌아간 제사들은 밤새 바다에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며 허탕을 쳤습니다. 동틀 무렵 해변에서 낯선 이의 말을 따라 그물을 던지자 그물을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그때야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황급히 뭍으로 올라와 제자들이 본 것은 숯불 위에 있는 생선과 빵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으라” 자신을 저주하고 등을 돌렸던 제자들을 향하여 따지지도 꾸짖지도 않았습니다. 낙심한 제자들을 위해 밥상을 차려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주님은 때로 우리의 정신과정에서 밥상을 차려놓으시곤 합니다. 우리의 꿈에서 종종 먹는 꿈은 새로운 자양분을 보충하고 활력을 공급하는 것이며 어떤 특수한 것을 동화하는 과정입니다. 때로 지쳐 있는 이들에게 밥상을 차려진 꿈을 꾸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50대 중반 되신 어떤 남성분이 가끔 씩 돌아가신 부모님께서 나타나셔서 어린 시절처럼 밥을 차려주시고, 밥을 먹는 꿈을 꾼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혼의 양식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지치고 연약해 있을 때 밥상을 차려주시는 분임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때로 답답하고 피곤할 때 우리에게 밥상을 차려주시고, 일어나서 먹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마음에 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여전히 갈 길이 많이 남아 있기에 용기를 내라는 그 음성을 다시 새기며 살았으면 합니다.(이 대목에서 가슴이 찡합니다)
더 나아가 지쳐 있는 이들을 위해 소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진수성찬은 아니어도 됩니다. 따뜻한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 진심어린 따스한 손길이면 족할 것입니다. 작년 마지막 날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 저의 검은 폴라티를 입고 있어서 내 것인데 왜 입고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는데 누군가 입어도 된다고 해서 입었다고 답하셨습니다. 그곳에 아버지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고, 입으셔도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저의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했고, 아버지와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했습니다. 실제적인 삶에서 제가 식사를 준비하는 것은 정신적 자양분을 만드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것은 저에게 영혼의 양식을 제공하는 설교이자 저의 창조적인 글쓰기인 논문일 것입니다. 올 한 해 우리 모두가 소박한 밥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